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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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불려야 하는가. 영화광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하여 중 /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걸 영화광이라고 부르든(197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 영화주의자들이라고 부르든(198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영화 마니아라고 부르든(199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21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시네필이라고 부르고 있다.하지만 '하여튼'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여기서 나를 이끄는 것은 우리들을 부르는 호명의 방식이다. -66쪽

내게 문제는 영화 마니아가 오디오 마니아와 같은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1990년대에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우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를 보는 시스템에 관심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나는 지금 홈시어터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말 그대로 영화를 '감상하는'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실제로 영화를 제법 보았다는 사람들조차 영화 촬영이나 사운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믿을 수 없는 만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중략)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서(대부분의 경우)문학적으로나,아니면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뿐이다.-68쪽

게다가 대부분 집에서 말 그대로 '그냥'비디오로 영화를 본다.집에서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오직 하이-파이 음질과 화질의 영화를 고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는 하지만,'하이-엔드'시스템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기계의 버전 업에 비례해서, '하이-테크'한 최신 할리우드 영화들로 그들의 라이브러리를 채워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그들의 취행이니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과 나는 점점 더 나눌만한 이야기가 없어지고 있다. -68쪽

첫 번째 오해에 대하여.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수집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그래서 영화를 음미하기보다는 영화(들)을 남들보다 많이 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며,희귀한 영화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중략)물론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과거의'채팅상에서 벌어지는 영화 퀴즈방(속칭 '영퀴방')을 들러 보면 그런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유머 버전일 뿐이다. 왜냐하면 영화 제목을 알아맞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한 편을 놓고, 그 다음이 문제의 시작이다. 영화는 결코 수집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음악이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이끌리는 것을 선택하고, 음미하고,그 안에서 자기의 자아가 반영되어 가는 과정을 다시 되짚으면 되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글이란 결국 자기의 기대의 지평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69쪽

그런데 1970년대에 영화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타자로 취급하던 것이,그리고 1980년대에 부르주아적 변종으로 분류되어 비판받던 계(70)급의 분류가 이제는 그 무언가 하나의 분류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인데,문제는 그 분류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을 어리둥정하게 만드는 지점이다.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종종 당당하게 활동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을 분류해 낼 만한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영화 마니아는 존재한다. 이 숨바꼭질을 분류해 내기 위해서는 역설이 필요하다. -70,71쪽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물론 감식안이 있지만,우리들이 갖고 있는 감식안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결국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안겨 준 홀림에 사로잡혀서 만들어 낸 환상에 대한 굴복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형태의 페티시즘이라는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그럼으로써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쳐 놓은 결계가 있다.그렇다. 이것은 경계가 아니라 일종의 결계이다. 우리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감식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티시즘에 의한 굴복이라면,그 어떤 판단도 오류를 피해 갈 수는 없다.이것은 지난 30년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내는 방식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정교한 분류-처리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공격의 목표가 영화가 아니라 (그렇다면 아주 반론은 쉬워진다),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1쪽

세 번째 오해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있다.우리들 자신 중에는 영화를 사랑하기보다는 영화를 빌려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전적으로 영화 마니아라는 호칭에 대해서 자유롭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이다. 일종의 페티시즘에 관한 증세로 만들어 버리는 규정에 대해서 이들은 가볍게(72)벗어난다.그런데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영화를 빌려 이론을 전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이들이 처음부터 영화를 개념으로 설정하고,그 안에서 그 안의 구성 요소들을 끌어내어 이루어지는 사건들과 그 정황들을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솔직하지 못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철저하지 못하다.-72,73쪽

종종 그것이 영화에 관한 글도 아니면서 정작 영화가 그 글 안에 들어가서 다른 개념들조차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종종 마주치는 실수이다.그것이 유하처럼 시인의 경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그러한 혼란의 경험은 새로운 예술적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이름을 내세워,그리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영화 마니아라는 나르시시즘에겨워 심심풀이로 쓰는 영화에 대한 글은 그 사유 자체를 나쁜 의미에서(그리고 아주 진지한 의미에서) 법도 질서도 없는 혼란으로 이끈다.그는 인접성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73쪽

