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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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회의'skepsis일진대, 정작 우리의 입김 속에서 흘러나오는 '체념의 음표'는 '회의의 긍정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우리 시대의 정치 철학이 강조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회의'는 '교과서적 민주주의'가 주는 환영의 커튼을 찢어버리기 위함인데, 이 커튼은 도리어 '사유의 광합성'을 막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답이 없는 투쟁에 지쳐 있다고 말한다. 고로 이 시대의 '지식-권력자'들은 의사형태의 답을 유포하며, 사람들에게 '여기 답이 있으니~'라는 허언의 남발을 일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무서운 비극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 허언에 '속는다'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속는다'는 것이다. '알고도 속음'은 우리들의 지성이 '불가피하게' 공중에 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적재적소'의 지성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이 시대의 비극, 그리고 이 비극이 만들어내는 삶의 아련한 기운에 대해 때론 합심하고 때론 분열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알고도 속음'이라는 태도가 낳는 것은 삶이란 오선지위에 그려진 '체념의 음표들'이다. 이 음표들이 만드는 것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우리의 신체는 '생명의 오선'에 걸쳐 있다는 비극이다. 고로 우리의 감각은 그 오선 위에서 전시되고 소비되며, 이 비극은 전시됨으로써 버려질 운명에 처해진다. 왜 우리는 '버려질 운명'인가. 우리는 그 운명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아감벤의 저서를 통해 고민하고 싶은 주제이다.  

문화연구가 그토록 강조해왔던 '차이의 정치학'은 우리 시대의 '저항의 연골'을 닳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비단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쾌락의 가능성, 쾌락의 능동성이 주는 잠재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쾌락'을 긍정하면서 발생한 보다 넓어진 '저항의 외연'속에서 문화연구는 고도소비사회의 비극을 '양심적인 형태'로 외면해왔다. '양심적인 형태'란 무엇인가. 이는 문화연구가 고도소비사회의 비극은 마냥 지나쳤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현대사회를 짚어가는 중점 속에서 나타났던 '배제의 지점'들 혹은 '차등의 지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지점들은 알고는 있었으나, '접합'이나, '맥락'이라는 이름으로 그 지점들이 주는 '정치적 고민들'을 정치학과 사회학에서 해야 할 것으로 간주해버린 것이다. 결국, 지금 현재의 '문화연구'가 (특히 한국의 문화연구가) '가시적인' 비가시적 존재(열심히 아둥바둥거리지만, 전혀 영향력없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처럼)가 된 것은, 무엇이 정치이며, 무엇이 권력이며, 무엇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회의 대신, 그 회의의 '단물'을 문화연구를 하는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언론학의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차용해온 데 있다. 아감벤의 사유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들, 특히 우리 시대의 정치를 사유하는 아감벤의 언어- 공간에서, 나오는 '기본의 언어들', '핵심의 언어들'을 임마누엘 월레스틴이 [지식의 불확실성]에서 희망의 어조로 전망했던 문화연구는 왜 검토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토록 '사람'을 중심으로 놓는다는 문화연구의 '기만'에 있다. 문화연구의 '기만적인 태도'가 아감벤의 사유에서 경청해야 할 것은 이 '늑대같은 도시'에서 그 도시를 수놓는 인간 군상의 분열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분열을 조장하는 '권력의 장치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장치들, 특히 아감벤이 의식하고 있는 푸코의 장치들은 "우리가 삶을 살도록 하는 상태'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생명'이 인구라는 '실험실의 언어'에 복속되어 가고 있을 때, 철학이 주는 각성이 침투해야 할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존재들에 대한 시비를 넘어 선, 우리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존재들에 대한 불만이다.  

