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라는 낯선 경계 - 코리안 뉴 웨이브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국가, 섹슈얼리티, 번역, 영화
김선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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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몇 가지 일련의 정치경제학적인 변화를 제 프레임에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아전과는 다른 재현의 정치학을 구사한다.정치적인 변화로는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 노태우 정권(1988~1993)을 마지막으로 한 군부독재시대의 종말, 새로운 문민정부의 탄생, IMF 국제구제금융 지원, 그러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이 그것이다. 한편 이러한 국민국가의 정치적 변화는 본격적인 소비 사회로의 진입,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라는 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현실은 영화에 직접적이며 바로 반영되는 게 아니라 영화 프레임이라는 경계 혹은 틈 사이로 새어들어 온다. 1996년에 더 낭가서 1990년대 이후 한국 극영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군부 독재 시대가 마감하는 그곳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군부 독재라는 억압의 사슬이자 악의 축과 그에 대한 저항과 피억압이 바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 정권 같은 국가 권력의 어떤 통합적인 이미지가 사라졌을 경우 리얼리즘의 미학적 변화는 대체된다.-서문 6쪽

한국영화가 동시다발적인 욕망과 힘들로 인해서 헤게모니의 장이 된 것은 1990년대에 일어난 이러한 정치경제학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동시다발적인 욕망은 크게 현실 역사를 프레임으로 끌어들인 영화와, 현실이 스며들 틈 없이 완고하게 제 장르를 구축해 가는 장르 영화로 나뉘게 된다. 이로서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두 가지 길에 나선다. 한 갈래는 군부독재 정권이 사라지면서 발생한 당대의 텅 빈 재현의 공백을 외상으로서의 한국역사에 대한 재현으로 메우는 길이다. 다른 한 갈래는 소비 자본주의화에 따른 여가의 장이자 오락 산업으로 '방화'라는 오염된 용어를 벗어나서 한국영화를 쇄신하려 했다. 이처럼 한국 영화가 끊임없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건 거의 시대적 요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영화의 새로운 정체성은 결국 1996년을 전후로 해서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로 갈라진다.-서문 7쪽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는 황금기로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영화는 암흑기로 기술된다. 영화는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국가의 억압에 자유롭지 못했으며 이는 검열 제도라는 엄연한 현실에 영화인들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는 걸 보여준다.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호명은 단순한 상상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군대나 감옥 등 억압적 국가장치가 동원된 물리적이며 강압적인 것이었기에 그 시대에(상상의,표현의)자유란 이미 한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영화는 유신헌법을 거치면서 점점 더 지쳐갔으며 본격적인 소비사회로의 진입과 비디오 시장의 활황 등으로 새롭게 열린 이데올로기의 빈틈은 에로 영화 장르 등이 메우게 된다. -서문 8쪽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는 1980년에서 1995년까지 한국영화를 말한다. 코리안 뉴 웨이브는 한국 영화 역사를 기술할 때 1980년을 서사, 스타일, 주제 등에서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난 시기로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영화의 변형을 '리얼리즘의 부활'이라고 명명한다.'코리안 뉴 웨이브 담론'은 크게 세 가지의 불연속적인 배치로(2)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80년대 민중민족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사회적 현실을 담은' 리얼리즘 영화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1980년대 중반에 상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신인 감독들의 영화를 '코리안 뉴 웨이브'라는 범주로 연결짓고 있는 것이며, 셋째는 '코리안 뉴 웨이브'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코리안', 즉 한국적인 것 혹은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제 정의로 이루어져 있다.-2쪽

다시 말해서 민족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국가나 감독의 국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를 말한다. 그리고 이 민족을 만드는 데에는 영화 뿐 아니라 그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 제도들, 집단들, 개인들 모두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민족영화를 사고한다면 민족의 현실이나 역사를 다룬 영화가 자동적으로 민족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영화라는 것은 그것을 민족영화라고 명명하는 행위자가 필요하며 민족영화로 수립하기 위한 제반 제도와 집단적인 수행의 주체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3쪽

앨리슨 랜드버그는 영화, 텔레비전, 박물관 등에서 재현되는 이러한 전례없이 새로운 공적 기억의 형식을 '보철의 기억PROSTHETIC MEMORY'라고 명명한다. 랜드버그는 이 보철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설명한다. 첫째, 보철의 기억은 개인의 산 경험의 산물이 아니며, 자연적이지 않은, 매개된 재현과 연루해 있다. 이는 영화를 보거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경험으로 기억이 이식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보철적 기억은 감각적인, 육체에 쓰여 지는 기억을 말한다. 이는 마치 베르그송의 물질적 흔적으로 육체에 남은 기억과 같다. 랜드버그는 베르그송을 인용하는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기억은 (현재에)저장된 육체적 행동과 같다. 즉 과거의 어떤 자극에 의해 행동했던현재에 남아있는 물리적 흔적이다. 따라서 순수 기(17)억이나 비물질적 기억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갖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베르그송을 따르자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각적인 경험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일 수 있는 일종의 기억하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보철이라는 것은 상호 교환가능성과 변환 가능성을 갖고 있다-17~18쪽

