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화심리학 관련 책들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는데, 내가 갖고 있던 과학의 편견들을 깰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화해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 특히 문화연구를 하면 으레 갖게 되는 기능주의 사회학과 심리학의 조합에서 오는 거부감들을 어떤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정리(비판)해볼 것인가의 문제. 그 고민들을 다음 학기에 더 다듬어 따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문화연구에서 너무나 소외당하고 있는 게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정작 우리 사회 안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데도,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인간' 적인 것 대 '과학'적인 것이란 이상한 구도를 만들어, '인권의 정치'를 오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공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긴 한데, 그것도 '생명'의 윤리라는 애초에 정해진 답을 정해놓고 쌓아둔 논리적 탑들만 보이는 것 같아 아쉽다. 더 깊은 시선이 나오기 위해선, '공학'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3  

테크놀로지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아직까지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 오랫동안 왕좌의 자리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조금씩 이것을 깨보려고 브루노 라투르의 책도 기웃거리고 있다) 문화연구 자체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쏠려 있다보니, 기술 자체가 갖고 있는 '기능'에 대한 더 깊은 탐색과 어우러진 행위의 연관성은 제대로 탐색되고 있지 못하다. 문화연구 안에 너무 쏠려있는 이상한 '휴머니즘' 같은 게 있는데,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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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불을 깔아 놓지 않은 딱딱한 바닥. 조용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소리에, 몸을 누이면 솟아나는 '미열'이 감지된다. 방에 남은 건, 약간의 입냄새. 그리고 불쑥 튀어 나오는 옛 기억들. 하필 쓰라린 기억이라 놀란 마음에 외계어로 급조해 본 욕으로 그 기억을 쫓아내면, 행여 누군가 듣고, 내 외계어가 그 누군가의 잠들기 직전 대화 소재로 쓰이지 않을까,라는 희안한 상상을 한다. 

문장 A -> B -> C- > D를 꼼꼼하게 혹은 차분하게 읽으려고 집었다 놓았다 하는 책 더미 속에서, A->C로 바로 훅 넘어간 채, 그래 '읽었다'라고 넘겨버리는 책의 운명. 우물에 빠지기 전,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책의 얼굴을 무시한 채 떠나면, 갑자기 귀신처럼 그 책이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나 있다. "그땐 내가 정말 미안했어.."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책은 내 목덜미를 콱 물어버린다.  인간인지, 흡혈귀인지 분간이 안 가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면 입에서 나는 피냄새로, 어젯밤에 나도 모르게 진행된 '흡혈귀였던 시간'을 곱씹어본다. 비록 그 시간의 덩어리는 내 송곳니에 물린 사람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3

낮이 되면 왠지 어젯밤 내게 물렸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상한 역공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뜨거운 여름에 때 아닌 긴 셔츠를 입고 자신의 땀냄새를 지하철 온 곳에 풍기는 아저씨가 어제 심하게 물렸던 사람이었나 보지? 모처럼 사람 없는 카페에 들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주문한 지 20초도 안 되어 나온 그 커피에 들어간 양심과 성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메신저 친구와 키득키득거리는 저 점원이 어제 내게 물렸던 사람이었나 보지?  

책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상상들이 책을 읽은 후 찾아올 때, 내가 굳이 이 책 속 사람들 은교와 무재에게 감동 받지 않아도, 그들이 만들어놓은 여백 속에서, 내 스스로의 '짧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때. 이것은 참 좋은 책이구나,라는 그 단순한 표현이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성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때. 웃어야 하지도, 울어야 하지도, 차라리 웃지도 울지도 않아도 된다는 그 중립 자체마저도 신경쓰지 않아도 될 때. 그 '아무렇지 않음'이 주는 편안함을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받아들이려 했을까라는 반복적인 후회를 하게 될 때. 결국 내게 남은 건 '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이 비극이 아닌 위안이 될 때. 

일제 시대의 기억을 꼭 거치는 땅부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속물성을 가린 채 세상의 모든 위악을 다 뽐내려는 고시 준비생이 아니더라도, 대뜸 그리운 외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을 자신의 부모에 대한 치유제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꼭 밟길 원하는 그 장소에 우리가 있지 않더라도, 진행될 수 있는 이야기의 잠입은, 의도하지 않은 때와 곳에서 일어나리라. 

