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훼밀리렌탈 1989.9.20.매일경제 7면. 

장난감, 카메라, 밥상,vtr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대여해주는 이색업종이 새로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대여업붐에 힘입어 한국훼밀리렌탈(대표 이수은)은 당장 필요하지만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을 대여료만 내고 쉽게 빌려쓰도록 하는 생필품대여업을 시작했다. 한국훼밀리렌탈이 대여해 주는 물건을 교육용컴퓨터 주변기기, 비디오카메라,vtr,카메라, 전자오락기,장난감, 등산용품,여행용가방, 전자타자기,밥상,전기해머드릴,야구게임장비,휠체어까지 망라하고 있다. 대부분 생활에 긴요한 품목이지만 고가이거나 자주 사용치않는 품목들이다. 대여료는 종류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코펠이 하루 1천5백원에 1일 추가될 때마다 5백원이 가산된다. 밥상,배낭은 2천5백원,vtr,카메라는 4천원, 전자오락기 2천원, 공구 3천원, 휠체어는 6천원이면 빌려 쓸 수 있다. 가장 대여료가 비싼 것은 비디오카메라로 2만 4천원, 어린이장난감은 월 9천원의 회비만 내면 무한정 사용이 가능하다. 대여료는 10일까지는 일정금액이 가산되지만 10일을 초과해 빌릴 때는 대여료가 크게 낮아진다. 대여 기간이 10일때는 30%할인을 받고 한 달이면 45~50%까지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한국훼밀리렌탈측은 대여품목 가운데 비디오카메라, 삼손요행용가방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밝혔다. 대여를 받는 절차는 비교적 간단하다. 주민등록증과 대여에 필요한 비용만 준비하면 된다. 또 전화로 주문, 배달이 가능해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대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파손되거나 분실될 경우에는 신품가격으로 전액 보상해야 하기 때문에 대여기간 중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또 소비자 사용 편의를 돕기 위해 24시간 연중무휴로 영업을 한다.  

비디오기자재 대여점.1984.7.3.경향신문.6면. 

비디오가 오락,교육용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가운데 아파트 단지에 비디오기자재와 테이프를 전문으로 빌려주는 곳이 생겼다. 지난 4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에 문을 연 '렌트의 집'이 바로 그것. 국내외 영화 등 오락용에서부터 CCC기독교문화사업단프로그램 등 교육용까지 700여 종의 각종 비디오테이프 5,000여권을 마련,대여하고 있다. 또 테이프 외에 비디오에 관한 모든 기자재도 빌려 주는데 비디오가 13세트, 비디오카메라가 7대 준비돼 있다. 

비디오 한달 평균 4편 본다.1990.11.26.경향신문.19면. 

직장인들은 한달 평균 3.8편의 비디오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서울ymca 건전비디오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 지난 8월 25일부터 9월25일까지 한 달동안 서울 시내의 남녀사무직직장인 1천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비디오 시청실태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비디오를 전혀 안본다고 응답한 직장인은 10%에 불과했으며 한 달에 6편이상이 19.8%, 11편 이상은 9.9%였다. 성별로는 여자가 1.4편인데 비해 남자가 4.3편으로 나타나 여자보다 3배 이상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선호하는 프로그램도 액션 45.4% 애정 13.2, 권격무술 10.9, 코미디 5.8, 공포괴기 4.9, 성인에로물 4.6,교육용비디오 3.3순으로 나타났다.  

 vtr 보유가정 1주 2,3편 감상. 1991.12.7 경향신문.22면. 

vtr를 소유하고 있는 서울 일반가정은 1주일에 3편 가까운 비디오를 보며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극장에서 놓친 영화를 보기 위해 비디오를 빌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비디오전문지 비디오플라자가 서울에 사는 중학생 이상 학생 2백14명과 40세 이하의 직장인 3백2명 등 총 5백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이트 조사에서 밝혀졌다. 응답자 중 85.4%가 평균 2.8편 이상의 비디오를 보았으며 자주 본다고 대답한 사람 가운데 39.9%가 여가를 즐길 거리가 없어서, 또 20.6%는 습관적으로 비디오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장에서 놓친 영화를 주로 본다고 응답한 사람이 54.8%나 됐으나 마땅한 좋은 프로가 없어 폭력적이고 음란,퇴폐적인 비디오를 주로 선택한다고 28.2%나 됐다.  

