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긴 글을 꾸준히 못 쓴 지가 2011년 2월을 마지막으로 1년이 지났다. 중간에 서평 요청을 받아 겨우 숨을 돌렸지만, 불만족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또 긴 글을 못 쓸지 모른다. 그래서 긴 글을 못 쓰는 이유와 슬럼프에 대한 긴 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사실 편집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자신감은 잃은 부분은 문장이었다. 더 나아가 자신감을 잃은 부분은 '문자'였다. 글자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면서, 계속 내 마음속의 생각이 붕붕 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이는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감을 잃는다는 건, 글을 쓰면서 손이 떨리는 데 있지 않았다. 글자를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이건 분명 편집이라는 내 밥벌이가 된 행위의 숙련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글자에 대한 확신은 글을 잘 쓰냐, 못 쓰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글을 잘 보냐, 못 보냐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글들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나는 정녕  글자를 정확하게 보면서 쓰고 있는 것일까.

 

#2

 

이 생각의 과정은 원고나 책을 읽는 행위의 자기분석을 요구했다. 글을 읽는다-글자를 본다의 연결성 속에 읽는다/본다로 일단 내 행위를 쪼개어보았다. 읽는다는 본다를 포함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두 행위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 혹은 괴상한 추락.

 

#3

 

조절되지 않은 찝찝함 속에서 글자는 떠돌고, 떠돌았다. 140자의 감옥 속에 유랑하는 글자를 잠시 가두어,  생각이라는 놈과 대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엉덩이에 낀 팬티 만지듯, 부자연스러웠다.

 

#4

 

글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니, (이 말은 곧 단순한 오자 수정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를 대하는 내 마음의 부실함과 가장 긴밀하게 만나는 글자 스스로가 구현해내는 개념이다) 또 하나의 구멍인 입에서 냉기가 마구 나온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냉기, 직관에서 나오는 얄팍한 튀는 시선의 냉기. 닿으면 얼어버릴 것 같다.

 

#5

 

손은 뜨겁다, 다만 눈이 차갑다. 눈이 차가워지니 글이 안 써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2-03-24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한글로 된 책을 못 읽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교정을 계속 보면서도 책은 읽지 못하겠더군요... 힘내세요!! 오랜만에 들러서 별 영양가도 없는 댓글만 남깁니다^^

얼그레이효과 2012-03-26 06:08   좋아요 0 | URL
후와님, 오랜만입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새로 만들려던 둥지에 썼다 망한 글.

 

 

 

 

 

 

 

 

 

 

 

 

 

 

 

 

 

 

 

 

1. 재판장의 극장화 

 

사실 <부러진 화살>에서 눈여겨볼 점은 김경호 교수(안성기 역)나 신재열 판사(문성근 역) 간의 줄다리기가 아니라, 그 줄다리기를 관람하는 법정 내 방청인들이다. 방청인들은 재판을 관람하면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영화는 사운드 처리를 통해 희미하게 그리고 서서히 재판에 대한 방청인들의 개입을 시도한다.(그리고 끝내 방청인들의 개입은 시각적으로도 분명한 소동으로 이어진다.) 이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김경호 교수가 벌이는 투쟁에 점점 동참하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만약 이 영화가 시종일관 판사, 검사, 변호사, 피의자의 '진술'로만 진행되었다면 영화적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김경호 교수가 맞닥뜨린 사법 권력의 부조리함을 법정 내부에서 영화 관객과 같은 처지에 있는 방청인들의 시선과 병렬 배치시키는 것. <부러진 화살>에서 방청인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큰 기능과 효과를 갖는다.

 

법정의 질서와 극장의 질서는 닮은 구석이 있다.  두 공간 다 '침묵'을 지켜줄 것을 요구한다. '소리의 개입'은 영화를 보는 자를 향한 방해이자, 이는 곧 영화에 대한 방해로 여겨진다. 법정도 마찬가지다. <부러진 화살>에도 종종 나오는 장면이지만 판사는 부단히 법정 내 방청인들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방청인들의 소란은 곧 법 집행의 방해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화사를 잠시 뒤져 보자. 극장에서의 침묵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영화사 초기,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본 관객들은 놀람을 어떻게든 감추지 못했다. 영화에 대한 신체적 반응은 주위 사람들이야 어떻든 상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 보기는 '소리'의 측면에서 침묵에 대한 동의를 뜻했다. 초기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신체적 반응을 통해 영화 속 장면의 '사실'을 인식했다. 소스라침은 영화적 장면과 사실로서의 풍경 그 자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하나의 징표였던 것이다. 그 후 영화 관객의 침묵은 근대적 징표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근대인으로서의 문화적 기준이 세워지고, 그중 영화 보기상의 침묵 행위는 자신이 근대인이라는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잠시 점핑. 법정과 극장은 '근대적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해왔다. 그런 점에서 <부러진 화살>에서 인상깊었던 법정 내 소란 장면은 근대화라는 체제가 가진 인간이 만들어온 어떤 엄밀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가진다. 법정 내 방청객이 보여주는 재판의 부조리함에 대한 적극적인 / 즉흥적인 '반응'은 영화사 초기의 '전근대적'인 영화 관객의 반응으로 간주되어온 신체적 반응(소스라침을 비롯한 이외의 표출 행위 등)과 만난다. <부러진 화살>에서  이러한 '전근대적 효과'는 '근대성'의 모순을 폭로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듯하다. .(김경호 교수는 영화 속에서 법과 수학은 문제가 분명하면 답도 분명하다며 체계의 엄밀성을 강조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외려 법이 갖고 있는 온전함/엄밀함의 이미지를 향한 비판적인 메시지로 전환되는 듯하다.)

 

 

2. 극장의 재판장화

 

이제 영화 바깥 이야기. 하지만 영화 안 이야기이기도 한. 나는 사실 이런 류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영화적인 것'을 탐문하고 싶다. 이 영화 속 내용이 얼마나 사실이고 허구냐를 가르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 최근 불고 있는 '사법 권력 비판'의 테두리에서 이 영화를 계속 교과서적으로 만들려는 언론의 제스쳐를 비롯한 여러 반응은 사실 점점 '영화적인 것의 퇴보'를 재촉하고 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좋은 작품이란 것은 한 소년이 사법 제도의 틀 속에서 죽어야 하는지, 아니면 살아야 하는지를 고심하는 '토론 내용'자체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화적 장치였다. 밀폐된 공간을 상징하는 각 인물들의 얼굴 표정(더운 날씨에 못 견뎌 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선풍기 등. <부러진 화살>도 이런 식의 감상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극장의 안과 밖은 영화 속 재판장을 방불케 하는 것 같다. <부러진 화살>이 갖는 사회 고발의 기능도 중요할 테지만,  우리는 이제 영화를 하나의 '사회 교과서'로 삼아버리는 시대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127120330

 

오랜만에 매체에 기고했던. '끄적끄적'의 힘이라도 길러야겠다고 다짐했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지 2012-02-2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새 둥지를 찾고, 만드는 건 어렵구나. 에잇.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LAYLA 2012-02-2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백 ㅋ

드팀전 2012-02-23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이름이 낯설어요.^^ 제가 좋아했던 홍차를 연상시키는 예전이름이 ㅎㅎ 좋다는

얼그레이효과 2012-03-07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샥샥이 라이프~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른 동네에서 생활해보려고 합니다. 알라디너 분들 덕분에 많이 배우고 많이 깨닫고 갑니다.

- 얼그레이 효과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샐러드소년 2011-12-30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헉... 어디로 가시는지는 알려주셔야죠 ㅠㅠ

2011-12-3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