A -> B ->C ->D를 지켜가며 모처럼 읽은 소설 <백의 그림자>에서, 나는 읽기의 윤리를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놀러 간 친구네 집 책장에서 문득 발견되어 걸린  생선이 파닥파닥거리지 않고, 그 큰 눈만 뻐꿈거리고 있을 때. 생선을 개를 쓰다듬듯 만져주면, 신기하게도 비린내는 '참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된다. 쓰다듬는다는 것이 읽기라면, 이 책은 읽기의 윤리를 우리에게 묻는듯하다. 많은 책이 사실 그런 윤리를 요구하겠지만, '미워할 듯'좋아하는 것과 '좋아할 듯'미워하는 감수성이, '우리 동네'의 윤리가 된 상황에서, 내가 책에 정직해지면, 책도 나에게 정직하다는 읽기의 윤리. 그것을 솔직하게 뽑아내는 언어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흡혈귀가 되어, 이 생선을 물지 않아서.   

(내가 흡혈귀가 되지 않도록 이 책을 건네준 친구 참참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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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1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내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정말 축복인건데...^^

얼그레이효과 2010-08-14 00:1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마기님. 그것을 고맙게 여긴다고 고백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요. 아직 제 삶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나봐요.
 

 

가끔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발표하러 온 교수들이 말이 아닌 주먹으로 붙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예의'로 포장된 유사 논쟁 속에서, '반대'의 언어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막전막후'처럼, 백분토론이 끝나고, 서로 할퀴고 뜯던 이들이 웃으며 악수하고 단체사진을 찍듯, 이 바닥에선 '명함의 의리'만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넥타이를 벗고, 소매를 걷고 차라리 주먹으로  서로를 엄청나게 패는 장면을 상상했다.(지루한 논쟁, 포장된 격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일이 유일한 것이다) 왜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걸까? 이런 말을 그들에게 늘 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해괴한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이들이, 오히려 그런 해괴함 자체가 주장의 강건함을 보여준다는냥 과시할 때, 나는 그 태도들이 싫었다고. 왜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냐고. 사랑하는 것 자체를 왜 이렇게 변태처럼 비비꼬아서, '합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그럼으로써 그 미움이 자신의 사랑을 더 표현할 수 있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그럼으로써 여기에도,저기에도 양다리를 걸친 채, 시시한 사랑 고백을 글로,말로 채워놓았냐고. 

그래서,나는 그들에게 격투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주먹으로 치고 받은 후, 질질 짜거나, 격함 이후에 온 그 멍한 상태에서 온 솔직한 고백들.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진짜 말, 진짜 고백, 진짜 언어가 아니겠냐고. ,난 반-지성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우리의 세계를 더욱 더 환하게 비쳐주길 바라는 쪽이다. 하지만, 매번 '긴장감의 유지'라는 말로, 학문 세계가 요구하는 규범 효과에 적셔져 있는 나의 가슴을 볼 때, 남아있는 건, 애정보다는 내 애정을 얼마나 예쁘고 젠틀하게 보일 수 있을지 염려하는 '방식'밖에 없다는 한 숨 뿐이다.   

4

이 바닥에 필요한 건 어쩌면 지긋지긋할 정도의 감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성의 동료를  정말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정말 진정으로(내 사랑때문에) 미워할 수 있는 감성.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혐오할 정도로 사랑하는 단계까지 갔음을 고백하고 쟁투할 수 있는 감성의 단계. 이 단계를 가려면, (엉뚱하게도) 빼어난 논문 발표보다는, 주먹이 필요하다는 상상.  

 '고고한 자'들의 분노가 정작 학회나 세미나가 아닌,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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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으루다가 추천 한방~^^ 근데, 사진의 남자분들이 모두 저렇게 다리를 올려놓고 있네요, 허 참~ 쩍벌남하구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때려주고 싶은 부류입니다..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52   좋아요 0 | URL
하하하.그러고보니 다들 왜 저런 포즈를.^^

로쟈 2010-08-1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와 지젝이 '실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부른 거로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16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로쟈님. 참고로 '고고한 자'라는 표현은 예전 로쟈님 블로그에서 본 '고고한 표범'에서 변형된 것입니다.^^(뒤늦게 양해를 구합니다.^^;;)