우리는 자유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결정하게 된 방식을 사후적으로 선택하는 능력이라는 칸트의 조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사회가 호명하는 방식과의 투쟁이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위해서 이 투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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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0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번'비디오를 보는 남자' http://blog.aladin.co.kr/717962125/3798296란 포스트를 통해, 곧 나올 내 졸업논문 주제를 밝힌 적이 있다. <VCR 시대의 영화 소비 경험에 대한 연구 :1979~1999)>. 한국의 1980년대,90년대 영화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매체였던 비디오에 관한 사회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포스트가 '비디오대여점'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오늘은 비디오를 볼 수 있던,1980년대의 대표적 공간인 만화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사실 이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는 시기에 태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사료로서만 그 시대의 느낌을 '호기심'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게 아쉽다)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장소가 된 만화방. 그래도 종로 어디어디에는 문득 보이던데. 지금은 만화책도 하드커버가 나오는 시대이지만, 그 시대의 어른들은, 아이들은, 또 어렴풋이 바라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조금 허락된 문화의 기억은, 누렇게 변질된 만화책,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손이 끈적하도록 침을 뱉고서, "얘야, 니 그 만화책 보고 꼭 손 씻어야 된데이..."라는 어머니의 걱정. 하지만, '엄지 만화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목적이 꼭 만화책을 읽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하다. 

 

엄지만화방에 설치된 딱 한 대의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은 나라를 살폈고, 세계를 걱정했다.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딴 짓'을 하러 온 연인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자. 이제 심야요금 걷겠습니다" 

우리는 심야요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욕정의 시간'으로 빠져 들었다. 지금에 와선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불법비디오를 대여해주거나, 상영해주는 사람은 사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비디오가 등장하자, 호기와 불황을 동시에 맞은 대표적인 장소가 만화방이었다. 여관은 물론이거니와, 분식집에서도 비디오 기기를 설치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데, 만화방이라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고 연이어 나오는 문화를 향해 가하는 지식인들의 도덕적 질타. 사람들은 '화이트 비디오'와 '블랙 비디오'라는 명칭으로, 자신이 보는 것은 정품, 밀실에서 즐겨야 할 것은 '삐짜'라는 구분을 지었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 심산 선생의 고백처럼, 낮에는 데모라는 열정의 시간으로, 밤에는 애마부인을 보기 위한 욕정의 시간으로라는 건 비난만 할 수 없는 그 시대의 문화였다. 밤의 열기 속으로.  

"야, 어린 짜식이 까져가지고는... 못 참겠냐? 화장실을 가던가 새끼야. 휴지줄까?"라는 대사를 던지는 명계남 아저씨의 

모습이 귀엽다  

 

엄지방의 총무는, 오늘의 상영회를 갖기 앞서, 사람들에게 볼 작품을 소개한다. 

"여러분 오늘 볼 작품은요. 먼저, 성룡의 사형도수입니다. 성룡의 코믹연기와 취권계열의 액션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흡족할 작품이구요. 두번째 작품은 척 노리스가 나오는 델타포스입니다. 척 노리스에 대한 이야기 BLAH..BLAH. 주변 사람들이 총무의 소개를 지겨워한다. "아. 거 빨리 영화 봅시다" 총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세번째 작품이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는....욕망의.... 갑자기 어느 남자가 "그거 좋지"라는 말을 던진다.  

 

꺼진 텔레비전, 시대에 지친, 사랑에 지친, 일에 지친, 무언가에 지친 사람들. 분노할 힘도, 좋아할 힘도 사라졌을 때, 누군가의 보살핌, 그리고 내가 정작 갖고 싶어하던 행복은 무엇이었나를 다시 돌아보고 싶을 때, 엄지만화방에 모인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는 것으로, 고뇌를 대신한다.  