비디오로 영화감상 확산.1992.9.7.매일경제.12면. 

대기업 및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는 도심의 비디오 가게에 최근 들어 퇴근길 직장인들의 발길이 크게 늘고 있다. 세종로 명동 종로,을지로 여의도 등에 자리잡은 대부분의 건물들의 지하 및 주변에 복합상가가 들어서고 있는 가운데 이들 상가 내에 위치한 비디오가게에는 금요일 퇴근 때면 주말에 볼 비디오물을 빌려가는 20~30대 직장인들로 붐비고 있다. (중략) 극장 개봉영화가 프로테이프로 제작돼 비디오가게에 등장할 때까지의 기간인 소위 홀드백 기간이 그동안의 6개월에서 최근 3개월 이내로 단축된데다 개봉관을 찾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직장인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안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도심의 비디오기게들이 대우(우일영상),skc,스타맥스,드림박스,미디아트,cic등 대규모 판매회사와 주거래를 하면서 내용이 건전하고도 작품성이 뛰어난 비디오물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데다 컴퓨터를 통한 철저한 회원관리 및 예약서비스 등을 실시하고 있는 점도 비디오가게의 성업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들 비디오가게가 실시중인 회원제는 1만원 또는 2만원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하면 대여료인 2천~2천5백원보다 저렴한 1천5백원에 프로테이프를 빌려주고 있다. 또한 평균 2박3일인 대여기간보다 빨리 돌려주면 편당 5백원씩을 회비에 가산해 주는데다 다음달 출시되는 프로테이프의 안내책자를 배포해주고 보고싶은 비디오를 미리 전화로 예약할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비디오대여점 서비스경쟁 뜨겁다.1992.12.26.매일경제.10면. 

예약 및 배달제는 신프로의 캐털로그를 dm(direct mail)으로 받아본 고객이 원하는 테이프를 전화로 예약하면 컴퓨터를 이용해 배달순서를 매겨 대여 가능한 날짜에 고객의 집을 직접 방문해 대여해주고 정해진 날짜(3일 대여기준)에 이를 직접 회수해가는 방식. 대여료 환불제는 이제까지 3일을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대여해오던 테이프를 대여기간에 따라 대여료의 일부를 환불해주는 제도. 마포지역의 대여점의 경우 3일 기준으로 책정된 2천원의 대여료를 당일 회수시는 1천원. 다음날에는 5백원을 환불해 주고 있다. 회원제는 기존의 단순한 방식에서 탈피, 컴퓨터를 이용해 한번이라도 자신의 점포를 찾은 고객에게 철저한 서비스로 보답하는 방식이다.  

방화비디오 안방극장 강타.1993.3.14.동아일보.10면. 

한국영화를 담은 비디오가 점차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흥행에 성공하는 국산영화가 잇따라 나오면서 일고 있는 이같은 현상은 이제는 외국과 마찬가지로 영화와 비디오의 연계제작시스템 도입 가능성을 크게 높여주는 것이어서 비디오업계에서나 영화업계에서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 비디오대여업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방화비디오는 '장군의 아들'시리즈와 시라소니, 결혼이야기 등. (중략) 한국영화가 영화관에서 뿐만 아니라 안방비디오극장에서도 인기를 얻자 이제는 영화업계에서도 영화 기획단계에서부터 대기업 자본이 들어와 비디오시장까지 노리고 영화를 제작하는 선진국형 영화제작시스템이 가동중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상영관에서 히트했던 신씨네 기획의 결혼이야기와 미스터 맘마. 결혼이야기는 삼성그룹이 제작비를 댔고, 미스터맘마에는 대우그룹이 관여했다.  

양들의 침묵, 기억에 남는 비디오 1위.1993.1.17.동아일보.14면. 