랜드버그는 주로 상품 형식을 띤 기억의 이식이 이에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보철의 기억'이라는 새로운 기억의 테크놀로지가 이전 시대의 사회적 통합과 집단적 정체성을 위한 사회적 기억의 틀, 즉 가족 종교 사회 계급 등을 벗어나서 타자성과 타자를 인식하고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부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기억의 테크놀로지는 대중문화 시대에 어떤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특정한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에게 기억과 정체성을 주입하고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억의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개인에게 이식된 기억은 더 이상 자기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유산이 아닌 감각적으로 스며든 이 기억을 영화를 통해서 획득하면서 비로소 관객들은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18쪽

시간 여행이나 현재를 이탈한 시간에 대한 강박적인 귀환은 서구의 기술적 근대화를 따라 잡기 위해서 혹은 그 내성화된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영화 테크놀로지를 도구화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 여행'이라는 <박하사탕>과 '2004년 한국 영화'라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한국 민족영화가 역전된 방향,즉 실패한 민족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방향에서 역사를 상품화하고 이미지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소비 자본주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본격적인 상품으로 등장, 가속화되고 있는 영화의 장르화와 상품화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가속화되는 장르화 및 상품화가 실패한 민족 내부의 역사를 망각하는 기억의 테크놀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패한 민족의 역사를 기억해 내는 데에서 망각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 혹은 애도가 승리로 바뀌어서 그 민족의 역사가 점점 더 상품화되어 이미지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바로 당대의 시간 여행 영화가 역사를 대면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역사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구축된다. -59쪽

이미지와 스펙터클을 위한 영화 테크놀로지의 구축은 민족의 실패한 과거를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애도하는 과정을 거친다. 즉 영원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근대의 게임에서 상실한 민족이라는 대상-원인에 고착되어 있었던 강박을 테크놀로지로 전이함으로써 근대를 성취할 수 있고, '자기 민족 되기'와 '근대 민족 되기'가 비로소 화해하는 것이다.이렇듯이 비서구 국가, 특히 피식민지의 역사를 지닌 비서구 국가가 시달리고 있는 주체적인 '자기 민족 되기'와 서구의 '근대 민족 되기'간의 분열은 비서구 국가-민족의 근대성과 근대화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59쪽

비서구 국가-민족은 제국주의 시기, 정확하게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근대화, 즉 테크놀로지와 산업의 발전을 통해서 서구를 따라 잡으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기술적으로 열등한 국민국가가 앞선 기술을 지닌 국가와 경쟁하고 싸우기 위해서 기술적 근대화는 필수적인 대항 수단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의 등장과 맞물려 있는 시간 여행 영화들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비서구 국가의 테크놀로지의 근대화를 통한 근대의 극복을 논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그 잠재적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서구 국가인 한국에서 테크놀로지 발전은 영화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즉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근대의 극복인 것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와 문화가 절합되는 과정에서 한국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새롭게 확립된다.-60쪽

가혹했던 근대의 역사는 이제 기술적 근대화를 통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처분 가능한' 상품이 된다. (61) 이미지를 통해서 역사를 재현하는 민족 스펙터클인 영화인 이 영화(<태극기 휘날리며>)는 서구의 내성화 도구로 테크놀로지를 사용, 새로운 테크노-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과거로 민족의 시간을 매끈하게 봉합한다. 테크놀로지는 공유된 과거 자체를 가까이 보고 그것을 스펙타클한 이미지로 재현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욕망-비로소 민족의 과거를 스펙터클로 재생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을 만족시킨다. 그러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과거, 모순 없는 민족의 과거, 현재에 복속될 수 있는 과거가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61 /68쪽

"주체 없는 재현의 공간은 없으며 공간 없는 주체도 없다. 따라서 경계 없는 주체도 없다." - 빅터 버긴 -75쪽

<이중간첩>은 북한 간첩들의 간첩 활동, 간첩간의 멜로드라마적 감정 등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알 수 있는 것은 남한 관객-국민이 보고 듣길 원하는 것은 실제의 북한 혹은 북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한 관객은 바로 남한이 어떠한 역사적 변화도 없이 언제나 억압당해 있는 북한을 개발시키고 진화할 수 있다는, 남한의 식민지 판타지를 유지시켜주는 영화를 보길 원하는 것-105쪽

여기에서 한국성은 임권택 감독의 여백의 공간과 자주 사용되는 테크닉 자체로 정의된다. 그의 영화 공간 자체는 한국이라는 민족성과 투명한 상호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형식주의의 토대의 내용은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성을 구축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는 서양세계의 반대쪽에 무언가 소박하고 청순한, 아직 오염되지 않은 민족적 원재료가 있다는 식의 관점을 지닌 서구의 자유주의적 동양주의자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132쪽