 

일터에 나가기 위해 새벽짐을 싸는 사람들. 그리고 어디선가 내일을 또 열고 있을 사람들 

  

가리봉의 하루는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장미빛 인생>. 이 영화를 만든 김홍준 감독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시네필이었으며, 우리에겐 필명 구회영으로 더 친숙한 사람이다. 나도 영화를 볼 줄 안다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시절의 필독서였던,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이란 책을 본다면, 그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이었나, 그 시대의 영화광은 무엇이었나를 돌아보는 데 소중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빛 인생>은 시대의 기억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마음 속에 소장하고 있을 나라는 영화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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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8-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제가 다니던 만화방의 경우 시간이 으슥해져 학생 손님이 빠지면 만화가게의 반을 가르는 아코디온커튼이 쳐졌지요. 그때부터 불법비디오 상영이 이루어지곤 했는데, 야자 끝나고 만화책 빌리러 들를 때면 커튼 너머로 들리는 야릇한 소리에 섬찟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8-19 22:17   좋아요 0 | URL
아..조선인님, 이런 증언. 제 논문에 너무 소중한 사료가 됩니다.^^ 제가 아직 그 시대 경험이 없어서,글로만 봐서 실감이 안났는데,경험자의 덧글을 보니 확 다가오는군요.^^

pjy 2010-08-20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말까지만 해도 만화방에 다니는 학생은 탈선의 일종에 발을 막 들인 아이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방과후 대본소용 일본?순정만화책을 보다가 집에 갈 시간을 잊어서, 엄마,아빠가 찾으러 왔었던 기억이 납니다ㅋ
남자애들이 집에 안오면 부모님들이 동네당구장을 순회하시는 것과 약간 비슷할려나요^^?

얼그레이효과 2010-08-21 03:42   좋아요 0 | URL
아 연달아 나오는 증언. 좋습니다. pjy님의 서재도 블로그 통해 잘 봤습니다.^^

바라 2010-08-2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만화대여점 시대 아닌가요? 저도 예전에는 종종 신림동 거리에 있는 만화방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었는데 요새 만화방과 이전의 8, 90년대 만화방은 또 문화가 많이 다를 거 같네요. 요새는 그저 만화를 읽기 위해 잠시 들르는 그런 곳인데..예전에는 거기서 비디오도 틀고 했다니 놀랍습니다. 더불어 가리봉과 구회영, 이 두 이름도 새삼 반갑네요~ 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8-21 03:42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요즘 만화대여점 자체를 안 들려봐서 어떤지 궁금하네요. 요즘은 정말 무엇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ㅎㅎ

2010-08-20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eong 2010-08-2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좋게 다가온 영화였는데 너무 쉽게 잊혀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야기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최명길 씨와 최재성 씨의 암울한 표정이 떠오르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8-21 03:43   좋아요 0 | URL
영화 끝이 좀 아쉽긴 했는데, 뭔가 영화가 정감 있어 좋았던 것 같네요..^^

2010-08-20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0-08-2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만화방 사진 보니 엔날 생각 납니다. 24시간 하는 곳이었는데, 1000원만 내면 온종일 만화를 볼 수 있던곳!! 단속을 피해서 포르노도 틀어줬죠~ㅋㅋ 요일이 정해져 있었던지 제가 갈땐 항상 그냥 애마부인 씨리즈만 해줬습니다..ㅎㅎ

아, 마지막의 책은 저도 소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아, 근데 논문 제목을 막 공개해두 돼나요? 누구는 물어두 않갈쳐 주던뎅~ㅎㅎ
흥미 있는 논문 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21 03:45   좋아요 0 | URL
생생한 증언 고맙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블로그에 종종 내용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도움 고맙습니다.ㅎ
 

스크린.1993.10월. 독자의 광장- 첩혈쌍웅   

299쪽

오우삼 감독이 서극,정소동과 손잡고 만든 <첩혈쌍웅>은 분명 상업적인 활동사진이다.그러나,내 생각엔 한번 쯤은 진지하게 읽어봐야 할 문제작이다. 오우삼 감독의 첫번째 히트작 <영웅본색>이 장철 감독에게 바치는 현대판 무협검술영화라면,<첩혈쌍웅?은 장 피에르 멜빌 감독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게 보내는 보다 세련된 갱스터 무비이다. <첩혈쌍웅>역시 다른 홍콩영화들과 자칭 영화광들에게 욕먹을 조건은 완벽히 갖추고 있다.황당할 정도로 잔인한 폭력,너무나 단순한 이야기구성, 그리고 서구영화의 모방..(웬만한 영화광이라면, 이 영화의 모태가 멜빌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사무라이>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301쪽 

유덕화,장만옥 주연의 <열혈남아>비디오 테잎을 사고 싶습니다. 정품이면 더욱 좋겠지만 녹화테잎이라도 상관없습니다.아울러 주윤발과 종초홍 주연의 <가을날의 동화>비디오테잎을 소장하고 계신 분도 연락주셨으면 합니다. 

