어릴 적, 만화를 보면 자주 나오는 악당 캐릭터 중 하나는 '젊은 놈의 혈기'를 빨아먹고 영생의 길을 가려는 요괴였다. 물론 그 길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지만, 어린 시절, 젊은 놈을 먹는다고 늙은 놈이 오래 산다는 생각이 좀 신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만화'같은 일이 만화에서만 일어나리란 법은 없다.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이번 8.8 내각을 통해 주목받는 국무총리 내정자, 김태호. 그를 둘러싼 언론의 수사는 역겹고, 이 정부의 사고는 참 저급하다. '39년만에 파격 발탁된 40대 총리'라는 식의 수사, 그리고 그를 뽑은 이유가 '젊은 세대와의 소통 필요'때문이라는 정부 측의 설명. '나이(age) 마케팅'은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사실 자주 나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김연아와 빅뱅을 팔더니, 이제는 정치에서 '젊음 = 나이'라는 등식으로 국민들에게 '서비스'를 하겠다고 밝혔다. 

마치 일일드라마에서 생전 집안 일 신경 안 쓰던 남편이 그래도 아내와 자식들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 쉬는 날 앞치마를 두르고 폼을 잡으며, "내가 다 할께. 오늘은 편히 쉬세요"라며 생색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난 그래서 남편들이 꼭 요리를 할 때, 앞치마를 두르고 폼을 잡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오면 참 싫다. 꼭 그렇게 앞치마라는 기호를 우리 눈 앞에 전시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트위터 할 줄 알아요", "나도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용어 알아요"같은 말들이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미덕'이 된 것이 안타깝다. 그것이 그들이 할 줄 아는 소통, 그들이 정의내리는 '젊은 세대에 대한 소통'이라면?  

그들은 사실 '젊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암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그들의 '젊음 암기'가 영생의 길을 가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어 두렵다. (이들의 영생은 막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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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운동을 하러 가면, 중,고딩 친구들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는 모습을 종종 본다. 늘 궁금한 건, 그들은 왜 멋지게 침을 뱉으려 하는가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같은 대열에서 조깅하는 여자들이 지나가면, 그들의 '껄렁한'모습은 더 커진다. 어깨를 더 터프하게 움직이면서, 눈은 여자들은 안 본 척, 힐끗힐끗. 그러면서 그들은 카악,하는 소리는 절제한 채, 하얀 침 덩어리 하나를 바닥에 하나, 둘 떨어뜨린다. 입에서 조용히 떨어지는 것 보다는, 멀리 나가기 대회를 하듯, 자신의 침을 '과시형'으로 뱉는 모습. 사실 그리 나도 '유경험자'로서 낯설진 않다. 

학교에 가면, 코에 난 왕여드름을 거울 앞에서 꼭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 옆에 있는 여중생 무리들이 지나가면, 나는 친구들을 따라 침을 뱉곤 했었다. 계획을 세우고 침을 뱉어서, 마음에 들어야겠다는 것보다는, 친구들이 침을 뱉길래, 따라 뱉은 것이 시작이었고, 정확히 그 친구들이 침을 뱉는 이유를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본능의 연대'라고 믿었다. 정확히 이유도 모른 채 나가는 침. 그리고 꼭 정자세보다는 어딘가 '껄렁해야'한다는 강박 아래, 뱉어냈던 침들.  

깊이 생각해보면, '침'은 인간에겐 '정복과 소유'의 도구로 쓰인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도시락에 맛있는 계란옷 입은 소세지가 있으면, 침을 뱉어 '내꺼"하던, 악동 짝꿍이 생각난다. 연인의 키스는 서로가 각자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침의 교환'이 아닌가. 정복과 소유의 도구 속에서, 침이 갖는 최종 상징은 '약속'이다. 침을 뱉어, 이건 "내가 먹을 반찬"이란 약속을 하고, 연인은 깊은 키스를 통해, 서로의 타액을 나누며, "넌 내꺼"라는 약속을 교환한다.  

