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 1 -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분위기? 김수현이거나, 임성한이거나 

김수현 드라마의 그 조근조근한 태도로 삶을 되뇌이는 대사 맛 혹은 임성한 드라마의 인물들이 뜬금 없이 내던지는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 그것을 기괴스럽게/ 속물스럽게 내는 맛. 박해천 선생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읽으면서 이 두 맛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 두 맛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아파트'란 놈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 당연한 담론의 장소로 늘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또 그 이야기야?"하지만(여기에는 '막장'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며 우리의 고단한 삶을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려는 현대인들의 반복된 일상이 포함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새 '또 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현실 속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 우리는 이를 "한국 사회의 무엇"이란 말로 제법 유식하게 포장하여 하룻밤을 지샐 준비가 되어 있거나, 또 누군가가 들려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에이..말도 안 돼"라는 불신 섞인 반응과 함께 그 이야기를 더 믿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저자는 아마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감수성을 지닌 것 같다. 책을 읽어 보면 저자가 선택한 시선들은 저 삶 속에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이 한국의 / 도시의 / 서울의 이야기가 '반복의 재미'를 주고 있음을 저자 본인이 알아채고 말하는 듯한 '경험의 눈'을 가졌다. 그 눈으로 그려낸 이야기. 이것이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분위기다. 

 

 

# 2 '1 픽션'의 효과에 대한 아쉬움

좀 에둘러가는 설명을 버리고, 이 책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간략하게 읊조리자면, 저자는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내던지고 그에 대한 해법을 구해가는 여정을 담고"(7)싶었다 한다. 우선 이를 위해 '가짜 자서전' 혹은 '허구의 회고담'이라는 글쓰기-형식을 시도한다(이는 '1-픽션'이라는 챕터의 내용을 채운다). 이 형식을 이끌어가는 행위자는 "1960년대 초반 완공 당시의 마포아파트를 바라보던 항공 카메라의 시선, 반포에서 압구정을 거쳐 잠실로 이어지던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1970년대 후반 이후 최근까지 강남의 아파트에 거주해왔던 1940년대생의 강남 1세대, 그리고 최근 고급 가전제품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각광받고 있는 꽃무늬 장식, 이렇게 1명의 인간과 3개의 비인간"(8)이다.   

저자는 "3개와 1명의 행위자들 뒤로 숨어"(8), "그들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10)라는 표현으로 저자 자신의 시선을 '수줍게' 서문에서 예고하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숨기 효과'가 그렇게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 들진 않았다. 인물의 회고 속에 그리고 비인물의 '의인화된' 시선 속에 들어간 '저자의 그 방대한 지식'이 저자가 택한 여러 소설의 구절과 엮이어 나는 글 속 내음이 군데군데 공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자가 조직해놓은 그 지식의 구성도가 주는 위압감은 '화자'의 생생한 맛을 잃어버리게 하는 효과로 나타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가상의 입'을 빌릴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그것을 신경쓰며 지식을 편집할 때 쓴 에너지(설정된 가상- '화자'의 입에 알맞게 배치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하는 에너지)로 더 새로운/섬세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면 좋았을 걸.  

저자는 가상의 화자들을 설정함으로써 아마도 그 화자들을 둘러싼 진부한 담론들을 각개격파하고, 이로써 아파트에 대한 그리고 아파트를 관통하는 시각 문화에 대한 제 3의 관점을 설명/발굴하고 싶었는 듯 하지만, 읽는 사람이 '가상-화자'라는 주체에 대해 의식을 하게 만드는 독특함의 수준은 그리 높게 평할 수 없었다. 즉, 1명의 인간과 3개의 비인간의 입을 빌려, 저자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싶다는 솔직함, 그리고 당연히 독자들도 그 형식을 빌어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는 상식적인 이해는 이 책을 여행하기 전에 모두가 따르는 여행의 규칙임은 뭐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와 함께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대감 즉,저자가 실험적으로 선보이는 그 가상-화자들이 '당사자'의 입장에서 내는 독창적인 목소리, 그것의 재현이 가능할까라는 기대감 차원에선  그것이 그렇게 돋보이지는 않았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한땀 한땀 뜬 '1-픽션의 형식이 챙기고 싶어하는 효과'에 대해선 그 정성 만큼에 비례하는 인정을/공감을 표할 수 없었다. 

 

 

# 3 디자인의 정치학/사회학이 건네는 몇 가지 메시지들 

 3.1 '지배의 미학'을 간파하기 -  계획과 구성, 도시 생산의 언어

 그러나, '1 픽션'의 형식-효과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할 만한 저자의 시선을 채우는 내용, 그것에서 새어 나오는 디자인과 사회적 관련성에 대한 저자의 문화학적 혜안은 (문화연구가 늘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의 문화가 (끊임없는 해석과 규정 속에서) 늘 자극 충만한 그리고 재미있는 것임을 알려주는 통로가 된다.  

"지배는 그 자체의 미학을 가진다" - 마르쿠제 

우선 저자의 시선에 동참하고 싶다면 당신은 간단한 워밍 업 정도는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책이라면, 저자가 참여했던 단행본 기획서 중 <한국의 디자인 02 -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현실문화연구,2008)에서 <공전하는 파편들 / 80년대 시각문화에 대한 몇 가지 기억>정도는 읽어주면 좋다. 저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사회문화사적 관점을 빌어 아파트의 특수성과 한국 사회의 맥락을 연결짓는 언급을 자주 하는데, 그 내용을 좀 더 깊이 나누고 해석해보고 싶다면 권유할만한 글이다. (나도 이 글의 도움을 얻었다) 저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시작하면서 도시 공간을 둘러싼 계획, 그리고 그 계획을 관장하는 건축가, 그 의미를 해석하는 비평가, 또 그 건축가와 비평가가 무시할 수 없는 국가 /사회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계획'과 '구성'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체제. 여기에 저자가 본격적으로 건드리려는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조건이 더해지면서 저자는 '계획'과 '구성'이 단순히 도시를 가꾸는 '디자인'적 언어를 넘어, 지배의 언어로 한국의 아파트에 연관되어왔음을 이야기한다. '지배의 미학' 그것은 '디자인의 정치학'으로 설명할/ 간파할 수 있는 상징이다. 우리가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느꼈던 그 '일치단결'에 대한 소스라침을 계속 곱씹어 본 적이 있었다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디자인'의 언어에 정치가 들어간다는 것이 전혀 이상할 리 없을 것이다. 아파트는 집단, 집중, 집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경제 개발'의 진취성을 알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아파트에 거주하게 될 사람들 자체를 '모델'로 삼아 한국의 근대화가 더욱 발전되어야 하는 당위를 계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3.2 디자인의 사회성, 배출되는 문화  

