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됩니다 한밭 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 윤제림, <가정식 백반> -

 

# 1. 어쩔 수 없는 선택

5월 5일 어린이날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밝아지는 이 날씨를 '차도남'컨셉 커튼 닫기로 촤악 막아버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근데 별로 한 것도 없이 배가 꼬르륵. 요즘은 '취업 우울증'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더욱 싫어졌다. 절친인 동무가 나를 불러주는 애칭, '전단지 할배'를 떠올리며, 서랍 속 전단지를 꺼낸다. 족발,보쌈,냉면,치킨,피자,회,찜닭. 할배모드로 혀를 쯧쯧 차며 어떤 메뉴 컨셉의 부재를 탓한다. 이 컨셉의 명칭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대신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이 필요하다. '엄마가 차려주신 그 잡채, 그 된장찌개, 그 고등어조림, 그 콩나물 무침..' 그러다가 입 밖으로 한 번, "에이씨..우리 동네는 왜 이렇게 가정식 백반 잘 하는 데가 하나도 없는 거야"라며 신경질을 낸다. 어쩔 수 없이 츄리닝 하의를 벗고 청바지를 대충 벨트도 하지 않은 채 입는다. 곱슬머리가 고정시켜 놓은 산만한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모자를 쓰고, 눈꼽을 좀 떼고 운동화를 꼬깃꼬깃. 그리고 슬그머니 엘리베이터를 탄다. 아, 1층에 내려갈 때까지 누가 중간에 타면 안돼. 눈을 감는다. "오늘은 삼각 김밥 유통 기한 안 지난 것 남아 있겠지?"

 

 

# 2. 동네에 정겨운 한식당 많나요?  

경기도 B시로 이사온 지도 어느덧 햇수로 7년째다. 그동안 내가 여기에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내가 자주 다녔던 단골 한식집이 대부분 망했다는 것이다. 보통 '자취'를 하는 남자들을 소개팅에서 만나면 그런 남자들이 여자들의 "그럼 요리 잘 하시겠네요"란 진부한 질문에, "뭐 김치볶음밥은 기본이구요. 스테이크도 좀 할 줄 알고, 찌개 종류는 잘 하죠.."이렇게 진부한 대답을 하지만, 사실 그런 자취생이 몇 명이나 되려나. 대부분 부시시한 눈 정리하고 1,500원짜리 '원조김밥' 1 줄과 자제하려 하지만 잘 안되는 탄산음료 1병 드링킹, 아니면 삼각김밥 몇 개에다 한 개만 끓이면 배가 아쉬워하는 라면 두 녀석으로 이렇게 끼니를 채운다. 그것이 질리면 찾는 곳이 동네 가정식 백반집일텐데. 내가 사는 B시의 이 동네는 이제 가정식 백반집이 한 곳 남았다(모두가 '엄마의 맛'이라 칭하며 포스를 자랑하는 한 곳). 사실 한 곳만 남은 것은 아니다. 두 곳 정도가 더 있는데, 이 집은 사실 좀 있으면 망할 것 같다(이유는 정말 맛이 없기 때문에). 사실 좋은 '가정식 백반'을 사 먹기도 시켜 먹기도 '두려운' 요즘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내 식습관 투정보다는 어떤 사회학적인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연구 더듬이'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예전부터 있었다.  

일단 인구통계학적인 측면을 잠시만 흉내내어 보자면, 내가 살고 있는 B시 S동은 유독 직장인들과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사는 원룸지역이라고 그 특성을 요약할 수 있다. S동은 특히 인천과 서울 가는 방향을 매개하는 지역이라, 버스와 지하철 교통이 나름 잘 발달되어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그런 가운데 주목해 볼 것이 소비의 특성인데, 음식 소비의 경우 주류를 포함할 때 술집과 고깃집이 먹는 장사 가운데 거의 9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1할이 떡볶이와 튀김 파는 노점상, 동네 피자 몇 곳, 횟집 몇 곳, 중국집 몇 곳 정도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이 자주 찾는 두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가정식 백반집이 있다.  

가정식 백반 소비에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면, 가정식 백반집이 요즘 증가하고 있다는 내용이 종종 발견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서구의 패스트푸드에 질린 직장인 등등이 엄마의 솜씨를 그리워한다는 둥으로 요약되어, 그 판매의 변이 실렸는데, 사실 그것은 '현 시기의' 가정식 백반집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치우쳤다. 내가 우려하는 건 바로 올해 서른 살이 된 나. 그리고 나를 포함한 1981년생, 1982년생 00학번, 01학번 세대들이 한 40대 정도나 50대가 되었을 때 과연 어머니의 손맛을 경험할 수 있는 한정식집을 동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일단 '우리 세대'라고 거칠게 요약하긴 부담스럽지만, 직장 생활 혹은 학교 생활로 인한 나름의 '식습관의 사회학적 구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삼각김밥이나 편의점 도시락, 그리고 한솥도시락 등의 매출이 점점 증가한다는 기사를 보는 가운데, 사람들의 식습관을 보면 매 끼니가 밥과 국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사라지고 있다. 대신 '아/점'이라든지, '점/저'문화의 발달로  그 문화를 구성하는 하루의 '맛난 한 끼'라는 컨셉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러면서 또 동네마다 주목해서 보는 건 각종 반찬가게의 성행이다. 물론 그렇게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내가 속한 S동은 직장인들이 퇴근할 때가 되면 그야말로 난리다. 아주머니들은 반찬을 담아주느라 정신이 없고, 손님들은 "아니, 이 집 반찬 여러개 맛있게 잘하더니..왜이리 메뉴 개발을 안 해.."라며 타박을 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직접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하는 것보다 '사 먹는 게'싸다는 소비 기대의 효용성이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 3. 한식의 세계화? '한식의 서민화'라는 또 다른 아이러니의 발생 