살아가면서 아직 '침을 멋지게 뱉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대부분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침'을 뱉는다는 것 자체는 내 앞을 지나가는 그녀들에 대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현실감'안에서 이뤄진 무의식적 행동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침이 적어도 상당한 성적 지향성을 띠고 있음 또한 생각해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운동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 원 참. 이러다 저 친구들 침에 맞으면 어쩌나.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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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8-09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심리학 주제 같은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09 09:1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반갑습니다. 놀랍게도 로쟈님 덧글 보기 전, 오늘 아침 눈비비고 일어나 문득 집은 책이 <오래된 연장통>이었네요.^^

穀雨(곡우) 2010-08-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하나로 많은 걸 보셨네요. 침으로 매개된 게 생각해 보면 많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09 11:05   좋아요 0 | URL
운동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구요.^^;; 좀 엉뚱하죠? 크크.

미지 2010-08-0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잘 읽었습니다^^!
근데 얼그레이님, 침 계속 뱉다 보면 목마르지 않으시던가요?^^
애들 한 오분 간격으로 침 뱉으며 놀이터 벤치에 내내 앉아 있는 거 보노라면
울렁거리는 호기심과 함께 안쓰러움이...
침의 성적 지향성... 뭔가 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09 21:33   좋아요 0 | URL
목마르죠..^^ 뭔가 오시다니 다행이네요.ㅎ 뻘글은 안되었나봅니다.

미지 2010-08-0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 저는 알라딘 블로그 초보입니다만^^ 꾸벅, 얼그레이님 문장이 참 좋아서, 혹시 저서 내신 것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좀 세게 듭니다. 결례가 아니라면...^^

얼그레이효과 2010-08-09 22:37   좋아요 0 | URL
아고,박미지님. 저는 책은 낸 적은 없구요(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ㅡ.ㅜ), 그냥 오래 '원딩(대학원생)'으로 지내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지 2010-08-0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꼭 쓰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에게 유익한 책이 될 겁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09 23:53   좋아요 0 | URL
노력하겠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렇다. '의심'보다 필요한 건 '괴롭힘'이라고. "나를 괴롭혀주세요"라는 부탁의 대상은 밀리언셀러클럽의 스릴러 소설이나 끝나기 5분 전 관객의 뒷골을 땡기는 영화만 속하는 건 아니다. '학문'도 충분히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출판계를 점령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제스츄어는 무엇인가. "자, 여기 불 따끈따끈하게 피워 놨어. 저기 안락 의자 보이지? 간식도 몇 개 챙겨놓았어. 자. 이 정도면 내 이야기 들을 준비 충분하지?" 권장할만한 자세다. 하지만 그 자세가 정체된 자신의 지식을 보호하는 데 이용되어선 안 된다. 굳이 긴 이야기로 꾸미지 않아도, 자신이 세운 이념형의 논리적 조각을 잘 맞추었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과로 이 세상에 대한 '열정'을 도모하려는 건 속된 말로 '날로 먹는 것이다'. 

<의심에 대한 옹호>엔 '의심'의 물질성이 없다. 저자들은 민주주의의 열정을 복원하기 위한 실천 윤리로 '의심'을 제안하지만, 여기서 '의심'은 논리적으로 잘 맞춰진 퍼즐 혹은 쌓여진 탑일 뿐이다. 즉, 그 '형식미'에서는 박수를 쳐 줄 만하다. 그러나, 그 '형식미'가 일상 속에 있는 행위자, 사람들에게 더 '친밀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점은 다른 층위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버거와 지터벨트는 내가 이 정도로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잘 정리를 해 보았으니, 제안한 이 개념, 충분히 쓸모 있지 않아?라고 전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의심을 둘러싼 담론의 역학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의심'의 대당인 믿음, 그 믿음과 확실성에 가려진 '관성화'된 사고를 고쳐보도록 하자는 '건전송'만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래전 버거는 루크만과 함께 <지식형성의 사회학>에서 사회학자로서의 사명을 밝힌 바 있다. (이 구절은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가져 왔다)