穀雨(곡우) 2010-08-1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백분토론 후 펼쳐지는 이종격투기 엄청난 시청률이 예상된다는...^^ 맞아요.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포장된 논쟁의 표출이 때로는 토론 자체를 떠나 혐오스러울때가 있더라는 사실. 한 대 쥐어박음 좋겠다 싶으면서 말이지요.ㅋㅋㅋ
역시 고고한 자는 모두 젠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군요. 고개숙인 저 친구, 너므 불쌍해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3   좋아요 0 | URL
한때 지하철에서 제 모습이었습니다. ㅡ.ㅜ

미지 2010-08-1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학계뿐 아니라 일상 전체를 지배하는 바로 그 포장 '방식'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많이 먹게 되는 걸까요?
폭탄주... 분노의 어두운 폭발... --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5:0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쓰고 나서, 저도 가끔 학계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누군가에게(제 동료들에게)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어 두렵군요. 그래서 술은 자제하는 편입니다.크윽.

마녀고양이 2010-08-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계는 모르겠지만, 회사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보면
회의 석상에서 엄청난 주장, 다툼, 심지어 재털이까지 날아다닙니다.
매번 서로의 입장은 평행성을 긋죠... 그런데 진짜 웃기는건,
지들끼리 슬쩍 술자리에 가서 여차저차 웃기는 매듭을 지어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들이나, 그런 상술에 익숙하지 않은 벤처 업체들은 먹히기 어렵죠... ^^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4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회사 프로젝트 회의 풍경도 궁금합니다.

pjy 2010-08-1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거시기 하게도 멍석깔아주면 못하는 이상한 분들이 많죠~~
대부분의 확실하고 솔직한 의사표현과 제대로 된 타협은 회의말고 딴 곳에서 이루어지죠ㅋ 저도 완죤 공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3 01:18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확실하고 솔직한 의사표현과 제대로 된 타협은 회의말고 딴 곳에서 이루어지죠ㅋ -> 공감입니다!
 

 

어제 침 이야기에 모티브를 얻어,  아침부터 잡은 책이 진화심리학을 다룬 전중환 선생의 <오래된 연장통>이었다. 책에 다뤄진 에피소드 대부분이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트라우마'로 다가오는 대목이, 남자와 여자가 웃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내게 트라우마로 다가온 내용인즉슨, 남자는 자신이 던지는 개그에 크게 웃어주는 여자를 선호하는 편이며, 여자는 자신의 개그에 남자가 웃어주는 쪽보다는, 자신을 잘 웃기는 남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난 학창 시절, 여자를 재미있게 해주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오늘도 인터넷에 여자문제로 고민하는 남자들이 덧글로 듣는 조언 중 많은 부분은 "여자는 개그 센스가 있는 남자 좋아하더라구요"가 차지한다(물론 잘생긴 남자는 어떤 썰렁한 개그를 해도, 다 용서가 되겠지만)  학부생 때 소개팅을 나간 적이 있었다. 처음 해 본 소개팅이라 부담이 컸는데, 가장 걸리는 대목이 '개그'였다. 그래서 우연히 네이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쥬니어 네이버'를 발견했다. 이상하게 거기에 있는 유머 시리즈 모음들이 내 코드에 맞았다. (중요한 건 내일 나를 기대할 여성의 코드일텐데 쩝)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좀 어색해지는 타임, 스트로우만 쪽쪽 빨다가, 이상한 소리가 날 때에 써먹을려고  갖고 온 유머 이야기를 던졌다. 잘 던지면, 그녀를 위한 '선물'일 것이고, 잘못 던지면, 그녀를 위한 '폭탄'일 상황. 그 분은 다행히 내 준비용 유머에 제법 크게 웃어 주었다. 분위기는 좋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밝아보이던 그 때. 그녀가 말했다. 

"그 이야기 나도 사실 기억나요.."  

사실  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 "여자들은 왜 자신을 흠집내는 개그'에 자지러질까?라는 것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친구들 중에서, 대부분 유머 능력은 a급 이었는데, 그들의 개그 종류는 늘 여자들의 외모를 흉보거나, 그녀들에게 말을 함부로 툭툭 던지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만나는 그녀들의 얼굴부터 억양까지 조목조목 놀려대며, 개그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것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케바케'(case by case)라고 하기엔, 그런 사례들이 너무 많이 누적되어 있어서, 나는 이상하게 그런 개그의 유혹에 빠져들곤 했다(하지만, 차마 입밖에선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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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8-10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개그를 둘러싼 성적 문제... 생각해 볼 주제네요... 어쨌거나 얼그레이님도 대미 장식은 좀 개그적이신 듯~ 하여 글 읽고 나서마다 하하 웃습니다^^ 이미지 훌륭한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6   좋아요 0 | URL
컴퓨터에 재미있는 이미지가 몇 개 있는데, 나중에 하나, 둘 풀겠습니다~