 저자는 한국의 정치사 속에 내포된 정치 기획적인 디자인의 언어, 그것이 구성한 도시상 속에서 한국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부딪힌 사물 그리고 그 사물에 밀착된 디자인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마치 장 보드리야르의 <사물의 체계, 1968>를 연상하게 만드는 저자의 '구성된 눈'은 한국 사회가 집착해 온 '스위트 홈'의 욕망을 집 안에 배치된 사물 각각의 특성을 설명해가며 끄집어낸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시각 문화라는 관점 속에서 거울/창(窓)의 의미, 베란다의 의미, 텔레비전의 의미, 세탁기의 의미, 욕실의 의미, 화장실의 의미, 거실의 의미 등등에 대한 설명을 해 나가는데, 여기에는 도시사회학,가정학,문화연구,역사학,여성학 등 다양한 학문 분과가 한 번씩은 밟아 나갔던 한국 근대화 과정과 주거 문화의 연관성에 대한 학술적 성과 참조, 그리고 도시성을 주제로 한 소설 구절들과의 조우 과정이 개입된다. 특히 저자가 신경 쓴 부분은 한국-서울-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이 섞는 생활 언어가 소설가 특유의 사색으로 조명된 몇몇 소설 구절의 인용, 그것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는 박완서의 <서울 사람들>, 정이현의 <특별 과외>, 김영하의 <이사>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서울을 살아간다는 것의 심정을 두텁게 표현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2의 내용과 유사할 수도 있지만) 저자가 의도한 실험성일 수도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인문/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인용하면서 그 소설이 가진 깊이를 도구적으로 채용하는 부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 소설의 구절 각각이 갖는 공감과 저자가 이런 소설 구절이 갖는 삶에 대한 진득한 성찰에 기대어 선보이려는 또 하나의 효과에 대한 공감은 읽으면서 구분하고 싶었다.  

다만, 저자가 풍부한 참조를 통해 '스위트 홈'을 구성해 온 사물의 체계를 해부하고, 각 사물의 기능과 상징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역사적 맥락과 성실하게 잇는 작업은 '디자인의 단독성'?(적당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이 아닌 '디자인의 사회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디자인의 사회성'은, 즉 사물과 함께 하는 디자인이란 단순히 사물의 사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문화적 상징을 돋보이게 하며, 무엇보다 그 사물과 공존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특징과 늘 관계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관계가 인간의 문화를 배출시킨다.  이러한 '디자인의 사회학'은 인간의 감정을 (아파트의 기능과 함께)/ 동일한 형태의 아파트를 '구별 짓게' 장식하려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 방식이 된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아파트는 '재산 증식'으로서의 장소로 늘 경제와 인간 도덕의 틀 속에서 뻔한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더 깊이 아파트의 문화적 의미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아파트에 투영해 온 실천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다. 그 사례들이 하나, 둘 보여지면서 하고 싶은 아파트에 대한 저자의 변은  아래의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옮긴이 :박해천의 말을 전하는 가상의 화자)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독특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노력했고,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67)

   

 3.3   디자인과 사물의 친밀성, 그 사이에 있는 인간 욕망의 내밀성 

 '디자인의 정치학'을 통해 지배의 언어를 간파하고, '디자인의 사회학'을 통해 아파트를 구성하고 있던 한국 사회 내 '스위트 홈'에 대한 욕망의 발견이 사실 저자의 독창적인 작업 성과라고만 볼 수 없다. 일찍이 린 슈피겔, 로저 실버스톤, 에릭 허쉬, 데이비드 몰리, 소냐 리빙스턴, 아르준 아파두라이 등 많은 미디어/문화연구자들이 '가족'의 상징성을 구성하는 사물 연구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 당시 근대성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공적 영역/사적 영역의 구분, 발달된 소비 문화와 이와 유관한 가족 내 정체성의 재구성 등이 한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일상문화연구의 뜨거운 테마로 떠올랐다. 이 연구 과정은 가령,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물이 곧 미디어이며, 그 미디어가 집 안에 어떻게 배치/활용되는가가 곧 그 집의 이미지, 그리고 그 집을 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가족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보여지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이론화 작업 및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더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이 연구자들의 책을 구해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개인적으로 로저 실버스톤과 에릭 허쉬가 기획한 <Consuming Technologies, 1992>를 권하고 싶다.) 