다만 미래의 차원에서 접근했을 때, 한식은 나름의 이중적인 문화적 범주로 소비될 것 같다. 하나는 최근 국가에서도 밀고 있는 '한식의 세계화'같은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국가 브랜드 차원에서 고안해내는 VIP식 한식 메뉴, 그것이 갖는 미학적 쾌감과 상품성 등. 다른 하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친근하고 이웃같고 집에서 먹는 느낌이 든다는 '한식의 서민화'다. 그런데 사실 '한식의 서민화'라는 것은 모순이 될 수 있는 표현이다. 원래 한식은 우리와 같은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최근 문화부장관이 호텔에서 몇 만 원짜리 김치찌게,된장찌게를 누가 먹겠냐로 시작한 한식 폄하를 곱씹어보면서 한식의 세계화라고 하는 담론에 가려진 '한식의 빈곤'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한식의 세계화'라는 담론이 포함시키고 있는 것, 그리고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무얼까? 이런 맥락에서 '한식의 서민화'라는 이 모순된 용어는 아마 우리 세대가 4,50대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쉽게 말해서 한식이 정말 우리가 예전처럼 쉽게 찾고 즐길 수 있는, 그리고 가족과 함께 먹는 그 맛으로 보존가능한 식문화로 남아 있을까? 우리는 이제 그런 식문화를 느끼려면 김밥천국 같은 곳에서 파는 여러가지 잡다한 유사 메뉴로 그 느낌을 경험하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과연 우리 세대에 우리의 밥을 챙겨줄 몇 천원짜리 가정식 백반집 아저씨, 아줌마가 탄생할까? 나는 '한식의 세계화'라는 담론이 갖는 저 국가 브랜드의 욕망 속에서 정작 우리 동네의 현실은 어떤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난제 하나. "그렇다면 당신이 손수 만들어 먹으면 될 것 아니요?"라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요즘 내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거시적인 차원도 고려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선 요즘 한국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문제이지만 이상기후 현상 등 외부 조건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음식 재료값의 들쑥날쑥모드다. 관련기사들을 찾아보면 이상기후로 인해 신선채소값이 올라 그것을 대용할 간편메뉴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은 우리도 일상을 통해 체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 직장과 여가의 문제다. 직장 내 노동 강도와 그것으로 인해 과중되는 스트레스, 또 업무 외 행동의 부담으로 인해 미래 세대가 앞으로 직접 요리를 하여 먹을 시간의 보장 여부, 그리고 그것에 신경을 쓸 여부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인 차원으로도 고민해 볼 문제다. 여기에는 "아. 넌 여자애가 요리도 못하냐", "야, 요새 요리하는 것에 남자/여자 구분이 어디 있냐"라는 갈등으로 소비되는 심리적 피로도도 함께 계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지금은 잘 찾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예전부터 "어휴,..저 복잡한 메뉴를 어떻게 다 해 먹어"라고 생각한 음식메뉴들이 인스턴트 형태로 대형마트에 다양한 메뉴로 더 진열되어 소비자를 유혹할 가능성은 커진다.    

 '지금' 가정식 백반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들에서 나는 미래의 불안함을 느낀다. 이런 불안함을 지적으로 고민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이런 생각하다가 배고픔을 잊을 수도 있고 ㅋ) 『음식인문학』(주영하, 휴머니스트,2011)이란 책이 나온 것도 어떤 측면에서 이런 지적 고민이 더욱 더 증가하리란 걸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싶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해석은 각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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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5-05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호텔에서 김치찌개를 팔면 격이 떨어진다네요...
한식세계화?...그저 꿈은 아닐지

얼그레이효과 2011-05-05 23:45   좋아요 0 | URL
어린이날 잘 보내셨는지요?^^ 문화부장관 수준이 참...그렇죠. 어떻게하면 팔아먹을까 마인드..그래서 인디영화도 '관변'인디영화로 만들려던 속셈도 있었고 말이죠...그건 아마 인촌이 형님 시기였죠.에효.

비로그인 2011-05-06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정식 백반'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도 궁금해지는군요. 어쩐지 억지로 만들어진 말 같아서요. '가정식'이라고 했으니 외식문화가 발달한 뒤일 테고(집에서 먹는 것처럼 해주겠다!) '백반'이라면 예전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명절에나 구경할 수 있는 나름 '귀한' 상차림이었을 텐데...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인지 가끔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이란 걸 시켜 먹을 때면 '뭐야, 우리집은 평균 가정도 못 되는거야?' 하고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답니다 ㅋㅋ^^

얼그레이효과 2011-05-06 09:3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용어와 한국적 맥락. 그런 것도 고민해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pjy 2011-05-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불러주든 간에 그 백반집이 제발 멀쩡하게 유지되면 좋겠습니다만,,이미 다니던 곳들은 대부분은 없어졌습니다요~
뉴스에서 말하는 건 다 딴동네 이야기입니다 ㅡ,.ㅡ;
요새는 백반집 가야되는 상황에 몰리면 기사식당을 좀 알아보고 댕깁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06 13:59   좋아요 0 | URL
기사식당류 김치찌개...기사식당류 부대찌개의 그 맛이란...#_# pjy님도 저랑 유사한 경험을 하셨군요.

pjy 2011-05-06 15:57   좋아요 0 | URL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네 뭐네해도~ 가장 손쉽게 1인분에 고기주는곳은 그곳뿐ㅋㅋ 맛있는! 기사식당 엄청 좋아해요^^

2011-05-06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11-05-09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기사식당의 계급성'이랄까?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던 중이었는데요. ^^

얼그레이효과 2011-05-09 11:05   좋아요 0 | URL
앗 바람구두님 반갑습니다!^^ 기사식당의 계급성. 흥미로운데요~ 즐찾한 바람구두님의 블로그 들어갔는데, 바람구두님의 '아카이브' 구축 능력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문화망명지를 처음 알고 나서.."와..어쩜 이렇게 정리를 잘 하시나.."감탄했었는데요..혹 노트 필기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훔쳐보며 감탄한 기분이라고 할까요.^^
 

 

 

 

 

 

 

 

 

# 1. 어느 관리의 죽음 - ‘쿨사과’를 다르게 읽기 위한 출발

체호프의 소설 중 『어느 관리의 죽음』이란 것이 있다. 내용은 짧고 간단하다.