미지 2010-08-11 21:31   좋아요 0 | URL
기대되네요^^

穀雨(곡우) 2010-08-10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여자들이 선호하는 개그는 피학을 즐긴다는 말이네요. 일종의 마조히즘처럼? 그나저나 얼그레이님의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예리하시네요. 어제의 침에 얽힌 풀이도 그랬고 오늘 개그에 얽힌 풀이도 재미나고...^^
얼그레이님, 재미납니다.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6   좋아요 0 | URL
곡우님, 고맙습니다. 제 개그에도 희망이?^^

비로그인 2010-08-1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여자로서) 여자들이 그런 개그를 좋아한다기보다 이미 인기남이기 때문에 그런 개그를 묵인해주는 것이 아닐까도 싶군요ㅋㅋㅋ http://twitpic.com/27rxzj/ 이게 참고가 될까 싶은데요ㅎ

pjy 2010-08-10 18:27   좋아요 0 | URL
만님한테 동감! 잘생긴 남자는 어떤 썰렁한 개그를 해도, 다 용서가 되는것처럼 나름 인기도로 용서하는거지 실제 그런 개그를 남자한테 듣고 진짜 좋아하는건 아닐걸요~ 혹시 그냥 무슨뜻인지 모르고 웃어주는 걸수도@@: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6   좋아요 0 | URL
아 보고 빵 터졌습니다. 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jy님의 말씀은 정말 우리 시대의 진리가 된 것 같아요. "잘 생기고 보기. ㅎㅎ" 난 어떡해 ㅜ.ㅜ

yamoo 2010-08-1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번...수위를 잘~ 조절해야지 않으러면 분위기 썰~렁 해집니다..여자가 남자에게 갖는 호감의 정도가 아주 중요하다군요...3번을 무리없이 하려면~^^;;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17   좋아요 0 | URL
요즘 연애 관련 오락 프로를 많이 보다 보니, 사람들이 이렇게 섬세하구나,싶더군요. '수위조절론'에 공감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8-1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자신을 흠짓내는 개그의 내용만을 보셨다면,, 그건 수박 겉핥기를 하신겁니다. 아하하.
내용이 아닌, 말투, 몸짓, 뉘앙스... 그리고 페로몬의 향기가 중요한거죠. ㅋ
한가지 더, 남자의 외모... 사실 그건 매력의 1순위는 아니랍니다. 도움은 되겠지만여~

얼그레이님 서재에 처음 방문합니다만,,, 재미나네요. 좋은 하루되셔염~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5   좋아요 0 | URL
역시 덧글들에서 삶을 배웁니다. 저를 가꾸어야겠군요.크윽. 좋은 하루 되세욧!
 

 

  

 

 

 

 

 

 

 

(그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가상의 발문을 쓰고 싶었다. 나는 사실 서른이 되기 전, 정성일에 관한 책을 쓰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책이 곧 나올 예정이란다. 놀랍게도 그렇게 오랫동안 영화평을 써 왔지만, 처음 내는 영화비평집이란다. 그와 그의 글은 우리 시대가 보호해줘야한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이 시대에, 더욱 더. 평범한 블로거의 오마쥬) 

1

 오늘, 정성일을 기억하는 자는 누굴까. '씨네클럽'을 경유하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의 추억으로 밤을 지새우는 세대들? 서강커뮤니케이션센터를 밥먹듯이 드나들며, 영화학교 서울을 기억하고, 무슨 말일지는 모를지라도, 귀하게 구한 '삐'자 비디오에 담긴 예술 영화에 환호하던 느낌을 간직하던 세대들? 나는 그 세대가 아니라서, 그 세대의 영화 문화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어릴 적, 외할머니와 함께 멀뚱멀뚱 굴렁쇠 소년을 보던 7살 소년에게 '영화'는 비디오였던 세대, 강시와 환영도사, 수라왕과 후레쉬맨, 헐크호간과 레슬매니아의 추억이 '곧 영화를 보던 시절'이었음을 고백하는 나에게, 사실 정성일의 진가를 제대로 판단한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성일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평다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제 영화저널리즘 바닥에도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영화학'의 그물 속에서, 우연히 걸린 학문적 열정의 논리로 여기저기 찔러보는 자들의 언어만이 횡행한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  지식꾼밖에 안 된다) 매년 신춘문예의 심사소감엔 논문이 아닌 영화비평을 보고 싶다는 지적이 올라온다. '영화'는 '학'이 됨으로써, 영화와 인간의 관계를 가깝게 했는가? 우리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까칠하게'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의 존재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괜한 대중과의 싸움 같고, 영화에 대한 패배주의적 시각은 이상한 '취향 존중'속에서 갈등 회피를 조장한다. 그러나, 외롭게 싸우는 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정성일이다.   