비디오 플라자가 지난해 10월부터 11월까지 한 달동안 서울 경기지역의 비디오 애호가 5백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나온 것. (중략) 비디오 애호가들의 대여행태를 살펴보면 한 달에 6~8회 정도 빌려다 보는 경우가 전체의 35%를 차지해 가장 보편적인 경우였다. 최소한 이틀에 한 번, 한 달 15회 이상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하는 경우도 11%나 됐다. 여가시간에 스포츠를 즐기는 경우 18.55%보다 비디오를 본다는 경우 22.35%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 비디오 문화가 우리 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디오 대여업소를 찾는 연령층은 20대가 절반에 가까운 45%를 차지했는데 그 중에서도 20대 후반의 직장인 29.65%가 주요고객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연령층은 30대와 40대 주부들로 15%를 차지했다.

 세계 최다 대여 비디오.1994.3.16.경향신문.14면. 

사운드 오브 뮤직,스타워즈,이티,쥬라기 공원이 각각 60~9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대여된 비디오 영화인 것으로 밝혀졌다. (중략)이 자료에 따르면 10년별로 10위안에 가장 많은 작품을 올려놓은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 70년대 조스,80년대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와 90년대의 쥬라기 공원에 이르기까지 30년에 걸쳐 6작품이 각 10위권에 올라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사임을 증명했다. 이어 sf영화의 귀재 조지 루커스와 재미 위주의 연출에 능력을 인정받은 c.컬럼부스의 작품이 각각 3편씩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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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옛날이 그리운가보다. 예전 내 블로그를 찾다가 '씨네21'의 창간 광고를 코멘트했던 포스트가 있었다. 1995년 4월 14일, 한국 영화 저널리즘의 한 획이 그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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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1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금은, 아니 많이 끔찍한 상상. '자유주의 우생학 비판'에 대한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문득 학부 시절, 영화 시나리오로 써보려고 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로쟈님의 페이퍼 속 내용에서 전제가 되는 건, 일단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나옴으로써 시작되는 것인데, 내 이야기는 어머니의 배 안에서만 진행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봤던 <이너 스페이스>란 영화가 좀 모티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크로넨버그 스타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지금은 '사장된' 이야기) 

장르는 SF인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근데 좀 어설프니까 양해를) 과학적 발전이 점점 이루어지면서, 낙태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 시도된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아이를 지워야 하는 것에서, 이제 '뱃 속의 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오게 한다는 취지'의 실험이었다. 이 시기에 아이는 뱃 속에서 점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빨리 신장되고, 아이는 자신에게 공급되는 '양분'에 의해, 내가 이후 이 부모의 삶에 함께하면서 '좋은 삶'을 살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사고한다. 그리고 아이의 뇌 속에 어머니가 아버지와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두 사람의 사회화 경향, 교육받은 정도, 등등을 아이가 뱃 속에서 수집 /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대략 임신 4개월 정도의 판단 기간을 통해, 아기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게 되고, 만약 자신에게 좋은 삶의 배경을 제공해주지 못할 것 같으면, 아기는 스스로 어머니의 뱃 속에서 목숨을 끊는다. 실험이 성공하고, 사회에서는 논란이 가중된다. " 낙태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생명과학의 전환!"이라는 옹호론과 "좋은 삶에 대한 선택권이라는 포장에 가려진 생명 경시"라는 비관론이 대등하게 펼쳐진다.  

이 논란 속에서 사회 분위기는 뒤숭숭해진다. 특히 실험 결과의 발표 이후, 빈곤층의 출산율 저하가 급격히 이루어진다. 사회에서는 비관적 분위기가 횡행한다. 아이를 가져도 결국 이 아이가 우리의 삶을 판단하고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라는 뉴스 인터뷰 속 시민의 모습이 잡히고, 그런 말,말,말 들이 겹쳐진다. (여기까지 생각해본 이야기. 이런 끔찍한 미래는 오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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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0-09-1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자면 태아의 자살을 허용해야하는가의 문제로군요..ㅎㅎ
자살을 허용하면 자유주의적 우생학이 되는 것이고 자살에 반대하면 공동체주의적 생명윤리주의자가 되는 것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9-11 14:32   좋아요 0 | URL
후자의 몫까지 판단을 확실시하고 이야기를 상상해본 것은 아니었는데, yoonta님이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시는군요.^^ 좀 깊이 고민해보겠습니다.

