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트 마케팅 - 시장의 새로운 우상들 예영 현대문화신서 4
노르베르트 볼츠 & 다비트 보스하르트 지음, 고재성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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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한 지식인 노르베르트 볼츠의 1995년도 저서 <컬트 마케팅>중 일부를 옮겨본다. /믿음이 사라지면 스타일의 차이가 흥미를 끈다. 삶은 예술작품의 한 재료가 된다. 자기 연출(Self-fashioning)기술이 중요하다.이 말은 니체가 '미국인의 신념'이라고 말하던 것인데,곧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말한다.삶은 소비를 고급예술로 보는 끊임없는 자신의 노래이다.이러다 보니 우리는 유행과 여가시간 활용과 육체 숭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제 가치의 변화는 오늘날 철학자나 계몽가들이 증오하던 이를,곧 의식주를 의미 있게 다루는 것을 일컫는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사상들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다. -42쪽

추세 연구가들은 명명(命名)하는 사람들이다.다수의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이름이 붙은 다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볼 수 있다.그래서 흔히 추세는 발명된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는데,실제로는 이름만 붙였을 뿐이다.오늘날 추세 연구는 벌써 역사가 되었고 지난 몇십 년 동안 추세 연구가들이 퍼트린 이름이 '추세용어사전'하나를 만들 정도다.-45쪽

추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상징적으로 축약되어야 한다.보여져야 한다.곧 어떤 프로그램도 포함하지 않아야 하고 불확실해야 한다.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반이 안정되어서 개인의 주관적인 차원을 떠나야 한다.결정적인 작용을 해야 하는데,이것이 추세가 유행과 다른 점이다.-48쪽

'길거리 패션'이나 '독립 프로덕션'은 끊임없이 귀중한 창의력을 제공할 수 있고 도회적 삶의 느낌을 표현하고 여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문화'와 '반문화'가 대중화하는 시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100쪽

어떤 초감각적인 것을 감각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은 종교적 상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사실 마르크스는 상품세계를 종교세계와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분석한다.이를 통해서 그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다.곧 상품의 비밀은 절대 그 상품의 사용가치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상품은 단순한 소비를 위한 물건이 아니다. 상품은 어떤 구체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보다는 토템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원의 무언가를 구현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상품시장에 나타나는 생산품을 사회적 '상형문자'(Hieroglyphe)라고 불렀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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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10-0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떼~~~로떼~~~~로~~~~~떼! 승리 내 로떼~~~~!

하이드 2010-10-01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저도 이거 보고 퍼올라고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도 못 읽고, 야구 보고, 재방송 보고, 하이라이트 보고, 그제는 준우 홈런 백번 돌려보고, 오늘은 대호 홈런 이백번 돌려볼 기세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10-01 11:19   좋아요 0 | URL
하하하.^^

2010-10-01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성일.KINO.1995.5.영화의 지나간 100년, 키노의 새로운 101년.  

우리에게 1995년이 중요한 것은 세 가지 이유입니다. 그 하나는 영화의 한 세기를 맞이하는 축제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전쟁과 두 개의 혁명 그리고 수많은 우리 세기의 기록 속에서 영화는 그 영홈을 담고 살아남아 우리 앞에 선 것입니다. 그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안고 함께 건배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나 근심하는 것처럼 영화의 죽음을 맞이하는 뉴 미디어의 묵시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인공위성과, 디지틀과 비디오와, 케이블과, 게임과 인터랙티브와, hdtv  앞에서 산산히 사지절단 당하고 찢겨나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제 더 이상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자기 해체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고, 그것을 움직이는 논리는 전지구적 규모의 자본과 정치의 이윤추구라는 용서없는 법칙입니다. 

정성일.KINO.1995.7. 전략으로서의 영화의 개입 그리거 이데올로기로서의 영화. 