이 장치를 가진 권력자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이 배제와 포함의 형태로서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시간.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끊임없는 '회의' 대신, 지속적인 '회개'의 시간을 요구받고 있다. 국가는 우리에게 '의사-희망'을 주면서, 그 희망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희망을 '성취'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희망'의 성취가 정작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희망을 둘러싼 인간들의 오류를 전시하려는 시선의 과잉이다. 고로 나는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에서 법을 넘어선, 그 '초법의 상태'가 강조하는 것은 권력자가 가진 '강권함'을 유지하는 건, 권력자에게 '초법의 상태'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전개되는 '오류들의 고백'으로 채워진 이 시대가 강요하는 회개의 남발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사함'을 떠올리지만, 오늘날 회개의 기능은 그것에 있지 않다. 아니, 그 예전 중세 시대에서도 '죄-사함'이란 개인의 죄를 전시함으로써 그 권력의 위상을 부여받았던 '종교-권력'이 아니었던가. 고로 회개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늘어나는 것은 '거짓 성찰의 난무'이며, 이러한 난무는 성찰을 위한 성찰로 멈춰버린다. 성찰을 위한 성찰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의례일 뿐이다.  

아감벤의 사유에서 무서운 것은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 자체를 우리가 인식하는 데서 온 이 시대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충격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포함하는 배제, 배제하는 포함이란 관계 속에서 그냥 '살게 내버려 둔' 그 자체에 대해, '알고도 속는' 상태로 우리 스스로를 방치해 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리라.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스스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이 정치적 사유 공간을 '내버려둠의 상태'로 놓아두려는 소극적 인식이다. 결국 이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푸코가 우려했던 지식과 권력의 결합이다. 이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이 이미 사회 현상에 적용되면서 시작된 무책임한 '적용의 현상'들이 도리어 '벌거벗은 생명'의 '내버려둠'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이는 비단 그러한 적용의 불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수용소 같은 풍경 속에서, 조에와 비오스의 구별이 불가능해진 '생명정치의 장'인 국가 속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작업은 호모 사케르의 서문이지 않을까. 즉  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을 알았다고 만족하는 데서 그칠 우리 지식 사회의 위험천만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진부하지만- 당연한' 우리 시대의 모든 '안정된 존재'들을 회의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회의'가 가능할 때, 우리가 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맞서야 할 것은 바로 '파문'이다. 우리 시대의 미디어들이 예전부터 권력과 결탁하여 무방비로 쏟아내고 있는 단어인 '파문'은 정치적인 단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탈정치적인 언어이다. 사람들은 파문이라는 단어를 통해 '일회적 관심' 혹은 '새로운 비극이 더 나타나 더 새로운 자극이 되길 희망하는 자세'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문'이라는 이 탈정치적인 언어의 자극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 '파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관습적인 '해결책으로서 제시된 비평의 언어'가 아니다. 조금은 힘이 들고, 조금은 희미하더라도, 아감벤이 주문하고 있는 것은 유아기에서 나오는 그 '순수 언어'의 가능성. 이 사회의 언어에 물들지 않고, 그 고유성을 확보할 수 있는 언어의 탄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언어의 탄생을 위해서 또 얼마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세속성'을 탓할련지. 하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탓함이 '체념의 음표'라는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결코 철학을 포기할 수 없다. 고로 이 포기될 수 없는 철학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외쳐야 할 목소리는 '파문에 반대한다!'이다. 우리의 생명에 늘 위기와 불안이라는 '관리적 시선'을 안겨다주는 이 사회, 이 국가, 이 체제는 '드라마틱하게도' 우리 사회가 늘 파문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파문의 절정은 오늘날 소외되고 있지만, 그러한 소외로 인해 사회의 '불가피한' 내부에 있다고 인식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파문'이 갖는 감각적 기능은 이런 '전시의 상태'에 있다. 우리의 감각이 철학을 통해 다시 항전의 상태를 갖춰야 함은, 바로 이 감각의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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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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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우리가 들어야 할 이 시대를 향한 '비관적 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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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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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적 농도의 진함이 통시적 농도의 중요성을 묻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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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능시험이 되면 저는 솔직히 지각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험생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두 손 모은 부모들,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후배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무관심'이 되어버린 것 같은 '수능거부 시위'를 하러 온 학생들은 여전히 제 관심 안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수능이 될 때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감합니다'가 아닌, '또 저런 짓이야?' 가 이제는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켓 들고 서 있을 시간에, 너희 친구들처럼 글 한자라도 더 보렴"이라는 반응은 올해 수능거부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당연한 반응'이 된 듯합니다. 

