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관용>으로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의 신간이 미국에서 곧 발간될 예정인 듯하다. 찾아보니 미국 일자로 10월 31일로 잡혀 있었다. 웬디 브라운의 책은 제목들이 다 좋은데, 이번 책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무엇보다 그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제목인 것 같아서 좋다) 이번 책 제목은 뜬금없이 지어진 것은 아니고, 위키의 힘을 빌려보니 2008년 그녀가 이 책의 제목과 유사한 제목의 강연을 했다는 걸 발견했다.  

그 강연의 제목은 Porous Sovereignty, Walled Democracy 이었다. porous의 뜻을 찾아보니 '다공의' 즉 구멍이 많다였는데, waning (시들해진, 약해진)과 무엇과 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마 그녀는 푸코의'통치성' 논의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아감벤 냄새도 난다.) 책에 대한 정보가 아마존에 몇 줄 나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는 내가 생각해본 그녀의 관심사와 초점을 표시한 것이다)

Why do walls marking national boundaries proliferate amid widespread proclamations of global connectedness and despite anticipation of a world without borders? Why are barricades built of concrete, steel, and barbed wire when threats to the nation today are so often miniaturized, vaporous, clandestine, dispersed, or networked?

In Walled States, Waning Sovereignty, Wendy Brown considers the recent spate of wall building in contrast to the erosion of nation-state sovereignty. Drawing on classical and contemporary political theories of state sovereignty in order to understand how state power and national identity persist amid its decline, Brown considers both the need of the state for legitimacy and the popular desires that incite the contemporary building of walls. The new walls—dividing Texas from Mexico, Israel from Palestine, South Africa from Zimbabwe—consecrate the broken boundaries they would seem to contest and signify the ungovernability of a range of forces unleashed by globalization. Yet these same walls often amount to little more than theatrical props, frequently breached, and blur the distinction between law and lawlessness that they are intended to represent. But if today's walls fail to resolve the conflicts between globalization and national identity, they nonetheless project a stark image of sovereign power. Walls, Brown argues, address human desires for containment and protection in a world increasingly without these provisions. Walls respond to the wish for horizons even as horizons are vanquished.  

이론의 수입이냐, 아니냐 이런 차원의 문제보다 내가 요즘 중요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은 '세계 문제'에 너무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아마 그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각성중이다) 한국의 언론만큼 '내 나라 소식 전하기'에만 골몰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소식을 괜히 끄트머리에 부착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세계로 인해 연결된 하나의 망으로써, 우리의 삶이 곧 세계의 흐름과 직결되어 있음을 언론종사자들은 계속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관용>에 이어 이번에도 언급되는 외국의 사례들은, 비단 '내 나라 밖의' 문제로만 취급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웬디 브라운이 강조하는 저 '벽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세계를 바라보려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아, 그래서 이 말이 한국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거야?"라는 조급한 문제 제기 대신, 우리는 그녀가 든 사례들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과 그것에 연유한 고민의 다발들을 챙겨보게 될지도.


이 책의 내용을 예고한 강의의 프리뷰를 잠시 보려면  

http://depts.washington.edu/uwch/katz/20072008/wendy_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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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 소개가 있다) 