체르바코프라는 회계관이 오페라를 보러 갔다. 관람을 하는 중 갑자기 큰 재채기가 나왔다. 그는 창피함을 이리저리 신경쓰다가 순간 자신의 대머리를 닦고 있는 한 남자를 봤다. 그는 통신부 장관인 브리잘로프라는 노인이었다. 체르바코프는 그 노인이 다른 부서의 상관이었지만 마음에 걸려 용서를 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로 향했다. 체르바코프는 조용히 용서해달라는 말을 속삭였는데, 브리잘로프는 “괜찮다”라는 반응만 보였다. 순간 체르바코프는 자신이 브리잘로프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마음에 계속 남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전전긍긍하다가  브리잘로프가 일하는 곳에 가서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브리잘로프가 사과를 하러 갔다.  하지만 브리잘로프는 체르바코프의 용서에 큰 화색을 보이지 않고 업무에 임했다. 체르바코프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계속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했다. 브리잘로프는 체르바코프가 저지른 일에 별로 개념치 않는다는 표시를 했다가 급기야 그의 거듭된 사과에 화를 냈다. 체르바코프는 당황했고 그 후 집에 돌아와 제복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쿨하게 사과하라』(김호·정재승, 어크로스,2011)(이하 ‘쿨사과’)를 읽고 이 소설이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쿨사과’의 시선이라면 ‘좋은 사과’에 대한 코칭(coaching)을 체르바코프에게 시도했을 것이다. “미안해”라는 말은 진정한 사과가 아닙니다.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어요. 그 사과의 시기를 잘 포착해 보세요. 당신이 브리잘로프에게 좋은 답변을 듣고 싶다면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세요. 혹시 당신은 브리잘로프에게 ‘사과같지 않은 사과’(본 책에서는 ‘비사과 사과’ / ‘유사 사과’라는 용어로 나온다)를 한 거 아닌가요. “제가 원래 오페라만 보면 알레르기가 있어서요..”로 시작하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사과 말이죠.
그런데 나는 여전히 ‘쿨사과’를 읽으며 이렇게까지 ‘사과의 방법’을 설명/제안하는 것은 ‘오바’라는 생각이 든다. ‘쿨사과’에 대해 다른 시각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 2. ‘이런 책’을 같게/다르게 읽기 위한 제안 (1) - 어빙 고프만의 ‘연극론적 분석’

우선, ‘쿨사과’를 다르게 읽기 위해 몇 가지 참조해 본 개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이 개념들은 ‘쿨사과’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일단 ‘쿨사과’는 ‘사과’라는 행위가 의도된 연기인가 혹은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인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런 책이 나오지 않더라도 ‘사과’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나의 자아를 다치지 않기 위한 / 타인의 자아를 염려하기 위한 ‘의례’라는 건 이미 공유하는 상식일 것이다. ‘쿨사과’는 여기서 ‘사과’가 경제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어, 특히 (기업으로 대변되는) 조직을 잘 이끌어가기 위한 ‘리더의 언어’로서 필요한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시선은 사과를 둘러싼 ‘처세술’적인 시선을 더 강조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쿨사과’의 두 저자는 ‘진정성’과 ‘공감’을 성공적인 사과의 중요 요인으로 꼽고 있는데, 이것을 두 저자가 강조할수록 사과는 곧 이 사회라는 무대를 살아가는 당신이 일종의 ‘사회적 연기자’임을 공인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 당신은 ‘진심’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진심마저도 갖출 수 있는 연기력’도 갖춰야 된다는 주장이 성립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쿨사과’가 '사과의 방법'이란 논지를 펴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비판론 중 하나일 것이다. (상당히 ‘도덕적’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말이다) 
 

‘쿨사과’가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쿨사과’의 논지를 중요하게 디자인하는 것은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의 견해들이다. 고프만의 복잡한 사회학적 성과들을 거칠게 요약하기는 부담스럽지만, 그는 이 사회를 연극의 한 무대로 보았다. 그리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면하는 타인에 대해 좋은 인상을 유지하도록 효율적인 표현을 구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례(ritual)’라는 사회학적 개념에 주목하면서 사람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자신이 곧 사회인입니다”라는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봤다. 고프만의 견해는 상당히 ‘상식적인’ 견해로 오늘날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견해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굴드너는 고프만의 ‘연극론적 분석’이 중산계층의 생활만을 옹호하는 사회학이며, 인간의 행위를 이해타산적인 차원에서만 한정하여 취급하는 “영혼을 팔아먹는 사회학”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굴드너의 이런 비판은 과한 측면도 있다. 굴드너가 “이해 타산적”이라고 몰아붙인 고프만의 ‘연극학적 분석론’이 권력의 정치술을 깊이 읽어내고 비판할 수 있는 용도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쿨사과’가 올바르지 않는 사과법을 예시로 드는 경우, 정치지도자나 기업 총수의 사과 등 권력층의 잘못된 정치 행위가 그 사례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쿨사과’는 올바른 사과법을 학습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나오고 나서도 여전히 지속될 권력층의 올바르지 않은 사과법을 짚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후자의 측면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가능성을 짚어가면서 읽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 3. ‘이런 책’을 이제 다르게 읽기 위한 제안 (2) - ‘쿨’(COOL)의 의미를 짚어보기

‘쿨사과’를 정치적으로 읽는 방식은 ‘쿨’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쿨사과’의 제목을 다시 한 번 펼쳐보자. ‘쿨하게 사과하라’다. 그런데 본 책에서는 ‘사과하라’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나와 있지만 ‘쿨하게’에 대해서는 세심한 논의가 없다. ‘사과하라’ 자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면서 두 저자들은 ‘어떻게’ 사과하라는 방식을 고안해냈지만, ‘어떻게’ =‘쿨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쿨하게’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일단 두 저자들은 ‘쿨’을 단순히 ‘초연한 감정’ 등으로 규정한 것 같다. 여기서 ‘쿨’은 경영학이나 요새 각광받는 ‘PR컴’쪽이 강조하는 기업의 위기 대처 능력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전제가 되는 것은 기업의 본질은 ‘이윤 창출’이며, 그것을 위해 기업의 ‘경영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영 합리성’을 최대한 고수하는 인지적인 태도가 바로 ‘쿨’이란 점이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기 위해 나는 ‘쿨’의 의미를 둘러싼 몇 가지 과정을 거쳤다. 

 

3-1.  성공적인 '쿨한 사과'는 결국 또 다른 권력의 유지 수단이 아닐까

 

먼저 ‘쿨사과’가 건드리는 기업과 쿨의 관계를 ‘감정사회학’의 차원으로 읽어보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기업의 행위를 합리성/효율성에서만 읽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감정사회학자들은 기업의 행위를 분석해보니 기업이란 곳이 상당히 감정적이란 곳임을 알았다. 이런 주장들은 사실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일 것만은 아니다(우리가 이미 일상에서 체험한 부분들을 잘 정리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기업 내 구성원들이 감정의 차고 넘침을 조절/자제하길 원한다는 전제가 이 논의에 깔려 있다. 감정사회학자 헬레나 플람은 ‘경영합리성의 신화’가 기업의 대표적인 감정을 만들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러한 경영합리성이 기업 내 구성원들의 감정을 관리하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들만의 감정 소비 / 해소 방식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주목하는 건 구성원들의 감정 소비 / 해소 방식이다.   