눈팅하다가 2010-12-28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재미있지만 어려운 소재군요.

전 전체적으로 굉장히 급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유독 낙태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본인의 선택권이 존중되지 않는 생명의 박탈행위는 어쨋거나 살해다.' 거든요.
네, 아무리 태어난 후 걷게 될 아이 자신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꺼라 '예상' 될지라도,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않는게 더 낫다고 생각 될지라도, 그건 아이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 자신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고 심지어 자살을 택하게 되더라도, 본인의 의사결정이 배제된 '낙태' 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그 생각을 다방면으로 확장시키면 저런 시나리오도 나올 수 있겠군요.
 

예전 블로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리뷰를 몇 개 발견했다. 2008년 2월 6일의 글. 지금 다시 들춰 보니, 대학 졸업을 곧 앞둔 상황에서  내 어떤 황량한 마음이 담긴 영화 리뷰 같다.  

 

끌로드 샤브롤의 1969년도 작품, [야수는 죽어야 한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저는 미리 말해두었습니다!)


끌로드 샤브롤의 1969년 작품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샤브롤 특유의 찝찝함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스릴러다. 샤브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히치콕과의 연관성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영화 속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찝찝함’이란 단어와 스릴러라는 장르가 갖는 특성을 나란히 둘 필요가 있다. 샤브롤의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기 위해서다.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관객은 ‘누구’의 문제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져 왔다. 누가 범인인가, 누가 저 사람을 죽였는가, 누가 살아남았는가, 누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마이더스의 손이 되고 싶은 제작자들은 극장 속 관객이 그 ‘누구’를 쉽게 찾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 기술자들을 필요로 했다. 이야기 기술자들이 ‘누구’의 존재를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까지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반전이다. 뒤집어짐의 쾌감. 대중은 오랫동안 그 쾌감을 맛보기 위해 관람석을 채웠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 기술자들이 거둔 성과를 안다.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나이트 M. 샤말란의 [식스 센스]는 현대 영화사의 흐름 가운데 자신 있게 뽐낼 수 있는 반전을 가진 영화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는 한국의 영화 관람 문화 속에서 소위 ‘반전 강박증’이 팽배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반전 강박증’이란, ‘누구'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스릴러라는 장르를 반전의 가치로 환원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최근 영화 경향을 보면, 특히 스릴러는 표방하는 작품들이 거의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포장하는 기술은 늘었지만 관객은 냉담하다. - 여담이지만 나는 작년에 나왔던 [리턴]을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 “에이 뭐 이렇게 시시해” 스릴러가 갖는 '누구'의 문제, 그것으로 긴장감을 형성하고 관객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당위의 차원으로까지 가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끌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갖는 독특한 행보는 바로 이런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찝찝함’ 때문이다. [뉴 웨이브]의 저자이자 영화평론가인 제임스 모나코는 이 작품에 대해 ‘부르주아 실존의 잠잠한 표면을 깨부수는 테러는 결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개인적으로 그 테러에 책임이 있는 특정 인물이 없다’라고 말한다. 샤브롤의 영화는 ‘누구’강박증에 벗어나 있다. 쉽게 말해서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만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조급하게 범인을 찾는 데 골몰하지 말고 좀 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이 좋다. 영화의 첫 장면은 노란 옷을 입은 미셸이란 소년이 바닷가에서 무엇을 잡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한 편, 조용한 마을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가 나타난다. 바닷가를 나와 마을을 거닐던 소년, 그리고 차 안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서로 대조되면서 이상한 느낌이 만들어진다. 교차 편집을 통해 더욱 고조되는 불안감. 결국 그 불안감은 미셸이 뺑소니사고를 당한 것으로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셸을 너무나도 잔인하게 지나쳐버린 차 안의 남자와 여자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이 우리가 보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영화는 아들인 미셸을 보고 절규하던 아버지 샤를르의 모습을 잠깐 보여준 채, 어느덧 냉정한 모습으로 일기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  