 1 

"만약 당신이 내일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가져가고 싶은 세 가지 물건은?" 한때 TV 토크쇼에서나, 아니면 친구들과의 수다 자리에서나 자주 등장했던 이 질문. (요즘은 이 질문이 자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싱거운 대답을 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자신의 개성에 맞는 사물들을 고심해 본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조난 사고를 당해 아무도 없는 섬에 떠밀려 왔을 때, 우리는 장난으로 했던 '무인도 퀴즈'의 지난 날을 추억하며 슬퍼할지도. 신을 믿는 누군가는 섬에서 회개 기도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카메이 토오루 감독의 <낙원(2005>)는 마치 ,"무인도에서 가져갈 것 세 가지? 쳇"하는 투로, 살기 위해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케이블 채널에서 자주 방영해주던 영화였는데, 사실 드문드문 봤던 몇 번은 그저 그런 <캐스트 어웨이>의 일본 버젼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어제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생각할 거리를 여럿 안겨다 주는 이 작품 속 장면들이 내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자 주인공인 마치다 시온은 전도유망한 정치 신인으로서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다. 선거 유세를 위해 어촌에 내려왔다가,사고를 당해 자신을 안내하던 한 어부와 무인도에 남게 된다. 여기까진 충분히 많이 봐 왔던 장면들. 그리고 이후에 이런 저런 장면들이 나오겠지?라고 하는 예상 속 장면들이 물론 있다. 좀 과장되고 군데 군데 어설픈 대목들이 있지만, 작품이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그건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2  

우리가 흔히 사회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겪는 많은 과정들이 있다. 가정, 학교, 일터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은 '사회인'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학습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을 의식하며, 접촉하는 가운데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짓는 언어를 익히고 신체 기술을 터득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막상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일정한 권력이 사람과 사람의 위치를 수직적으로 변화시키고, 누군가는 명령을 하는 것을, 누군가는 명령을 받는 것을 선호한다. 현실 정치를 꿈꾸는 여자인 마치다 시온은 무인도에서 철두철미한 준비도 없고, 가만히 넋을 놓고 있는 어부 사카키 히데오가 못마땅하다. 그녀는 자신을 포함해  두 명의 사람이 있는 이 곳에서 '사회 실험'을 한다.(이미 무인도 생활을 하던 중국인이 있는데, 논의를 위해 이 부분은 생략한다) "넌 명령을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이지?" 라는 직언으로 시작해 남자의 약점을 공략한다. 그녀는 단 한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위에서 군림하길 원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회 실험'을 통해,무인도에도 내가 사회에서 했던 명령들, 행위들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물론 이 확신은 그녀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씌여진 하나의 가면으로 작용한다.  

3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은 어부인 사카키 히데오가 오랜 무인도 생활을 통해, 그가 이 섬에서 그냥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대목이다. 이는 여전히 이 무인도를 탈출하고 싶어하는 마치다 시온의 태도와 대비됨으로써 더욱 부각된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로 인해 감옥 자체가 사회보다 더 편안하고 익숙해져버린 모건 프리먼의 경우처럼, 사카키는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마치다가 이 섬을 나가도록 작은 뗏목을 만들어준다.(원래 그는 마치다가 섬을 자신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동굴 안에 있던 뗏목을 바다에 보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뗏목을 타고 바다로 향하던 마치다를 부여 잡는 사카키는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이 두려워 자신과 함께 살자고 그녀의 다리를 잡는다. (만약 그녀를 편안히 보내주었다면, 이 영화는 시시한 휴먼 드라마 였겠지만, 약간은 얄궂은 이 반전으로 인해 영화가 가진 '날 것'으로서의 인간은 더 도드라진다)  

바다를 떠돌던 마치다는 결국 사람들이 있는 사회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선거는 끝난 상태다. 성공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첫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녀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녀는 선거관리사무소에 가 직원에게 따진다. 선거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선거가 가능하냐고.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집착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을 던진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다의 이런 거센 항의, 분노와 대비되는 것은 너무나 평온한 어촌의 풍경이다. 고로 영화는 그녀의 사회적 부재를 둘러싼 주변의 조용한 시선을 통해, 그녀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 부재의 비극은 그녀의 몫이다.  