시네필리아의 한국어인 영화광은 폴 윌레먼의 개념으로, 죽었지만 과거의 기억속에는 살아있는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영어 명명법으로 굳이 '필리아'라는 병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체애호증인 네크로필리아necrophillia의 과거 지향적 속성을 시네필리아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윌레먼은 이 개념을 역사화 할 때 중재 중인 사회 mediatic society, 즉 문화에서 어떤 모호한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각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시기에 바로 이 관객 주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을 발견한다.-138쪽

영화광의 시선은 미래 지향적인 영화의 존재론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영화광은 시네필리아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듯이 사진의 속성을 영화에서 발견하면서 어떤 특정 순간, 몸짓, 세부 묘사 등을 페티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전지구적 시각 경제의 자장으로 이월해 보면 권력과 자본이 깊숙이 개입해 있는 이 경제에서 오늘날 서구의 영화광은 지표적인 사진 이미지의 시대와 디지털 전자 이미지 시대라는 가상현실의 시뮬라크라 세계가 부딪치는 중재 혹은 혼성의 시대에 제 관객성을 드러낸다. 비서구의 영화들이 동시대 서구 영화(제) 시장 경제에서 교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물리적 현실을 넘어서는 디지털 전자 이미지에 대한 영화 매체의 존재론 자체의 불안을 해소시켜준다는 데에 있다. 즉 이 영화들은 디지털 시대에 사진적 리얼리즘을 부활 혹은 갱신하여 영화 매체의 존재론을 다시 증명해 냄으로써 서구 정보 기술 자본주의 시대의 포스트 모던 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물질적 세계에 대한 포기를 회귀로 전환시킨다. -139쪽

서구의 시각적 욕망, 즉 기본적으로 '포르노그래피적' 욕망인 동시에 식민주의적 욕망은 디지털의 전자 이미지 시대를 맞이하여 영화 매체를 향수적으로 복원시키려는 비서구의 영화를 수용하면서 채워진다. 또한 거꾸로 비서구 영화를 대면하면서 서구의 두 가지 욕망은 형성되고 의미가 구성되는 것이다.-140쪽

김기덕 영화에서 몸은 디지털 시대의 과잉 산업화와 기계화와는 구분되는 제삼 세계 지역을 지시하는 메타포와 같다. 즉 기계 혹은 사이보그와 같은 탈인간의 형상이 보편적인 전지구화의 상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한다. 몸이 갖고 있는 물질로서의 자연은 언어를 비롯한 인공적 문명과 대립하면서 동시대 남한의 현실에 침윤해 있다. -142쪽

결론적으로 오늘날 한국영화에서 '작가' 영화라고 불리며 '세계 영화'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한국 영화 감독의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서로 연동된 위상을 점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 매체의 존재론적인 면에서 이들 영화는 지표의 위상을, 다른 하나는 영화 재현의 영역인데 이 부분에서 이들 작가 영화는 동물적이며 육체가 전경화된 폭력의 자리에 한국을 놓으면서 지역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도 추앙받고 있는 이들 작가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더들리 앤드류가 말하고 있는 영화의 변증법, 즉 '뿌리를 둔 세계주의' 혹은 '비판적 지역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걸까.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결국 트랜스 내셔널 시대의 한국영화의 (재생된)뿌리는 그 낡은- 지표적인- 영화화면 위에 펼쳐지는 남성들의 날 것의 폭력이 아닌가.-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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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책 커버 이미지는 출판사에서 유가족들의 동의를 구하고 만들었답니다.  


 제가 책임간사를 맡고 있는 시사비평모임 '당대비평'에서 '당비의생각 시리즈 세번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만들었습니다. 웅진씽크빅 인문교양담당 산책자에서 책이 만들어졌고, 저는 이 책의 기획참여와 책 전체 편집을 담당했습니다.  

2009년 참 많은 상실과 그것으로 인한 아픔이 발생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았지요. '당대비평'은 바로 그 죽음을 성찰하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용산 참사의 광경들, 두 대통령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애도와 우울,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정치와 기억, 역사의 관계를 살펴보려 했습니다.  

제 부족한 생각 대신, 《당대비평》 기획주간인 서동진 선생님
의 여는 말 한 대목을 인용해봅니다.

“1년이 되어가도록 장례를 치루지 못한 채 기억의 저편에서 표류하는 용산 참사, 어쩌면 회피하고 싶은 죽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박종태 씨의 외로운 죽음, 그리고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서 비롯된 노동자 가족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죽음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까지 함께 가지고 있다. …어떤 죽음이 대대적으로 애도될 때, 그것은 단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애도하는 자의 정치적 욕망이 투여되어 있음을 가리킬 것이다.