 

샤를르는 경찰을 위시한 법과 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복수를 택하는 방식은 공교롭게도 ‘연기’다. 연기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샤를르라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이름을 택한다. 마크 앤드류. 이제부터 그는 샤를르가 아닌 마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서를 하나 둘씩 찾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자와 여자에게 접근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갖는 감정은 주인공의 명석함에 대한 감탄이다. 그러나 샤브롤의 이 작품은 주인공의 뛰어난 두뇌를 찬양하지 않는다. 샤브롤이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은 변화와 친숙하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가 뺑소니사고의 범인을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상의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샤브롤 특유의 의식을 찾는 게 중요하다.  

영화는 죄와 벌의 관계를 물으면서도 그 범주 안에 우리가 당연하게 제외시켜도 된다고 보는 주인공 샤를르를 집어 넣는다. 당연히 관객은 의아해 할 것이다. 장 안느가 사악함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주는 캐릭터 폴의 너저분한 욕설과 천박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생각을 보면서 관객은 어느덧 폴의 집에 들어간 샤를르의 심정으로 폴을 대하게 된다. “폴을 죽여. 저 사람이 범인인 것이 확실해!”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샤를르는 윤리의 옹호를 위해, 정의의 수호를 위해 영리한 두뇌를 마음껏 자랑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준수한 외모와 조심스런 태도 속에 어딘가 모를 어색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 폴과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자인 엘렌 랑송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샤를르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그 낌새를 무시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낌새는 다시 돌출되고, 샤를르와 묘한 연대를 형성한다. ‘우리는 폴이 싫다’ 그러나 엘렌은 정확히 왜 샤를르가 폴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단지 ‘싫다’라는 감정과 그 감정이 바라보는 대상이 ‘폴’이라는 것을 공유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샤를르는 그녀를 가엾게 여긴다. 그는 일기를 쓰며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자신의 여린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약해지지 말자, 경계를 둘 필요가 있다는 표현으로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폴의 집에 들어간 샤를르는 폴의 아들인 필립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필립은 죽은 미셸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인데(실제로 미셸역과 필립역을 맡은 두 아이는 서로 형제 사이다.)필립 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드러낸다. 집은 제법 호화스러운 것 같지만, 경직된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건 역시 샤브롤 영화의 재미다. 샤브롤은 부자들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 화려한 겉모습 뒤에 케케묵은 비밀들이 있을 것이라고 계속 찔러댄다. 그리고 이 영화에 숨어있는 분노의 대상은 폴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샤를르만이 폴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제인 엘렌과 섹스를 하는 것이 거리낌 없는 남자라면 폴은 정말 야수가 맞다. 폴의 가족들은 이 야수에 억압받고 있으며, 아들 필립은 극한의 증오심으로 다른 아빠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른 아빠가 샤를르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쾌감은 좀 모순된 표현일지 몰라도 ‘찝찝함’이다. 쾌감이란 단어가 주는 시원스런 분위기와 거리가 먼 감정인데도 나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불투명함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로저 에버트는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고 해도 딱 한 번만 보면 되는 작품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솔직히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 [디 아더스] 같은 영화들이 아무리 뛰어난 이야기의 몸매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여러 번 보진 않을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누구’의 문제로 치닫는 이런 영화들이 여러 번 손길을 가게 만들지 않는 것은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 솔직한 상황이다. 허나 샤브롤의 이 작품은 좀 다르다. 그것은 분명 범인을 향한 추궁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상황을 바라보게 만드는 샤브롤의 주제 의식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굳이 끌로드 샤브롤라는 이름과 위대함이라는 표현을 엮어 윽박을 지르는 듯한 거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칭송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려는 건 아니다. 
  