이제 영화는 자아가 없는 자본의 법칙에 따라 미디어의 속도 속에서 중심을 끊임없이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해관계는 친구와 적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생산해낸 질문은 소비되는 이해관계의 즉자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제 질문은 이해관계의 반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진실과 영화-시스템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위치할 것인가라는 입장에 관한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중략) 그 다음 영화에 맞서는 진영. 이들은 영화의 바깥에서 거꾸로 영화의 경계를 세우려고 끊임없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방에서 시도합니다. 이해관계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매우 비판적이고 때로는 세계관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를 경멸하고, 기이한 대중주의를 끌고 들어와서 영화에서 반 엘리트주의를 선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략) 더 나아가 영화가 지식과 결탁을 맺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언가 수상쩍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허무주의의 유행에 따라 반 엄숙주의를 내세워서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성찰과 진실까지도 한낱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 죽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질문은 종종 정치적이거나 아니면 권력에 관한 시도가 됩니다.  

정성일.KINO.1998.2. 희망은 유령이 아니다. 영화를 떠나가는 사람들 뒤에 남아서 누가 진정 영화를 위해 남을까. 

우리는 영화가 죽어가고 있는 시대에 (영화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불현듯 영화가 모든 유행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갑자기 직업을 바꾸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날조된 전문가들이 사방에서 유령처럼 출몰하고, 그들이 영화에 대해서 강의하고 별점을 주고, 심지어 이리저리 참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문학이나 연극, 또는 미술에서 우리는 그런 기이한 현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영화와 록 음악 만이 90년대에 전문가를 과잉생산하는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들이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정말로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응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영화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본에는 노동을 끌어들이는 원심력이 존재한다는 베른슈타인의 지적은 더 없이 적절한 것입니다. 영화산업은 더 빨리 영화를 소비하기 위하여 더 많은 영화담론들을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기꺼이 언제나 동조하는 노동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건 생산과 소비의 이안삼가경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전략은 언제나 느리게, 더 느리게였습니다. 그것만이 소비의 경주로 말려든 그 가속도의 생산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에로 돌아와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런데 갑자기 외부적인 이유로 영화의 소비의 속도가 방향을 뒤틀고, 그 토대의 변화에 의해 감속현상을 일으키는 산업 속에서 영화담론들의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이상의 이윤을 창출하지 않을 때 여기에 남는 것은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더 이상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고, 더 나아가 권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할 때 죽어가는 영화를 위해서 그 누가 남을 것인가라고 다시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정말로 어떤 형식으로건 영화가 산업과 서로 함께 기생하고 동거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이상 영화에서의 순수주의란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건 소비되기 위하여 우리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그것을 통해서 퍼즐을 풀고 남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서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영화의 소비주의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정성일.KINO.1998.4. 가난한 영화보기를 위하여 세가지 희망, 그 희망의 원리에 관하여. 

우리는 영화관 앞에서 망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문화이지만, 영화관은 산업입니다. 당신이 영화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 입장료는 분명히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 아니면 그 누군가가 낮에 흘린 소금의 댓가를 치루고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거리를 갖고 비판과 반성의 사유로 다시 물어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화관람에 대해 작은 성찰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선택입니다. 자신의 선택의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거기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영화를 보러가는 행위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중략) 두번째는 영화를 보는 기회의 상대적 박탈입니다. 정말로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영화를 모두 볼 수 있을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영화를 볼만한 좋은 영화가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정말로 소비의 속도에 휘말려든 나머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의 차원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며 더 나아가 현실로부터의 상대적인 박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화의 속도는 좀 더 늦춰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본 영화를 충분히 다시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삶 속에 그 영화의 경험이 새로운 정서를지닌 자세로 창조되어지도록 이끄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영화로부터 이제 다소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일상생활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의 소비의 속도를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영화관 앞에서 망설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본 영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그 속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 위치로부터 영화를 다시 물어보는 것입니다. 영화는 언제나 현실로부터 일정정도 멀리 떨어져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행위가 현실로부터의 꿈이면서 동시에 각성이 되기 위해서 그것은 언제나 으미있는 체험이며 더 나아가 현실로부터의 거리 지우기를 통해 얻어지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구성이며, 현실 곁에서 얻어지는 세상의 미적인 형상들에 대한 발견의 순간이어야 합니다. 