그녀의 비극은 사실 무인도에 있었다는 차원을 넘어, 그녀가  사회에서 익숙하게 체화시켜왔던 명령, 규범, 이성적 기획의 부분들을 무인도에서 실현시켜보려고 했다는 점. 그것의 출발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그녀는 사람으로서 내가 '살기 위해' 터득해야 할 것은, 내가 '사람다움'이라고 배워 왔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중간에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있는 해산물을 씹어 먹고 싫어하던 생선도 먹는다. 살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잘 짜여져 있는 생각의 구획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충실하여 몸을 움직여버리는 본능의 몸짓이거나, 미약하게나마 인간으로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자연의 도구적 활용이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정치평론을 하시는 한 젊은 분이 한국은 6.25 이후 크게 망해본 적이 없는 사회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정말 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랬을 때 우리가 처할 극한적 절망의 상태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런 절망의 상태를 느껴본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과연,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다가올 혼란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정치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과거 LA 폭동처럼, 여기저기서 화재가 일어나고 매일 약탈이 일어나는 상황이 한국에도 발생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그 말 이후 자주 해 보게 된다. 물론 이것은 그러한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오는 스펙타클의 스릴도, 정말 그런 상황을 실현시키고 싶은 광기의 차원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혼란 자체가 왔을 때, 인간이 행할 사회적 행위. 그것에서 느껴지는 잔혹 혹은 예기치 않은 감동, 사랑,눈물,비애,냉소 등의 사회적 감정 들을 우리는 그 순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6  

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예언'하는 묵시록자들보다는, 나는 도리어 '극한적 절망의 상태'를 통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봄직한 희망과 사랑에 대한 모습들을 더 가까이 /세심하게 보고 싶어하는 놈이긴 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와 사회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그 절망의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점점 이 사회에서 우리도 모르게 늘어나고 있는 건, 영화 속 어부처럼 사회에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는 삶의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보다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건, 그래도 숨이 붙어있다,라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러한 존재들의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태도보다는, "그래도 지금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잖아.."라는 시선에서, '사회인'이라는 범주가 갖는 그 기본선의 경계를 타인에게 적용 /작동시키는 데서 오는 위안을 더 즐기는 것 같다. 과연 어디가 낙원일까. 저 먼 유토피아와 저 먼 디스토피아 사이의 간극 속에서, 정치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현실의 탐독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지도. 만약 누가 무인도에 가져 갈 세가지를 묻는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답변을 준비해봤다. 나에게 닥칠 절망의 상황을 정직하게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의 유지. 그것 하나면 된다고.  오늘 우리네 삶에서 "난 사회인이요! 사회인이요!'라는 소리가 빈번해질 때마다, 그것은 '생존의 두려움'이라는 노래의 b-side ver.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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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1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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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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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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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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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분열된 이야기, 하지만 찬찬히 보면 연결된 이야기. 

  1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3~4절)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중 하나인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 성경 구절과 연관된 소설 <어린 사환의 신(1929), 시가 나오야 작>이 논의의 중요한 길로 제시된다. 신이치는 모스의 증여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소설의 내용을 살펴봤는데, 나는 신이치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이야기다. 한 어린 사환이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고 싶어하는데, 자신에겐 그 초밥을 먹을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그 모습을 본 A는 사환의 사정을 알고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A는 이 사환에게 자신이 돕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싫어한다.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겠다는 뜻, 자신이 돕는 사람인지 몰라야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지난 후, 사환 몰래 그가 배불리 먹을 초밥 값을 초밥집 주인에게 주고, 뛰쳐나온다. 소년은 생각한다. 이런 선물을 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심지어 사환은 그를 신의 존재로 생각한다. 여기서 더 빠지면 신이치가 마련해놓은 사유의 길로 가게 된다. 여기서 잠시 중단)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A가 느끼는 괴로움이다.  길지만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A는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얼마 전에 소년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동정을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식으로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우연히 기회가 주어져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년도 만족했을 터이고, 그러니 나 자신도 만족해도 좋을 것이다. 남을 기쁘게 해준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나는 당연히 어떤 기쁨을 느낄 만한 자격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왜 이렇게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이런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마치 남몰래 나쁜 짓을 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어쩌면 나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우쭐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본래의 진정한 마음이 그런 의식을 비판하고 배반하고 비웃기 때문에 이런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닐까? 자신이 한 일을 좀더 가볍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사실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구속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닌 건 분명하다. 적어도 불쾌한 느낌을 갖고 있지는 않아도 좋을 듯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23쪽) 