스크린.1993.2월. '커팅'전쟁 휘말린 <하얀 전쟁> 

266~267쪽  

skc의 자회사 동 프로덕션이 영화 <하얀 전쟁>을 무려 14군데에 걸쳐 10분 이상의 분량을 삭제,수정하는 횡포를 자행.  

267쪽 

마지막으로 대사 수정문제가 남아 있다. 세장면에서 대사가 수정되었는데, "..아 더러운 따이한들아.."를 "이놈들아"로 바꾼 것 등이다. skc 측에서는 이것이 시네마코프에서 텔레시네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문제라고 해명한다. 즉 화면이 작아지면서 오른쪽에 세로로 채워졌던 한글자막이 잘려버려서, 그 부분에 관한 한 자막담당들이 장면을 보고 유추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지영 감독은 영화 전체가 월남전에 대한 재해석,반성,비판을 의도하고 있었기 때문에,장며 하나 대사 하나가 모두 의미있는 장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삭제나 수정을 하는 경우 감독의 의도는 그냥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특히나 '따이한'과 같은 대사는 그 단어 하나에 월남인들의 모든 감정과 분노가 들어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자르는 것이라고 했다.  

로드쇼.1992년 8월. 저주받은 비디오 고다르 vs 파스빈더  

284쪽 

우리나라 비디오업자들의 손에는 가위손과 엿가락이 함께 들려 있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미개봉 명작들,기대에 차 환호했던 영화광들은 처참하게 변형된 걸작의 모습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이익을 위해 잘라내고 이익을 위해 엿가락처럼 늘여놓은 비디오 천국에서 독자를 위한 명단공개를 시작합니다.  

(중략) 흥행이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대부분이 아트 필름이거나 개성이 강한 감독의 작품이다)혹은 90분을 넘는 영화들의 경우는 어김없이 90분짜리 테이프에 키를 맞춰야 한다. 거두절미(?)의 위력은 스크린의 배율뿐만 아니라 길이에 있어서도 여지없다.  

285쪽 

비디오악당선언. '졸작'으로 둔갑한 '걸작'  

첫째, 비디오의 거두절미. 무슨 소리인가?시네마스코프 영화 화면의 가로 세로 비율은 2.35:1이다. 텔레비전 모니터의 비율은 1.37. 즉,양사각형의 경계선 사이에 서 있는 주인공은 아무리 크게 떠들고 열연을 해도 비디오 화면에서는 쫓겨난 꼴이 된다.명감독의 뛰어난 미장센이란 비디오관객에게는 '전설'로 여겨질 뿐이고,그저 줄거리만 줏어섬기게 되는 셈이다.  

287쪽 

비디오광에게 보내는 퀴즈 : 절대 찾을 수 없는 제목 

여기 모은 리스트는 '창씨개명'당한 비디오출시작들입니다. 명감독의 걸작들을 보기 위해 비디오가게를 힘들여 뒤지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그리고 잃어버린 이름들의 복원을 위하여 간단한 독자테스트를 마련합니다. 총문항수 62개, 55점이상이면 출시제목에 속지 않는 안목을 지녔다고 자부해도 좋습니다.앞으로는 이런 테스트가 없기를 바라면서,걸작들의 이름을 찾아줍시다. 

1993년 8월 로드쇼. 여름을 정복하는 영화광의 통과제의. 

컬트영화 베스트 10 

238쪽 

'컬트'라는 말이 이제 낯익다. 거리에는 '컬트'라는 카페까지 들어섰다. 작년에 <델리카트슨>이 컬트 딱지를 붙이고 서울에 입성했고, <블루 벨벳>,<바톤 핑크>까지 컬트 명찰을 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컬트는 이른바 '홍콩 느와르 붐'에서 찾을 수 있다.  