정성일. 로드쇼.1991.3. 거짓말장이들에 관한 두세가지 경향.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며, 그래서 영화에 편들기로 결심한 이들의 진영에 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주변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잡귀들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영화를 여전히 구경거리 잡동사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거나 심지어 잡담에나 써먹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첫번째, 여기에 해당하는 잡귀들은 이런 식으로 유혹을 시작합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비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그럴 때면 영화등은 사운드 트랙을 틀어놓고 험프리 보가트나 잉그리드 버그만(아마도 <카사블랑카>를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이런 넋두리를 앵무새처럼 늘어놓아도 질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별일이다)을 떠올려보자. 미안하지만 떠올릴 것이라곤 별로 없는 사깃꾼들의 거짓말이 시작됩니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비오는 날에도 카메라를 들고 흙탕물 속에서 도대체 나는 왜 영화를 하고 있는가라고 진지하게 고통받는 영화현장의 시네아스트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두번째, 영화에 관한 인명사전을 열심히 외우고는 마치 영화를 모두 알아버린 것처럼 수다를 떠는 잡귀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영화광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자본은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매스컴의 허수아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불행한 영화광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영화는 지식이 아니며, 더구나 인명사전 따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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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날 때마다 영화감상 / 세상일 간접경험 '기쁨' 남미숙 (약사 - 나의 여가). 한겨레.1994.6.3.13면. 

나는 시간만 나면 영화를 본다. 아니 그보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시간을 쪼갠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사람 사이에 부대끼고 힘들 때는 혼자 영화관을 찾는다. 물론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도 영화를 함께 보자는 제의를 많이 한다. 소규모 영화상영 클럽이나 비디오방도 토막시간에는 자주 찾는 편이다. 내가 영화보는 것을 취미로 갖게 된 것은 영화광인 친구 덕분이다. 그 친구는 체력이 허용하는 한 하루에도 몇편씩 영화를 볼 뿐 아니라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은 너댓번을 보고도 양이 차지 않아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지니고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다. 이 친구에 끌려다니며 '세뇌' 당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 것이다. 요즘은 잡지를 보거나 서점에 들러도 영화관련 코너를 먼저 돌아보게 된다.  

막동이 시나리오 당선작 제노사이드 쓴 안재훈 씨. 한겨레.1994.6.1.16면.   

"처음 타란티노를 알게 됐을 때,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고요. 야, 너랑 똑같은 자가 또 있구나." 제1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 (제노사이드)의 안재훈(25)씨가 타란티노처럼 비디오가게 점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은 타란티노에게 그랬듯, 안재훈씨에게도 학교였다. "이름난 영화 찾아다니며 보는 영화광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 있나요? 비디오 가게만 가도 가슴이 뛰는데요. 장르 가리지 않고 아무 영화나 좋아해요." 

예체능계 남자수석 소영준군. 한국일보.1996.12.6.38면. 

소군은 입시공부에 매달리면서도 한달에 한번은 꼭 영화를 보러 갔고 토요일 하오 등 여유가 있을 때는 반드시 비디오로 영화 감상을 했다며 스스로 영화광이라고 말했다. 영화학과가 설치된 대학을 지원할 생각이다. 

일 까지 찾아가 관람 '영화광'.문화일보.1997.9.24.24면. 

서른 세살의 독신남 김재용(서울 구로구 독산동)씨. 평범한 회사원인 그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한 두 편의 비디오와 케이블영화를 보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일본 위성방송의 영화까지 놓치지 않는 영화광이다. 특히 일본영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번 여름휴가도 도쿄로 갔다 왔다. 

여고 3년생 김현정(경기도 분당시 야탑동) 양. 반에서 1,2등을 다투고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뜻의 '범생이'로 불리는 평범한 여학생이지만, 입시 스트레스를 영화로 푸는 영화광이다. 할리우드영화는 시시해서 안보고 유럽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는영화잡지를 정기구독하며 가끔씩 친구들과 토론회를 갖는다. 부모님의 권유로 대학진학은 영화와 무관한 학과를 택할 예정이지만 언젠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외국의 난해한 아트영화들에는 관객이 들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같은 실험성 높은 우리 영화는 외면당하는 풍토도 서구 우월주의나 명성에 집착하는 영화보기 풍토를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케이블 영화채널 캐치원 주최의 제1회 공포영화제를 기획했던 송혁 과장(캐치원 마케팅팀)은 "계보를 줄줄 외우는 등 영화보기를 지적 과시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사이비 마니아들도 있다"고 말한다. 