긴 설명 필요없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선, 비판자의 학벌이 좋은 측면은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요즘 대중들에겐 한 편의 '성공학'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어렸을땐, 이런 상황을 통해 대중들이 "칫, 지는 서울대, 연고대 나와 놓고..남한테는.."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보는데,,요즘은 "그래 학벌 비판도..좀 유식한 놈, 머리 좋은 놈이 해야지..뽀대 나지 않아?"라는 생각이 더 팽배해진 듯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확산이 결국 '수능거부시위'에서 '그래서 당장 뭐 바뀐 게 있냐'는 실리주의적 시선이 큰 호응을 얻지요. 그 실리주의는 '생활보수주의'로 바뀝니다. 그냥 입 닫고 공부 열심히해서 부모님 속 썩이지 말라고, 네가 사회 생활 해보면, 네가 지금 그러는 행동 피눈물 날거라고.   그들은 수능을 거부했지만, 세상은 그들의 의사를 거부하려고 하는 비극. 이 비극은 결국 그들의 행동을 매년 다가오는 수능처럼, 그들의 의지를 치부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언론도 아예 그들에게 매년 '올해도..'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들'의 자리는 매년 바뀌지만, 바뀜의 효과는 더 차디찬 냉소라는 반응과의 접촉입니다.

차가운 반응 가운데, 제게 가장 무서운 냉소는 사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이나 보라"는 반응이 아닙니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그 대학에서 네가 펼치고 싶은 꿈을 펼치라고. 네가 하고싶은 시위의 정당성도..영향력도 그때 커질거야"라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수능거부 시위를 하는 친구들에게 수능이란 현실을 택해서, 그 수능이란 과정의 최정점의 결과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보라라는 게 오늘날 그들의 의지보다, 그들의 프로필에 기입된 '최종학력'을 소비하고픈 대중의 욕망에 더 가까운 게 아닌지 고민해 봅니다..  결국 대중들이 바라는 욕망은, 세상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한 개인의 의지와 그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보인 과정들의 발견이 아니라, "정말 공감합니다..글 잘 쓰시네요..역시..개념이시네요.."와 같은 딱 자신의 삶에서 적절한 개입선의 측정일 겁니다. 그러면서 그 공감의 반응들이 만드는 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체득한 학벌 자체를 선망함으로써, 끝나버리는.  

이제는 '대안학교'도 교육의 대안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대안으로서 낙인이 찍힌 느낌이 든 지 오래입니다. 이 현실이 스며든 '기업화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수능 추위'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도 극복해보려는 수능거부 시위자들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냉소로 화답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는 요즘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학력 차별을 점점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이 '수능거부 시위자'들에게라도 실컷 냉소를 퍼부을 수 있는 자기위안의 안전망에 자신을 집어넣고, '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나은 것 같다'는 자족감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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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그 수많은 책 가운데,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인 코드'를 꼽으라면, "한국인은 지나치게 주의를 의식한다"일 것입니다. '눈치중심주의 사회'라는 말이 좀 과장될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거부할 수 없는 찝찝함은 안겨다주는 게 사실입니다. '말 한 마디'도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옷 한 벌'도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문화연구가 그토록 환호했던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구호는 요즘의 '시대정신'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것은 '뒷담화의 카니발'입니다. 지금 당장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말을 쳐보시죠. 특히 카테고리 중에서 '지식in'을 살펴보면, '뒷담화'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부터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원래 그렇게 '뒷담화'가 심한가요까지, '뒷담화'에 대한 외상이 생각보다 심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뒷담화'라는 것이 일상에서 으레 우리가 즐기는 가벼운 오락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만, 주변 지인들 가운데 이 '뒷담화'로 인해 사람들 앞에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지나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외상'라고도 저는 봅니다. 