이 연구들의 성과가 집적되면서, 그 집적된 결과물들의 혜택을 독서 과정을 통해 누려본 결과를 잠시 공유하자면 우리의 집을 구성하는 사물들, (학술적으로는 주로 '홈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을 쓰는데) 그 사물의 기능과 상징을 매개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사물, 사물을 휘감는 디자인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디자인의 상호관련성'이라는 그 진부한 메시지를 넘어 디자인이 어떻게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특수성을 닮아가려 하는지, 인간은 사물과 사물의 디자인의 기능과 상징에 어떤 영향을 받고, 그 받은 영향을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려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되묻는 게 필요한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기서 특히 한국 사회의 거주 문화를 집중 분석하면서 그 거주의 의미에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서로 끊임없이 맺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맺어짐은 사물의 기능에 단순히 끌려다니는 인간의 모습과 사물을 주체적으로 소유/활용함으로써 타인에게 자신을 '재현'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사회인임을 확인받는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기나긴 /반복적인 현대인의 싸움 가운데 아파트는 늘 핵심이 되어 왔다. 그리고 '피로감'이 될 정도로 우리는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에 그 피로감은 둔감함으로 바꾸었나 할 정도로 또 아무렇지 않은 주거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저자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은 '솔직함'일 것이다. 저자가 정성을 들여가며 쪼개어 놓은 아파트의 의미, 아파트 속 방의 의미, 그 방을 채우는 사물의 의미에는 인간이  추구하고 싶은  내밀한 욕망이 있음을, 그리고 현대인은 스스로 늘 그 욕망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함을 은밀히 발설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 4. '곳'을 비우거나 또 채우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다 비우고 다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곳'을 다 비울 때 나타난 그 공백들(흰 벽지만이 남은)이 나에게 무슨 말을 걸까. 그 공백 자체가 디자인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그 순간 어떤 마음을 디자인하고 싶은 걸까라는 장면을 기대한다. 그리고 나는 '곳'을 비우며, 채워졌던 옛 시간에  남겨졌던 사물과 벽 간의 먼지, 그리고 검은 자욱들을 바라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내내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나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 이외에 이 집을 채우는 모든 사물들이 나 빼고 이미 친해져 있던 것일까. '곳'을 비우거나 또 채우거나. 사물에게 말 걸기. 디자인과 친해지기. 내 욕망에 솔직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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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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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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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어제 (1)을 쓰고 나서, 읽고 또 읽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일을 넘 크게 벌렸나?" 왜냐하면 난 이 책이 주는 메시지 자체를 부정하진 않기 때문이다(나같은 미천한 블로거에게 '논쟁'이란 것은 과분하고, 또 그것을 잘 할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 (1)에서 느껴지는 내 표현의 애매모호함, 그리고 부적절함 등이 없었는가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이하 '열노가')를 재차 읽으면서 돌아보게 되었다. (2)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일단 (1)에서 내가 꺼냈던 몇몇 시선들을 다시 주워담아 정리하고, 더 명확하게 내놓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감정사회학'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이하 '열노가')를  아카데믹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국내 번역된 일부 인문,사회비평서 및 연구서 그리고 국내 연구서 및 문화비평집들의 경향을 쭉 뒤돌아보니 중요한 키워드는 '감정'이었고, 또 감정을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적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흔적/성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도를 말한 것이었다.  그 경향 속에서 '열정'이라는 키워드로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를 분석한 '열노가'를 위치지을 수 있겠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둘째, '열노가'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아픔과 현실,그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들인 정성과 시선에 대해 조금 아쉬움을 표한 대목은, 내용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 주장하는 시각들이 더 견실하고 촘촘하게 제시되면  좋았을텐데,라는 차원의 아쉬움이었다. 난 이 책 전반의 내용을 동의한다.  

셋째,  난 '열정 노동의 이론화'과정이 조금 더 두텁게 서술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이론과 개념 설정에 대한 인식이 무조건 "저 높은 곳을 항하여"(찬송가 제목이다)모드 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론화 과정'을 거쳤다고 저자들이 책 속에서 말을 한 상황에서 이론화 과정을 시도함으로써 생기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은 분명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그 책임감에는 '열정 노동'을 개념으로 만드는 데 있어 더 충실한 참고 자료의 제시 혹은 열정 노동을 언급하면서 이런 언급을 책 속에 계속함으로써 이 개념 설정이 갖는 한계는 없을까라는 성찰이 진중하게 고려되었으면 하는 내 아쉬움이 충분히 피력될 수 있다고 봤다.   

 

 

# 6

넷째, '열정 노동'의 이론화 과정을 책을 통해 지켜보면서 내가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에 대해. (2)는 이 부분 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유사 주장'이라는 표현을 써 놓고, 이 표현이 충분히 내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사 주장? 그럼 이 책 이전에 이미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일차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다만 내가 '유사 주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저자들이 서문에서 잠깐 꺼내놓은 우려. "우리는 곧, 대체 어떤 것이 열정 노동이 '아니라고'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15)에서 보듯, 저자들이 염두에 둔 '열정 노동'의 대상이 처음에는 프로게이머와 문화 산업의 종사자들이었는데 그 범주를 확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는 데서 시작된 이 책이 가진 어떤 야심에 대한 우려였다.   

'열노가'는 참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근래 논의되어 왔던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중인 사회적 논제들을 다 끄집어 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88만원 세대' 이야기, '학자금 대출 제도', '자기 계발 담론', '면접 문화 - 준비 과정과 기업 면접의 현실 그리고 스펙', '노동자의 죽음', (<마음의 사회학>이후 부쩍 자주 언급되는) '속물, 진정성', '보보스', '창조 경제', '신지식인', '벤처기업의 굴곡', '90년대는 문화의 시대', '신자유주의', 'IT 산업', '문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오류', '한류',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활동가(달리 말하면 사회운동가)의 죽음', '윤리적 소비', '사회적 기업', '고령화와 저출산율', '재스민 혁명', '대안 경험의 상품화'문제 등등. 누구는 책을 읽고서 저자들의 의견처럼 이 다양한 논제들이 '열정 노동'으로 다 꿰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난 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저자들이 고생해서 각각의 구슬을 꿰고 있지만, 일단 저 하나 하나의 구슬을 '열정 노동'으로 꿰기 이전에 한 구슬, 한 구슬 자체도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그냥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 거기서 발생하는 산만한 구성? 그 '방식'에 대한 아쉬움을 (1)에서 말하고 싶었다는 게 내가 '열정의 계보학은 완성되었는가'를 쓰게 된 목적이다.  

