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아가지 못하는 분노. 우리 시대는 과연 '분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분노를 어리게 보는 사람들은 어림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렇기때문에 뭔가 분노와 행동이 이어져야할 때, 분노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참자'고 말한다. 그것이 '준엄한 분노'를 위한 성실한 준비로 연결된다면 납득할 만하지만, 그 시간을 자신만의 유희로 '자위'하려는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싶은 선의는 없다. 그것마저 다원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그렇게' 넘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면, 가운데 손가락은 내 머리보다 솔직할 것이다. 

고로 사람들의 입에서 관성적으로 튀어 나오는 "죄송합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서요"라는 말에 담긴 우리들의 생각은 가슴 속에 묻어난 그 어떤 '비판적 사고'를 도모하도록 한다. 분노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이들, 나는 이들이 '관객의 윤리'에 갇혔다고 생각한다. 입만 산 사람들은 그래놓고 '강단 좌파', '입 진보'라는 꼬리를 달기 좋아하며, 자기 예외의 논리로 맞선다. 남의 집에 불이 났는데, 그것을 걱정하지만, 물을 채울 양동이가 있는지 위치만 확인하고서는, 그냥 누가 대신 물을 뿌려주겠지라는 심리. 나는  어떤 역사적 '대사건'을 바라고, 그 '대사건'을 하나의 희생양으로 삼아 대중들이 이것을 기회로 일어나야 한다는 구호를 촉구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무기력감. 걱정은 하지만, '죄송합니다'라는 말 하나를 인터넷 덧글로 남긴 채, 사실은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근황을 다른 커뮤니티 사람들과 낄낄 거리며, "사람이 어떻게 매번 치열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조금 쉬어 가야죠.."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어떤 예의의 차원으로 몰고 갈 생각도 전혀 없다. 예의에 대한 굴복 말이다.) 

관객이 있다면, 관객이 낄낄 거리거나 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무대, 그리고 그 무대를 장식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관객도 참 다양한 성향이 있겠지만, 무대 위 사람들의 퍼포먼스에 일희일비하는 것에 만족하는 관객, 그 일희일비에 수긍하는 것에 그치는 관객에게 그 무대 위 사람들은 자신이 '광대의 운명, '광대의 윤리'에 복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하지만 이 광대를 자조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관객의 윤리가 만들어 낸 '상상의 대상'이라고 해두자.) 

현실 세계의 수많은 열악함들이 우리를 뒤덮는 가운데, 우리에게 정치 현실이란, 그리고 그 정치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교양이란 회사에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지내기 위해 '낯선 공백'을 채우는 '정치  정보에 종속되고 만다. 고로 정치 정보의 '기능'은 정치 교양이 갖고 있는 잠재성, 현실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대화의 종결과 함께 틀 지운다. 고로 사람들의 대화는 또 다른 역사적 대사건을 기다리고, 사람들은 끊임없는 대사건의 연속에 그 대사건이 주는 '진지한 자극'들을 쉽게 잊어버린다. 

솔직히 말해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사람들의 몰아치는 이 '반성'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한. 원한. 분노. vs, 대, 대결...혹시 우리는 이 '반성'을 현실 세계의 답없음과 교환하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고로 이 반성은 '관행적 반성', '기계적 반성'이 되어, 우리는 또 다른 노무현을 만들어, 거기에 '희생양 의식'을 투여하는 것은 아닐까. '나'가 다행히 살아 있어, 죽은 이의 넋을 기리며, 그 뜻을 받들자는 구호의 욕망 속에, '지금 당장' 의지를 분출할 이 시간을 유예하고,그 시간에 자신의 '약함'을 동정 어린 변명으로 내세워 그냥 시간 속에 묻혀버리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고로, 그렇게 우리 이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구호 또한 '관객의 윤리'에 갇힌 대중들에 의해, 스쳐 지나가는 역사적 대사건의 하나로 남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냥 광장 하루 갔다 왔어. 출석했어. 나 장하지'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 받고, 그것에 대한 만족으로 '우리는 할 일 다했어'라고 우리의 권리를 애써 축소하고 있지는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담론과 해방 - 비판이론의 해부
김경만 지음 / 궁리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당한 내공의 책이다. 읽으면 머리가 시원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나는 <'대딸방'과 '술안주'로 전락한 문화연구>라는 제법 과격한 글을 준비중이다. 사실 곧 있을 어느 학술대회의 발표용으로 생각중인데, 그냥 내 '딸딸이'에 그칠 공산이 커 허무한 마음에 끄적거려본다. '문화연구'라는 말을 스무 살때부터 들었고, 곧 십 년을 바라본다. 그동안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나는 어느 교수의 말처럼 문화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데, 이 자체가 학문적 제도화로 나타난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소감에 동의한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은 늘 '정체성 찾기 게임'을 즐긴다. 한국의 문화연구는 이래야 한다 등, ~이다', '~한다' 놀이는 사실 문화연구자들의 진부한 논쟁 거리가 되어 왔다. 이것이 진부할 정도라는 말은 나의 자의적 판단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나만의 냉소가 들어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학술 공간의 지적 다툼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인간'이 빠져있는 문화연구의 비극은 갈수록 커져만 갈 것 같다.  