소설가 이제하씨.이 세기의 인물탐구 27. 서울신문.1993.5.5.11면. 

 군제대후 조각과를 4학년 1학기에서 그만두고 서양화과 3학년에 편입, 그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델보를 비롯, 뭉크와 스텡 프란시스 베어컨에 빠져있었고 영화에 대해서는 한때 소형영화클럽을 만들만큼 영화광. 요즘도 시간이 날때마다 청계천에 들려 레이저디스크를 복사해온다. 비디오테이프만 8백여개. 좋아하는 작품은 소련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꼽고 있다.  

예술인의 고민 / 윤대녕 소설가. 서울신문.1994.12.27.12면

오랫동안 귀로 들어오던 레오 카락스의 영화 <나쁜 피>를 보았다. 영화 비평가가 아니므로 주제넘은 소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나는 예술, 대중, 권력이라는 해묵은 자기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 폭발적인 문화수요가 일어나면서 이른바 매니아 집단들이 형성되고 있다. 영화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컴퓨터 통신을 통한 동호인 모임이 있는가하면 미개봉 필름만 상영하는 소수 단체도 있는 모양이다. 쉽게 말하면 일반대중의 문화감식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는 얘기다.'나쁜 피'는 말하자면 개봉되기 오래전부터 매니아 집단 사이에서 돌려보곤 하던 그런 영화 중의 하나다. 

(중략)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들의 표정은 대개가 석연치가 못하다. 난해하다는 뜻일 것이다.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 장르라는 영화가, 거꾸로 가장 예술적이라는 상업적 용어로 포장돼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형국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예술 이데아 품목의 필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비디오 함께 봅시다. 한겨레.1992.3.13.21면. 

요즘 도시인들의 새로운 여가풍속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방콕파'란 유행어가 있다. 휴가 때나 쉬는 날 무얼하느냐는 물음에 혼자 편히 감상할 수 있는 매력에 흠뻑 빠진 '비디오광'가운데 상당수는 날마다 한편이라도 안 보면 잠을 잘 수 없는 '비디오 중독증'의 경지에 이르러 생활의 리듬을 잃기도 한다.  

김성곤 교수의 영화 에세이. 박덕규의 책읽기.국민일보.1994.9.9.10면.  

영화 얘기만 나오면 주인공 인적 사항에 영화감독의 다양한 경력에 영화 유파까지 얹어 소감을 피력하는 비디오광들을 자주 만난다. 영화라면 나도 논리적인 감상문을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이 비디오광들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우선은 그들의 시청량을 못 따르기 때문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먄 그들이 그 폭넓은 시청량을 무기삼아 나처럼 일상적인 차원의 영화팬들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독자공동체의 길잡이.김영진의 <미지의 명감독>.씨네21.1997.11.4-11. 82쪽.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언론에서 부추겨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데이비드 린치와 타르코프스키는 다들 보러가면서 미클로시 얀초나 프리드릭 소 프리드릭슨의 걸작은 왜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일까?  혹시 우리의 영화문화는 블록버스터건 예술영화건 유행만 따라가고, 우리의 영화광은 영화를 '지적 과시'의 무기로만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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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1997.1.). 비디오의 헤쳐 모아 영화 만들기. 월간 말.248-249. 