 

 

야구계의 '괴물'이 류현진이라면, 영화계의 괴물은 정성일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 나온 모든 영화를 다 볼 기세로 영화로 하루를 시작하고 영화로 하루를 끝낼 것 같은 사람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기뻐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분노한다. <로드쇼>가 서서히 망해 갈 무렵에, 나는 이 세상에 가장 저급한 영화 잡지가 <로드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로드쇼>의 초창기를 헌 책으로 구입했을 때, 어색한 '격문'들이 붙어 있었다. 이 사람 뭐지? 왜 이렇게 영화에 죽니 사니 하는거야?  그는 정말 영화 때문에 살고 영화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영화에 격분하고, 영화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늘 자신이 봤던 영화에 대한 황홀감으로 지금 평하는 영화를 사유했다. 그는 지식이 영화를 죽이는 걸 싫어했고, 영화가 영화를 살리는 '소생술'에 늘 고심했다. 그리고 대중에게 제발 이 소생술을 알아달라고 간구하는 듯했다.(최근 씨네21에서의 행보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그가 영화만 보는 인간은 아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볼 기세로 책을 '판다'. 그는 극장 밖에 일어나는 현실을 사유했고, 그것을 지독하게 영화 '안'에서 고민하려 했다.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냉소주의를 우려하기도 했고(그는 우석훈의 칼럼집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추천사에서 이 부분을 밝혔다) 지성의 흐름을 헤엄치면서, 지식의 상영관에 나오는 언어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이미지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를 모른다면, '키노'는 알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친구들은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백치들'이 커버였던 <키노> 몇 호를 끼고 다니며, 영화 동아리방을 들락나락거렸다. 나는 소심하게 친구들 잡지를 얻어 보다가, 알란 탐과 왕조현 사진을 선전하지 않아도, 이렇게 두터운 내용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 놀랐다.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것 같지만, 어느새 하나, 둘 보이는 그 잡지. <키노>는 악명이 높았지만, 정성일은 그 악명을 애초부터 즐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영화에 관한 '순혈주의자', '순수주의자'인가? 그는 아마 이 명칭을 싫어하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영화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저버리지 않은 채, 그는 영화가 넘쳐나고, 영화 이야기가 넘실대던 시대에 오히려 우려를 표한다. 이것은 지극히 영화광 다운 태도이다.    

"우리는 주변에 이미 수없이 많은 영화에 관한 담론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사랑과 증오가, 풍자와 자살이, 패배와 절망이 서로 뒤섞여 알 수 없는 농담(?)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드문 사람! 그리고 세상을 점령해버린 것 같은 황당무게한 테크놀로지의 천년왕국론과,근거없는 비난을 일삼는 자해극들, 게다가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모르는 속임수는 심지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키노>1995.05.영화의 '지나간'100년' 키노의 '새로운'101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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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둘러싼 갈등은 늘 논쟁의 중심에 선다. 영화 또한 그랬다. 영화에 대한 존재론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신생 매체와 영화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왔다. 많은 이들은 이른 '수용'에 바빴지만, 정성일은 달랐다. 그는 '영화의 죽음'담론 뒤에 과연 남을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사뭇 폭력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그는 영화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의연하게 '영화의 죽음'담론에 대처한다. 그가 책에 '필사적'이라는 표현을 넣은 것은 그의 영화 인생을 안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정말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글을 써 온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때론 과격하고, 때론 눈물겹다.  너희들이 안 하면, 나라도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는 영화의 종말, 영화의 죽음을 종용하는 담론들과 투쟁하면서, 영화를 외롭고 작게 만드는 매체들과의 사투를 잊지 않았다. 가령 비디오는 '시네마'의 황홀함을 점점 앗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비디오에 스며든 그 자본의 폭력성,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존중도 없는 무자비한 절단에 분노했다. 그리고 싸웠다.  