사실 이건 비단 문화연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내 경멸이기도 한 것 같다. 늘 내가 이 글들의 연속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을 '이용과 충족'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명성 유지를 위해 삼키고 뱉어버리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선을 인식하는  윤리의 도달은 머나먼 이야기일수도. 무서운 것은 처음부터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대학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이 신물나는 것은, 결국 이들의 성찰이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 간의 경계 유지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술 영역 안에서 '업'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해야, 자신의 생존이 보장되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문화연구'는 내가 존경하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대기업의 소비자 마케팅 조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고로 문화연구자들은 갈수록 이런 지적에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돌아온다. 그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은 '기계적 관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요즘 항상 이 문제로 분노해 있고, 갈수록 시민들과 멀어지는 문화연구를 이야기할 때, 불쌍하게 동석한 한 지인에게 이 분노를 배설한다. 그러면 지인은 말한다. "어이, 자네 학문 세계에 염증 생긴 것 아냐?" 나는 웃었다. "그런가?"라는 어색한 말 하나와 함께. 데이비드 로지의 <교수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등..잡히는 책들을 보면 지인의 지적도 맞는 것 같다. 왠지 부르디외의 '재귀사회학적' 정신을 구현하자는 나만의 선언 자체도 구차해 보인다. 나는 단지 대학원이라는 곳이 이렇게 폐쇄적인 줄은 몰랐다는 솔직한 심정에서 꾸준하게 이 곳의 비밀들을 말하려는 것 같다.  

나에게 지금 이곳은 이상한 감옥 같다. 대중들과 함께 뉴스를 보면서 시시각각 소식들을 접하는데도, 문화연구자들은 그 속에서 연구거리를 찾을 때, 논문으로 쓸 만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이란 분류 체계를 작동시킨다. 그들의 문장은 유난히 호들갑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유난법석을 떠는 문화연구자들의 '오버'는 그들만의 경계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심리선 강화에 일조한다.  문화연구자들은 이제 '문화연구라는 제도 영역의 환영에서 벗어나 시민들과 연대해야 한다.(문화연대는 우리는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주장하겠지만, 나는 그것 이상의 노력을 말한다) 문화연구자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에서 나타나는 고뇌의 수준이 "왜 대중들에게 우리 문화연구는 힘이 없을까?"라는 '영향'의 차원으로 간다면, 문화연구자들간의 쟁투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연구에게 던지는 문제적 화두는 '시민과의 연대', 지식인과 시민이 '평등한 자리'에서, 그 어떤 이론의 확정지음이 갖는 학술적 폭력의 횡행 없이 평등한 이성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결국 문화연구자들은내가 배운 윌리엄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내가 알고 있는 홀은 그러지 않았다로 귀결된 반복된 문장들을 읊고 말 것이다. 과연 문화연구자들은 시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그 노력을 학술대회에서, 혹은 제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받는 "교수님, 연구 테마 참 좋습니다. 어찌 그런 테마를 연구하시나요?"의 차원으로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무지한 스승'들의 '기계적 관행'만이 계속될 때, 문화연구와 시민은 갈수록 멀어질 것이다. 남은 것은 문화연구자들의 정액, 애액, 토사물, 쓰러져있는 소주병일게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그레이효과 2009-12-0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고맙습니다.
 
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8
칼 심스 지음, 김창환 옮김 / 앨피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석학적 순환'이 갖는 삶과 이야기의 오묘한 관계를 그려낸, 우리 시대 겸손한 영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스승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자들에 대한 정갈한 일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