‘당비의생각’ 3권은 2009년 한국 사회의 정치적 공간을 배회하였던 죽음을 비판적 반성의 무대로 불러들이고자 한다. 그것은 죽음 자체의 문제를 떠나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삶의 정체성을 헤아리고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적 정치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찾아보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_ 서동진:「들어가며: 당비의생각 3권을 기획하며」에서

책은 12월 7일에 공식 릴리즈 된다고 하네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는? 

기획주간 :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교수)  

기획위원 : 정진웅(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교수),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장), 

              송경아(소설가), 이상길(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한보희(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강사) 

편집간사 : 김신식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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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12-0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챙겨야겠군요! ^^

얼그레이효과 2009-12-0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고맙습니다. ^^

얼그레이효과 2009-12-0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당비'가 예전처럼 다시 힘을 내려 합니다. 지금처럼 관심 부탁드려요.^^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40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웹진 <제 3 시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우리는 ‘언어-에너지’의 과다 분비를 통해 많은 상처를 안고 산다. 나는 이러한 상처의 누적이 만연한 오늘날의 사회를 ‘스팸(spam) 사회’로 명명하려 한다. 하루에 2~30개씩 쌓이는 스팸 메일. 우리는 이 메일의 운명을 안다. 예견된 폐기의 운명 말이다. 2~3초의 순간에 폐기의 미래를 빗겨나기 위해 애쓰는 ‘스팸’ 생산자들의 ‘친절’ 전략은 고도화되어 가지만, 그럴수록 가깝게 다가오는 남모를 깊은 고독과 지속되는 실망감. 그것은 곧 시각의 피로감을 유발한다. 우리는 이런 피로감을 일찌감치 예방하기 위해, ‘외면’이라는 전략을 선택한다. 길거리에서 불과 몇 십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내 손에 쥐어지는 전단지들. 그 전단지를 개인의 손에 쥐어주어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어색한 접촉. 우리는 이 접촉을 통해 메시지의 무의미함을 체감한다. 그리고 내가 취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판별하고 학습한다. 메시지는 흩뿌려지고, 구겨지고, 거리에 쏟아진 구토물에 섞여 있다. 메시지는 오늘날 하루살이 아니 ‘일초살이’가 되었다.


이런 ‘일초살이’의 범람 속에서 내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구경꾼의 어떤 윤리이다. ‘말과 글’의 스펙타클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 그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감각이 피로를 호소할 때, 우리는 이 피로감을 혐오로 교환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짧지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짜증. 이 짜증은 메시지를 전달해야지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인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곧 구겨지고 거리에 버려질 전단지의 운명처럼, 제목만 보고 휴지통에 들어갈 스팸 메일의 그것처럼, 우리는 메시지의 비극적 운명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에게도 덧씌우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경꾼의 윤리 속 내면화된 상처에 대한 예방. 이 예방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시도되는 ‘외면과 무관심’이라는 행위. 이를 통해 정작 거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들 또한 곧 폐기의 운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의미 없는 메시지의 굴레라는 구경꾼들의 인상에 갇힌 채, 의혹의 수술대에 오른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칼을 준비하여, 그들을 해부하려 한다.  

 

‘난’ 보았다. 그리고 알고 있다. 의료사고로 생긴 부작용으로 사회 생활을 못하는 어느 남자의 외침을, 경찰에 연유 없이 불법 연행되어 졸지에 방화범으로 몰린 한 대학생의 울분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저들은 그렇게 쳐다보여질 운명이라는 것을. 결국 우리는 망각의 약을 복용하기 위해 오른손을 내민다. 그러나 우리는 또 안다. 이는 우리네 삶의 ‘깔끔한 입’, 타자를 향한 ‘적당한’ 관심만이 내 삶의 안전망을 해치지 않는다는 ‘영민한 입’을 위한 부정과 부인의 과정임을.


‘스팸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피로감은 스스로가 ‘영민한 신체’가 되도록 부추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얻고 싶은 메시지를 얻고, 그 수확을 위해 쏟은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과다하게 푼다. 소위 ‘뒷담화’라고 말하는 이야기 문화의 만연과 그것이 주는 상처의 과잉은 ‘스팸 사회’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소비될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준비하기.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타인의 사생활에 별점을 매기고, 20자 평을 남기기. 여기엔 어떤 친밀성과 내밀성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있다. 말을 해야 하는 상황. 메시지가 없는 자리가 어색하고, 그것을 언어로 채워야 할 상황에서, 내 삶의 안전망을 해치지 않는 차원의 언어 공간을 창출하기. 그것을 위한 가장 손쉬운 전략은 타인의 내밀함을 교류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고로 현대인은 이장욱의 소설 제목처럼 ‘고백의 제왕’이 되어가고 있다. 짧은 시간 소비되고 잊혀질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소재들을 진열하고, 개인은 그 진열된 이야기의 풍요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풍요 속에서 주고 받는 ‘빈 말’의 미래를 체화한다. 정이현의 소설 한 구절이었던가. “언제 한 번 보자”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예의 있는‘ 거짓말이 되었다고. 진언과 허언의 경계가 사라진 언어 에너지의 과다, 혹은 그 둘의 경계를 만들어 의혹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위무하려는 개인들. 우리는 물론 이 개인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허언’을 둘러싼 사람들의 냉소와 체념. 그것을 도모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두렵고 무섭다. 2008년 이후,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빈 말’의 정치. ‘허언’의 운명을 타고난 ‘공약’이 “그것은 오해입니다”로 일갈되는 그들만의 소통을 생각해본다. 사람들에게 이 국가와 이 사회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가 ‘휴지통’에 쉽게 버려질 운명에 처한 지 오래인 지금. 우리 사회는 메시지라는 존재에 지쳐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이 ‘스팸 사회’속에서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빈 말’이 환영받고, 무관심의 상처를 가진 자들의 호소와 분노는 ‘빈 말’ 취급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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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스튜어트 홀 지음, 임영호 옮김 / 한나래 / 2007년 12월
품절