학교나 회사나 커피숍에서 하던 '뒷담화'가 아는 사람들끼리 행해지는 것이라면,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뒷담화'의 스펙터클은 '상상 이상'입니다. 누가 하나 '뒷담화'라는 차의 시동을 걸어주면, 여기저기서 '무임승차'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인터넷 커뮤니티입니다. 흔히 우리가 '이슈'라고 말하는, '껀수'하나가 터지면, 이 무임승차의 규모는 엄청나지요. 무임승차라는 비유에서 우리는 내 감정의 투여 속에 '적정선'이라는 건 그냥 묻어놓은 채, 일단 '타고 보자'라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덧글 보험'에 든 사람들은 가입비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보험은 특이해서, 그냥 인터넷 가입비만 내면, 너무나 편하게 이 보험의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꼬박꼬박 보험료 내라고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이 보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혐오'입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혐오는 경계를 만듭니다. 너와 나. 그리고 ~와를 통해 자연스럽게 구분/구성되는 '차이'. 이 '차이'는 '혐오'를 통해 덧글 보험의 효과를 누려야 하는 이들에게 당장 뿅망치로 때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 두더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같음'을 추구합니다. 혐오로 뭉친 자들은, 내가 그 '혐오'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쉽니다. 그리고 '덧글 보험'을 통해 형성된 '혐오'라는 사적 보험은 난 혐오 받는 너와 달라, 하지만 혐오하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과 같아라는 명제의 동굴에서 나올 줄 모릅니다. 왜냐면 그 동굴 속 어둠이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의 저자 다카하리 모토아키의 주장처럼, 오늘날 우리를 뒤덮고 있는 것은 '불안형 내셔널리즘'입니다. (저는 이 개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사이비 적'을 만들어 놓고, 그 '적'에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적대'라는 이름으로 표출하는 것. 이 불안형 내셔널리즘이 인터넷이란 미디어와 만나, 우리에게 '취미화된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을 안겨다주지요. '적대'라는 것이 충분한 설득력 없이 마냥 '희화화'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를 우리는 사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취미화된 적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맞닥뜨리는 '사태'입니다.  사회의 유동화 속에서 그 어느 하나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이 안정에 대한 욕망은 이상한 연대로 나아가는 듯 합니다. 적대와 연대가 묶이고, 그 효과가 '혐오'라는 이름 아래 묶일 때, 개인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이성의 필터'는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지요.  

[미녀들의 수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루저' 관련 방영분을 보면서 든 생각은 사실 남 대 여의 구도에서 오는 분노와 적대를 넘어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관계'이라는 고민의 꼴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제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읽으면서, 그 꼴을 더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스의 [증여론]에서 강조되는 세 요소 교환, 증여, 순수증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많은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커뮤니케이션이 늘 '화통'되는 것은 아니고, '불통'을 학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남으로써 초식남, 건어물녀 같은 개념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 예방'을 위해 우리가 아예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요. 좀 더 현실적인 움직임은 '예방'이 아닌, '예상'의 성격이 강한 움직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겠다'라는 '순수증여'라는 포장된 애정의 언어대신, 우리는 (마음 속에 숨겨놓았지만) '교환'이라는 애정의 언어를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도경씨의 '루저'발언보다, 최한빛 씨가 언급한 '여성들이 꾸미는 만큼 남자들이 그만큼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사실은 제법 진부한 지적이지만, 늘 고민거리로 남는 견해에 대해 더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큰 인상을 받음으로써, 사실 우리는 '루저' 발언에서 이도경씨의 입에 함께 따라 나왔던 '경쟁력'이란 단어도 보다 거시적인 구조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이 고민은 사실 제 지인이 고민하고 있는, 또 최근 여성학 진영에서 중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기업화된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업화된 가정' 속에서 늘 '전쟁'같은 일상을 감수해야 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에서 나온 어떤 무의식에서 시대와 조응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홈 스윗 홈'이라는 구도마저 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요즘, 집마저도 전쟁을 위한 공장처럼 간주되는 오늘날, 그 어느 하나 'vs'의 구도로 맞설 수 밖에 없고, 또 구도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요구받은 이 사회에서,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이 진심이었든 / 대본에 따른 발언이었든 적어도 지금 이 시대가 공명하고 있는 외상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아야 할 사람과 그 상처로 인해 가슴 아파야 할 사람은, '루저'라는 발언으로 발끈하는 이들과 함께 이도경씨 본인도 들어가야겠지요.  (그래요. '투자'라는 단어가 어디 네티즌들이 그토록 덧씌우고 싶어하는 '요즘 여성'들의 가치관이던가요. 그 '투자'라는 단어를 오히려 즐기는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이 시대의 연애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자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한 치장, 그 치장으로 남성의 유복함, 귀족됨을 확인받던 그 시절.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한스 페터 뒤르의 책들을 보시면 공감하실 겁니다)

