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와서 첫 학기였습니다. '벌써부터' 이론서 읽는 것에 지쳤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막 빌려다가 읽는 한 선배가 부러웠습니다. 푸코의 <성의 역사 1권 - 앎의 의지> 앞부분에 헥헥거릴 때, 그나마 푸코니까 다행이었지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같은 책들의 사회과학적 문체들을 접할 때면, '어이쿠나'했었죠.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가는 글자들, 그 글자들이 주는 어떤 과학적인 향취가 내 가슴을 마른오징어처럼 만든다고 느낄 때, 매주 읽어가는 소설책이 바뀌어 있는 그 선배를 보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되어보지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제 전공이 국문학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사회과학적 문체에 적셔져 있는 이상, 대학원 후배들에게도, 대학원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도, 저는 시간이 나면, 소설책을 많이 보라고 말을 많이 했습니다. 소설책을 읽으면 뭔가 축축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 축축함이 힘을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그런 느낌을 줘서 좋았더랬죠. 그래서인지 저는 당장 읽지는 않아도, 앞으로 읽어보고 싶은 / 읽게 될 소설책들을 사서 쌓아두는 편입니다. 예전부터 '온스타일'이나 '동아티비'가 'vj특공대'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저에게, 요즘 '칙릿소설'이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백영옥의 [스타일] 서유미의 [판타스틱 개미지목]같은 이 분야의 '명전'들을 샀고, 조금씩 읽어보려 합니다.  

방학 때 읽었던 소설 중에 숄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가 기억에 나는군요. 소설 속 주인공이 마치 미래의 내 삶이 될 것 같아서 두려움을 갖고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소설에 문외한인 저에게 좋아하는 소설책은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좀 조용히 해요] 정도였는데, 이런 '소설-샤워'를 주기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 벨로의 소설을 읽으면서 말이죠. 

이 소설의 마지막이 참 멋있어요.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것 같던 심리학 박사에게도 희망이 없었던 것을 안 주인공은 결국 모르는 이들의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데요. 그런 행위를 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 '어떤 미래'를 오랜만에 따스하게 품어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인간에 가까이 가게 하려는 제 노력도 다듬어보구요. 은둔의 필요성을 느껴서 집안 커튼을 베이지색에서 보라색으로 바꿨습니다. 하루 종일 밤입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늘 감추어 놓은 태양을 오랫동안 비추어보이기 위해 단련 중인 밤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자,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요?(김연수 흉내 한 번 내보는 것으로 오늘은 그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09-1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취집에 아주 큰 창이 있어서 여름이면 새벽같이 겨울이면 늦으막히 일어나곤 하는데, 보라색 커튼 탐이 나네요.(물론 게을러서 바꿀 엄두는 안납니다만)
소설-샤워는 저 역시 필요합니다. 세상의 향내를 밀도있게 맡고 싶다고나 할까요~
얼그래이효과님 좋은 하루 되세요.

얼그레이효과 2009-09-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가 늦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휘모리님.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사회학에 요즘 관심이 많은데, 참고가 되었던 책입니다. 매우 뜯어보고 싶은 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그레이효과 2009-09-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독서는 좀 이 책을 알기 전에 주변인으로부터 들은 지식에 입각해서 한 것 같아서,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시민사회'에서 시민의 위치에도 못 들어가는 이들이 우리나라에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책을 시민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버림받은 인간'들을 위한 분석의 틀로 한 번 활용하고 싶군요. 슈미트와 아렌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기도 하구요. 한보희 - 김항 - 박진우 - 정일준 이 4명의 역자들이 빚어낸 총서 시리즈 속에서..이 네 명을 역자가 아닌,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화자'로서 해석해보길 권합니다. 나중에 한 번 총체적인 분석을 해보지요.

얼그레이효과 2009-09-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김항 선생은 저자군요.
 
국가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5
장 보댕 지음, 임승휘 옮김 / 책세상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기 전에, 짚고 넘어가면 좋은 책이지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그레이효과 2009-09-1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제 부분에 '보댕'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보려는 역자의 정성도 놓치면 안 될 것 같네요.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다시 찾아보게 만든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좀 멀리 나아가자면(슈미트와 연관지어서), 박정희를/ 전두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학문은 순수한 것일까요. 난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깨끗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순수함'이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겠지요. 저에게 공부를 하면서 갖게 되는 순수함이란, 공부를 많이 하고 그것을 통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나누는 삶을 뜻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지성의 의지를 확보하는 것도 포함되구요. 대학원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리 영악하게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주 깨끗한 놈이라는 것은 아니구요. 뭐랄까요. 그래도 희망은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름 방학 때부터 찾아온 슬럼프는 그 희망에 대해 다시 질문을 하게 만드네요.  

그 어떤 일이든 그렇겠지만, 대학원은 '야심'이 있어야 인정받는 곳입니다. 사실 아주 겸손한 미소로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는, 그 미소를 한 꺼풀 벗겨보면 다 남모를 이유가 숨겨져 있을거에요. 지성과 친절함의 관계에 대한 불순함, 그것에 대한 의심은 일찍이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바가 있지요. 뭐 꼬치꼬치 사람을 험담하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공부와 인간 관계 속에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친구들의 넋두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괴로움 속에서 '타인지향형'의 공부 태도를 발견하게 되죠. 또, 그런 것을 과도하게 어떤 전략화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한 이들이 계속 너스레를 떨 때마다, 괴로움들은 우리들만의 '뒷담화'가 되는 것이 사실이구요. 