그랬을 때 '열정 노동'이 이론화되는 과정이 담긴 3장<오렌지 족, 그리고 '신지식인'의 열정>은 저 다양한 주제들이 커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챕터로 구성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장은 저자들이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문화산업의 종사자들', 그들이 90년대 소비문화의 주체로서 그들이 향유하고 있던 소비문화 혹은 대중문화에서 만들어놓은 / 느낀 어떤 정서, 어떤 쾌락, 어떤 문화적 취향을 그들이 생산하는 주체로 변모하면서 상품으로 직접 만들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과정의 지원과 한계들에 대한 서술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난 (1)에서 '헐겁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저 다양한 주제들을 꺼낸다는 것은 저 다양한 주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내 입장은  저 하나하나의 주제들도 책 한 권, 한 권으로 담기에도 모자랄 수 있는데, '열노가' 한 권이 모든 짐을 다 떠 안고 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걱정이 든 것이었다. '관통'이라고 하기엔 건드리는 주제들 하나 하나가 만만찮은?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열정 노동 > 88만원 세대 담론 +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 한류 + 대안 경험의 상품화 + 기타 문제 등등으로 처리될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낳을수도 있겠다는 인상 정도를 언급하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난 아마도 책을 읽기 전에 '열정 노동'에 대한 '독창적인 서술'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 책은 '열정 노동'의 언급 속에서 열정 노동이 껴 안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논제에 대해 이미 언급된 좋은 시각 몇몇 자체를 끌어 와서 '선택'하고 간략하게 서술한 정도라는 인상이 강했다. 서동진의 무엇? 엄기호의 무엇? 리처드 세넷의 무엇? 지그문트 바우만의 무엇?을 부속적으로 인용하는 차원에서 그친. 사회비평집 같은 구성에 사회 문제에 대한 보고서 같은 구성이 혼합되면서 느낀 어떤 산만함이 계속 아쉽게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 독자로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자면 이 인용된 견해들,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이 열정 노동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데 가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저자들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이 한 권의 책을 빌어 '다 언급하자!'라는 열정 아래, '열정 노동'이라는 그 용어를 무리하게 '끌어온'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또 하나. 독자로서 아쉬움을 느낀 건 열정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담론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정의 역사적 시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 한국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적어도 저자들이  명시해놓은 그 90년대를 분기점으로 해서, 70년대 노동 구조에서 열정의 사회적 맥락, 80년대 노동 구조에서 열정의 사회적 맥락 같은 것에 대한 언급 같은 것. 그랬을 때 열정을 둘러싼 담론적 맥락의 굴곡 및 단절 등이 열정 노동의 개념을 더 도드라지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완수되면 본 책에서 강조하는  90년대의 문화에 대한 소비의 열정 그리고 그 이후 그 열정을 관리하는 국가와 기업에 대한 미진한 인식에 대한 서술을 주안점으로 삼아 '열정 노동'이  오늘날 문화산업의 특수성과 그 종사자들의 특수성을 더 돋보이게 해주지 않을까라는 설정 같은 것을 독자 입장에서 기대했던 것 같다.

 

   

 

 

 

# 7 

앨버트 허쉬만의 1977년 저작 <열정과 이해관계>라는 책이 생각난다. '열노가'와 밝히려고 하는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열정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연결지어 보려했다는 점에서 두 책은 비슷한 점도 있다. '열노가'는 최근에 출간된 바바라 애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과도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이라는 좋은 감정의 상태, '긍정'이라는 인간이 누리고 싶어하고 지속시키고 싶어 하는 감정의 상태. '열노가' 나 '긍정의 배신' 모두 이 올바른 감정들을 '전유'하는 국가, 기업, 사회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처음에는 희극으로, 다음에는 비극으로>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요즘 성행하는 '행복학'이 오늘날 자본주의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문화'로 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감정과 경제의 관계가 이로 인해 발생한 상징성은 어떤 압박감으로 다가오는지. 우리는 그 친밀한 유혹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비평의 언어들을 접하고 있고,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 현상도 맞닥뜨리고 있다. 우리는 이 좋은 감정을 '성행'한다는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측정 /관리/평가하려는 체계에 대한 비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열노가'가 '열정 노동'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열정의 제도화, 열정의 프로그램화, 열정의 서열화일 것이다.   

 

 

  

 

 

 

 

 

 

 

  

앨버트 허쉬만은 열정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 속에서 통제받아야 하고, 관리받아야 하며, 억압되어야 하는 감정이었음을 밝혔다. '(역사인류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이 쓴 <개인의 발견>을 보면 이 시기가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확산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탐구의 열의와 그 결과는 개인의 힘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개인의 힘을 활용하여 지배의 언어로 삼으려는 노력도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열노가'도 언급하는 부분이지만, 열정은 차고 넘치는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적당한' 감정이 사회적으로 무해한 것이며, 그것을 고안하기 위한 논의들, 그리고 실천들이 일어난 것이다. 허쉬만은 그것을 학자들의 논의에서 발견했다. 흄,스피노자,몽테스키외, 애담 스미스 등등. 열정이라는 것, 특히 돈에 대한 소유욕과 같은 탐욕으로 열정이 저급하게 치부되면서 이것은 곧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기, 그리고 그 통치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 통치자의 밑에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열정'은 예전부터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좋은 방식,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켜 사람들을 적당히 구슬릴 수 있는 감정으로 발명되어야 했다. 그 결과 '이해관계'라는 용어(경제행위에 포함되는 상거래를 지지하기 위한)가 열정과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점점 중요해지는 돈,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경제 행위가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며, 국가의 통치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리고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등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다. 하지만 공통적인 지점은 열정이 이해관계라는 '무해한 열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환되면서 그것이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라는 형태로 유지되기 위한 '전략적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허쉬만의 발견을 통해 열정의 '전략적 개념'과 '열노가'가 주장하는 '열정의 제도화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각인시키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열정의 관리!

우리가 한때 신자유주의라고 크게 이름 붙이며 비판의 테마로 삼았던 이 체제가 인간의 문화적 형태로 잠식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상 속 상징. 그 상징의 핵심어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발견하는 작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가령, 최근 서동진이 <무엇이 정의인가>에서 밝힌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그 정의의 윤리에 새겨진 '책무성'과 '투명성'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공정하고 옳은 감정의 한 형태, 혹은 사유의 한 형태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그런 '성찰적 사유'가 기업 혹은 국가, 혹은 시민단체까지 그들의 이미지 신장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열노가'가 추출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상징은 '열정'이었다. 노동은 인간의 열정이 담김으로써 그 개인이 추구하려는 목표, 의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자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러한 과정을 함부로 재단하고 비인격적으로 개인의 열정을 무시해버리는 이 사회에 대해 한탄하며 분석의 언어로 더 당당하게 맞서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상징을 추출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열노가'의 미덕은 존중하고 공유하고 싶다.  그리고 그 미덕의 공유는 이 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오늘날 노동의 의미 / 노동자의 의미'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열노가'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 '우리'가 회피하려는 질문을 책을 읽고 질문해볼 것을 권한다. "당신은 노동자입니까?"   

