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한국의 탄생
조우석 지음 / 살림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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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이 책에 많은 기대를 가지신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이 책은 또 - 그 놈의 지겨운- '불가피론'입니다. 복습해봅시다. '불가피론'의 대표적인 견해가 무엇인가요. "아유. 그 당시 배고픈 시절에 민주주의는 무슨...민주주의 해야할 놈이 배고픈데,,민주주의는 아직 일러.." 좀 말을 만들어보면 '선-경제성장', '후-민주주의'라는 도식인데요. 저자는 그의 오랜 통치 기간 속에서 나타난 부작용이 있지만, 그 부작용의 이면에는 박정희 스스로가 '오랜 통치'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심'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조금 더 한국이 국가가 (엄밀히 말하자면 박정희겠지요), 박정희가 정해놓은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민주주의는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을 꺼내놓아요.  

저자가 이 책을 견실한 '박정희-史'로 만들고 싶었다면, 조금 더 성실했어야 했고, 조금 더 치밀해어야 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좌로도 치고, 우로도 쳐야죠. 하지만,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중도적' 책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기때문에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치유와 화해를 시도하자는 구호는 저자가 책을 통해 보여주는 역사기술의 어설픔을 포장하는 일종의 전략적 모토로 느껴지는군요. 저자가 치유와 화해의 박정희라는 주제를 위해 제시하는 이야기들은 '박정희 개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박정희 개인'이 갖고 있는 인간의 고뇌? 그 인간이 외부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이랬다라는 그의 '이미지'인데요. 그 고뇌의 이미지를 포함해서, 이 책에는 저자가 제공하는 '박정희 -비사'를 통해, 박정희를 수놓은 부정적 편견의 시각들을 깨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비사에서 드러나는 박정희 인물 개인의 온화함과 그 어떤 '멋드러짐'이라고 하는,이 책에서 간주되는 몇몇의 행동 혹은 성격의 특성이 국가라는 실체적 존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행되었던 안타까운 광경들을 뒤덮을 수 있는 건가요.   

저자는 이 광경을 하나의 '미학적 가치'로 해석하면서, 박정희의 통치가 갖고 있는 부정적 실체, 그 편린들을 '미적 취향'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마치 '박정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라고 하는 시각이 마치 역사를 통한 담론의 경쟁을 부질없는 싸움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 아닌가요. 저는 죄송하지만 역사는 분열과 경쟁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은 분명 또 하나의 논쟁적 시각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장점 또한 있다고 봅니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대통령'들의 기록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 등, 이런 것들은 더 학술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물론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의 비사 혹은 전기적 시선에서 드러나는 일정한 '감싸기 전략'은 마치 박정희가 있던 그 시기를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 보는 느낌을 줍니다. '그 그림의 가치는 이렇다. 그 그림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데, 평판이 많이 갈린다. 그래도 그림은 참 보기 좋지 않냐. 자, 이 그림의 가치를 당신은 어떻게 볼텐가. 당신의 '수준'이라면, 당신의 '취향'이라면, 이런  그림 충분히 좋게 판단되지 않나.' 역사적 박정희가 현재적 박정희로 작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 박정희는 분명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 할 숙제로서, 많은 이야기들의 공간을 계속 생산하리라 봅니다만, 이런 이야기들의 공간이 "그래, 이렇게 보면 어떻고, 저렇게 보면 어떠하리" 식으로 가고, 역사를 개인의 문화적 취향으로 몰아가는 듯한 기술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를 향한 성실한 해석이 동반된 시각의 제공과 역사를 문화적 취향으로 보며 관객 같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문화적 취향처럼 대한다는 것은 제가 이 책에서 느끼는 위험한 책 속 모습입니다. 마치 곽경택의 조폭영화가 주는 폭력과 사나이의 우정이 '미화'로 귀결되는 과정처럼, 이 책이 가진 역사적 시각은 박정희 시대의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의 아픔을 박정희라는 한 개인의 '능력'으로 미화시켜버리는 것 같군요. 이 미화의 윤리는 무엇입니까.   

결국   저자 자신이 박정희라는 '문제적' 대통령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강조하는 '지도자 대망론'은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한 국가의 지도자가 갖는 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국가 운영의 요소이지만, 그 국가 운영의 요소로써 '지도자'가 갖는 능력의 자율성, 권한의 자율성을 저자 스스로 너무 많이 부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저자는 앞에서 제가 '불가피론'의 대표적인 견해라고 했던 '선-경제 성장 후- 민주주의'라는 도식을 언급하는 대목에 강조점을 두는 인상이 짙군요. '문화적 박정희'라는 개념을 통해 저는 이 책이 박정희라는 개인의 '중층성'을 부각함으로써 그 중층성이 '역사적으로 볼 때 그의 결단은 어쩔수 없었다'로 귀결되는 것이 참 씁쓸합니다. 결국 앞에서 말한 일종의 '미화의 윤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자로서 누릴 역사적 권리의 측면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책을 덮으면서 남는 건 택시 드라이버들이  라디오에 흘러 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젊은 손님들에게 '자식자랑하고, 자수성가한 자기 인생사 이야기하다가, 요즘 젊은이들 정신상태를 보면 삼청교육대 부활해야돼, 그 때가 살기 좋았지'라는 뻔하지만 종종 발견되는 '딜레마의 시간'들이 앞으로 더 강해지겠구나라는 안타까움입니다.  