대처리즘은 20세기 영국 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러한 정치적 합의와 전통의 대대적인 재편과 시장, 개인주의의 부활을 표방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대처리즘 국가 역시 이데올로기적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적극적인 개입주의의 성격을 띤다. 시장과 경제 문제에서는 자유주의와 탈규제를 추구하지만, 이데올로기 부문에서는 개입주의적인 양면성을 띠는 게 바로 대처리즘 국가의 특징이다. 홀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개념은 바로 대처리즘의 이런 복합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도덕적 경찰로서의 국가 역할은 바로 홀을 비롯해 여러 연구자들이 1970년대 중반 <위기의 관리 Policing the Crisis>에서 이미 제기한 문제이다.-11쪽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처리즘은 '자유 시장'과 경제인이라는 자유주의 담론과 전통, 가족, 국가, 명예, 가부장주의와 질서 등의 유기적 보수주의의 주제를 결합해 새로운 담론 접합체를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된다.(21) 문화적으로 대처리즘 프로젝트는 '퇴행적 근대화 regressive modernization'의 한 형태로 정의된다. 이는 사회를 '교육'하고 규율화해서 특정한 퇴행적 근대성 형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인데, 이 과정은 똑같이 퇴행적인 과거의 (근대성) 형태를 통해 사회를 과거로 회귀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21~22쪽

이 분석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문화 현상이다. 그리고 대처리즘이 긴 기간에 걸쳐 발전해왔고 변화했기에, 어느 편인가 하면 그것의 문화적 기원과 문화 지형에 더 많이 주목하게 되었다. 좀 더 정통파적이거나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주된 문제에서는 벗어나는 '주변적인'문제처럼 보일지 모르는 갈등 영역들이 '헤게모니' 분석이란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도덕적 행위에 관한 문제라든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제라든지, 인종과 종족성 ethnicity문제라든지, 생태학이나 환경 관련 이슈, 문화적, 국가적 정체성 문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처리즘은 '내부의 적'을 찾아 내려하고, 사회적 삶에서 다양한 구분이나 정체성의 영역을 가로질러 새로운 구분이나 정체성 구분을 만들어내면서 작동한다. 대처리즘은 '남성적인' 정통적인 취향과 성향, 선호, 의견, 편견 등을 갖춘 고상하고 가부장적이며 기업가적인 주체를 우리의 주관적 세계를 장악할 수 있는 보장책이자 안정된 주체적 기반으로 구축한다. 대처리즘은 특히 편협하고 특정 종족 중심적이며 배타적인 '국가 정체성' 안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다.-32쪽

대처리즘이란 상당 부분 상식의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즉 대처리즘의 목적은 '이 시대의 상식'이 되는 것이다. 상식은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계산 방식의 틀을 형성하며,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실제와 사고에서 그냥 '당연시'되고 모든 대화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는 결코 검토나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을 이루며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가정하는 전제가 된다. 스스로 역사에서 벗어나 자연의 영역으로 자연화하고, 그리하여 드러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꿈꾸는 바이다. -33쪽

국가 장치가 교정과 강제 기능을 강화하게 된 것은 이데올로기 풍조가 대체로 훨씬 엄격한 사회적 규울 체제를 선호하는 쪽으로 극적으로 악화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중략)1972년과 74년 사이에 집권 정부, 억압적 국가 장치, 미디어와 몇몇 여론 표출 부문들은 마침내 서로 맞물린 계획적 혹은 조직적인 공모에 의해 '위기'를 활용하게 되었다. (중략)물론 공모의 유령이 이렇게 서서히 성장하게 되면 - 대다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기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 물질적 효과가 발생한다.(58) 이것이 유포되면 국가의 논리를 위협하거나 거기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 공식적으로 억압하는 조치가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의 전제는 사회 전체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국가는 대중적 의지의 산발적인 합의를 관료적으로 구현한 것이자, 이를 강력하게 조직화하는 중심이며,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정당하며, (비록 그것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합의를 위협하는 것은 누구든 국가를 위협하는 셈이다. 이는 치명적인 굴복이다. 이 등식의 배후에서 예외적 국가는 번영을 누린다.(59)-58~59쪽