영화는 복수와 자연스레 관계를 맺게 되는 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끄집어내지도 않는다.(이 영화에서 그나마 선명한 피는 미셸의 사고 현장에 남아 있던 핏자국이다.) 영화 전체를 지배할 것 같은 피의 향연 대신 영화 속 주요 배경이 되는 브르타뉴의 애매한 날씨만이 시각을 채운다. 영화는 머리와 가슴의 문제를 끄집어내며, 이성과 감정의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면서 죄, 복수, 살인, 가족, 위선, 증오 등을 이야기한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유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샤를르가 마크로 변신하면서 마크라는 새 정체성으로 복수를 시작하는 교묘함은 분명 [복수는 나의 것]이 갖는 감각과 스타일에 기댄 복수와는 차이가 있다. 한 번 더 모순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주인공 샤를르가 보여준 복수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반면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샤를르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자기 영역의 확보다. 그는 경계를 두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함께 증오의 심정을 느끼는 애인 엘렌, 폴의 아들 필립에게 그는 복수를 위해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복수는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숭고함은 자신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신성함의 의미로까지 읽히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면 허무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데, 이는 ‘누구’강박증에 빠져 있었던 나 스스로가 낯선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허무함과 낯선 심경은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되며, 스릴러라는 장르를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scene 이다-샤를르와 엘렌의 식사 scene

이 장면은 [야수는 죽어야 한다]를 본 사람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폴을 죽이는 데 실패한 샤를르에게 엘렌은 식사를 하면서 지금 밥이 넘어가냐고 묻는다. 샤를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하고, 엘렌에게 먹을 것을 얹어 준다. 식당 종업원이 오리 요리를 가져다 드려도 되겠냐고 묻고, 샤를르는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배인이 오리 요리를 가져올 즈음, 샤를르는 엘렌에게 뺑소니 사고로 죽은 아이는 바로 자신의 아들인 미셸이라고 말한다. 엘렌은 예상은 했지만, 충격은 크게 받은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샤를르가 엘렌에게 미셸에 대해 말할 때, 지배인이 오리 고기를 써는 장면이 함께 나오는 데 이 장면이 주는 긴장감과 섬뜩함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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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들어가, 지도교수에게  처음 밝힌 포부는 앤서니 기든스의 <친밀성의 구조변동>과 같은 책을 꼭 한 권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과 문학>이라는 학부 교양 시간에 처음 알게 된 이 책은  나의 마음을 계속 움직였고, 최근 '감정사회학'을 연구하면서, 조금씩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파트는 제6장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이다. 속된 말로 나는 이 파트에 '꽂혔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파트에서 기든스가 언급한 인간 유형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고,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했다. 그리고 최근 영화 <대혼란(Havoc)>을 보면서, 나는 '공의존'의 개념을 더 깊이 고민해보게 되었다.  과연 '공의존'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많은 치료서(therapeutic literature)에서 공의존 codependence이라는 말은 - 결코 여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한때 '여성적 역할'일반이라고 불렸던 것을 기술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공의존적 여성이란 타자를 돌보는 것을 스스로 필요로 하는 보호자(carers)이지만,그러나 무의식 수준에서는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적으로 자기의 헌신이 퇴짜맞기를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인가! 공의존적인 여성은 엽색가와의 관계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그녀는 그를 '구해 줄' 준비가 되어 있고 어쩌면 그것을 열망하기까지 할 것이다. 145 - 146쪽 

이 부분만 읽으면, '공의존적 여성'이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캐릭터를 정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기든스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로맨스를 정리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가 '공의존'이란 개념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건 바로 다음 대목이 아닐까 한다. 

공의존적인 사람이란 존재론적으로 안전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욕구를 정의(define)해주는 다른 한 사람 또는 일련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의존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헌신하지 않고는 자기확신(self-confidence)을 갖지 못한다. 공의존적 관계란 한 개인이 어떤 종류의 강박성에 지배되는 행동을 하는 파트너에게 심리적으로 묶여있는 관계이다. 148쪽 