우리의 목적이 일상생활의 현실 - 더욱 자세히 말해서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유도하는 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있으며,또한 여러가지 이론적 안목에 있어서 이러한 현실이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다양한 이론적 조망으로 비추어지는가에 대하여 오로지 관심이 있으므로, 먼저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의 상식에 이용될 수 있는 현실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사회학자로서 그가 가진 소신의 일관성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나타난 그의 서술 태도를 보면, '상식의 재구성'수준에도 못 나가고 있는 듯하다.(사실 가만히 있던 '의심'이란 개념을 통한 '상식의 재구성' 이것이 저자가 노린 의도였을텐데 말이다)  

a란 사고 잘못 되었지? b란 사고 허점이 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a의 장점만 취하고, b의 단점을 피해서 c란 대안을 일상 속에서 생각해보자구. 그게 바로 내가 '의심'을 통해 추구하고 싶은 '중용의 정치'라는 거야.  

하지만, 여기엔 오직 '상식의 되풀이'만 남았다. 내가 요즘 가장 우려하는 지식 시장의 종교적 현상, 바로 '반복을 도모하는 예배의 언어'들, 그것의 넘쳐남 말이다.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기독교의 핵심에는 '반복'이 있다고 했다. 고로 기독교에 필요한 건 신자의 순결함이 아니라, 신자의 타락이다. 타락이 없다면 기독교가 갖는 '반복'의 힘. 예배당에 와서 반복적 회개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정당화를 획득할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시장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게 말해 미안하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책에서 보여주는 사고와 태도는 '나'의 지적 타락을 도모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회학적 개념과 원칙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개념 '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계보학적'탐색이 보이지 않는다.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성과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이들이 주창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이념형'을 만들어내는 정도다. 고로 이 책은 한창 사회학에 빠져든 한 대학원생의 페이퍼가 갖고 있는 정돈된 열정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정작 그 '열정'에는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무엇보다 불만스러운 건, 상대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과정 자체다. 상대주의에서 발견되는 니힐리즘을 깨고,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절대성'이라는 광신을 깨기 위한 무엇의 발견. 두 저자는 "우리는 광장의 언어에 무심하지 않아"같은 제스츄어를 드는 사례 및 직접적인 몇몇 구절로 넌지시 표시해두지만, 정작 이들이 무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장'의 복잡다단함이었다. 그들은 학문의 언어가 갖고 있는 개념의 건실함을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설명'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정작 '일상생활'의 심층적인 부분들에는 '테두리식 접근'에만 머무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주창하려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자신이 독자들의 세계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에 대한 옹호>는 이 질문에 대한 선명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원칙의 검토와 확인'만이 있을 뿐, 오히려 자신이 사고하고 밀어붙이는 '원칙'에 대한 믿음이 도리어 강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의심을 '예찬'하면서, 자신들이 주창하는 그 의심 자체에 대한 '믿음'을 강화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게 바로 그들이 추구하자고 제안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건실함을 지탱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건, 앞에서 말했다시피, '의심'자체에 대한 물질성, 그것이 사회 세계에서 언어의 물질성을확보하고, 사회를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교류되고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심'자체의 진공상태가 확정된 상황에서, 그것을 위해 깔아놓은 논리적 무기들은,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에 더 가깝지, 그것이 그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윤리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의심을 제대로 옹호하기 위해선,자신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뒷골을 오싹하게 할 공포스러운 '이단적 언어의 창조와 재구성'. 그것이 주는 '괴롭히는 사회학적 태도'의 강화여야 했다. 