그리고 90년대 한국 영화 문화에 들어온 '컬트' 현상'의 기이함도 비판했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영화광의 덕목이 되어버린 시대를 슬퍼하며, 그는 아벨 페라라를 들먹거리는 좋아하는 '백과사전'식 영화매니아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들은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가? '진퉁'영화광과 '짝퉁'영화광의 대립? 정성일이기에 가능했던 진정성있는 문제제기였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격분하겠지만.) 정성일은 오늘날 시네필을 사유하며, '노트북 세대'의 시네필을 이야기한다. 더 이상 영화의 '서사'가 주는 흥분엔 관심이 없는 시네필, 오직 영화의 '정보'만을 흡수하고, 그 정보를 제대로 언급했는가, 아니었는가의 판별에만 관심있는 시네필, 그렇기때문에 그는 그것이 가짜 갈등이라고 말한다. 오직 남은 건 빈 덧글 끼리의 대립일 뿐. 인터넷 세대, 게임방 세대의 시네필,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VCR 세대의 시네필. 그는 지금 이 시대를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매달렸다.   

8

그는 더 나아가 당신은 영화관에 가는 것인가? 영화를 보는 것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그는 이 질문을 아주 오래전부터 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름에 영화를 보러간다고 말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무더운 여름에 도시에서 외곽지역으로 이동해서 여가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냉방장치를 갖추고 시간을 낭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찾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관에 가는 것은 서로 다른 행위이다. " 

"사람들은 자동차를 끌고 영화관에 와서 팝콘을 사고 콜라를 마시면서 영화를 소비한다.실제로 영화는 그렇게 부주의하게 볼 만큼 친절한 담론의 양식을 갖고 있는 매체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주의한 상태로 만든다. 이렇게 부주의한 관객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영화는 스스로의 장점을 포기하고 구구절절히 설명을 늘어놓아야 하며,시선의 한계-체험을 버리고 이야기를 통해 기승전결을 일러주어야 하며,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쉽사리 집중력을 상실하는 지속을 계속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해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넣어야 한다" 

                                                                           - TTL CINEMA CLUB 영화교실 2001.5.14, 영화관의 아우라?中

그는 약 십오년 전, 어떤 글에서 영화평론가는 '실패한 영화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언제나 이런 고백이 자기도 모르게 스노비즘으로 빠지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그래서 이 고백은 혹시나 같은 시행착오에 빠질지도 모르는 '미지'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격려이며 서둘러 고백하며 만일 피할 수만 있다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길 기대하는 작은 희망에서이다. (중략) 

말하자면 영화평론가는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서, 순진한 영화광과 진정한 영화광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이다. 또는 '실패한'영화광이다. (중략) 이미 고다르는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불가능하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영화 그 자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물론 이런 것과 싸운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구조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하거,페미니즘을 말하고, 정신분석학을 언급하고,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실증주의를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그저 책 몇 권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중략)하지만 번번히 그 노력을 실패로 이끄는 것은 여전히 고다르의 충고였다. 영화에 관한 이론을 영화가 아니 다른 것(나의 경우에는 대부분 글쓰기에 의존하여)으로 시도할 때마다 거꾸로 글쓰기의 논리가 영화읽기와 노력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다.

                               - <비디오 무비>,1995,05. 어느 낯선 영화광으로부터 보내온 편지, 또는 영화를 다시 생각하며 中 - 

10 

다들 알만한 트뤼포의 시네필에 대한 이야기. 정성일은 시네필의 약속을 지켰다. 영화를 좋아하는 진정한 영화광이라면, 첫째, 영화를 두 번 다시 보고, 둘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는 것이며, 셋째,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는 것. 그에게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일상다반사였을 것이며,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쓴다는 건 그가 아마 신체적인 한계가 올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셋째, 그는 드디어 자신이 감독한 첫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나는 문화에 대한 충성과 열정이 퇴색된 시대에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 한 대목을 같이 나누고 싶다.  