 인터넷에 이런 고민을 고백하는 한 유저의 글이  올라왔다고 치자. 이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마 "님 좀 짱^^!"이란 덧글을 달며, 그의 선행을 응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 이 글이 어느새 그 날의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고,  어떤 사람이 그 게시물을 뒤늦게 읽어본다."아니, 뭐 도와주면 도와준거지. 이런 것도 엄연히 자랑 아니야. 쳇". 물론 예상 가능한 반응이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와 착함을 덧붙인 지금 이 시대를 비판하는' 자선파티의 정치경제학'이다.

2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요즘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자주 들려온다. 읽고 있는 여러 저널에도, 또 알라딘을 비롯해 주요 서점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채우고 있는 몇몇 책들의 테마도, 이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내가 썼던 <윤리적 소비와 인간미를 판매하기>(http://blog.aladin.co.kr/717962125/3950531)와 연결될 수 있다. 윤리적 소비, 생태 자본주의, 문화적 자본주의, 자본주의화된 사회주의. 지젝부터 스퐁빌까지.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헷갈린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심심한 참에 잘 되었다고 달려들거나,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 같다.  유명한 영화 감독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자들이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착해져서 당황스럽다고. 며칠 전  지인이 사는 어느 신도시의 거리를 같이 걷다가,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 동네 뭔가 있어. 사람들이 다 있어 보이는데, 뭔가 다들 선하고 여유로워 보여" <어린 사환의 신>에서 A는 어린 사환을 돕는 것까지 모자라, 아예 그 도움 자체로 괴로워하고 있다. 누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누구는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지금 그것을 실행한다면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돌을 맞을 확률이 크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숙이고, 가면을 벗길 준비를 한다.  

 

종영된 KBS 드라마 중 <부자의 탄생>이란 작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던 드라마였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그려보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이 드라마는 결국 부자가 되고 싶은 한 가난한 사나이가 결국 부자였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결국 부자의 아들이었던 자는, 가난한 자의 삶에 잠시 내려온 것 뿐. 여기서 드라마는 부자가 되는 방법 대신 혈연으로 모든 것을 덮는다. 남는 건 이시영이 보여주는 부자의 삶에 대한 희화화. 결국 서민들이 부자의 삶에 깊게 다가가는 길이란 없다. 이 드라마는 애초의 목표를 시원하게 배신하면서, 그저 부자를 바라보라고 한다. 아니면 정말 부자는 우리 시대의 '로또'인 것이다. (당신이 이 로또를 맞기 위해 쇼핑몰을 차린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연애 프로그램에 나오는 그 잘나가는 쇼핑몰 CEO 대신, 홈페이지 만들고, 거래처 조금 잡다가 종 치는 CEO들이 수두룩하니까)  결국, 우리 시대의 서민이 던지는 최고의 항의는 <서울의 달>과 같은 서민들의 드라마를 제발 만들어달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부자들을 구경하는 시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정녕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멀어져 가게끔 만드는 미디어의 책략. 분석 대신 분노와 투영만이 깃든다.

 

 

 

 

 

 

 

 

 

자본주의는 정말 사회적 나눔으로 인해 발산되는 소모의 쾌락, 소모됨으로써 솟구치는 오르가스무스의 길을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았는가? (그래도 정액은 끊임없이 공급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모되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정액. 그것이 우리를 둘러싼 자본의 현실 아니겠는가) 조르주 바타이유를  꺼내오자면,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조금 비튼 상태로 함부로 / 거칠게 원용하자면, 이 착한 부자들의 원천은 '파괴'일 것이다. 이 파괴의 의미를 돈으로 연결짓자면, '써도 또 써도, 그 '씀'으로 하루 하루를 버텨나가는 자들. '자선파티의 정치경제학'은 여기서 '기부의 이면'을 보라고 충고한다. 가령 구조조정 뒤에 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의 문제. 구조조정을 한 B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B의 기부금으로 인생을 미약하게 연명하거나, 아니면 그 기부금이 전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 B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심지어 그가 한때는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황당함 이상의 반응들을 세심하게 펼쳐볼 수 있을까) 