  우선 ‘쿨사과’가 제시하는 ‘훌륭한 사과’라는 모델은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이미지 신장을 위한 수단으로 자주 제시된다는 점부터 짚어보자. 그리고 그 이미지 신장에는 그 조직을 관할하는 리더 /경영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불만이 생긴다. 결국 ‘쿨하게’라는 것도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부분이라면, 그 보여짐이 멋지게 보여지는 결정의 여부가 저자들이 제시하는 ‘쿨’을 구성하는 멋진 몇 개의 사과 방식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해서 쿨하게 사과하는 것도 이미 그 쿨을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쿨사과’의 논지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쿨하지 못한 사과’를 한 사람들이 결국 ‘성공적으로’ ‘쿨하게’ 사과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지나친 '계급결정론'이 아닌가라는 한계도 있다. 몇 년 전, 강준만은 쿨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쿨'의 용법엔 '계급'을 '문화' '취향'으로 바꾼 혐의가 스며있다. 누군들 촌스럽고 싶어서 촌스럽겠는가? '쿨'하기 위해선 투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믿는 구석'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쿨'할 수 있다. "너 돈 없구나"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너 '쿨'하지 않구나"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처럼 '계급'을 '문화' '취향'으로 바꿔 말하는 건 우리 시대의 예법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계급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 '쿨'엔 계급만으론 다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7쪽). - 강준만,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에너지』(인물과사상사, 2007) -

강준만이 말하는 쿨과 '쿨사과'에서 비판적으로 읽어볼 수 있는 개념으로의 쿨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강준만의 주장처럼 '쿨'이 계급의 의미에서 문화적 의미로 넘어갔다고 해서 '계급의 의미'가 온전히 사라졌다고 보기엔 어렵다. '쿨함'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평가받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쿨'은 보임의 과정을 통해 누군가를 미안하게 만들고 주눅들게 만들며 이를 통한 권력 관계가 양상될 가능성도 늘 갖고 있다. 혹은 그런 쿨함을 보임으로써 훼손된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는 기능을 할 여지도 있다. 나는 묻는다. '쿨사과'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쿨한 사과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볼 수 있는 방식이 되는가. 이것은 또 다른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은 없는가.   

  

 

 

 

 

 

 

 

 

 3 -2. 우리 안의 '체르바코프'를 구해야 한다 

감정사회학자 헬레나 플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의 견해에 주목하는 건 기업과 기업의 대표자가 주도하는 기업 내 감정관리를 통해 불가피하게 억압받고 있는 많은 '피고용자'의 입장이다. 쿨한 사과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적은 입장을 따져보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쿨사과'를 비판적으로 읽고 싶은 요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의 '체르바코프'를 구해야 한다. '쿨한 사과'는 권력과의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릇된 권력 자체를 깨진 못한다. '쿨한 사과'는 여전히 그 권력의 잔존을 허용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고로 권력자는 쿨한 사과를 할 수록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지만, 피권력자는 그것을 함으로써 얻는 감정의 이윤이 권력자보다 많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때문에 피권력자는 체르바코프처럼  사과라는 행위에 쩔쩔 매며, 그것이 제대로 된 효과를 얻지 못할 경우 정신 착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사회가 '쿨한 사과'의 대표상을 보고 환호하며 즐기길 원하지만, 권력이 없다고 간주된 일반인들의 '쿨한 사과'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는 점이다. 사과가 루저의 언어에서 21세기 리더의 언어로 부상하리라는 저자들의 의견이 거북한 것은 사과를 둘러싼 승자/패자의 구도 자체를 설정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이미 많은 신경증적 외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세심히 짚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쿨한 사과'가 때론 자신이 성공적인 '쿨한 사과'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배신의 언어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내가 '쿨사과'를 쿨하지 못하게 읽은 이유이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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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5-0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재승 교수님이 이 서평에 대해 깊이있고 신선한 시각이라고 내 트윗에 글을 남겨주셨는데, 갑자기 내가 '쿨하지'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기분 뭐지. 켁.

김호 2011-05-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정재승 교수님과 함께 이 책을 쓴 김호입니다. 제가 본 여러 서평 중 가장 깊이있고, '쿨한' 서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쿨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저도 쿨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중이고, 이를 파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작업중에 있습니다. 지난 3년 이상을 붙잡고 있으면서 제게는 너무나 익숙한 책 '쿨하게 사과하라'를 낮설게 만들어주셔서 제게는 선생님의 서평이 쿨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1 01:21   좋아요 0 | URL
앗. 선생님도 들려주셨군요. 이렇게 써볼 수 있었던 것은 또 선생님과 정재승 선생님이 흥미롭게 책을 써주신 덕분때문이랍니다. '사과'라는 키워드로 논문들을 뒤져보니 흥미로운 분석들이 많더군요. 몇달 전에 저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인데..PR컴이라는 세계가 이런 곳이었구나 살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전에 번역하신 책 <쏘리 워크스>도 읽으려고 챙겨두었습니다. 읽고 또 좋은 생각들 나누길 고대합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꾸벅.
 

 

 