- 못난 독자의 글 끝. (한국 보안업체는 이지아와 서태지의 신비주의를 본받아라! 본받아라!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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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난리났네요. BBK 매장설까지 떠도는 모양입니다. 혹시, 얼그레이님도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해 언급을...? (썰렁한 농담.^^; 글 잘 읽고 가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6:55   좋아요 0 | URL
전 서태지는 '풀잎파리'줄 알았는데, '무성'인간이요.ㅋ 그 사람도 남자였군요. 풉.^^

2011-04-2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5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5-1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뒤늦게 글을 보게 됐네요. ^^ 좋은 리뷰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까지 독서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이 책도 그렇지만 얼그레이효과님도 한 권 써 내신 듯한 기분이 리뷰를 읽는내내 드네요. ^^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에 충분히 당선될 글이라 여겨집니다. 살까 말까 망설이는데 얼그레이효과님의 리뷰를 보고 저도 한 번 사색하고 싶다는 마음이 확 들었어요. 거기에 비숫한 류의 추천 책까지! 지존이십니다. ^^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4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몇몇 구석은 책 구성이 아쉬웠어요. 근데 책이 술술 잘 넘어가고, 요즘 사람들이 마음 속에 늘 품어왔던 주제를 잘 건드렸다고 생각엔 동의하며 읽었어요. 지존이고 싶은데,,아직 부족합니다. 갈 길이 멀어요.~
 

 

 

 

 

 

 

 

 

   

# 1 

인문/사회판에 대한 촉이 발달되어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근래 사회학자나 문화연구자들은 감정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측면을 객관화시키는 구조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러한 관심은 학문 사회 안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라면 쓰고 싶은 '힙'한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주제를 교수에게 쓰고 싶다 밝히면, 백이면 백 말리는 경우가 많다. '감정'이라는 그 불확실한 측면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어젯밤 강하게 가졌던 대학원생들의 '야심'을 단번에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은 심리학의 전유물이었고, 인문 도서란에는 여전히 감정을 흥미롭게 실험한 사례들이 듬뿍 담긴 심리학서들이 주류를 차지한다. 그러나, 도전은 계속되었다. 감정을 사회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잭 바바렛 같은 감정사회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사회학이 애초에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재선언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감정사회학은 아직 국내에선 '힙'한 연구분과로 여성학(여성학은 한국 사회에서 학문 유행을 가장 잘 타는 학문분과 중 하나다),사회학, 문화연구자들이 도전하고 싶은 연구 테마로 분류되어 있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나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감정사회학이라고 딱 잘라 분류하긴 어렵지만, 이 두 연구자들이 갖는 이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확실해 보였던 인간의 마음 상태, 혹은 인간이 추구하고 싶은 추상적인 욕망의 형태가 어떻게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 들어오고 있는지 사회학적 성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젊은 연구자들은 더욱 이런 연구 형태에 욕심을 내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러리라 본다.    

 

 

 

 

 

 

 

 

 

 

# 2  

최근 출간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열정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담긴 감정의 한 형태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변질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꼭 나왔어야 할 기획이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책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창의산업'의 폐해는 한국 사회의 불안, 그 정점에 서 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가능성을 점점 코너로 몰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인간의 창의성이라는 것이 긍정적으로만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 또한 동의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드는 여러가지 아쉬움도 많았음을 기록해두고 싶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저자들이 '열정 노동'의 이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밝힌 3장 <오렌지 족, 그리고 신지식인의 열정>이다. 이 장을 기대한 것은 과연 저자들이 열정이라는 그 인간 내면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일상생활에 파고 들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노동'이라는 인간 행위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열정'과 '노동'이라는 두 개념이 접합되었을 때 이러한 접합이 갖는 이론화에 대한 시도가 별 무리는 없었는가에 대한 꼼꼼한 점검 혹은 언급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3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들은  '열정'이라는 개념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자신들이 비판하고 싶은 사회 현상을 더욱 특색있게 보여주기 위해 '열정'이 수사적 기능으로만  보여지고 있지 않은가란 점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서 굳이 '열정'이라는 말을 넣어서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노동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먼저 든 것이었다. 오히려 본 책이 주목하는 '창의성'이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떻게 오용되고 악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더 세부적인 검토가 있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창의 산업'과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연관성,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문화생산자라는 개념을 포함한)의 모습을 담은 비평 그리고 연구는 예전부터 국내외적으로 그 논의의 장을 구축해 왔다. 대표적으로  안젤라 맥로비나 존 하틀리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어떻게 상품화에 필요한 아이디어가 되었는지, 그들이 그 과정 속에서 어떻게 문화 생산의 주체이자 기업의 피해자가 되었는지 혹은  창의산업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릴 수 있는가를 검토해 왔다. 이런 논의를 참조하여 국내에서도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생산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의 일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속성은 무엇인지 연구가 이루어졌다. 문화연구자 김예란의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문화생산 공간과 실천에 대한 연구>(2007)는 대표적이다. 그녀는 이 연구를 통해 '문화판'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문화'를 강조하게 된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특수성과 그것을 관장하고 있던 정부의 정책 형태를 비판하고, 또 문화의 소비자인 90년대 청소년 세대들이 자신들이 즐기던 문화를 어떻게 자신들의 노동 형태로 만들고 살아가는지, 그 속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없는지를 심층 인터뷰 형태로 분석하였다. (김숙현의 2006년논문 <문화백수의 정치성과 정체성에 대한 연구>도 유사한 관점을 가진 글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보시라) 

# 4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리고 다양한 사례로 펼쳐진 문제들. 인간의 재능을 프로그램화하고, 그 프로그램의 틀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순응의 구조를 만드는 오늘날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열정'이라는 개념으로 다 끌어안고 가기에는 지나치게 헐겁다는 생각은 책 속에서 느낀 어떤 산만함 혹은 더 나아갈 듯하다가 멈춰버린 구성 같은 것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다시 앞의 논의로 들어와서 열정이라는 것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우리 앞에 담론적인 한 구성물로 등장할 수 있다면, 그랬을 때 그 열정이 비단 90년대 한국 사회의 소비 문화, 거기서 발생한 소비 주체의 특수성, 신지식인이라는 국가 주도의 담론 정책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쉽게 단언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열정은 확고하고 적확한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열정 노동의 이론화 과정이 그 외 챕터에서 제시된 열정 노동의 사례라고 든 부분들과 제대로 엮이고 있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갖는 건, 이 책이 새롭게 제시하는 '열정 노동'이라는 개념이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들을 모아놓은 것 이상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나머진 다음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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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가 궁금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2)도 기대할께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6:56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 기대에 못미친, 몸사리 (2)를 적어 죄송합니다.^^;

Arch 2011-04-2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얼그레이님 리뷰를 보니까 좀 더 기다렸다가 비슷한 주제의 다른 책을 읽는게 낫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문화백수의 정체성과 정치성에 대한 탐구 논문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6:59   좋아요 0 | URL
문화백수 논문이 학위논문이라 아마 연대도서관에만 있는 것 같던데, 저자분이 미국 유학 중인 걸로 알고 있어서 이 문화백수라는 개념을 나중에 더 확장시켜 발표하실지 궁금하네요. 저자가 책으로 발전시켜보시면 arch님도 쉽게 구해 보실 수 있을텐데요 ; ' 열.노.가' 책은 사서 보시기에 그리 무리는 없을 듯해요^^ 재미있는 인터뷰 내용도 담겨져 있더라구요.