특정한 집단이 '도덕적 공황 moral panics'이라는 방법에 의해 여론은 사회적으로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한결같이 또 끊임없이 길들여진다.(60) 지금은 대단히 중요한 계기이다. 즉 지금은 '동의를 통한 헤게모니'의 방안들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좀 더 억압적인 특징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점이다. 여기서는 헤게모니의 행사 내에서 움직이는 시계추가, 동의가 강제를 능가하던 데에서 벗어나 말하자면 강제가 동의를 확보하는 자연적이고 관행적인 행태로 되는 여건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헤게모니의 내부 균형 이동 - 즉 동의에서 강제로 - 은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사회 세력들이 점차 양극화하는 데 대한 국가 내부의 대응이다. 바로 이것이 '헤게모니의 위기'가 재현되는 방식이다. 통제는 완만한 단계별로 점진적으로 집행하게 된다. 위기가 초래하는 '골칫거리'에는 영역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통제가 가해진다. 여기서 매우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것은 이 통제가 두 가지 수준에서(즉 위에서와 밑에서)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는 갈등과 투쟁의 강제적인 관리라는 형태를 띠는데,-60/ 81쪽

이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적 '동의'도 갖추고 이미 정당성도 획득한 것이다. 영국의 국가가 '예외적인' 위치로 빠져들때 취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우리는 잠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 '파시즘'같은 단순한 구호들은 모든 것을 편리하게 은폐해버린다. (81)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소수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과 서로 엮이게 된다. '모든 사람'의 이익은 지도층의 보호를 따를 때 적절한 보호 방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국가는 말없는 다수(즉 '온건파들')를 위해 또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극단파'와 투쟁하는 캠페인을 공개적이고 정당하게 전개할 수 있다. 이것이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법과 질서' 중심의 사회가 은근슬쩍 자리 잡은 것이다. -81, 83쪽

이데올로기적으로 '법과 질서' 중심의 사회로 넘어가는 실제 경로에는 아주 구체적인 과정이 뒤따른다. 핵심만 말하자면, 이 시대의 초창기에는 대체 효과 displacement effect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이 과정이 유지되었다. 이 대체 효과는 위기가 다수의 사회적 경험(사회적 불안)에 전유되고 일련의 거짓 '해결책'을 거쳐 주로 도덕적 공황의 연속 형태를 취하게 되는 그 방식을 위기 자체와 연관짓도록 하는 것이다.이는 마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될 때마다 그럴듯하게 불안의 대상처럼 보이는 주제들에 공포를 투사해서 일시적 안도감을 얻는 것과 같다. 이러한 주제로는 악마의 발견, 민중적 악당의 설정, 도덕 캠페인의 전개, 고발과 통제의 속죄, 요컨대 도덕적 공황의 사이클을 들 수 있다. -85쪽

법과 질서의 언어는 포퓰리즘적 도덕주의에 근거해 유지된다. 바로 여기서 '좋은 편'대 '나쁜 편',문명과 비문명의 기준, 무정부와 질서 사이의 선택을 구분하는 거창한 구문론적 법칙은 바로 여기서 세상을 끊임없이 둘로 쪼개 각자 지정된 위치로 분류/배치한다. 법과 질서 회복을 외치는 십자군들이 대중적 도덕성과 상식적 양심을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 영역에서는 '가치'와 도덕적 쟁점들이 작동된다는 바로 그 점에서 주로 비롯된다. 이러한 가치의 작동은 또한 노동 계급 지역과 그 인근에서 겪게 되는 범죄와 절도, 귀중한 재산 손실의 경험과 예상치 못한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건드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 아무런 다른 해결책을 널리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우파가 자신의 권위주의적 강령에 대한 동의를 구축하는 데 아주 긴요한 '권위의 필요성'에 사람들이 집착하도록 유도한다. -120쪽

