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입문'이란 표현이 가능하다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두 학자가 있다. 한 명은 레이먼드 윌리엄스, 다른 한 명은 스튜어트 홀이다. 최근에 교보문고에 들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가 출간된 걸 확인했다. (의미의 '과장'이 좀 필요하겠지만) 난 이 출간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문화연구하는 친구들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텍스트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을 좀 풀어보자면, 꼭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거쳐야하는 필요성을 모르는 '새로운 문화연구 세대'의 도래. 이것이 지금 '문화연구의 흐름'이다. 오히려 요즘 문화연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는 과거 '레이먼드 윌리엄스 급'의 텍스트, 그 자리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들어왔다고 본다.  

왼쪽에 링크를 걸어놓은 [New Cultural Studies]란 책은, 바로 '새로운 문화연구 세대의 도래'를 알리는 국외 텍스트이다.(아직 번역되진 않았다.) 게리 홀이라고 하는 신진 문화연구자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이 컴필레이션 텍스트의 서문은 '지금' 문화연구 세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채워져있다. 이 서문의 내용을 구성하는 가장 큰 기준에 문화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한 '버밍엄 학파'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문화연구의 기초를 닦았던 이들, 이미 문화연구의 '판테온'에서 '명예고문'으로 있는, 호가트, 톰슨, 윌리엄스, 홀 등등등.

그러나 이 서문에는 '문화연구'하면 으레 떠오르는 사람들의 업적 나열이 없다. 요즘 문화연구자들은 분산되어 있고, 각자가 옹호하는 이론가 /이론도 다르다. 목차를 보면, 맥루언이나 윌리엄스 대신 키틀러가 들어가 있고, 문화연구- 정치를 담당하던 스튜어트 홀의 자리엔 지젝, 아감벤이 들어가 있다. 어쩌면 이건 문화연구 특유의 빠른 '흡수력'이란 장,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인지 모른다. 고로 뉴 컬쳐럴 스터디즈란 책의 개정판이 몇 년 후에 나와, 내용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자리에 다른 이론 /이론가들이 들어가 있다는 건 전혀 상상 외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은 단순히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이론을 옹립하려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 시대의 문화연구자들이 더 이상 과거 '버밍엄 학파'의 유산에 구속되지 않은 채, (과거 책을 읽은 내 기억을 좀 되살려보자면) '문화연구자'로 정의될 수 없는 문화연구자들, 이 시대의 흐름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로 나타나는 듯하다.   

(책의 표현처럼) "버밍엄이여 영원하라!, 버밍엄은 죽었다"  의 시대, 이것이 지금 문화연구의 시대이다.

이 맥락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누군가에게는 '유품'으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남을 것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10-09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1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킬레우스 2010-10-11 11:02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만 봐도 숨막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AYLA 2010-10-0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술대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10-09 08:04   좋아요 0 | URL
징그러워요 정말.ㅋ
 

 

 

MBC 스페셜을 보면서, 온라인의 배설보다 무서운 건, 한국 사회 내 '학문'에 대한 인식이리라. 이제 한국사회는 80퍼센트 이상의 대학졸업자가 아닌, 80퍼센트 이상의 '대학원 졸업자' 사회에 진입할 게 될지 모른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 인가라는 반문이 나올 듯하지만, 여기가 한국이니까 가능하리라 본다. 교회를 안 다녀도, 교회 사정을 신도보다 잘 알고, 인도 여행을 가지 않아도, 인도 사정을 그렇게 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나라 아니었는가. 노르베르트 볼츠가 말한 '정보미식가'들의 세상에서, 정보는 경험을 부정하고, 경험을 한 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우리 시대의 총이 되었다. 정보미식가들에게 상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상식은 (그들의 정보에 의해) 구성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성일(1996.2). 영화에서의 세 개의 삼각형, 사랑과 작가주의의 시장 속의 근심. 키노. 

영화에 관한 '팝콘'지식이 온 세상을 설치고 다니며, 꼼꼼한 성찰과 그로부터 지혜를 나눠주는 철학은 능멸당하고,장사꾼들과 싸구려 매스컴이 결탁하여 거짓된 흥분을 일거에 창조(!)해내고, 온갖 기업들이 영화에 뛰어들었다는데도 한국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다는 비명이 터져나오고, 영화 전도사들은 신앙처럼 영화를 내세워 혹세무민하지만 거기 영화를 위해 순교하려는 믿음은 없으며,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담론만이 우리 곁을 유령같은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영화라는 구경거리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근심에 대한 공격에 남아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나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공격하는 방관자들입니다. 영화는 이미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뉴 미디어의 시장 속으로 뻗어 나아가,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사회 전체가 영화라는 구경꺼리와 서로 겹쳐고 옮겨져 더 이상 경계를 나눌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산업의 중심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정성일(1995.8). 살아난 영화시체의 여름 밤, 또는 이레이저 시네마.키노. 

영화가 종합예술이었던 적은 없으나 언제나 종합적인 노동이었던 것은 영화의 시간과 관계한 것입니다. 치밀하게 나뉘어진 배급 구조의 순환체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시장의 분할은 영화(들) 사이의 영화관을 내세운 싸움입니다. 여름은 여기서 특별한 시간입니다. 영화에서 여름은 계절이 아니라 시간으로서의 시장입니다.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여러가지 형태의 휴식(방학에서 휴가까지)이 주어지고,집단적인 휴식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영화관을 확장된 시장을 형성하고, 영화는 휴가를 소비하는 상품으로 우리 앞에 치욕스럽게 열거됩니다.  

정성일(1996.8). 행복의 원리로서의 영화,영화에의 위협으로서의 불행.키노.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영화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비디오라는 물적 형태 속에서 아주 끔찍할 정도로 훼손당해 있었습니다.우리는 매일 불량품에 지나지 않는 비디오를 보며 발견과 감동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으며, 그나마 발견된 비디오들은 매우 불합리한 유통구조 속에서 빠른 속도로 멸종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비디오를 통해 자기증식을 하고 대중 속으로 뻗어나아가는 대지 속의 줄기이며 영화광들의 기억 속에서 부활하는 영원불멸의 행복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화를 배신하고 원본의 감동을 증발시키고 그래서 감동의 순간을 회의하고 의심하며 기억 자체를 망가뜨리는 기계장치로 유포되고 있음을 지켜보는 정말 참기 힘든 '비디오 감상'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