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용한 부부 정남과 혜연 . 각자 일에 바쁜 터라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혜연이 뭔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주말에 소소한 집밥을 차렸다. 그런데 둘 다 서로에게 문제가 있어 걱정하는 건 아니고, 각자 바깥일은 집에선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묵묵한 서로의 표정과 마음이 궁금할 뿐이었다. 혜연이 먼저 용기를 내 집밥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근데 정남은 "와 맛있겠다" 이 한마디 이후 멍한 표정을 한 채 밥알을 하나하나 건졌다. 남편이 조용한 편인 건 알았지만 집에서도 바깥에서도 내내 침울함을 드러내진 않는다고 생각해왔기에 혜연은 정남에게 조금 세세한 질문들을 던져보려고 준비했다. 허나 정남은 먼저 "혜연씨 미안해.  나 조금 잘게" 하곤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혜연의 성격이 이런 순간이 닥치면 "야 내가 힘써서 실컷 차렸는데 이거만 먹으면 어떡해?" 하는 편은 아니고, "어, 그..그래. 안 먹은 거 다시 냉장고에 넣어놔야겠다" 하는 편이라, 혜연은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자신이 차린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2

설거지가 끝난 뒤 혜연은 커피물을 올리고 침실을 조용히 봤다. 정남은 곤히 자고 있었다. 혜연은 남편이 깰까봐 볼륨을 줄인 채 못 봤던 드라마를 챙겨보고 예능 프로도 보았다. 프로를 연달아 보니 이 정도면 됐다 싶어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침실을 갔다. 혜연은 정남이 조용히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겠거니 싶은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남은 또 자고 있었다. 혜연은 속으로 '이 사람 이렇게 잠이 많은 편이 아닌데..' 생각이 들어 정남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정남씨 요즘 무슨 일 있어?" 정남은 처음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기운이 스며든 목소리로 "혜연씨. 요즘 회사 사람들이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갑작스레 꺼냈다. 

 

3

정남은 한 중소기업 F의 팀장이다. 팀장직을 맡은 지 4개월째. 입사 뒤 성격이 워낙 둥글어 '뒷담화'가 원천인 직장 안에서도 소재로 올라오지 않는 '심심하지만 원만한' 캐릭터로 각인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선하다'였다. 이는 정남의 둥글둥글하고 성실한 성격을 그대로 대변하는 '선함'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정남은 선배들이 새로 맡은 일이 생기면 "선(배! 이번에) 하(시는 일 힘드신 것 있음 저한테) 다(말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건네곤 했다. 이 말이 하나의 레퍼토리처럼 주변 동료들에게 인식되면서 정남에게 별명 하나 지어주자는 술자리에서의 제안에 누가 이런 축약어를 아이디어로 낸 것이었다. 

 

4

시간이 흘러 정남 밑에도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정남은 어느새 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근데 팀장이 되고 나서 몇 주 뒤, 정남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몇 번 겪었다. 남을 도와주는 데 익숙한 처지는 자신이 누군가의 일을 '받아 하는' 사원일 때 가능했지만, 정남은 이제 팀장의 입장. 근데 그는 누군가에게 일을 나눠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부회의 때 자신의 팀에 떨어진 업무가 있으면, 이를 세세히 공유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일단 자기가 묵묵히 쌓아둔 뒤 '밑에 친구들이 요즘 가뜩 바쁘니 그냥 내가 해버리지 뭐'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5

일을 잘 '분배'할 줄 몰랐던 정남은 혼자 끙끙 앓고 있다가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오거나 해서 위에서 시킨 것을 마무리하곤 했다. 혹은 조금 더 마음을 쓴다면 자신이 그나마 터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일을 조금 준 뒤 부탁을 해 일을 마무리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런 업무 방식이 지속되자 정남도 뒷담화 소재에 오르기 시작했다.

"야 우리 팀장은 지만 깔끔하게 일해. 아니 같이해서 만들어가는 맛이 있어야지."

"그러다가 뭐 하나 잘못되면 우리는 벙~쪄서 이게 무슨 일이래? 맥락도 모르고 놀라게 하고 말이야.."

 

한 팀원은 조용히 커피를 마시다가,

 

"아 보통 그런 성격 밑에 있으면, 크기가 되기 어려운데.."

 

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6

정남이 이런 팀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허나 자신의 이런 성격이 한순간에 고쳐질 리 만무하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그래서 고민은 커졌다. 자신의 업무 방식 때문에 팀 내에서 제대로 뭔가 일이 처리되지 않아 혼날 때가 생기면,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번엔 제 미스입니다"라는 말이 한 번, 두 번  자주 나오게 되었다. 