"아 떨려..어떡해. (드디어 내가 교수 A의 프로젝트를 맡았어)" 그러면서 그 교수랑 내가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을 티내려고 컴퓨터를 끄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훤히 공유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 현실적으로 대학원에서 '지적 경쟁'이라는 것은 그리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닐테고. 제가 그리 오랜 대학원 생활은 안해봤지만, 대학원은 분명 고인 물이 썩어 지린내가 나는 곳이 맞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너무 영악해져서, 그 지린내를 "아이 달다~"하고 연기하며 버티어내죠. 나만 잘하면 되지라는 심정으로 말이죠.  

지성이 정말 나를 키워줄거라는 사람들에게 대학원은 '인정 투쟁'이란 장애물을 선사합니다. 당신이 조용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라인'에서 부터 시작하는 그 호들갑스러운 '과시적 태도'의 소비들에 몸서리를 칠지 몰라요. 그리고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안 좋은 방향으로 파고드는 괴물로 변해있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종종 제 지인들은 이런 대학원의 모순을 알고, 이 대학원을 탈출하고자 자신의 인생이 <트루먼 쇼>의 결말처럼 되길 희망하며, 노를 저어요.(사실 그러면서 탈출하려고 하는 이 대학원으로 언젠가 다시 돌아올것 같다는 모호한 희망 아닌 희망을 품고 살면서 말이죠) 

'키친 타올 심부름'을 시키고, '미용실 예약'을 부탁하는 교수들의 뒷처리를 위한 예민지수가 이제 몸에 베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대학원 동료들의 모습을 들어볼 때마다, 저는 '야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난 주부터 용기를 내어 대학원 측에 터무니 없는 등록금 항목에 대한 항의를 시작했습니다. 기대했던 것처럼 성의 없는 답변이 나왔지만, 그리고 그것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보는 동료들이 너무나 많은 것에 아쉬움 금할 길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모순을 내버려두지 않기. 공부한다는 것에 희망을 걸기. 그리고 공부를 내 삶에 스며들게 하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9-09-1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한 교수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께서 재직중인 대학은 아직도 등록금이 130만원이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다들 궁금해서 물었는데, 지방 국립대의 경우 - 서울 소재 국립대도 마찬가지긴 합니다 - 매년 5%씩 올리다보니 80년대 몇십만원 하던 등록금이 매년 올라도 얼마 안 오른다는거죠. 몇만원 정도. 반면, 사립대는 똑같이 매년 5%를 올려도 수십만원씩 올라가게 되니, 지금처럼 거의 5-6배의 차이가 나는거라고요. 우리는 '5%'라는 동일한 수치에 속아버린겁니다. 사립대학은 부지값으로 돈을 모으기만 하지 학생들을 위해 쓰지는 않습니다. -_-

얼그레이효과 2009-09-1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 때부터 [교육투쟁]을 해왔던 사람인지라,,아프락사스 님의 덧글을 읽고 다시 한 번 한국 대학의 모순에 대하여..느끼게 되는군요.. 글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당대비평을 기억하십니까? '모가 단단히 난' 계간지 하나가 있었죠. 영특하기도 했고,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해? 너무 앞서 나간 것 아니야? 이런 말을 들으며 욕도 먹고, 환영도 받았던 계간지였죠. 2007년 '당비의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체제도 '계간지'에서 '단행본 기획신서'로 바뀌었습니다. 조세희 선생님이 1997년 '당비'에 첫 운을 띄운 후, 문부식 선생, 김진호 선생이 당비의 편집 주간으로 많이 애를 썼고, 현재 서동진 선생이 '당비의 생각' 기획주간으로 있습니다. 저는 이 '당비'의 간사로 있구요. 2007년 '당비의 생각' 창간준비호로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를 냈었고, 2008년 '당비의 생각'시리즈 1호로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를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나름 문제를 일으켰던(?) 2호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를 올해 3월에 출간했습니다.  3호가 11월 중순에 곧 나올 것 같아요. 죽음, 기억, 애도, 정치에 대해 다룰 것 같은데 우리가 사실 가슴 속에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목을 칼칼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던 성찰의 지점들을 뼈있게, 논쟁적으로 건드릴 것 같습니다. 이번 책을 직접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비의 용사'들이 한 분, 두 분 이렇게 모여서 복귀를 한다는 점이 조금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 명단은 책이 나올 즈음에 알려드리죠) 

지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가 좀 문제를 일으키면서, 아직 '당비'를 그리워하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던 것에 대해 고마웠습니다. 비록 '두터운' / '정기적인' 계간지 형태로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더 자주 만나려는 계기를 만들고 있어요. 특히 '온라인'의 소통 중요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즘이기에, 곧 온라인에서 보다 젊고 새로운 논객들이 꾸려가는 '파워 플랜트'로서의 '온라인 당비'가 선을 보일 겁니다. '당비'는  이제 우리 시대를 새로운 비평적 언어로 사유할 젊은 논객들을 키우려고 해요.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가며 인연을 만들고 있구요. '기특한 칭찬'을 얻으려는 비평이 아닌, 날 서고 섬세한 감각적 사회평론의 젊은 야심가들이 몸을 풀고 있답니다. 이 '온라인 당비'는 아마 다음 달에 선을 보일 것 같네요. (아직 비공개라 웹 주소는 다음에 공개해드리죠) 

저 개인적인 책 관련 작업으로는, 스승님과 함께 푸코 관련 신간  마무리 일을 조금 도와드리고 있는데, 푸코를 맛깔나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책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또 한 권은 찰스 테일러에 대한 책인데, 이것은 아직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암튼, 이제 좀 블로그도 성실하게 관리를 해보려구요. 졸업 논문도 쓰고 있는데, 문어발 생활을 못하는 내게, 올해는 좀 특이한 해로 기억될 것 같군요. 새로운 포스트로 곧 뵙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