포클랜드 위기 자체는 예기치 못한 일일 수 있으나, 이것을 포퓰리즘적인 대의로 구성해낸 방식은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대처리즘 포퓰리즘의 전체 궤도에서 최고점에 해당한다. 공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정치인들이 지녀야 할 자질, 즉 선거에서 정치 강령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능력 이상의 것으로라는 뜻으로 나는 '포퓰리즘'이란 용(154)어를 사용한다. 이는 대처리즘 정치에서 중심적인 프로젝트인데,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기반을 직접적으로 '국민'에 대한 호소 위에 두고, 상식적 경험과 실천적 도덕주의라는 본질적 범주에 이 정책들의 뿌리를 두며, 이리 하여 계급, 집단, 이해 관계들을(단순히 일깨우는 데 그치지 않고)재구성해 특성한 방식의 '국민' 개념으로 만들려는 프로젝트를 말한다.-154~155쪽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1970년대 중반 '새로운 우파'의 형성과 더불어 영국의 현장에 등장한 새로운 헤게모니 정치 형태를 특징 짓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는 사회적, 정치적 세력들 간의 균형에서 일어난 변동을 묘사하며, 또한 국가를 통해 사회에서 제도화된 정치적 권위와 사회적 규제 형태에서 일어난 변화도 기술한다. 사회와 국가의 무게 중심을 '권위주의적'규제의 축 쪽으로 더 가깝게 옮겨놓으려는 시도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사회가 점차 방향을 잃고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드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상태에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사회적 규율과 리더십의 새로운 체제를 '위로부터' 부과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182) 전략의 '포퓰리즘적'부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사회적 권위와 규제의 새로운 형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반드시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공포와 불안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법과 질서 유형의 사회로 표류하는 현상은 이 움직임을 뚜렷이 보여 주는 지표이다. 이 움직임에 핵심적인 부분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공식적인 장치들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규율을 강화하는 조치가 단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182~183쪽

그람시에게 '헤게모니' 문제란 세력 관계의 작동이 중단되는 상황이 되는 영구적인 사물의 상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지금쯤 자명해졌을 것이다. 그것은 지배 계급 권력의 기능적 조건도 아니고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동의' 나 '문화적 영향'의 문제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적 국가'의 쟁점이다. 즉 이것은 모든 사회 활동의 수준에 걸쳐 사회적 권위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중단 없는 작업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국가의 수준을 좀 더 일반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충분할 정도로 '경제적, 정치적, 지적, 도덕적 통일의 계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271쪽

<법과 '사회 질서' 대 법과 질서> 두 번째 측면은 위기 상황에서 경제적, 정치적 투쟁을 제어하기 위해 국가가 강제적 권위와 억압적 기구에 점차 의존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사회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생활 수준을 지키려는 투쟁이 격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국가는 점차 국가의 강제적 측면과 법적 기구의 교육적, 훈육적 효과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 다.-277~278쪽

즉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 집단과 개인에 대한 경찰의 권한과 감시가 확대되었고, 광범위한 사회 갈등 영역에서 경찰과 법적 기구의 동원이 늘어났으며, 경제와 산업 분야의 계급 투쟁 저지에서 사법부의 강제력의 역할이 증가했고, 시위와 파업을 법적으로 제한한 노사 관계법 같은 새로운 사법적 수단의 동원이 잦아졌고, 공모 혐의에 대한 기소와 정치 재판이 늘어났으며, '긴급 상황'을 느슨하게 정의하는 바람에 인신 보호 영장이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수호, 정치 질서 전복 방지라는 주제들에 관해 법적, 사법적 개념과 담론들이 정교하게 마련되고, 이것들을 다시 범죄를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권위의 붕괴를 보여주는 '징후'로 보는 관점과 연결되었다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현상이다.-278쪽

도덕적 규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밑으로부터의 외침'은 우선 소요의 즉각적인 징후들(범죄, 비행, 도덕적 관용성의 증가)을 포착하고, 조직화된 풀뿌리 이데올로기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이것들을 일반적인 '도덕 질서의 위기'라는 시나리오로 만들어냈다. 이후의 단계에서 이것들은 좀 더 정치화된 위협들과 함축적으로 연결되어, 적들이 '안팎에서' 급증하는 바람에 사회 질서가 도덕적 붕괴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식의 그림을 그려냈다. 이것은 대중적 도덕성의 보편적이고 탈정치화되고 경험적인 언어로 대중의 수준에서 체험되는 '위기'이다. 대중적 도덕성의 담론들을 통해 구체화된(접합된) 범죄와 사회 비행이라는 주제들은 일반 사람들의 직접적 경험, 걱정, 불안을 건드리게 된 / 다. 이 때문에 밑으로부터 발생한 '규율의 요구'는 사회 질서와 권위의 '위로부터'의 강제적 회복에 대한 요구로 바로 그대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대중적 불만의 진정한 물질적 원인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 세력들과 캠페인들을 통해 이 원인들이 '규율 잡힌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로 재현되는데, 위의 접합은 이 둘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한다. -279~280쪽