그들은 '맛난 밥상'의 선결 조건은,  바로 '맛있음'에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음식은 어디서 시켜먹든, 밥이야 햇반으로 하든, 일단 친절하게 밥상만 잘 차려보자라는 식의 태도가 불편하다. 정작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먹어보니, 준비한 태도에서 나오는 저자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도덕적 건강함'만이 조금 느껴질 뿐이다. 상식의 재론에 큰 일 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학자들과 상식에 너무 과장된 찬사를 보내는 시민들의 신앙 가운데, 점점 크는 건 시민들의 망각을 노리는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늘날 보편화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인 '명강의의 언어'에 들뜨고, 잊어버리면 또 그 명강의의 언어에 은혜를 받고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던 죄를 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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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니 읽을 마음이 샥~ 살아지는데요~ㅎㅎ 아, 그나저나 쓰신 글 중에서 의문사항이 있어서요..'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치는 것과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의 차이가 그렇게도 큰 것인지요? 의심에 대한 과감학 계보학적 탐색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논의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흄이 했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책이 '정치하지 않다'로 받아들이는데..맞는지요? 그리고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민주주의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요? 보편화된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EBS 명강의의 언어..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요..쓰신 글의 맥락상 이런 언어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을 획득할 수 없어 보이는데...그렇다면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 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ㅠㅠ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22   좋아요 0 | URL
아고, 부족한 글(사실 책에 대한 기대와 어긋난, 제 분노에 치우친 글)에 덧글 고맙습니다. 덧글이라 시각상으로 잘 나타나질 진 모르겠지만, 당시 제가 이 글을 썼던 마음의 상태와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yamoo님의 지적 중, '계보학'에 대한 이야긴, 푸코 쪽이었습니다. 사실 '제목'도 그랬고, (물론 출판사의 부가적인 타이틀 부각도 있었지만) '계보학적 탐색'이 갖고 있을 때, 주는 그 언어의 변동 양상이라고 할까요. '의심'이 사회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역사 속 그 단절의 순간, 그러면서 애초에 우리가 몰랐던 '의심'이라는 개념 자체의 새로운 시각을 함께 고민해보기. 사실 이런 걸 기대했었습니다. '의심'을 둘러싼 언어-지식-권력, 이것에 대한 세세한 역사적 탐색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들, 뭐 이런 것에 대한 저자들의 귀기울임을 기대했었거든요. 그런데, 책의 구조가, 이미 '의심'은 신의 의자에서 놀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은 우리가 최상의 목표로, 우리 시대의 실천 윤리로, 행동 강령으로 정해놓은 상태란 말이지" 원제가 비록 '의심 예찬'이긴 하나, 이런 예찬은 기대했던 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두번째, 교양민주주의 언어 측면에서, 요즘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지식과 지식 수용에 있어 발생하는 목회자- 양들 간의 관계라고 할까요. 사실 상식의 재론 수준에 머무는 책 자체가 갖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을 위한 목가'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이런 것에 대한 제 비판적 시각을 적어본 것인데, 고민의 세밀함이 아직 더 해, 제 진심의 강도는 아직 약한 것 같습니다.^^;;(노력해야겠습니다.) '상식화된'민주주의, '정보제공자'로 추락한 지식인들..또 그런 책들의 출간 러쉬..같은 것.(전 개인적으로 유명 지식인들 몇몇 출판사에서 짬뽕으로 이리저리 넣어, '다시,민주주의를 말한다'같은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거든요. 그런 지식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제 의견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이라는 표현은, 담론에 대한 제 생각을 넣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심 자체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술'(테크놀로지)에 의해 맺어진 하나의 양식인가, 그 양식은 시대를 거쳐가며 변해왔는가,시대의 권력자들, 지식을 소유한 이들은 '의심'을 어떻게 전유했는가, 변용시켜왔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의심'을 구성해왔는가 등등의 생각들이요. 그런데 <의심에 대한 옹호>에는 그런 시각이 없더라구요.(개인적으로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책이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같은 책을 기대했었던지라, 제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2010-08-1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함 자체의 가치 절하를 말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것과는 다른 결의 주장인데, 아직 제 생각이 채 여물지 못한 듯 합니다. 꼼꼼한 지적 고맙습니다!