무해한모리군 2011-04-2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가 기대가 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0   좋아요 0 | URL
(2)가 좀 재미없게 쓰여졌네요. 죄송합니다. 쿨럭. ㅜ.ㅜ

게슴츠레 2011-04-20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읽었고 (2)를 기대합니다.ㅎㅎ 다만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들을 모아놓"는 행위도 이론화만큼이나 나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글이라는 행위가 꼭 '이론'이나 '개념'의 형태로만 사회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0   좋아요 0 | URL
제가 그 표현부분을 제 마음껏 이야기 못한 부분이 있어 (2)에 좀 적어 봤습니다. 그 여부를 떠나서 게슴츠레 님의 말도 당연히 맞구요^^ 말씀 고맙습니다.

아킬레우스 2011-04-2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프리 알렉산더의 인터뷰(http://www.youtube.com/watch?v=61x7VZMtlu4)인데요 이러한 알렉산더의 작업도 감정에 대한 논의로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요?ㅎㅎ(사실 감정이라기보단 문화적인 차원 혹은 상징적인 차원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알렉산더의 논의에서 상징은 단순히 인지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충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1   좋아요 0 | URL
제가 꼼꼼히 링크분 보고 또 말씀 드리겠습니다. 밤새고 댓글 다는중이라 헤롱헤롱하네욧. 맥락을 더 자세히 이해해서 추가 댓글 달께요. ㅜ.ㅜ

루쉰P 2011-04-2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꼭 사보고 싶은 책이어서 리뷰가 궁금해 이렇게 들어와 읽고 갑니다. ^^ 좋은 리뷰 감사해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2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장문을 써서 구절구절이 좀 길고 딱딱한데, 다음엔 좀 더 유연하고 쉽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고맙습니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 모으다가. 문득 <씨네21> 진중권의 지난 글이 생각나서 스크랩.    

(동의 차원에서 스크랩한 것은 아님. 이런저런 시선이 있다는 차원에서)



필경사 바틀비>(1853)는 월 스트리트에 개업한 변호사의 눈에 비친 한 인물의 기이한 언행을 담은 허먼 멜빌의 단편이다. 이미 두명의 필경사를 데리고 있던 변호사는 늘어나는 업무를 감당할 수 없어 또 다른 필경사를 고용한다. 바틀비라는 이름의 이 새 직원은 차분한 성격으로 엄청난 양의 업무를 훌륭히 처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변호사가 맡기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거절하더니, 나중에는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을 거절하고 사무실에서 빈둥거리기 시작한다.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일을 거절하는 방식. 통상적인 거절의 문법은 이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I would not prefer to) 하지만 바틀비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 한마디로 그는 일하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일 안 하는 것을 ‘긍정’했던 것이다. 화자는 바틀비가 왜 이런 기이한 언행을 하는지 이해하려 하나, 끝내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차마 바틀비를 내치지 못한다.

어느 날 밤늦게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변호사는 바틀비가 아예 거기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묘한 호기심과 동정심으로 그를 내치지 못한 변호사는 바틀비를 거기에 남겨둔 채 자신이 이사를 나간다. 문제는 그 다음. 어느 날 새 주인이 변호사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새 주인이 입주한 뒤에도 바틀비가 퇴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강제로 건물 밖으로 쫓겨났지만, 바틀비는 낮에는 계단에 앉아 있다가 밤에는 건물의 현관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계속해나간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고 싶어 그를 식사에 초대하나, 돌아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는 특유의 거절. 얼마 뒤 변호사는 바틀비가 결국 방랑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는다. 감옥으로 그를 찾아간 변호사는 간수에게 뇌물을 주어 바틀비에게 좋은 음식을 충분히 제공하도록 조치하나, 이 마지막 호의 역시 그의 거절에 부닥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감옥에서 살지 않는 것을 선호했던 바틀비는 음식을 끊고 거기서 굶어죽는다.

 

디오게네스 앞에 선 알렉산더의 당혹감


이 이야기는 프란츠 카프카, 혹은 사뮈엘 베케트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월 스트리트’라는 배경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사회, 남의 문서를 베끼는 무의미한 작업의 반복, 부조리한 실존적 조건에 대한 바틀비의 불합리한 저항. 바틀비 못지않게 이상한 것은 화자인 변호사의 행동이다. 마치 아비의 원수 앞에서 망설이는 햄릿처럼 그는 바틀비의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끝내 그를 내치지 못한다. 그에게서 자신의 내면에 억눌려 있는 또 다른 자아(alter ego)를 봤던 것일까?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일을 계속할지, 아니면 자기를 떠날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그는 이 양자택일의 상황을 교묘히 비껴간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 ‘소극적 저항’은 급진적이다. 이 말이 반복될수록 사무실의 기능은 마비되어간다.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할 자유를 주나, 그 선택은 이미 일을 주는 자의 권력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바틀비는 적극적 소극성으로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절대적 자유에 도달한다.

디오게네스 앞에 선 알렉산더의 당혹감이랄까? ‘뭐든지 주겠다’는 금전의 회유, ‘내가 무섭지 않냐’는 권력의 협박도 통 속의 개를 구속하지 못한다. 대왕의 막강한 권력이 개를 자처하는 자 앞에서 졸지에 허무해졌듯이,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이 앞에서 변호사의 알량한 권력은 대책없이 무너진다. 그가 바틀비에게서 느낀 것은 ‘숭고’의 감정이었을 거다. 변호사는 끝까지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나, 바틀비의 생각은 언제나 그의 이해력의 피안에 존재한다. 그는 바틀비에게 매료된다. 아니, 압도당한다.