248쪽 

이제는 숨은 비디오 찾기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게다가 비디오시장의 위축은 숨은 비디오가 나올 수 있는 구조조차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 올 한 해동안 당신 주변의 동네 비디오 가게 중 사분의 일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비디오들은 영화관에서 개봉된 다음에 찾아오고, 미개봉작들은 천편일률의 따분한 액션영화와 에로영화가 차지한다. 그리고 더 이상 속아서(?) 숨은 비디오 걸작을 내지 않을 만큼 비디오 업자들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세련되어 졌다. 자. 이제는 비디오 가게 구석의 먼지를 뒤집어쓰며 없는 비디오를 찾으려고 시간을 보내는 대신 눈을 돌려보자. 우선 당신 방안에 있는 비디오 테크를 다시 들여다보실 것. (중간) 비디오는 당신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디오의 새로운 제품이 나올때마다 광고에는 온갖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으스댄다. 정작 당신이 손가락으로 하는 일이라곤 네 가지밖에 없는데, 비디오에는 오디오와 달리 명품이란 없다. 말 그대로 소모품이 그 운명이다. 그래서 수명을 다하기 전에 온갖 기능을 모두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기계다.  

249쪽 

우선 당신이 좋아하는 명장면 열 개를 뽑아 보자 그리고 그 장면이 나온 비디오를 빌린다. 이제부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다소 번잡스럽더라도 창조적인(!) 작업이다. (중략) 문제는 이 영화들을 얼마나 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영화를 읽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세대들의 마음과 정서를 일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중략) 비디오라는 기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며 그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숨어 버리는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를(우리는 한 번 본 영화를 과연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보존하고, 반복시키고,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속도를 뜯어내고 멈추고 더 나아가 다른 속도로 만들어 낸다. 비디오가 영화를 보는 태도에 가져온 가장 혁명적 전환은 영화를 가지고 다시 우리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비평가 중의 비평가라고 불리운 앙드레 바쟁이 우리에게 해주는 충고,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말 중요한 일은 좋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일이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비디오로 당신이 좋아하는 장면의 비밀을 훔쳐내고,산산조각 내버린 다음 우리 방식으로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잔인무도한 시체부검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 영화를 다시 한 번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성일(1995.12). 남한에서 예술영화를 본다는 것. 월간 말. 240 - 241. 

240쪽 

1995년 남한에서 '예술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또는 '예술영화'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그 이상한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일정부분 새로운 상업주의와 결탁한 협잡은 아닐까. 관객들은 왜 '예술영화'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을 눌러 참아가면서 소비하는 것일까. 조금 과장해서 '예술영화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가능한 것일까. 올해 비디오시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경향은 '예술영화'라고 분류되던 영화들이 갑자기(!) 지금까지의 금기사항을 돌파하길도 하듯 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오히려 여기서는 1995년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는 이미 저기에서의 물신화된 예술영화 비디오를 물어 볼 생각이다. 우선 예술영화는 그렇게 고상하고 품위 있는 용어가 아니다. 예술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상업영화의 범주이다.  

(중략) 영화는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며, 배급구조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전후 유럽영화들은 할리우드의 외곽지역, 또는 변방, 더 솔직히 말하면 시장의 여백 사이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유럽영화들이 자신의 관객으로 선택한 것은 유럽의 반 할리우드 성향의 학생들과 지식인, 그리고 고정관객들과 유럽 바깥의 유럽성향의 '속물' 엘리트주의에 빠진 엄숙주의 관객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영화매스컴들이 부추기기 시작했다. 

241쪽 

중요한 것은 유럽영화의 한 장르로서 '예술영화'가 산업적으로 발명(!)된 사실이다. 실제로 유럽의 '예술영화'는 정말 예술 지향적인(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영화들이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와 고급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중의 일부관객들이 좋아하는 변덕스러운 취향에 따라 포장되는 패션 영화들이다. 그건 마치 지식조차도 철따라 갈아입는 의상처럼 바뀌는 전후 서구 소비사회의 속도에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재고처리를 서두르는 광고문구이다.  

(중략) 더욱 위험한 것은 유럽 '예술영화'의 한국적 모방들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중독은 더욱 치명적이기조차하다. 유럽 '예술영화'에 빠져든 것은 대부분 영화광들이고, 그들은 우리 시대의 영화유행을 이끌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을 가치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또다른 편향과 종속에로 뛰어드는 위험한 불장난이다. '예술영화' 비디오들은 그 자체로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의 숭배와 물신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반성적 의식을 요구하는 자아비판의 과정이다.이 새로운 상업주의의 경향이라고 부를 '예술 영화'는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 1백년 내내 싸워야 할 또 다른 우상숭배이다.  