1.아리조나 유괴사건 : 1) 몇몇 저널레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낸 뒤로 2)코엔 형제의 다른 영화들을 보고 구색을 맞추거나 확인을 하려고 몰려든 영화광들 때문에 3)한번 보고 두번 보고 급기야는 복사본 만들려고 또 보는 열혈 편집광들 때문에 비디오숍에서 정말 보기가 힘들어진 출시비디오.4) 또 이 영화의 정체를 단언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면서도 꾸준히 인구에 회자하는 영화.5)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컬트에 동참한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는 새로운 '컬트컬트'영화. 

239쪽 

5.블루벨벳 : '불법비디오'는 컬트였으나 정작 수입/개봉은 더 이상 컬트일 수 없게 되어버린 경우. 웬만한 영화광이라면 대학의 상영회나 시네마떼끄로 몰려다니며 <블루 벨벳>불법비디오나 LD를 챙겨보는 건 필수였다. 데이비드 린치 고유의 '기이한'매력의 맥락 위에서 맹목적 통과의례처럼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6.열혈남아 : <영웅본새>,<천녀유혼>과는 달리 비디오출시 이후 엄청난 관객이 몰린 경우, 즉 컬트비디오라 해야 할 것이다. 왕가위의 두번째 작품 <아비정전>역시 개봉관에서는 일주일만에 내려져 그해의 최단기록을 세우더니 비디오로는 꾸준히 재평가받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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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2008). 할리우드 영화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유 훈련법 1탄 <미스트>.씨네21.640호. 

오늘날 영화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영화라는 사건을 가능한 세계의 한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사건-가능,이라는 하나의 삼각형.다른 하나는 영화라는 정보를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읽는 것이다.후자의 방법은 거의 모든 영화들이 우리 시대의 광학적 기계장치를 다루는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그로므로 영화를 볼 때 이제는 그것을 보는 직관적 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풍요로운가라는(다소 상투적인 비유이지만) 유목민적인 산책의 구경보다 그 영화를 둘러싼 정보를 얼마나 더 많이 갖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영화가 더 잘 보이는 네트워크로서의 집단적 전송과 리플이 이 시대의 영화감상을 특징짓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착각하면 안 된다. 오늘날 이 네트워크의 특징은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오로지 사이버 대화가 있다.정말 있는 것은 전송뿐이다.전송하고,전송받고,베냐민적 영화보기에 대한 맥루한적 영화보기의 승리.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미국영화(의 관객교육 방법)의 승리.오늘날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둘러싼 정보에 더 열중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트북 세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게임방 시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그들은 사실상 재빨리 새로운 영화를 보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들은 영화를 본 다음 견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정보의 오류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정보를 경유하고,정보를 통해서,정보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화를 더 잘 보려고 혼자서 명상에 잠겨 자기의 생각을 말하여 들 때 새로운 시네필들에게 그 노력이 일종의 영화적 문맹이거나 혹은 부질없이 관념적인 잡담처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혹은 지식이 이들을 간섭하려들 때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한다.(중략) 이제 검색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선택하느냐가 얼마나 적하한 미학적 용어를 알고 있느냐보다 그 영화의 핵심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이 새로운 영화들의 핵심은 정보를 미학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   

정지연(2009). 디지털 시대의 영화 존재론에 관한 연구 : 매체 융합환경에서 영화의 수용자 경험 변화를 중심으로.커뮤니케이션학 연구:일반, 제17권 1호. 

78쪽 

1990년대부터 편재화 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전 사회적 확산은 미디어 컨버전스와 함께 진행되어 왔다. 극장과 TV가 융합되고,TV와 컴퓨터가 융합됐다. 공적 공간 미디어와 사적 공간 미디어가 융합되고,고정된 관람 지점의 미디어와 모바일 미디어가 융합됐다.영화는 이 모든 과정에서 모든 미디어와 결합했다. 이미 1950년대 텔레비전과 뒤섞였고,1980년대에는 vhs미디어와 결합했다.그리고 90년대에는 dvd로부터,컴퓨터,케이블,PMP미디어로 확장됐다. 특히 DVD시대가 시작되면서,DVD는 영화의 단순한 부가상품이 아니라,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성을 지닌 어떤 것처럼 변모하기 시작했다. DVD에는 영화의 본편만이 아니라, 감독 코멘터리,확장판,삭제판, 다른 버전의 엔딩,메이킹 다큐 등 무수한 영상물이 추가된다.  