 # 1. 내 '밥상'에 죽음이 찾아온다긔?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모비, 박지연 외, 현암사, 2011)는 '비건'(쉽게 말하면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들의 생활 제안서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사회 보고서라고 거칠게 그 내용을 줄여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찌들게 만드는 증거들을 만나게 된다. 이 증거는 " 아니, 이 기업이 이런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단 말이야?"와 같은 '폭로'의 방식이거나, 아니면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화장실보다 더러운 것은 사실 부엌입니다"와 같이 상식을 뒤집는 설명으로 나타난다(흔히 통계적 수치와 함께). 이를 통해 우리는 아무렇게 방치해둔 우리네 삶의 모양을 점검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우리네 삶의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의 관심 분야를 서적 분야의 장르 선호도로 따질 수 없지만,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생태와 환경을 다룬 서적은 '재미없는' 분야, '밍숭맹숭'한 분야,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호들갑스러운' 분야로 인식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책을 통해 '밥상'에 놓인 것은 반찬이 아니라 '죽음을 앞당기는' 반찬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쳐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바쁘게 살기도 벅찬데, 이런 문제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라는 취급을 받기 쉽상인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연구하는 동무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이런'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적인 지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2. '이런 책'을 읽는 방법 1 -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책'은 환경문제부터 노동의 가치까지 '윤리와 경제'의 접점을 찾으려는 자장 안에서 읽어보면 그 연결고리가 맞아 들어가는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제시되는 열쇳말 중 하나가 '지속가능성'이다. 저널리즘에서도, 기업 홈페이지나 자체 운영 경제연구소 사이트에서도, 정부 보고서에서도 보듯,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트렌드 / 국가 전략 / 기업 전략 등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환경사회학이나 생태경제학 등(최근에는 인문지리학까지)의 학술 담론이 경제와 엮이면서 '지속가능성'은 뜨거운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은 우리의 후손이 더 건강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소중한 정신, 가치가 동반된 실천을 지금 이 세대가 지향하는 태도라는 지극히 규범적인 정의 차원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적극적인 비판을 시도해보는 ‘견해들 간의 영역’으로 관심 받고 있다. 가령, '지속가능한 개발'이라고 하는 용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속가능'과 '개발'은 서로 어울리는 걸까? '지속가능'이 강조되려면 '개발'은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우리의 지금 삶을 유지하는 건 '개발'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잖아, 지속가능이 좋다고 해도 '개발'이라는 초점을 흐려선 안 돼 등. 환경 / 생태 문제가 '자본주의'와 엮이면서 생기는 모순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의견을 제시하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지속가능성’은 뜨는 이슈로 자리 잡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당신이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앤서니 기든스의 『기후변화의 정치학』(홍욱희 옮김, 에코리브르, 2009)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3장 <녹색운동과 그 이후>는 ‘녹색’과 ‘성장’, ‘생태’와 ‘자본주의’ 등과 같이 과거에는 접합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녹색 성장’, ‘생태 자본주의’(혹은 어떤 책 제목처럼 ‘자연 자본주의’) 등의 정책으로 제시되면서, 그것이 갖는 아이러니라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저자인 기든스가 “여러분, 지구가 아픕니다. 이 지구를 위해 우리 모두 재활용에 동참해요! 우리 건강을 다 해치는 악덕 기업을 몰아내요!”와 같은 견해를 책 속에서 펼쳤다면, 이 책은 어느 녹색운동가의 강건함이 담긴 (그러나 외면받기 쉬운) 에세이 정도로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든스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진다. 

 

 

  

 

“우리는 자연을 신성시하거나 자연에 경외감을 갖는 태도 역시 거부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가치의 중심을 인간으로부터 지구 자체로 옮겨가고자 하는 관점도 포함된다. (중략) 녹색운동은 그 배후에 중요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기후변화를 완화하고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경제 성장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중략) 우리는 녹색운동에서 나온 개념들이 과연 얼마나 유용한 지에 대해서도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개념들에는 사전예방 원칙, 지속가능성, ‘오염자 부담’ 원칙 등이 포함된다”(87~88쪽)

 




기든스는 인용된 위의 세 개념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 그 중에서 ‘지속가능성’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용례 속에서 각 주체들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 설정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환경주의자라면 ‘지속가능성’에, 정부와 산업계는 ‘개발’에 더 집중하기 마련(96)이라는 식이다. 기든스는 특히 이런 개념들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그 상황이 불가피하게 묵인하는 권력 관계는 없는가 묻는다. 이미 ‘개발’을 통해 높은 / 강한 자리에 있는 선진국, 그리고 그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이 있다고 쳤을 때, ‘지속가능한 개발’이 ‘개발’의 중요성을 희석시키고 이미 누릴 것은 다 누리는 선진국 중심의 전략으로 나타난다면 개발도상국은 이 상황을 그냥 순전히 받아들여야만 할까?라는 점은 도덕적인 비난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기든스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일정 수준의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이 발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든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호불호가 분명 갈리지만 적어도 ‘지속가능성’을 둘러싼 ‘이견’들이 우리에게 깊고 큰 고민을 준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이를 통해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에 등장하는 저자의 시선을 단순히 삶의 보호, 환경 보호, 생태 보호라는 덕목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살펴볼 가능성을 열어두면 좋을 듯하다. 


  

# 3-1. '이런 책'을 읽는 방법 2 - '투명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책’을 읽을 때, ‘지속가능성’과 함께 살펴볼 또 다른 열쇳말은 ‘투명성’이다. ‘지속가능성’이 정부/ 기업 등의 논의를 통해 다분히 거시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듯한 인상을 준다면, 오늘날 ‘투명성’은 시장 질서 안에서 정부를 비롯하여 기업과 시민사회가 맺는 특정한 관계를 읽어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최근 ‘윤리적 소비’가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과 소비라는 행위의 접점, 그것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2008년 사회학과 학회지 <한국사회학>에 발표된 <한국사회 투명성 패러다임의 전환>(장용석, 송은영 저)이란 논문을 보면, 한국의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투명성’이라는 개념이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가를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은 한국 사회가 ‘기술적 투명성’에서 ‘문화적 투명성’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투명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보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 가운데서 그 이윤을 내기 위해 사용한 정보를 공개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기업과 일반 시민들은 정보를 둘러싼 비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행여 이런 시민들의 투명성을 향한 요구가 적극적인 기업 내 정보 공개로 이어져도, 그것은 기업이 저지른 비리 혹은 환경 오염과 같은 문제들이 ‘이미’ 일어났을 때 뒷수습 차원에서 만들어 낸 제한적인 정보 공개 수준에 머물렀다(회계 감사는 대표적인 기술적 투명성의 실천 전략이다). 그래서 이런 ‘기술적 투명성’은 ‘결과적 투명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을 ‘과정의 투명성’으로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업은 투명성을 적극적인 기업의 전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늘날 ‘윤리 경영’, ‘책임 경영’, ‘지속가능한 경영’ 등의 이미 유행이 된 전략적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투명성’은 기업의 열린 이미지를 통한 이미지 신장 차원과 동시에 기업의 이윤 생산 과정에 ‘시민의 목소리’를 참여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문화적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 3-2. '이런 책'을 읽는 방법 3 - ‘과정을 소비하기’ / ‘투명성’을 요구하기