도를 넘어선 마녀사냥이다!와 같은 의견 등 우리가 예전부터 정말 많이 접해오고 있는 담론 양상ㅡ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 '희생양'의식에서 우리가 좀 두텁게 사유해봐야 할 지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마녀사냥'이란 단어 자체를 가지고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라고 하면서, 자신의 '취미화된 적대'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마녀사냥'은 정말 그녀가 '마녀'는 아닌데, 사람들로 인해 '부당하게' 마녀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부당함'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마녀사냥'이란 말로 그녀를 구해주려 하느냐입니다. 근데, '부당함'이 사실 객관적일 순 없겠지요. 그 부당함을 둘러싼 복합적 요인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확신하는 지점은 이 '마녀사냥'의 시선을 거부하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적대적 행위는 비판받을 수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과는 전 분명 싸우고 싶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마녀사냥'운운한다는 것을 하나의 지적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최근 견해들을 보면, 일부 공감가면서도, 그 사태에서 자신이 하는 행위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도 보여진다는 것 또한 저는 보여지는군요)

둘째, 이 '루저'발언으로 갑자기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권'운운하는 분들은 종종 그 발언을 접한 자기 부모가 울었다느니, 친구가 우울증에 걸렸다느니 같은 상당히 '감동적인'(?)예를 들고, 또 거기에 '장애인'들의 사례까지 끄집어내어, "네가 장애인들의 심정을 아느냐"같은 과장된 동원을 시도하더군요. 저는 이 동원도 자신이 즐기고 있는 이 취미화된 적대의 분위기에 동참한 '불쾌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인권' 운운하여, 소송을 걸고, '정의'라는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여, 그 정의의 댓가로 돈을 받자는 의견도 나오더군요. 그러면서 이건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건 상징이고, 나는 그 상징을 위해 소송을 한 것이다. 글쎄요..여기서 '법'은 과연 우리에게 온전한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셋째, 이번에도 '된장녀' 사건 때처럼, '이게 다 모두 페미니스트들 때문이다'라는 괴언입니다. 페미니즘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어떤 '사이비 강의'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1세대 꼴페미'가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이 또한 진부한 시각을 들고 오시던데, 페미니즘이 얼마나 한국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가는 이번 사건에서 또 나타났습니다. (이건 마치 젠더 연구한다고 하면, 여성들이 하는 연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뭐가 다른 지적 수준인지..이거 원) 

문제는 앞으로 이 '취미화된 적대'는 계속 될 것 같고, '덧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온갖 잡다한 사이비 지식으로 편견과 오해의 벽을 견고히 만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혐'이라는 감정으로 언제나 똘똘 뭉쳐, '이'가 아닌 '동'으로 가길 바라는 현대 사회의 심리는, 그냥 오락거리의 하나로 보기엔 분명 위험한 수준입니다. 문제는 이런 '혐'을 통해 그 '혐'의 대상자가 된 사람이 "설마 안 좋은 ...?"그 결과로 가는 것 아니야?라는 그 위험한 상상의 '야릇함'을 무의식적으로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제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입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에서 시작된 취미화된 적대 -> 근데 그 적대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남 -> 반성이라는 진부한 굴레에서,우리는 또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암울함. 그 암울함을 소비하는 우리의 잔혹함. 문제는 이 잔혹함이 계속 우리의 양심문을 두드릴수록, 우리는 그 문에 강한 자물쇠를 채우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 자물쇠를 채우는 일이 "이웃도 하니 나도 한다"라고 해서 더 문제이겠죠. 거기서 가장 무서운 결론은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일이랍니다.."라는 자들과 "이거 하다보니 그냥 웃자고 하는 것 같아요. 놔둬요 이게 대세입니다"라는 자들의 무의식적 연대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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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1-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론..지금 이 반성 드립이 더 무섭습니다...이 반성 드립으로..또 취미화된 적대감은 면죄부를 받고..유예되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