덧붙임) 1. 저자가 비판하는 '반박정희 = 민중사학적 시각'에서, 민중사학이 갖고 있는 민중에 대한 문제설정은 민중사학 자체 내에서 이미 예~전부터 성찰의 한 지점으로 숙고되고 있는데요. 저자는 마치 민중사학적 시각이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고, '그들'은 아직도 '나태하게' 그들의 시선을 고수하고 있다는 견해를 내비치는군요. 이것이야말로 저자의 '나태한' 시선이 아닌지요.  

2. '인용'과 '비교'에 있어서, 역사적 실증의 비교와 검증이 아닌, 박정희라는 개인의 센티멘탈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아래, 나타나는 비교법, 인용법등은 이 책의 역사기술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이건 치유와 화해를 위한 비교와 인용이 아닌, '박정희 신화'를 만들기 위한, 비교와 인용이라고 하는 게 맞겠는데요.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박정희 일부'를 보고, 박정희를 비판한다는 '반-박정희론'자들에게 일침을 쏜다면, 저자 자신도 그 '일부' 자체에 조심해야겠지요. 그런데 이 인용과 비교에서 일부를 본다는 것은 지면 제약상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정당한 인용과 비교라면, 그 인용되고 비교된 대목에서 "아, 이 사람이 전체적 맥락을 보며 문장을 가져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책에서 '일부'는 일부일 뿐입니다.  

3. 이 책의 난점을 찾는 것은 책을 다 읽고, 책의 제목을 다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박정희, 한국의 탄생. 저자는  지금의 한국이 있는데, 박정희가 그 토대를 이루었다고 봅니다. 생각해봅시다. 박정희가 가진 잔여는 분명히 한 '영향'으로 존재하지요. 고로 우리는 그 '영향'으로 지금도 많은 /빈번한 역사적 논쟁을 벌이니까요. 근데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박정희가 한국의 탄생이라면 말이죠. 박정희는 국가의 탄생을 이룬 사람이고. 이는 마치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박정희는 그 가족을 이끄는 '가장'의 위치를 부여받는 도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자가 바라보는 박정희는 국가라는 거대한 가족을 이끄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덧입혀지는 인상이 짙습니다.(중요한 건 사실 이런 관점이 전혀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국사 속에서 지도자에게 아버지의 형상을 입힌 채, 근대적 발전사를 설명하려는 시선은 사실 아주 많았지요. 저자는 새삼, - 정말 새삼스럽게 - '발명'을 한 듯한 역사기술적 태도를 취하지만, 그냥 때가 되면 찾아오는 듯한 '반복과 포장'의 태도가 더 강한 듯합니다. 이런 저의 지적마저 진부하군요.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된 박정희. 고로 저자는 이 아버지가 아무리 가족에게 싫은 모습을 보인들, 우리는 그 아버지를 결국 싫어하냐?는 싫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내는 것 같아요. 자식인 우리가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면서, 아버지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불평해도, 그 불평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가문(한국)' 욕하지말고, '가문의 영광'이 '아버지(박정희)'로 인해 있어 왔고, 그 영광의 세월을 우리는 잊고 살았음을 직시하자는 것이 저자의 견해랍니다. 치유와 화해. 좋지요. 그래요 박정희라는 아버지를 비판만하던, 국가의 자식들아, 아버지가 세운 이 가문. 이 가족 그만 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거라라고 외치는 시도인데요. 저는 그냥 '탕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한국이라는 집의 명패가 왜 '박정희'라는 이름이 되어야 하는지는 전 아직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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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월]에 방영된 유시민의 일요인터뷰를 보면서, 문득 10.28 재보선 결과를 통해 진보진영의 위기를 분석한 레디앙과 프레시안의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노무현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유시민에게 '잠룡'의 위치에서 깨어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던 이들은, 인터뷰에서 유시민이 했던 말 한마디,한마디에 시원함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재보선에서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낀 곳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아닐까 싶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사표론'과 '비지론'의 차원에서 '희생'을 강요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유시민은 인터뷰에서 친노신당의 포지션을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가 아니라, 민주당과 민노당/ 진보신당의 사이에 있는 '중도진보'라고 설명했다. 지금 누구를 찍어야 하나라고 고민하는 많은 누리꾼들에게 '솔깃한' 소식일게다. 다만, 기존 진보진영에서는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을 게다.  다만 민주당의 이번 결과를 볼 때, 민주당도 그리 안심할 수 없는 건 '민주당에게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대안은 아직까지도 '엠비를 아직도 믿으십니까'같은 구호일텐데, '심판론'의 구호는 그렇게 안정적인 전략은 아니지 싶다. 사실 이 '심판론'의 구호 안에 전략적으로 뭉치는 진보진영의 경우, 생각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다는 것은, 심상정이나 노회찬 같은 '인물론'이 아직 대중들에게 낯설다는 것 또한 분명 봐야할게다. 그들은 아직 '좋은' 정치인으로 인식될 뿐이지,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대중들은 '좋은 정치인'이 이 정치판을 좋게 '이끌어갈 수 있다'라고 보진 않을 것이다. 그 '좋은'에는 역설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공유되는 '좋지 않지만 인정해야 할 부분을 보여주는 것'로서의 '좋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게다. (이것이 정치인 걸까) 