오늘날 '문화'를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문화'란 기본적인 생활세계의 범주로서 등장한다.예를 들어,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말로 믿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을 지키는 것뿐이다(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율법을 지키는 경우 등)."내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된/치환된(disavowed/displaced)믿음을 표현하는 지배적인 양식인 듯하다. 문화적 생활양식이란, 산타클로스를 믿지는 않지만 해마다 12월만 되면 집집마다 또 공공장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닐까? - 13쪽

즉 '문화'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 '진지하게 생각하지'않으면서 실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얼그레이효과 생각 - '지칭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시대, 문화의 위상이 아닐까)과학이 이러한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 역시 과학이 너무 진짜라는 사실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근본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반문화세력,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겁도 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문화 속에 매개 없이 속해 있는 사람들,자신의 문화에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 14쪽  <죽은 신을 위하여> 中 - 

이제 영화를 '믿는 '세대는 사라지고, 영화를 '관리'하는 세대만이 남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정성일은 이러한 시대에 고집스럽게 '시네필의 존재론'을 주창한다. 그는 최근 씨네21에서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며, 동료들과 함께 고민했다. 쌓여가는 담배, 시간을 잊은 시계, 자신들에게 황홀함을 안겨다 준 감독들의 세계관을 쉴새없이 주고받기.. 이제는 보기 힘든 영화문화 속에서, 정성일은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적대와 환대의 정치학을 계속하여 시도할 것이다.  

"마무리 얘기를 하자면, 시네필이 영화에서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성립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이 영화에서 매혹이란 게 뭔지 설명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영화적 순간이란 시네필의 동의어입니다."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학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영화학이 감히 그 매혹을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순간 유명한 수술대의 교훈이 성립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 죽었어,라고 그렇게 시네필들이야말로 미라가 될 뻔한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아닌가 합니다." 

"시네필의 핵심 경험은 마법적 황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20대 때 기호학,구조주의,마르크시즘,정신분석학 책들을 열심히 봤습니다. 얻은 교훈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아무리 열심히 봐도 거기에 답이 없다는 것, 두 번째가 사실 중요한 데 이 연구들의 공통된 목표는 이 마법적 황홀함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공부를 덮으면서 하게 된 결심은 이 마법적 황홀함을 방어야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영화학에 대한 시네필들의 저항, 앞서 얘기한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방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게 공부하지 말라는 말로 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우리는 시네마틱이라는 단어로 방어하고 공격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씨네21>.2010.6.22.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中 - 

영화에 대한 믿음이 아닌, 영화 정보에 대한 믿음만이 하나의 '신앙'이자, 합리적 라이프스타일로 당연하게 자리잡은 시대에 정성일의 주장은 외롭고 또 외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없어도 잘 살 것이다. 왜냐면,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책이 아직 도착하기 전 글이라, 책 속 내용이 없는 '발문'의 취지를 제대로 못 살린 글임을 밝힌다. 책을 다 읽고, 세세한 평가를 다른 페이퍼를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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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8-10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정성일의 책이 드디어 나왔군요!! 예전에 인터뷰에서 책 낸다는 얘기는 진작에 들었던 거 같은데. 내일 다시 들어오겠습니다ㅋ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7   좋아요 0 | URL
바라님, 반갑습니다. 저도 최근에 알았네요. 구입해서 읽고 영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네요.

미지 2010-08-10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 씨 글은 거의 음악의 경지죠... 책 얼른 사야겠습니다.^^ 영화가 개봉이 아직 안 되어 안타깝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8   좋아요 0 | URL
영화가 아직 참..일반 극장 개봉이 안 되었죠? dvd라도 나왔으면 하는데..음.

stella.K 2010-08-1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는 잡지라고 해도 거의 눈문집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노무 잡지가 글이 깨알 같이 박혔던지...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는 게 정말 아쉬웠어요.ㅜ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터넷에 pdf파일이라도 종종 떠다니던데..이젠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집에 몇 권 있다는 것을 위안삼습니다.

dorati 2010-08-1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의 PDF들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user.chol.com/~dorati/kino 물론 99호 전부는 아니지만, PDF파일로 떠다니는 파일들은 여기가 시작이었으니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1 18:11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2010-09-1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1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헤는밤 2010-09-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받은 감동이 다시금 살아나네요. dorati 님의 고급정보도 얻어가게 되어 기쁩니다.ㅎ
제 블로그에 원문 링크하였는데 괜찮을지요? ^^ 종종 찾아뵐게요.ㅎ

까만진주씨 blackpearls.tistroy.com

얼그레이효과 2010-09-27 18: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