 96쪽 

극장의 선형적 시간이란,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는 개인 관객이 결코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과 흐름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가령 DVD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는 물론이고 수용자가 원하는 순간 언제든지 영화를 멈추거나 되감거나 도약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극장은 관객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화의 상영시간(running time)동안 그것에 철저히 종속되어야 한다. 

98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영화 경험에 부여하는 이러한 영화의 새로운 속성들에 대해서,유토피아적으로 해석하는 많은 논점들은 디지털 시네마의 새로운 미학적 성취들을 강조하고,더불어 극장의 강제적이고 통제적인 시공간성을 극복하여 관객이 영화에 더욱 참여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영화 경험이 미학적 성취이고,자유로운 주체성(관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인지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98쪽 

테렌스 라퍼티는 <누구나 컷 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문제이다(Everybody gets a cut:DVDs give viewers dozens of choices-and that's the problem)>라는 글에서 현대인들이 컴퓨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그 컴퓨터 유저의 사용 패턴이 현대적 삶의 일상영역은 물론이고 예술 경험에까지 작용해 들어가고 있다고 비판한다.즉,현대인들이 컴퓨터를 통해 일상을 처리하(98)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정보 양식'으로 취급되어 통제되거나 소비되는데,이러한 컴퓨터 기반의 일상생활 양식이 예술에 대한 행위와 감각에까지 영향을 미쳐,예술이나 영화 조차도 마치 컴퓨터의 '정보 패키지'를 취급하듯이 한다는 것이다. 인터액티비티에 대한 욕망,랜덤 액세스에 대한 욕망, 지루할 때 스킵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 등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terrence Rafferty,2006) 

99쪽 

디지털 시대에 점점 비중을 키워나가는 다양한 영화 윈도우들의 양태는 명백히 자본주의내 상품과 소비 생산의 메커니즘이 강하다. 겉으로는 수용자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이야기하지만,사실 수용자가 dvd를 볼 때 장면을 선택하는 행위 혹은 스킵하는 행위가 예술을 경험하는 주체의 능동적 사유를 유발하기보다는,오히려 매체에 대한 사유와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행위 패턴의 기계화 혹은 감각의 마비를 자극하는(99)부분이 더 크다. 디지털 매체의 인터액티비티나 랜덤 액세스가 오히려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영화감상의 적극성을 감소시키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극장의 선형적 시간은 관객의 몰입을 강제하며,그 강제성이야말로 억압적 기제가 아니라,영화 경험의 중요한 차원이자,핫 미디어(hot media)의 특성인 것이다. 

100쪽 

특히 1980년대 이후 멀티플렉스는 대중의 영화경험을 단순히 영화라는 대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멀티플렉스가 놓이는 소비공간으로서의 배치와 마케팅 상품의 연속들 속에서, 영화 경험을 소비과정의 한 단계로 강력하게 편입시켰다(공간의 정치학).즉 영화의 문화적 예술적 향유의 속성이 약화되고, 점점 더 영화 경험이 고도로 치밀한 상품소비와 동의어가 되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영화경험의 사회적 구조는 영화의 물질적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유선영(2009). 근대적 대중의 형성과 문화의 전환.언론과 사회.17권 1호. 