정성일(1995.9). 우리가 찾아야 할 남한의 컬트영화들.월간 말. 244 - 245. 

244쪽 -245쪽

흥미 있는 것은 컬트영화가 태어나는 과정이 나라마다 서로 다르며, 그 과정이 그 나라의 컬트영화를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컬트 영화는 주로 대학가 근처의 심야 영화관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대학생 문화이며, 여가의 문화이며, 제도 내의 반제도이며, 보호받는 일탈이다. 프랑스에서 컬트는 시네마 데끄로부터 태어난다. 그것은 이미 제도이며, 역사이며, 문화이며, 자가당착적 저항이며, 보수적인 싸움이며, 개인적인 탐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244)는 심야영화와 시네마데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트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세워졌다. 그것은 영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디오를 통해서이다. 심야의 교회 십자가만큼이나 많은 비디오 대여점의 형광간판이 유령처럼 섬광을 발하고 연간 1조1천억원에 달하는 비디오들이 동네 구멍가게 비디오점의 진열대를 장식한다. 너무나 많이 쏟아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중략) 양적 전화는 질적 전화를 가져온다는 옛 선현의 말씀은 여전히 옳다. 구경거리로 영화를 보던 비디오 마니아가 어느새 영화광으로 '전화'하여 이제 참고서적까지 들고 비디오 대여점을 순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찬양의 대상을 찾기 위해서. 이것은 축복받은 결말일까? '여전히' 아니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의 컬트문화(이런 말이 허용된다면)가 일정 부분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컬트논쟁가들이 컬트영화의 정의를 내리면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영화광들이 컬트영화라고 발견하는 것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국의 영화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광들이 컬트영화로 맞서려는 것은  전세계적 규모의 영화문화(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가 아니라, 바로 자국의 문화와 영화산업의 토대 위에서 자국의 영화산업 양식과 문화, 공식 역사, 교과서화된 영화에 맞서려는 것이다. 컬트영화광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화의 체제에 맞서는 '반체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지, 결코 국적불명의 유행에 휩쓸려 사대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략) 마침내 영화광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대주의자가 되었고,바깥의 영화를 끌어들이는 첨병이 되었으며, 바깥에서 바깥과 싸우는 국적 없는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토대에 대한 비판없이 남한의 컬트영화 현상을 공격하는 것은 정말 비겁한 일이다.   

정성일(1998.7). 어제의 컬트는 오늘의 컬트가 아닌데...월간 말. 228-229쪽. 

228쪽 

한국에서 컬트(cult)영화라는 말은 그 이상한 이름짓기의 주해가 만들어 내는 소란스러운 표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우리는 이 말의 실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이 힘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영화에서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유포되기 시작한 데 있다. 그런 가운데 컬트라는 말은 제도에 대한 저항의 함의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일종의 비밀결사체와도 같은 자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저항과 자장은 유행과 광고와 카피로 전이되었다. 모두들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이 말의 몸을 빌려쓰고 스스로를 변장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세했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두 개의 말은 잡종교배하였고 컬트는 점점 더 많은 주석을 갖기 시작했다. 오래된 우화의 교훈처럼 너무 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컬트는 그 모든 영화의 다른 이름이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이제 유행은 지나가고 컬트라는 말의 자장은 그 힘을 잃었다. 

안정숙.특정취향 관객을 위한 영화 장르 아닌 관람방식 지칭, 컬트영화란 무엇인가. 한겨레.1992.10.24.9면. 

(전략) 그러나 정성일씨는 "엄격하게 말해서 '컬트영화'는 없다. 이런 영화관람방식의 '컬트영화현상'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블루벨벳>이 문화적 풍토, 토양이 다른 서울의 대극장에서 상영될 때 그것을 컬트영화라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소수의 광적인 관객의 적극적인 관람이 '컬트영화'의 요건이라면, 이 용어는 한국적 상황에서 <파업전야>같은 영화에나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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