그 변호사만이 아니다. 여러 철학자들이 이 인물에 끌렸다. 들뢰즈는 바틀비를 미학적 형상, 즉 독창적 주체로 바라본다. 바틀비는 반복적으로 자기가 ‘특별하지 않다’(I’m not particular)라고 말하나, 정상적 문법을 비껴가는 그 독특한 어법은 불현듯 체제를 교란하는 ‘특이성’(singularity)이 된다. 그의 어법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다른 이들을 사로잡아, 결국 사무실의 모두가 그의 말투를 흉내내기에 이른다. 어떤 의미에서 바틀비는 ‘사건’을 일으키는 현대의 퍼포먼스 예술가를 닮았다.

 

바틀비는 누구인가


 

아감벤은 (베냐민의 <폭력 비판>,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혹은 데리다의 <법의 힘>을 배경으로) 바틀비에게서 신학적 형상, 즉 세속적 메시야를 본다. 우리는 권력이 정의로울 것을 기대하나, 그런 염원에서 수립된 권력도 결국 정의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바틀비의 무위(inoperosita)는 이 무의미한 놀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미(未)실현이 아닌 의도적 비(非)실현이야말로 신화적 폭력의 악순환(역사 자체)에 종지부를 찍는 메시야적 파국, 베냐민이 말한 순수한 신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네그리는 바틀비에게서 정치적 형상, 즉 혁명적 주체를 본다. 아감벤과 달리 그는 바틀비의 거부를 해방으로 나아가는 1단계로 여긴다. 그저 체제를 거부하는 데에서 멈출 경우, 우리는 결국 ‘무덤’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아사한 바틀비처럼 사회적 자살에 이르고 만다. 따라서 바틀비의 부정은 이제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 생성, 건설하는 2단계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긍정의 단계에서 네그리의 사고를 이끌어주는 것은 아마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역능’(virtus)의 개념일 것이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


지젝의 정치신학(유물론적 신학)은 네그리와 아감벤의 상이한 해석을 이른바 ‘시차’(視差)로 재배치한다. 먼저 아감벤을 따라 지젝은 바틀비의 거절을 출발이 아닌 근원, 준비단계가 아닌 최종목표로 바라본다. 하지만 네그리를 따라 그 텅 빈 저항의 제스처에 ‘몸체’를 부여하자고 말한다. 즉 바틀비의 저항은 ‘극복’이 아니라 ‘실현’의 대상이다. 파국과 생성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미학적 바틀비를 정치-신학적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데에는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가령 지젝이 제안하는 구체적 실천의 예를 보자. 그는 (일시적으로 고통을 경감시켜 결국 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에 이바지하는) 사이비 저항을 거부하라고 외친다. 그의 구호를 우리 현실에 대입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거절이 과연 체제에 대한 급진적 저항이 될 수 있을까?

참여의 거부는 먹고살기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not’이 ‘prefer’의 앞에 오느냐, 뒤에 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가짐의 변화뿐인데, 그게 그토록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구별인지 모르겠다. 관념적 급진성은 실천적 보수성으로 이어지게 마련. ‘사이비 저항’의 양파를 까고 또 까면, 그 끝에서 바틀비의 사도들은 그저 ‘무’를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바틀비를 구세주로까지 만들어 섬길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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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4-1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 9월 10일 씨네21 진중권의 아이콘에서 가져 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문예신서 142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1998년 12월
구판절판


차라리 이것은 앎들의 봉기이다. 한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 개념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사회와 같은 한 사회에서 형성된 한 과학적 담론의 기능과 제도화에 관련된 중앙집중적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는 봉기이다. 이 과학적 담론의 제도화가 대학 안에서 또는 매우 광범위하게 교육장치 안에서 구체화되거나, 정신분석과 같은 상업적 이론의 망 안에서 혹은 마르크시즘의 경우처럼 그 모든 관련성과 함께(26)정치기구 안에서 구체화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계보학이 싸워야 할 것은 소위 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담론이 갖는 고유한 권력의 효과에 대항해서이다. -26,27쪽

따라서 계보학이란 앎들을 과학 고유의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 앎들의 예속상태를 풀고 그것을 자유스럽게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하면 통일적이고 형식적이며 과학적인 이론적 담론의 강제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반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업이다.(중략)고고학은 국부적 담론성의 분석에 적합한 방법이고, 계보학은 그렇게 묘사된 국부적 담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 끄집어 낸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이것은 전체적인 기획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28쪽

지난 몇 년 간의 강의에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은, 물론 투쟁-억압의 도식편에 들어 있다. 내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도식이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나는 그것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거슨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번째는 여러 관점에서 아직 그것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 전혀 다듬어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두번째로는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이 종국에 가서 포기되지 않으려면 적지 않은 부분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하튼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36쪽

어느 면에서 나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권력의 관계들이 진실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규칙들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가진 진실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권력의 유형은 어떤 것인가?-42쪽

두번째 수칙은 권력을 의도나 결정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말 것이다.즉 그것의 내면에서 포착하려 하지 말 것(중략)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잠정적으로 권력의(46)대상이나 표적 또는 적용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 외적 측면에서 권력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즉 권력이 뿌리를 내려 실제적인 효과를 발생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권력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중략)그러니까 남의 육체를 예속시키고 그의 행동을 이끌며 그의 행위를 관장하는 그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다시 말하면 "어떻게 군주가 저 높은 곳에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고, 수많은 육체와 힘,에너지,물질,욕망,사유 들에서부터 어떻게 실제로 물질적,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신하들 혹은 신민이 형성되는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46,47쪽

결국 리바이어던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자동적이며 동시에 통일적이고 실제의 개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모든 시민을 몸체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그 정신은 주권앤,그러한 인위적 인간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권력에 대한 연구는 리바이어던의 모델 밖에서,즉 국가제도와 사법적 주권에 의해 구획지어진 범위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지배의 기술과 전술에서부터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53쪽

결국 내가 지난 몇 년 사이에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어떻게 정밀과학의 전진기지에서 인간행동의 불확실하고 까다롭고 희미한 영역이 조금식 과학에 병합되었는가가 아니었다.인간과학이 조금씩 형성된 것은 과학의 합리성의 진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인간과학의 담론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과정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두 타입의 담론의 대립과 병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에는 주권 주변에 법의 조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규율들에 의해 행사되는 강제들의 기제가 있다.우리 시대에 권력이 이 법과 기술들을 통해 행사된다는 것,규율에서부터 생겨난 이 담론들과 규율의 기술들이 법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규격화의 과정이 점점 더 법의 과정들을 식민화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내가 소위 '규격화 사회'라고 이름짓는 것의 전체적 기능을 설명해주는 것이다.-58쪽