한 쪽에서는 너무 심한 것 아니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반응이, 다른 한 쪽에서는, 여러분 지금 그거 달다고 덥썩 물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독이 든 과일이 될 거에요,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허락된 '가지 않은 길'은 무엇일까.  혹자는 강경하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드는 어투로) 자본주의의 착함 운운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주장한다. 결국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도, 그 기술의 유해와 이로움은 사람의 사회적 사용에 달려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자체의 사회적 활용을 우리가 잘 해야하는 문제로 덮을 수 있는 것일까?    

 

 5

 그렇다고 우리가 가면을 벗기기 귀찮아서 / 힘들어서 랩으로 이 자본주의 녀석의 얼굴을 꽁꽁 싸매어, 자본주의 자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섣부르고 뜬금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보다 인류학적인 태도. 손과 발에 달린 눈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매만지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믿는 쪽이다. 그들이 확실한 대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이 조각들이 모였을 때, 우연의 힘은 냉소로 시작했던 의도를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차분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 하지만. 이런 내 소심한 결론 뒤에 숨은 하나의 확신. 자본주의가 착해서 그렇다, 나빠서 그렇다에서 우리가 시원한 아이스크림같은 대답을 먹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가장 맛있는 부위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음을 알고 후회한다는 것이리라.  

다만, 앞에서 인용했던 성경 구절이 좌파에겐 상당히 신랄한 꾸짖음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자 한다. 여기엔 물론 나만의 비유와 비약이 들어간다. 양해를. 이 시대의 좌파(왼손)들은 정말 우파(오른손) 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른다기 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인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잘 안다는' 문제는 사회를 바라보는 감정과 시선의 차원, 앎의 누적에서 오는 교만함과 그 교만함을 어리광부리는 태도로 바꾼 냉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을 때, "오른손이 왼손이 보도록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라는 차원의 문제, 그래서 오른손은 결국 속물이었어라고 못박아 버리게 만드는 유혹. 이때 좌파들이 왼손과 오른손의 일 모두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신'의 경지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은 아닌가,하고 우려를 표하게 된다. 정작, 자신은 사람으로서 왼손과 오른손의 일로 분열하고 있는데, 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려는 사람들. 그 전지전능함의 최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착한 거북이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의 겸양된 시안으로 지면들, 페이지들, 쪽들을 채울 때. 나는 그들이 "사실은 나 저기 가 있는 토끼인데.."라고 위안을 삼은 채 거북이 행세를 하는 것 같아 두렵다.  토끼가 거북이와 개미의 기믹까지 다 먹어버린 시대로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 지극히 '문제적'이다. 

A를 신으로 생각하려는 어린 사환에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정작 들려주려고 하는 나는, 이미 이런 이야기 다 끝난 것 아니요,라는 오판으로 "사실은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해석을 할 줄 아는) 내가 신이야"라고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이, 인간은 운다.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고, 왼손으로는 자위를 하는 게 이제 이 삶의 낙인가,라는 찬 바람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그리고 이 사회가) 확성기를 대고 설파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삶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냉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복잡한 문제에서 오는 쾌락을 맛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요즘 그래서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첫 걸음을 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치유는, 냉소라는 지옥에서 탈출하기다.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때마침 필요했던, 그 심심함을 달래줄 고마운 적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정말 우리에게 닥칠 불안한 미래인 것일까?  우리는 이 논의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랑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사랑해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것을 택하겠다고. 다시,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다. 굿바이! 미스터 냉소주의.  