 

7

혜연은 이불을 걷어내고 정남에게 근처 공원에 가서 좀 걷다 오자고 말했다. 정남은 조용히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아내를 따라 나섰다. 혜연은 정남의 손을 잡고 조금씩 공원을 거닐었다. 서로 말은 없었다. 정남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혜연이 웃으며 "힘 좀 내" 하곤 등을 툭 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정남이 짓는 웃음의 쓴맛이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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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혜진은 오늘도 자신이 다니는 출판사에서 나온 에코백에 교정지를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은 좀 해보자라는 다짐. 그러나 업무 시간 내내 시달린 잡무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잠이 쏟아질 뿐이다. 그녀는 결국 '새벽3시'를 에너지의 회복 시간으로 갖게 되었다. 

회사에 남아 저녁을 먹고 조금 일을 더 하고 갈까?에서 이제는 6시에 칼퇴를 해 일단 집으로 돌아가 잠을 푹 잔다, 그리고 휴대폰 알람을 새벽 3시에 맞춰놓는다. 

'새벽 3시'에 깨어 무얼 한다는 게 자기 고유의 방법은 아니었다. 우연히 정혜윤의 책을 읽다가 그녀가 제안한 자기만의 시간법이 생각이 났고 자신의 리듬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다는 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혜진은 유난히 이 부분에 연약했다. 자신이 한 일, 한 말에 대해 유난히 뒤를 돌아보는 편이었다. 평소 긴장감을 달고 사는 혜진은 직장을 다닐수록 퇴근 뒤 녹초가 되는 정도가 심해졌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삶.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내야 하는 책 일정은 다가오는데, 업무 시간인 '낮'에 쓰는 집중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걸 그녀는 느꼈다. 잡무가 주는 분산적인 일환경으로 인해 정작 낮에 시간이 생겨도 교정교열 등의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혜진은 야근을 택했다. 허나 야근을 위한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이미 하루에 쓸 수 있는 육체적, 심리적 에너지는 고갈된 상태였다. 낮에 나타난 집중력 분산은 야근에까지 미쳤다. 해보자 하고 펼친 교정지를 뒤로한 채,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새로나온 책 정보 등을 찾아보다가 동료에게 먼저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선 교정지를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비유를 들자면 (오늘도 공부는 결국 안 했지만) 도서관엔 갔다는 '출쳌'의 마음이 거꾸로 되었다. 그녀에게 '출쳌'이란 집에서 집이 아닌 곳을 가서 무엇을 하는 게 아닌, 외려 집이 아닌 곳에서 집으로 가 무엇을 해버리는 게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무얼 해보자라는 상황이 일어나면서 혜진은 6시 칼퇴, 일단 자기, 그리고 새벽3시에 일을 하기, 출근 준비라는 생활리듬을 만들어버렸다.


허나 새벽3시의 고요함이 그녀의 감각을 분산에서 집중으로 깔끔하게 도모해줄 리 없다. 새벽3시는 고요, 침묵, 사색의 시간 대신 어제 업무 시간에 일어났던 사람들의 말,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자극'을 준 사람들을 '신경쓰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그간 못 읽었던 책을 펼쳐볼까? 대책을 세워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첩에 일기를 적어볼까? 몇 자 적어보지만 한 일을 적어보니 자신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책만 늘어간다. 화장실에 들어간 혜진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욕설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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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내가 주목했던 가장 '송창의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감내하는 캐릭터에 최적화되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정한다. 그에게 시집온 채린에게 제시하는 해결책은 '분란을 일으키지마'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갈등을 싫어한다. 선택을 두려워한다. 선택의 두려움을 알기에 선택 이후의 인내를 일찌감치 예상하며 혼자 남몰래 술을 마시고선 속을 삭힌다.

결정, 선택 이런 것들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그는 '당신이 좋아하는 건 뭐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람이다. 선택피로감 혹은 결정피로감 안에서 그는 삶의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둔다.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시 그가 최후로 꺼내는 카드는 "미안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다.

이 갈등의 봉합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일상을 더 피곤케 하는 대안을 내놓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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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 동아시아의 사상은 가능한가? 아이아 총서 1
쑨거 지음, 윤여일 옮김 / 그린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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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동아시아 사상의 흐름 읽기`가 아닌,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 읽기 그리고 이에 관심 많은 편집자들이 참고했으면 하는 책. `잡감`이란 것에 대해 중요한 문제의식을 심어주기도 하는 책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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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은 말의 덧없음, 소위 침묵예찬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자 같은 조언에 반감이 생긴다.


2. 침묵예찬이 '어떤 침묵'이어야 하는지 고민되지 않고, 마치 애서가나 인문주의자들의 감흥에서 비롯된 무형의 선한 감정으로만 떠도는 것 같은 형태에 대한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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