지난 총선 이후, '홍정욱에게 아쉽게 패한 노회찬'의 이미지가 좋게 각인되는 등의 일정 수확으로 진보신당 등에 새로운 기운들이 유입되곤 했었지만, 그 새로운 기운을 형성하는 층이 진보신당을 고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진보진영은 심오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싶다. 그리고 유시민은 인터뷰에서 분명 밝혔듯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자기들의 실현을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면서, 선을 어느 정도 그었다. 이 선 긋기는 분명 친노신당의(이 갖고 있을만한) 자신감 확보와 이후 연대 전략이 생길 경우,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유시민 스스로가 언급했듯이 친노신당은 분명 '리스크가 있는 정당'이다.  좀 서둘러 가자면, 차후 서울시장 선거는 강금실 대 오세훈보다 더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할 듯하다. 다만,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나 이번 재보선에서 느낀 것처럼, 한나라당 후보보다 민주당 후보가 누가 나오는 지를 더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 친노신당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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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
J. 스콧 버거슨 외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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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불온한'과 같은 제목이 남발되는 시대에, '발칙한'이라는 수사가 사뭇 의심되긴 하지만 스콧 버거슨의 본 책은 '의심'대신 '안심'을 해도 된다고 본다. 그러나, '안심'이란 단어가 자칫 이 책의 저자들인 버거슨과 그의 친구들이 내놓은 성실한 '한국 독해'를 일종의 '재미주의'로 판단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안심'대신 '수심'[愁心]이란 단어를 꺼내야 할 듯하다. 한국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책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한 지금, 나는 우리와 그들이란 시선의 구분을 고민하는 외국인들의 '한국 비판'을 '흥미로운 출판 기획'으로서의 일부가 아닌,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느낀다.  