이런 개념의 설명과 설정이 기업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와 같은 책을 여러 권 읽어보면 ‘문화적 투명성’을 일반 시민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도 구상해볼 수 있을 듯하다. 최근 ‘윤리적 소비’에 관한 여러 기사들과 연구 자료들을 읽어보면서 나는 ‘자본주의와 창(窓)’이라는 설정을 생각해 봤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를 단순히 ‘채식주의자’의 파격적 폭로로만 치부하지 않기 위해서는, 책 속에서 주장들을 제시하는 용법과 그 용법을 시도하게 된 맥락, 그리고 그 맥락의 효과 같은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책’에서 우리가 얻는 지식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는 몰랐던 ‘상품 생산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 과정을 소비자인 ‘나’가 밝혀냈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윤리적 소비’가 흔히 ‘과정을 소비하는 것’으로 소개되는 것도 이제 사람들은 “이거, 중국산이잖아, 에이 안 사”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소비를 둘러싼 ‘과정의 맥락’,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생산과정의 정치경제적 맥락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어낸다는 특성 때문이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이나 예전에 나온 『죽음의 밥상』 같은 서적은 ‘소비’는 포기하지 않되,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랬을 때 “당신은 채식주의자니까. 그런 주의를 따르는 일관된 삶을 사시오” 혹은 “에이 그렇게 나보고 살라고?”와 같은 심심한 이분법보다는 ‘채식주의자’라는 주체로 자신을 선언하게 된 용법을 파악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 용법을 요구하게 된 다양한 맥락을. 그랬을 때 책 속에 등장하는 저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체제가 주는 폐해를 꼬집는다.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드는 상품의 이면, 그 이면을 ‘생산 과정의 윤리’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분석에서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을 기업이 소비자에게 떳떳하고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인 우리가 그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생산과정의 ‘창’을 더 투명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과정을 소비한다는 것’에서 오는 윤리의 만족감이, 실제 과정을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4. 채식 '위주'냐, 채식 '주의'냐  

 

최근 이효리가 한우홍보대사 계약이 끝나자마자 채식 위주로 식단을 조절하겠다는 내용이 기사로 공개되었다. 기사에서는 (내 표현으로) ‘언론스럽게’ “이효리, 채식주의자 선언”과 같은 제목으로 사람들을 흥분한 생선마냥 낚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연예인 생활에 이리도 관심이 많아”같이 평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상도덕에 어긋난 처신을 했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기사와 그 반응들을 읽어보면서 제법 재치 있는 덧글 하나를 봤다. “채식 위주랑..채식주의자랑은 그 차이가 큰데..”

오늘날 우리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지한 일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별난’ 일이다. 과거 무슨주의자는 진중한 선언을 대변하는 사람을 나타냈지만, 이제 무슨주의자는 그냥 형형색색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한 범주로 취급받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혼자 지키고 싶은 일이지만 찬사와 희화화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가엾은 존재의 현실을 보여준다. 차라리, 희화화라도 한다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와 대단하시네요” 같은 찬사는 내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오, 남들에게 깊은 관심 받을 사안도 아니란 걸 보여주는 비극의 답례일 것이다.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타인이 꾸준히, 그렇지만 티는 나지 않게 던지는 의문과 엮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보여준다. 당신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당신의 일관성을 의심하기. 이런 의심은 이제 ‘경제 인간’이라는 제법 철지난 개념어를 둘러싼 거부할 수 없는 시장 체제가 무슨주의자의 일상 생활에 더 깊이 관계맺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징후다. 어떤 면에서 이효리가 어겼다는 그 상도덕의 문제는 이효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지른 경솔함을 지시하는 비난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무슨주의자로 살았을 때 다가오는 어려움을 바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에 있다는 것이리라. 그랬을 때 ‘채식주의자’로 간주된 이효리의 삶보다 더 곤란함을 겪고 있는 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채식주의자들이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건 사실 채식만 한다는 ‘별종’으로 분류된 시선이 아니라, “너 그것만 먹고 힘이 나겠어” 뒤에 생략된 표현. “너, 그것만 먹고 힘이 나겠어. (사회 생활하려면) 고기 먹고 힘내서 돈 벌고 계속 노동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야지”라는 일상 속 사람들이 쏟아내는 규범적 시선이 아닐까. 고로 우리에게 ‘채식 위주’로 산다는 것과 ‘채식 주의’로 산다는 것의 간극은 더 멀다. 쉽게 말해서 ‘채식주의자’되기는 곧 당신을 순수한 선언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 사회를 살아낼 만한 경제적 자격이 있는가라는 여부를 판단하는 시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채식주의자는 한편으로 ‘대단한’ 취급을 받는 이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단한 취급이 진정한 찬사인지, 아니면 당신이 이 자본주의적 삶을 지켜나갈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섞인 의문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육식주의자'라는 언급이 더 이상하다는 것에서 오는 '채식'주의자의 이질감과 함께)
그런 면에서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는 ‘별종의 채식주의자’들이 건네는 ‘순수한’ 에세이가 아니라, 채식주의자라는 주체 되기를 통해 자신들이 겪어낸 이 사회의  자본주의적 시선을 향한 셀프 르포르타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채식 자본주의'라는 신조어도 얼마 안 있으면 등장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신조어 앞에 어떤 것에 더 방점을 찍을 것인가? 혹은 그것을 요구받게 될까? 둘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까?  

 

아직은 덜 여문 생각.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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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5-0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책들 소개 잘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판단이 쉽지가 않네요...좀 더 내공을 쌓은 후에...ㅎㅎ..

얼그레이효과 2011-05-03 12:18   좋아요 0 | URL
여강여호님 반갑습니다.^^ 판단이 쉽지가 않다는 견해부터, 바로 여강여호님 고민의 훌륭한 성과가 나타날 기분이 드는데요!

비로그인 2011-05-03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는 방법'을 앞으로도 계속 써주시면 안 될까요? 저 같은 사람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암튼 고맙게 잘 봤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03 12:19   좋아요 0 | URL
후와님 오랜만입니다.^^ 힘이 닿는데까지, 질리지 않을때까지 한 번 이런 컨셉으로 계속 나가보죠 뭐! 저도 후와님의 글 통해 많은 도움 얻고 있습니다. 감수성의 팽창이라고 할까요*_*

노이에자이트 2011-05-0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이라는 기든스의 발상이 눈에 들어옵니다.선진국과 후발국의 이런 갈등은 늘 논란과 쟁점의 장이 되더군요.너희는 다 재미 봐놓고 우리가 해보려고 하니까 왜 나쁜 놈 만드느냐는 항변에 뭐라 뾰족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달까요...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 논리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5-0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효리의 채식주의 선언은 따로 글을 써주셔도 좋겠습니다.예전에 개고기 민족주의자들의 논리가 '왜 개만 불쌍하냐.돼지 소는 먹으면서'였는데 채식주의자들에겐 '식물도 죽여서 먹는 거야'하는 공격이 들어오더군요.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채식주의를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냥 또라이로 보는 사람이 많죠.