 공의존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어떤 욕망이 있는지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추구하는 욕망이란, 결국 타인의 욕망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스타를 좋아하는 사춘기 여성들의 팬덤 문화로 환원될 수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차원도 아니다. 보다 미시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역동성, 우연성 등등이다. 특히 나는 영화 <대혼란>을 보면서, 자신에게 '일탈'의 캐릭터를 부여하는 '범생이'들을 공의존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싶어졌다. 이 캐릭터는 언급하면 누구나, 아하!하는 캐릭터일 것이다. 당신이 조금만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을 학창 시절에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혼란>은 그러한 캐릭터를 생각보다 잘 드러낸 영화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대혼란>의 주인공 앤 헤서웨이 그리고 그녀의 친구 비조 필립스는 백인 우월주의를 경멸하는 중산층 자녀이다. 영화는 이 두여성의 '일탈 게임'에 주목한다. 이들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역겨움을 표시하는 그들만의 장치로써, 힙합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려 로스엔젤레스의 '동부 지역'에서 코카인을 사보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앤 헤서웨이는 자신의 일탈에 시동을 거세게 걸어 줄 남자 프레디 로드리게즈를 만난다. 이 남자를 만나자마자, 힙합 흉내를 내며 껄렁대는 자신의 백인 친구들과의 놀이는 재미가 없다. 프레디는 네가 정말 여기에 온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계하지만, 이미 앤 헤서웨이의 마음은 이 동네에, 그리고 이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에 흡수되기를 갈구하는 쪽에 더 치우쳐 있다. 급기야 앤 헤서웨이는 친구 비조 필립스와 함께 프레디 로드리게즈가 있는 '16번가'라는 무리들에 합류하려고 '그들이 사는 '동네를 찾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전혀 다른 환경, 경찰들의 치안이 늘 이 동네를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내몰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자신의 삶에 부여된 '스릴'인 것이다.   

이미 스릴에 대한 갈망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 '16번가'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조건이 있었다. 주사위 게임을 하여, 나온 숫자만큼 남자들과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앤 헤서웨이는 망설이지만, 승낙하고 비조 필립스도 결정을 따른다. 하지만, 앤은 섹스 도중 자신보다 많은 숫자가 나온 비조의 아픔을 보고 그곳을 도망치게 된다. 학교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고, 진상 조사에 들어간다. 앤과 비조의 백인 친구들은 흥분하여 총을 든 채 '16번가'를 찾아가게 되고, 앤과 비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른다. 앤과 비조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순한 고양이가 되어 버린다. 진한 스모키 화장, 야한 옷차림, 누가 들으라고 하지라는 태도의 시끄러운 욕설이 채우던 영화 전반부와 달리, 창백하고 여린 두 여성의 모습이 영화 후반부를 채운다.  

앤과 비조의 '하위문화에 대한 잠입'은 앤서니 기든스가 '공의존적 인간'이라고 설명한 부분과 만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 현재 친구로 있는 사람들. 소위 '날라리'라고 하는 유형의 이 사람들, 그들의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사회가 간주하는 일탈적 문화를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체험하며, 자신의 삶에 지속시킬 용기가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추구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일탈적 인간'에 대한 추앙에서 비롯된 '스릴' 그 자체의 만끽?.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정말 자신이기를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가면 놀이?' '공의존'이란 개념은 후자에서 내가 표현한 '가면 놀이'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분석 장치로 다가온다.  이것은 기든스가 '허위적 정체성'이란 표현으로 기술한 인간의 유형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공의존적인 사람은 카슬이 본대로, 핵심 정체성이 미발달되었거나, 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고 외적 자원에 대한 의존적 애착에 기반하여 허위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인 것이다. 152 
 공의존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욕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152

 이 시선을 받아들인다면, 앤과 비조의 문화 체험에서 그들은 정말 그 문화의 깊은 곳까지 빠져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또래로부터 스스로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전략의 차원으로, 또 그런 '차이 전략'에 수반되는 '위험 게임'에 스스로를 던지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스며든 두려움을 덮어버리는 데 더 방점을 찍은 유형에 가깝다. <대혼란>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목은, 영화가 이 두 여성의 일탈을 연결짓는 장소에 있는 '16번가'의 주인공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캐릭터를 나름 세심하게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면과 행위의 어긋남 속에서, 결국 앤과 비조에게 상처를 주는 남자이지만, 앤과 비조가 자신들의 문화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는 앤과 비조, 너희들이 추구하고 싶은 게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고 있는 그 문화의 깊숙한 곳인지 질문함으로써, 앤과 비조의 문화 체험을 일종의 '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의존적 개념을 복습한다는 차원에서 내가 상상해본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공의존적 인간을 통해 우리는 날라리라는 유형의 인간들(예로 들면 <비트>의 로미 같은)의 '사회적 전술'을 생각해볼지도.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고민해본 삶의 한 단면으로 이해해준다면 고맙겠다. (가족과의 관계, 거기서 연유된 아픔, 학교 문제, 친구들과의 관계 등등에서 쌓여진 사회성의 문제들) 