2010-08-12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진지하게 잘 들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신중함은 사실 참 중요한 것인데, 저도 이 참에 다시 제 포스트 하나, 둘 돌아봤네요. 성의있는 주고 받음을 위한 다리 놓기라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절판


20세기에 들어 수립된 종교사회학에서는 근대를 종교 쇠퇴의 시기로 보려는 이런 시각을 '세속화 이론'이라고 부른다.이 이론에 따르면,과학 지식이 널리 보급되고 근대 사회제도가 신앙의 사회적 기반을 허묾에 따라 세속화, 즉 사회와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의 지속적 축소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이런 시각은 어떤 반종교적인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그 시각을 뒷받침하는 여러 경험적 자료에 근거한다(그런 자료는 대부분 유럽에서 찾을 수 있으이 의미심장하다).-15쪽

참된 다원성이 존재하는 조건은 지식사회학에서 '인지 오염cognitive contamination'이라고 부르는 용어로 풀이된다.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 행태에 바탕을 둔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뒤섞이다 보면,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된다.그렇게 '오염'이 일어나면,남들의 신념과 가치를 이상하다,기묘하다,사악하다 등으로 규정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차차,하지만 확실히,다른 사람들도 존중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그것은 앞서 당연시했던 현실 인식이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5쪽

전경과 배경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배경적 행동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거의 숙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이때 개인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반면 전경적 행동은 숙고를 필요로 한다.이렇게 할까,아니면 저렇게 할까 하고 묻는 과정이 필수적이다.-30쪽

적극적 관용과 소극적 관용을 구분 짓는 것이 유용하다.적극적 관용은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개인 또는 집단과 마주쳤을 때 순전한 존중과 개방성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반면 소극적 관용은 무관심을 나타낸다."저희들 멋대로 하라고 해."여기서 '저희들'이란 다른 신념이나 행동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용은 대체로 두 번째 유형이다.-54쪽

진리에 이르기란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상대적 포용론의 최종 국면은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며 폐기되어(84)야 한다는 입장이다.우리는 처해 있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른 편향성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며,결국 그처럼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극단적 상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고,심지어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조차 없다고 한다.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내세우는 입장-84,85쪽

인식론적 엘리트는 유일하게 진리를 담지하며,다른 모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결국 상대주의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그 엘리트이며,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91쪽

집단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도덕을 고려하게 하는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다.또한 그것은 데카당스로도 볼 수 있다.사회를 지탱하던 규범이 유명무실화되고,허울뿐이거나 숫제 조롱의 대상이 되며,누구나 남들도 그런 규범에 따라 행동하리라 믿지 않게 되는(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퇴폐적인 사회상,그것이 데카당스인 것이다.-106쪽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극단적인 불확실성도 극단적인 확실성도 위험하다.-132쪽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한다.한 가지 근본적인 요소는 '제도의 필수성 institutional imperative'이다.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도(에밀 뒤르켐의 정의를 따르면,행동,사고,감각의 전통적인 패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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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Betamax to Blockbuster 

: Video Stores and the Invention of Movies on Video 

/ Joshua M. Greenberg (2008) 

82쪽 

영화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사용한 전략. 팝콘 

"많은 소매상들이 팝콘을 그들 가게의 디자인 부품으로 썼다." "어떤 소매상은 구식 팝콘 기계를 가지고, 고객들이 비디오테잎을 대여해갈때마다 무료로 팝콘을 줬다.  

84쪽 

rental VS sellthrough 

Owning them is only for snob appeal .... 

92쪽 

the theater and the home 

"안방 극장"이란 수사는 계속되었다.그러나 이 수사는 극장 경험의 사회성보다는 기술 구성 상, 상대적 크기와 충실도에 더 치중되어 있다.   

96쪽 

비디오 대여점의 spatial layout 측면. 비디오 대여점이 아이용 비디오와 성인용 비디오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as distinct and seperate from the more theatrical genres)  

 

5 Retailers,Employees,and Consumers  

97쪽 

"더 넓은 사회적 관계 형성"을 위한 용도, 비디오 대여점. 

third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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