얼그레이효과 2011-05-0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관련 논의들을 최근에야 좀 읽고 찾아봤는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더군요.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 흥미로운 표현만큼이나 씁쓸한 현실이 더 복잡하게 얽혀있어 안타깝습니다. 이효리글은 조금 더 치밀하게 접근해서 다음에 한 번 더 꺼내보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04 16:39   좋아요 0 | URL
기대하겠습니다!
 

 

 

 

 

 

 

 

 

김 원 선생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 이매진 출판사를 통해 다시 나왔다. 2001년, '새내기'란 이름으로 이런저런 형님, 누나들의 '열혈 투쟁기'에 이끌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고자 애썼을 때, 당시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당시 함께 꽂혀 있던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이란 책과 함께) '열혈'이 늘 가까이 하고 있던 좌절에 대한 이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혈'을 더 키우고자 했던 의지에 대한 이해에 대해. 1999년 이후의 컬리지언 총서 시리즈 중 하나였던 본 책은, 한때 학술계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했던 '학생운동'에 관한 거대 담론에 대한 연구들이 가려놓은 '일상의 문제'들을 추적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여기엔 문화연구가 주목하는 '일상생활'의 문제에 대한 두터운 시선, 그리고 그 시선으로 인해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에 대한 문화적 조명이 동반된다.   

 

 

 

 

 

 

 

 

 무엇보다 한국의 학술 연구 성과에 대한 '대중적' 틀을 함께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부실한 현 출판 상황에서 국내 연구자의 좋은 성과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서 기쁘다. 지금은 많이 확산되었지만, 본 책의 원재료인 김 원 선생의 석사 논문 <광기의 시대 :1980년대 한국 대학생의 하위 문화와 대중정치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사례 연구>가 나온 1995년 당시만 해도, '구술사'라는 연구 방식은 학계 내에서 그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본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연구 방식이 가져다 준 '사람들의 목소리 전하기 / 기록하기'는 사건 그리고 역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동사 연구를 비롯해 학생운동을 새롭게 조망하고자 했던 후속 연구자들에게 많은 참조가 된 김원 선생의 연구 성과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이야기하기 위한 재료로 반영되길 희망해본다( 개정판에 추가된 보론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 책의 테마가 마음에 드는 분은 전희경 선생의 <오빠는 필요 없다>와 오하나 선생의<학출>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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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3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개인적으로 노무사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노동사에 대해 제가 읽을만한 책이 있을까요?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며 지금은 아파트 경비실에서 근무를 하는 32살 노총각인데, 사회의 현실과 뭔가 전문적인 것을 해보고 싶어 노무사 공부에 도전을 하고 있거든요. ^^ 부끄럽지만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무뢰한에 가까워서요. 제가 좀 식견을 기를 수 있는 책을 좀 알고 싶어서요. 왠지 얼그레이효과님이라면 아실 것 같아서 수줍게 질문 드려요. 제가 좀 예의가 없죠? ^^;;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7   좋아요 0 | URL
아..저도 사실 문의하신 관련분야(노동사)로 상세히 읽은 책은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정도밖에 없네요. 노동사 분야로는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소에서 몇 년 전에 '노동사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들을 해왔고. 그래서 그 성과물들이 있을 거에요. 제 포스트에 있는 김원 선생님도 노동사 연구에 주력하시는 분인데, 아마 그 분 블로그(네이버에 있습니다)에 '노동사 연구'에 대한 성찰이 있을 겁니다. 성찰이니, 아마 노동사 연구가 원래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소개가 있겠죠? 김원 선생의 글이 예전에 좋았는데, 도움이 되셨음 좋겠네요.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22   좋아요 0 | URL
그 외 읽지는 않았지만, 이영석 교수라고 이분도 경제학사 연구하시면서 아마 외국 노동사 쪽으로 공부하시면서 노동사 쪽 책들을 내셨던 것으로 기억이 나네요. 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란 책도 있는데, 그건 어떤지 못 읽어봤네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책도 노동사 책이 있을 건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요. 책 이야기는 늘 좋아합니다. 얼마든지 대화해요~! 도움이 못되서 죄송합니다.

루쉰P 2011-05-15 07:47   좋아요 0 | URL
오~~이런 고급 정보 감사합니다. 김원 선생님의 블로그를 좀 가봐야 겠네요. ^^

노동자로 살아 온 세월이 있다보니 기계처럼 쓰여지다 버려지는 인생이 한심스러워 저 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근데 이왕이면 그 공부를 하면서 노동사에 대한 부분도 정확히 알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서요. ㅋ

저도 책 이야기는 엄청 좋아합니다. 사실 사회학 서적은 읽는 것은 두려워 하는데 꽤 많이 사는 편이에요. 뭔가 지금 내 인생을 분석해 줄 지침서 같아서 말이죠. 헤헤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이 힘을 떨어지게 한다는 시대에, 루쉰님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공부를 했던 사람으로서 기쁘네요.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1  

개콘 <생활의 발견>이 화제라고 한다. 사실 이 코너가 지향하는 개그 컨셉이 그리 색다른 것은 아니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두 분 토론>처럼, '생활을 읊는 개그'는 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 같다. 어쩌면 <생활의 발견>은 이런 개그 컨셉이 대중들에게 가장 잘 먹힌다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코너인지 모른다. 개그맨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그란 것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같아서 우리가 배를 잡고 웃는 장면이 결국 우리의 삶 그 자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임은 여전히 신기한 대목이긴 하다. (나처럼 '진지함'세포가 온 몸에 박혀서 타인을 웃기려는 능력이 없음을 '자학'하는 사람에겐 그 신비감은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개그를 평할 때, 우선 '일상성'이라는 용어를 갖다 쓰면서 그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90년대스러운 것'같다. 다만 '일상성'이란 용어가 그동안 한국의 영화비평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달라진 위상을 갖게 되었는지 검토해 보는 것은 내가 <생활의 발견>과 같은 개그 컨셉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줄 것 같다.  