# ' '앨리와 지나' , 너 정말 너였니?

앨리와 지나라는 두 여성이 있었다. 지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조용하고 말이 없는 차분한 여성이었다. 앨리는 지나와는 상반된 캐릭터다. 욕도 잘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어젯밤 만난 남자와의 섹스 경험담을 큰 목소리로 공개해도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지나는 그런 앨리가 부럽다. 그리고 앨리와 매일 함께 생활하면서 앨리의 캐릭터를 닮아간다. 어느날 잭이라는 남자가 지나를 보고 반하게 된다. 잭은 지나의 모습에 호감을 갖는다. 얌전한 척 하지 않고 과감하고 섹시한 모습,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은 영민하게 책임지고 끝내는 모습에 끌린 것이다. 지나와 잭은 사귀면서, 앨리 또한 그들 사이에 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잭은 지나의 과감한 모습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게 되면서, 지나에게 자제할 것을 부탁한다. 사이가 틀어진다. 그리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잭은 지나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지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소곳한 모습에 잭은 속으로 "너,정말 너였니?"라고 묻는다. 지나와 헤어진 후, 잭은 앨리를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갖게 된다. 자연스레 지나와의 이야기가 대화 소재로 나온다. 잭은 지난 번 만난 지나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잭은 너무나 놀랐다고, 예전에 알고 있던 지나가 아니라고 앨리에게 말한다.앨리는 웃는다. 그리고 잭에게 하나,둘 이야기를 꺼낸다. 지나와 사이가 안 좋다고. 앨리는 지나와 친해지면서, 그녀가 점점 자신을 따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에 기분 나빴지만, 어느 정도겠지하고 그녀는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새 지나는 앨리와 똑같은 캐릭터가 되고, 그때 잭은 지나를 알게 된 것이다. 앨리는 지나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잭은 앨리를 만나던 것이었을까? 지나를 만나던 것이었을까?  잭은 생각한다.지나는 앨리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스스로가 가지지 못했던 '차이'를 두드러지게 체험할 수 있는 그 기회를 잡았다는 차원이 절박했는지 모른다고. 앨리는 나름의 '문화 매개자'가 된 것이다(여기서 문화매개자는 부르디외가 설명하는 것과 다르다)  지나의 '날라리'놀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그런 사람들의 삶을 동경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 그런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든스의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는 당신의 그 순간을 뜻있게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그들이 추구하는 일탈, 방황. 과연 정말 그들의 것이었을까?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 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을 더 세밀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는 것이다.    

 

 덧붙임)

(물론 똑같진 않지만) 앨리와 지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체험했다고 기억한다면, 아마 당신이 바벳 슈로더 감독의 <위험한 독신녀>를 늦은 밤 여러번 봤기 때문일 것이다. 제니퍼 제이슨 리는 우리 시대의 '지나'로 나온다. (아, 추억의 이름이여..제니퍼 제이슨 리..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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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0-09-1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지나는 잭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요기서 "잭은 지나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이렇게 바뀌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9-11 13:12   좋아요 1 | URL
앗. 그렇군요. 큭. 고쳤습니다. 세심히 봐주셔서 감솨요^^

pjy 2010-09-11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덧붙이신 영화는 저도 봤습니다^^
영화속의 등장인물이 심하게 공의존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도 잠깐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부러웠던 친구의 극단적인?면을 그대로 따라해보려고 했었던....'날라리'놀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서로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게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겠죠?

얼그레이효과 2010-09-12 15:16   좋아요 1 | URL
네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