미래의 한비야를 꿈꾸며, '자신만의 여행서'를 꿈꾸는 이들, 여행의 자유로움과 세계에 대한 넓다란 경험의 충족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국-밖'의 세계는 '나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장소로 인식되는 것 같다. 허나 '여행책 시장'이 형성된 가운데, 자신의 '체험거리'를 엄청나게 진열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의 권리와 윤리, 그것을 아우르는 사유는 사실 '한국-밖'의 세계를 두텁게 사유해보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다. '트렌드 세터'로서의 여행 리더들이 되고 싶은 욕망이 득실득실대면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의 가치는 이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구호인 '실용'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수잔 손탁이 [사진에 관하여]에서 남긴 명언처럼, '사진'을 찍는다는 것 하나로, 그 사진에 담긴 장소의 명성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 세계를 다 이해한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손탁의 그 이야기가 언제나온 것인데 아직도 그럴까요?라는 질문을 쏙 들어가게 만든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이 '방법으로서의 여행'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그 세계가 가진 갈등의 깊이를 매만질 수 없을 것이다.  '방법으로서의 여행'이 강조되고 각광받는 요즘, 그러한 '방법론'은 세계에 대한 '신비화'를 조장하고, 자신이 고수하는 여행의 윤리를 합리화하는 데 일조할지 모른다. (고로 한비야와 그 아류들은 '윤리적 소비'의 한 측면에서 비평의 대상으로 충분히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세계 -경험'을 욕망하는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스콧 버거슨의 이 책은 한국을 독해하고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도리어 '한국-밖의 세계'를 사유하는 데 갖고 있는 우리들의 특정한 오류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한국-밖'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한 여행서 혹은 문화비평서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아이 러브 뉴욕' 같은 구호들을 조금 가려보려는 안일한 '문장의 노력'들과 이미지로 가득한 여행서들 속에서 우리는 때로 자신이 간 곳에 대한 '성실한 비판'을 토대로 그 곳을 한 번 부딪힐 만한 곳으로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부딪힘의 시도는 '봉사와 헌신'이라는 상징성으로 '도와줄만한' 나라에 가서 '도와주겠다'는 어떤 윤리의 욕망을 비판하고 싶은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 윤리의 욕망은 다들 알다시피, 그 나라를 '구제'하겠다는 선의에도 피해자가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여전히 이런 여행의 윤리는 어렵고 복잡한 게 사실이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스콧 버거슨에게 물론 '여행자'라는 칭호를 붙이는 건 적절치 못할 게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 강조되는 '엑스팻', 즉 한국에 온 외국인으로서, 그는 '한국 안'에 거주하지만, 언제나 '한국 밖'의 사람으로 인식되는 존재인 그와 그의 친구들은 '원치 않는 여행자'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엑스팻이라고 하는, 한국-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정작 그 '안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그들을 호명하는  존재들의 비평이 담겨진 본 책은. 한국민들이 대체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 낯설어 하는 문제들을 끄집어 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 예로 북한의 문제는 이 책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분단'이라는 문제는 까놓고 말해서 젊은 세대들에게 관심이나 있는 문제인가. 스포츠 경기에나 신비롭게 비춰주며,미사일로 위협할 때나 선글라스를 낀 김정일과 그의 가족들 모습을 '상징으로 소비하며' 깔깔대는 차원에 머무르는 북한에 대해 우리는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가.(오히려 한국사회는 북한을 상징적으로 소비하면서, 그들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북한과 한국 사회의 갈등적 간극을 국가 자체에 내버려둔 채, 우리 사회는 그 국가의 정치 탓만으로 우리의 무관심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베라의 책도 그렇고 버거슨의 본 저서도 이런 부분들을 간,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원치 않는 여행자'인 엑스팻으로서 버거슨이 느낀 한국에 대한 당혹감은 마지막 장에 (나는 이를버거슨의 '촛불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잘 나타난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버거슨과 의견이 갈리지만, 버거슨은 촛불을 실패한 쿠데타라는 시선 아래, 그 쿠데타에 가려진 의미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나름 성실하게 수행한다. (이 장은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느낀다) '자유주의자'로서의 버거슨이 느끼는 촛불에 대한 염증은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측면이다. 무엇보다 그가 이명박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그 이전 김대중과 노무현을 향했던 비판의 시선을 망각시키고 있는 지점은 없는지, 왜 '촛불'의 시선이 그 이후의 중점 사안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 '문제화'시킨 부분은 비평의 시선에서 이 역시 정독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며 중요하다고 본다.  

 

허나, 나는 이러한 정독을 통해, 버거슨의 '사실주의'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적' 시선에서 오는 난점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일례로 버거슨의 '촛불론'에서 조/중/동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조금 결여되어 있다. 그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을 예로 들며, 촛불을 든 이들이 하나의 그릇된 신화로서 조/중/동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조/중/동을 향한 이들의 시선이 단지 '그릇된 신화'가 아닌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조/중/동이 실제로 쌓아온 부정적인 '누적물'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버거슨은 '시위대' 대 '전경'의 구도를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데, 지난 2008년 촛불의 문제에서 '시위대'가 시민을 '촛불의 공간'으로 집어넣었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들은 촛불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에 대한 독해를 그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다만, '촛불'이라는 상징성 가운데, 그 상징을 꾸준히 유지하고, 더 발화하려 했던 시간 속에서, 시위대 혹은 시민들에게 나타났던 폭력의 장면들. 그 신화 안에 가려진 폭력성을 폭로하는 부분은 단순히 '조/중/동'의 시선, '이명박의 진영'이라는 편협한 '위치'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숙고해야 할 '성찰'의 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버거슨이 '자유진보진영'이라고 묶은 언론과 언론인들의 자세 또한 감싸줄 것이 아니라,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는 것임 또한 이 책이 가진 좋은 시선이다)

한국을 두텁게 사유하는 노력 앞에서, 그 노력이 '한국을 즐기는 방법'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세계를 성실하게 인식하는 개인의 의지라면, 나는 이런 개인의 의지가 서점가에 빽빽하게 진열된 한국인들의 세계 여행서에도 표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책을 통한 한국 밖 세계 여행은 '류시화스럽고, '한비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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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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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을 위한 눈물. 그 희망의 실타래를 부여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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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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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기획이다'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학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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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0-28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다운 책입니다. 담론 간의 경쟁을 통해 어떻게 민족주의는 오래 그 생명을 유지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외국에 계신 상황으로 인해, 한국의 '상황'을 '소개'하는 듯한 투는 연구자로서 비판적 거리를 둔다는 장점도 있지만, 한국 투어를 담당하는 '안내자'같은 느낌도 들게 하네요. 민족주의 담론 안에서 한국을 신비화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너무 꼬였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