먼 길을 돌아간 이야기, 결국 나에게로 돌아갔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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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9-0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소하니까 지젝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자선이나 기부, 착한 자본주의 관련해서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재밌는 글이 떠오릅니다. 이미 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http://socialandmaterial.net/?p=104

얼그레이효과 2010-09-01 03:28   좋아요 0 | URL
바라님 늦은 밤 반갑습니다.^^ 논문이 잘 정리가 안 되서, 헛글을 써 봤습니다. 크. 링크 고맙습니다. 읽어보고 고민해보도록 하지요.

2010-09-02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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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원래 공부를 '독고다이'로 해온 편인데, 이번 학기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또 공부의 열의가 있는 사람들끼리 '감정사회학'이라는 테마로 모임을 가져볼까 생각 중이다. 사실 김홍중 선생의 책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마음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이론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나는 이것이 매체 연구에서의 어떤 전환을 야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내 소견이다)  

가령, 미디어 연구에서는 (아직까지도!) 어떤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그 매체를 활용한 사람들이 이런 효과를 얻었다더라,수준에 머무르거나(대표적으로 이런 방법론을 이용과 충족 연구라고 한다.국내에서는 1980년대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언론학 하시는 분들은 이 방법 좋아라한다) 문화연구의 시선 처리를 배운 게 그나마 수용자의 능동적 해독방식 정도이다( 1990년대부터 미디어 연구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의 절충안으로서, 그나마 더 나아간 것 같지만, 사실 포장만 번지르르할 뿐.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  

난 차라리 일정한 매체의 수용 과정에서 나오는 사랑, 기쁨, 미움, 속물, 진정성 등등 그런 다양한 감정들 하나, 하나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가령 내 졸업논문 내용 중에 들어가 있는 비디오 시대의 영화광들을 둘러싼 담론에는 속물과 진정성의 대립이 포진되어 있다. (그랬을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과연 영화를 속물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 이 과정은 내 만두 속에) 

 

 

 

 

  

 

 

 

 

감정의 상품화라는 테마 또한 염두에 두고 있다(이 테마에 대해 벌써 식상해져가는 이 학문 소비자들이 두렵다!) 나는 통치성론과 좀 다른 맥락에서 크리스토퍼 래쉬가 '치료국가'라고 불렀던 개념을 더 깊게 팔 생각이다 (졸업 논문을 쓰는 과정에, 나는 래쉬의 치료국가론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의 '문화'와 도덕주의 그리고 정신의 관계가 어떻게 가정에 개입하였는가,의 문제. 특히 문화 소비와 관련하여, 국가와 여성의 도덕주의적 접점이 만들어지는 데  개입한, 지식을 활용하는 연구소들의 담론, 그 문제점을 짚는 작업을 했다)

 

 

 

 

 

 

 

 

 

 

  

 

 

  크리스토퍼 래쉬를 공부하다 보면, 필립 리예프를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다시 앤서니 기든스와 지그문트 바우만으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시선에서 문화를 진공상태로 만들지 않기다. 에바 일루즈가 말한 것 처럼, 문화 내부의 논리를 어떻게 복합적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차원. 그 차원에서 보다 우리를 복잡미묘하게 만드는 감정과 지식, 감정과 경제, 감정과 문화. 이것을 보다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눈을 길러보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진흙탕 속에 빠져있는 미디어/문화연구의 획기적인 기획을 꿈꾸면서, 내 무기를 단련시켜보고자 한다. 이게 내 이번 학기 목표가 아닐까 한다(졸업을 앞두고 이 무슨 짓인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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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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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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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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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1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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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을 옹호하다>와 <반대자의 초상>의 국내 출간으로 독자들을 찾았던 테리 이글턴, 그리고 미디어 연구자들의 필독서가 되어버린 <재매개>의 저자 제이 데이비드 볼터가 곧 한국을 찾는다고 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을 위해 소식 옮겨봅니다. 