(전략)역사 안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는다는 것은,그 첫단계로 자신을 의식하고 앎의 질서 안에 자신을 재편입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4쪽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일종의 지속적인 전쟁과 같은 힘의 관계를 사회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불랭빌리에는 마키아벨리식의 분석을-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용어로-복원했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군주의 손에 놓여져야 하는 정치적 테크닉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힘의 관계는 군주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시 말해서 민족 같은 것(귀족 혹은 나중에는 부르주아지 개념으로)-자신의 역사 한가운데에 표시하여 확정지을 수 있는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원래 정치적 대상이었던 힘의 관계는 이제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사-정치적 대상이 되었다.왜냐하면 귀족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앎을 되찾아 정치세력의 장 안에서 다시 정치적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힘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였기 때문이다.-194쪽

자기 분석의 축과 무게 중심을 약간 바꾸어 놓음으로써 불랭빌리에는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을 했다.우선 소위 권력의 합리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의 원칙을 정했다.권력이란 소유의 가능성이 아니고, 상호관계가 작동하는 대립항의 차원에서만 연구해야 하는, 또는 연구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계일 뿐이다.(200-중략) 불랭빌리에에게 있어서(이것이 중요한 것인데)힘의 관계와 파워게임은 역사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사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어떤 것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힘의 관계,어떤 파워게임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0,201쪽

다시 말하면 불랭빌리에는 그때까지 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원칙이었던 것읅 역사의 이해원칙으로서 작동하게 했다.역사기술과 국가 경영이 서로 연속성을 갖게 된 것,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모델을 역사이해의 암호판으로 사용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역사-정치적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이다.이 연속체 덕분에 이제부터는 역사를 말하는 것과 국가 경영을 말하는 것은 같은 용어, 같은 암호판, 같은 산술계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203쪽

문제는 역사 담론에서 내부적으로 통제되었던 전쟁관계가 어떻게 그 자리를 옮김(쇠퇴라고까지 할 수 없다 해도)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한다.전쟁관계가 다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외부적인 부정적 역할을 하면서이다.더 이상 역사를 구성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회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역할이며, 이때 전쟁은 더 이상 정치적 관계나 사회의 조건이 아니고,다만 그 정치적 관계 안에서의 생존조건이다.이때부터 사회 그 자체 속에서,그리고 사회 그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위험들에 대항해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호장치로서의 내적 전쟁의 개념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그것은 사회적 전쟁이라는 사유가 역사에서 생물학으로,법률적인 것에서 의료적인 것으로 대선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52쪽

(얼그레이효과 주 : 1976.3.17 강의분이 그 유명한 생정치에 대한 푸코의 견해가 나오는 대목이다.본 책 277쪽부터 시작) 19세기의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장악하는 것,생물학의 국유화라고나 할까,아니면 적어도 생물학의 국유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경도현상이다.-277쪽

삶과 죽음의 권리란 사실상 무엇을 뜻하는가?그것은 물론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권리는 항상 죽음의 편에서 불균형하게 행사된다.삶에 대한 군주권의 효력은 군주가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때부터 발생한다.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권리란 결국 죽일 수 있는 권리이다.군주가 삶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죽일 수 있는 순간에 한해서이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칼의 권리이다.그러므로 삶의 권리와 죽음의 권리는 대칭이 아니다.그것은 살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아니라,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이다.이것이 명백한 비대칭성이다.-278쪽

19세기의 정치적 권리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 오래된(278)군주의 권리-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를 새로운 권리로 대체까지는 아니다 하더라도,그것을 보완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 새로운 권리는 구 권리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침투하고 관통하고 수정하여 정반대의 권리,아니 차라리 살게'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권력이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권리는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정착된 이 권리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다.-278,279쪽

규율적이 아닌 이 새로운 권력기술이 적용되는 영역은-신체를 상대하는 규율과는 달리-사람들의 생명이다.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극단적으로 말하면 종으로서의 인간을 상대한다.(중략)새롭게 정착한 기술은 다수의 인간을 상대하기는 하되,그것이 개체로 요약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 다수가 모든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출산,질병 등 인류 전체의 과정에 영향받는 글로벌한(280)전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이다.그러므로 개인화의 모델에 따라 권력이 인체를 장악한 후 두번째로 시도된 권력의 인체 장악은 개인화가 아니라 전체화였으며, 다시 말하면 육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을 향해 행해지는 권력 행사였다.18세기에 이루어진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 이후 18세기말에 더 이상 해부정치학이 아닌 어떤 것이 나타났는데, 나는 이것을 인종에 대한 '생물정치학'이라고 부르고 싶다.-280,281쪽

요컨대 질병을 인구현상으로 본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을 갑자기 덮치는 죽음-그것이 전염병이다-으로서가 아니라, 삶 속에 미끄러져 들어와 끈질기에 그것을 파먹고 점점 작게 만들어 마침내 그것을 약화시키는 그러한 점진적인 죽음으로서의 질병인 것이다.18세기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현상이었다.그리고 이것이 의료행위의 조정과 정보의 집중,앎의 규격화와 함께 공중보건을 주임무로 하는 의학을 만들어 냈다.이 의학은 전인구의 의료화와 보건교육 캠페인의 모습을 띠었다.그러므로 출산,출생률,사망률 등이 문제였다.-282쪽

생물정치에 의해 작동된 메커니즘은 우선 예측과 통계,그리고 전체적인 측정 다음에 그런 특정의 현상이나 개별적인 개인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이고 글로벌한 현상의 결정 수준에서 개입을 한다. 사망률을 수정하고 낮추어야 하며,수명을 연장시키고 출산을 권장해야 한다.우연적인 요소가 많은 인구 전체 안에서 균형상태를 고착시키고,평균을 유지하며,일종의 항상성을 수립하고,보상을 확보할 수 있는,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구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우연적인 요소들 주변에 최대한의 보장장치를 마련하고, 삶의 질을 최적 수준으로 만드는 그러한 규제 장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284쪽

죽음은 권력의 영향권 밖에 나오고,권력은 죽음을 전체적,일반적,통계적 수준에서만 장악하게 되었다.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망률이다.이런 관점에서 죽음이 사적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중략)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권력은 죽음을 내팽개쳤다.-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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