82쪽 

지식인의 개입은 식민지 대중에게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영화가 근대적 여가와 오락의 중심으로,즉 문명화의 한 표상으로 정립된 것이다. 영화는 과학주의,지성주의,모더이즘,문명의 이미지로 덧씌워졌고 영화관객은 지식,매너,스타일,유행,쾌락,소비와 같은 근대 대중의 소양과 자질,태도와 연관되었다. 영화관객은 근대적 대중의 이미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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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을 전공한 후배 녀석들이 가끔 이런 고백을 자주 털어놓는다."선배,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요.언론학이 재미가 없어요." 물론 '재미의 기준은 각각 다른 것이니까요'란, 식상한 생각으로 상황 자체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적당한 예의로, 그냥 우리 갈 길 가면 되는 거 아니요,란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선 안된다는 생각이 몇 년 동안 들었다. 나도 후배들의 고백에 담긴 고민을 어떤 선배, 어떤 스승들에게 똑같이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칼럼 자체가,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업계(난 이상하게 '학계'란 표현보다 이게 더 현실적인 것 같다)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된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단서. 반복이 계속된다는 것은,한편으로 안정적으로 현상을 사고할 수 있다는,  그리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그 상황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노련미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반복이 가중되면, 점점 쌓이는 건, 정체감이다. 뭔가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늘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그 미디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우리에게 신선하며, 도발적인 공간을 마련해주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3  

저널리즘 분야에 대한 칼럼도 마찬가지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널리즘을 바라보는 업계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 정의롭다. 정의의 선이 굵고 명확하다보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리고 경계를 긋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의 정의는 이상하게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관점이라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내세우는 데이터,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밝혀주고 있는 현실은, "나, 그래도 이 방송사 현실 잘 알지?"정도로만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미디어 트렌드에 대한 소개나 그 수용에 대한 감각적 제시를 잘하는 곳은, 언론학이 포진되어 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kt경제경영연구소'같은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권력은 이미 이동했다.(현실의 껍질을 더 까보면, 새로운 미디어 관련 예측 보고서의 경우, 많은 언론학자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런 경제경영연구소의 예측 결과, 현실 분석을 베끼고, 그냥 정리하는 수준에서, 한 편의 완성된 논문을 냈다고, 오늘 내 할 일 다했다고 자위한다. 그리고 전문가 소리를 듣길 바라는 게 언론학의 현실이다) 

미디어라는 오늘날 대중과 가장 친숙한 사물 그리고 생각의 매개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의 생각을 너무나 모르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너무나 규범적인 비평들이 득세한다. 도덕의 언어 차원에서 부르디외가 말했던 '하강하는 부르주아지'의 언어에 담긴 단순한 '포르노크라시'의 언어만 툭 던져놓고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또 미디어 소비에 있어서, 그 현상의 이면을 더 깊이있게 바라보려는 노력 대신 표피적인 사색, 그것보다 더 무서운 '관용어구'적인 사색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6

언론학 분과 안에 있는,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가 있다면서, '늙은 나이'에 내가 그래도 이 정도로 젊은 아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디냐는 교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뻔뻔하게 칼럼에서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 경향'을 논하며, 문화의 권위자 노릇을 하고 있다. '불성실'이 성실보다 추앙받는 현실 안에서, 그 어떤 좋은 분석안이 나올 수 있을까.  

가장 큰 문제는, 언론학에 있는 많은 업계 사람들이 자신의 '밥줄'이 끊길까봐 그 누구보다 전전긍긍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나마 '미디어'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으니까 연구 프로젝트 따기도 쉽고, 어느 정도 수익도 보장된다는 무시할 수 없는 그 점 하나로, 이 안의 현실과 친해지자는 생각으로 버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누구보다 신문계, 방송계, 뉴미디어계 현실을 잘 안다고 떠벌릴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들의 시선은 '밥그릇'차원에서 진행되는  토픽에만 열을 올린다. 대중들에게는 전혀 다가가지 못하는 '정의의 문제'만을 토픽으로 삼아 지면을 채운다.  

그들에게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는 단순한 기능이자 실용일 뿐이다. 그들은 정작 그릇된 미디어 소비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구축하는 담론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문화가 없고, 교양이 없고, 인문이 빈곤하고, 사유는 닫혀 있으니, 아무리 젊은 자가 들어가도 이내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게 이 곳 언론학이다. 그 누군가가 "교수님 어제 방송 출연하신 거 잘 봤습니다. 어제 신문 칼럼 잘 읽었습니다"라는 말 대신, 빨간펜을 들고, "적어도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이렇게 진부한 생각으로 현상을 바라보세요?라고   대꾸할 때가 되었다. 이미 누군가가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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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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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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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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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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