1. 제이 데이비드 볼터  공개 강의 

 



 

 

 

 

 

 

응용문화연구소에서는
세계 미디어 석학 초청 강연 시리즈의 일환으로
세계 최고의 매체 이론가이자 『글쓰기의 공간(Writing Space)』, 『재매개(Remediation)』의 저자인
제이 데이비드 볼터 (Jay David Bolter) 교수님을 초청해
공개 강연을 개최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석 부탁드립니다.


일시: 2010년 9월 2일 목요일 오후 5시

장소: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관 132호

강연명: Writing on the World

강연자: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 교수

주최: 고려대학교 응용문화연구소

원문 출처 : http://www.cacs.or.kr/bbs/board.php?bo_table=4_notice&wr_id=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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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테리 이글턴 공개 강의 및 유관학자 라운드 테이블

일시 : 2010년 9월 6일 ~ 9월 10일

1강 : 신념과 근본주의 (9월 6일, 오후 4시)
-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2강 : 문학의 내면 (9월 7일, 오후 4시)
- 교보 컨벤션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 여기까지가 서울에서 열리는 공개강좌입니다

3강 : 미적인 것의 윤리적 가치 (9월 8일, 오후 4시)
-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 * 3강은 유관학자만 참석하는 라운드테이블입니다.

4강 : 신념과 근본주의 (9월 9일, 오후 4시) 

- 전남대학교 광주은행홀 

5강 : 문학의 내면 (9월 10일, 오후 3시) 

-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

 원문 출처 : http://hlectures.nrf.go.kr/bbs/notice_view.jsp?board_id=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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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8-29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이거 시간이 다 제가 갈 수 없는 시간대군요. -_-

얼그레이효과 2010-08-30 00:54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논문쓴다고 외출을 못해서..갈까말까 고민중인데. 이글턴 1강은 가보고 싶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8-30 15:53   좋아요 0 | URL
좀 아쉬운 행정 처리이긴 하네요. -_-

바라 2010-08-30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관학자만 참여하는 것이면 대중공개강좌는 아닌가보네요. 그나저나 저 포스터는 이글턴 사진은 엄청 쪼그맣고 고대 건물만 엄청 크게;; 누가 만든걸까요

얼그레이효과 2010-08-30 00:56   좋아요 0 | URL
미적인 것의 윤리적 가치. 저게 가장 듣고 싶은 건데 저 3강만 유관학자 참여인가 봅니다..포스터는 정말 할 말이 없네요..;; 이글턴은 제발 저 포스터 안 보고 강연들어가기를,,(아니면 예리한 감각으로 강연중 쓴소리 한 마디 했으면 좋겠네요.ㅋ)

마늘빵 2010-08-30 12:20   좋아요 0 | URL
딱 보니 저 건물 고려대 같습니다. ^^ 고려대에서 만들면서 자기네 건물만 크게 넣었나보네요. 티내려고. -_- 공개 강좌는 좀 퇴근 이후 시간대로 잡아주지. 일반인도 참석하게요. 센델 강연처럼 해야 하는데.

2010-08-30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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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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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10-08-30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강은 아마도 대중강연의 형식을 빌려 인촌기념관의 대강당에서 할 듯해요. 그런데 이글턴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저 강당을 채울 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많이 와야 할텐데... 지난번(2006) 월러스틴 강연처럼요. 월러스틴의 지난번 대중강연은 꽤 괜찮았답니다. 그리고 3강은 그들만의 리그 형식을 빌려 몇명의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전문가/지식인들 몇명이 인촌 기념관의 몇층에서 정말 전문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것 같습니다. 역시 지난번 월러스틴처럼요.그리고 저 사진은 인촌기념관 정문의 사진인 듯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30 22:38   좋아요 0 | URL
무화과나무님 / 상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 3강 주제가 욕심이 났는데 아쉽군요. 논문때문에 이것 참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손만 쭉쭉 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