 

# 2 -1

한동안 한국의 영화비평계는 '일상성'이란 용어를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렴풋이 내가 이 용어에 대한 궁금함을 갖고, 이 용어가 자주 들어간 한국 영화를 찾아보던 때가 199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영화잡지를 뒤적거리면서 나는 '일상성'이란 용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 줄 몰랐지만 이 용어가 자주 들어가 있는 영화들을 보면서 "아..이런 게 일상성인 것인가" 수준으로 그 용어를 '어림짐작' 알고 있다 생각했다. 이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알지 못하고 같은 진부한 죄책감 놀이에서 벗어나 당시 이 용어가 반영되던 영화 특성에 대한 담론을 살펴보면 우리의 '지루한' 삶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그런데 그것을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는 '나'가 받는 어떤 놀라움, 작은 재미들에 대한 재치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이 용어가 흥하면서 영화배우들이 우리처럼 손톱을 깎고, 기계치인 아버지에게 텔레비전 트는 방법을 알려주고, 서로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들이 '소소하게' 펼쳐지는 상황 같은 것이 더 미세하게 다른 영화들에 퍼져 나갔다. 누가 일기를 써보라고 하면, 그 일기에 "오늘 나는 아침부터 뭐 했고, 점심엔 뭘 했고..."같이 적는 것처럼. '일기'같은 영화들이 한 때 유행이 되었다.  주류의 이런 정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전염'처럼 계속 확산/전파되어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범'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일상을 낱낱이 보여주기, "아, 맞어 정말 우리 이렇게 살잖아"라는 말이 나오게끔 만드는 장면을 재현하기가 저널리즘 영화비평계의 찬사를 구할 수 있는 수단, 미래의 박찬욱, 봉준호를 꿈꾸는 이들이 한국의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입상할 수 있는 '창의'로 간주되기도 했다. 

 

   

 

 

 

 

 

 

 

 

# 2-2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널리즘 영화비평계에서 '일상성'이란 용어를 미덕의 흔적이 아닌 퇴보하는 영화의 흔적을 찾고 싶을 때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느 시기, 어느 영화라고 다 지칭할 수 없지만 비평가들은 '일기'같은 영화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공교롭게 그런 시선을 접할 때 나 또한 '일기 같은 영화'에 진부함/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입맛'이 까다로워졌다고 할까. 일상을 스크린을 통해 '보고'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고 싶었다. 내겐 그 작품이 에릭 로메르의 <비행사의 아내>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스토리와 그 의미를 구구절절히 읊기 보단, 뭐라고 할까. 일상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지만 어떤 '정신착란적'인 행위들이 영화 속에 드러나는 것. "에이 또 그 이야기야?"와 "에이 설마 일상에서 저런 일이 있을까?"라는 그 질문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는 영화(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그래서 가끔 다시 찾아본다)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 3 

사실 요즘 흥하는 개그 컨셉을 보면 '정신착란적'인 캐릭터가 주는 야릇한 웃김은 없어진 것 같다. 대부분 웃겨야 한다는 강박 속에 나오는 것은 인기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그 자체, 혹은 그 자체를 보는 우리들. 마지막으로 그런 우리들이 겪은 미세한 에피소드를 그대로 보고 하는 개그가 뜨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가 전문적인 개그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건 건방지고 웃긴 일이지만, 적어도 이런 개그가 흥하는 데 있어 그 공감을 채우는 대중의 특성 같은 것은 나름대로 내 색깔을 칠해볼 수 있겠단 생각을 해 봤다. 난 그것을 '말적인 몸'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이고 싶다. 

'말적인 몸?' 요즘 개그가 '몸'이 아닌 '말'이 대세란 것은 다 느낄 것이다. (어쩌면 '몸개그'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은 '몸'을 통해 웃긴다는 영역이 그만큼 작다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짝짓기 프로그램이나 심지어 우리네 소개팅에서도 말로 웃기는 사람은 매력이 급상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이런 개그를 의식하고 내 개그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연구를 일상 속에 하기 시작했다. 유머러스함이 듬뿍 담겼다는 타인의 재주를 글자로 / 말로 확인하면서 우리가 평소에 해 왔던 일들을 남을 웃기기 위한 의도로 혹은 우연하게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일상 속 웃기는 이야기라며 글을 올리고 수많이 달린 덧글 속에서 자신의 웃기는 능력 있음/없음을 확인하는 것은 인터넷 언어가 글과 말의 중간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그 진부한 커뮤니케이션학적 관점을 대입시켜보는 것을 넘어, 일상 속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개그'의 코드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하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 

 

# 4  

사람은 입이란 신체기관이 있어 그 기관이 전담하여 '말'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끔 <생활의 발견>과 같은 컨셉의 개그를 보고 있자면 개그맨의 퍼포먼스 자체가 사람의 말과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개그맨 A는 남자 친구 역을 맡은 개그맨 B와 함께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을 '우리 처럼'시키며 삼겹살을 시킬 때 우리가 쓰는 생활의 언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의 몸짓은 내게 '몸'보다는 '말'로 느껴진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도 개그이지만 그들의 몸 전체가 '말'로 느껴진다는 기분이 보는 내내 들었다. 그러다보니 이 말이 주는 논리적인 치밀함이라고 할까? 개그맨 특유의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미리 배치된 그 논리정연한 치밀한 퍼포먼스가 '말 잘하는 사람'이 흔히 치는 개그 이상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그들이 인정받는 개그는 우리네 일상에서 당연하게 일어난다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부리고 싶은 욕심은 그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을까?에서 출발한다. 갑자기 터지는 작은 광기, 그러나 그 어색한 놀람 속에 이후 충분히 해석 가능한 행동들.  

"패밀리 레스토랑"과 "김밥천국"의 대립 구도, 항상 계산지는 남자 곁에 두는 점원의 행동'에 대한 발견,  백화점에 가서 남자/여자가 보이는 구분된 행동 등등등 우리의 / 우리가 찾는 개그가 늘 '남녀탐구생활'같은 관점에  치중되어 있다는 건 이 상황 자체를 '웃김의 강박'을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는 일상 속 사람들의 강박은 아닐런지. 그 강박을 '웃겨야 함'을 업으로 하는 개그맨들이 더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어느 문화평론가의 글 제목처럼 "웃으라고 윽박지르는 세계"에서 우리의 일상을 빽빽하게 전하는 이 '말적인 몸'같은 개그를 통해 내가 요즘 웃고 있는 건 거기서 감지되는 '웃음'에 숨겨진 슬픔 때문이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해석은 각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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