이 접합의 주된 효과는 부과 imposition를 통해 질서 회복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일깨운다는 점인데, 바로 이것이 포퓰리즘식 '법과 질서' 운동의 토대를 이룬다. 이것은 거꾸로 국가 활동의 균형이 대중적 정당성을 유지하면서도 '강제성'의 축으로 기울어지는 데 대해 폭넓은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처럼 법적 통제 기구를 좀 더 노골적으로 동원하는 - 즉 '법'을 도덕적 질서에 봉사하도록 하는 - 데에서 대중적 이데올로기 세력들은 적극적으로 조직적 역할을 수행 했다. 우리는 여기서 '도덕적 공해 반대' 로비, 낙태 반대 운동가, '범죄율 증가' 반대 로비, 수는 적지만 맹렬하게 활동하는 '교수형 부활' 선전가들, 또한 무엇보다도 경찰 기구 자체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조직된 이데올로기 세력에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 세력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경찰력의 확대를 옹호하고 범죄 수사 절차의 강화, 법적 권리의 박탈, 더 엄격한 처벌과 더 가혹한 구형 정책, 더 고된 감옥 체제를 주장하는 캠페인을 펼쳐왔다. 위기의 측면을 푸는 비결은 - 즉 '예외적인' 시기를 위한 '예외적인' 통제 형태로 가는 추세에서 중심적인 토대는 - -280쪽

바로 대중의 도덕적 이데올로기와 담론들이 지니는 위력이다. 이 이데올로기와 담론들은 실제 경험들과 물질적 여건들에 개입하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이것들을 밑으로부터의 '규율에 대한 요구'로 접합시켜, '민중의 이름으로' 도덕적 권위주의 체제의 / 부과를 선호하게 유도한다.-280~281쪽

법과 질서 영역에서 대처리즘은 대중 이데올로기 속의 전통적 공간, 즉 여러 보수주의 '철학'의 풍토병인 도덕주의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였/다. 대중적 도덕성의 언어에는 어떤 필연적인 계급 소속성이 없다. 그러나 전통적이며 교정되지 않은 상식은 완고할 정도로 보수적인 세력이며, 여기에는 종교적인 선악 관념, 인간성은 바뀌지 않고 바꿀수도 없다는 고정 관념, 복수에 의한 정의 실현이라는 관념 등이 철저하게 침투할 여지가 있고 실제로도 그래 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288쪽

대중적 도덕성에서 핵심은 이것이 대중 계급들 사이에서 가장 실제적인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세력이며, 훈련이나 교육, 철학적 체계화, 해박한 지식, 학습의 도움을 거치지 않고도 계급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에 작용하는 언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회 현실 세계를 명쾌하고 분명한 도덕적 양극화의 축에 따라 배치해줄 수 있는 위력도 갖추었다. 따라서 이는 계급의 대중적 경험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장악한다. 사회적 혼란과 변화기에 이것은 경험을 조직화하여 자신의 평가적 범주로 분류하는 도덕적 준거점을 제공한다. 여건이 갖추어진다면, 전통주의적으로 재현되던 '민중'은 어떤 담론들 안에서 일련의 호명으로 압축되어 정치적 쟁점들을 인습적인 도덕적 절대 가치들로 체계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291쪽

이데올로기로서 대처리즘이 실행하는 것은 국민들의 공포, 불안, 잃어버린 정체성을 겨냥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를 통해 정치에 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우리의 집단적 환상,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영국, 사회적 심상을 겨냥하고 있다. -327쪽

그람시가 고전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고하는 부분은, 정치가 단지 이미 통일된 집단적인 정치적 정체성, 이미 구성/ 된 투쟁 형태들을 단순히 반영하는 장에 불과하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게 정치란 종속적인 영역이 아니다. 특정한 권력 형태, 지배 형태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경제에서, 사회에서, 문화에서 여러 세력들과 관계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작업해야 하는 곳이 바로 정치이다. 이것은 정치의 생산, 즉 생산으로서의 정치이다. 이 정치 개념은 근본적으로 상황 의존적이며 근본적으로 결과가 열려 있는 것이다. 어떤 정치 투쟁의 산물이 필연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할 수 있는 역사 법칙이란 전혀 없다. 정치란 어떤 특정 계기에서 세력 관계들에 의존한다.-330쪽

헤게모니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고 그람시는 항상 주장했다. '경제라는 결정적인 핵심' 없이는 헤게모니가 성립할 수 없다. 반대로 해묵은 기계적 경제주의의 함정에 빠져, 경제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삶의 나머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지는 마라. 현대 세계에서 권력의 속성은 이것이 또한 정치적, 도덕적, 지적,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성적 문제들의 관계에서 구성된다는 점이다. -332쪽

문화는 결코 사물만으로 구성된 적이 없으며, 사물과 테크닉의 사회적 사용을 통해 확립된 관계의 특정한 패턴으로 구성될 뿐이다. -415쪽

현재 우리 좌파의 딜레마 중의 하나는 사회주의의 내용과 미래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습관이다. 사회주의가 마치 이미 완성된 의제, 즉 이미 집필이 끝나 누군가 무대에 올리기만 기다리는 연극 대본인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략) 믿음은 신자에게 맡겨두어야 한다.-422쪽

대처리즘의 승리는 이기심과 속죄양 이데올로기의 승리에 해당한다. 국가의 실패는 개인의 방탕의 결과라고 이들은 믿었다. -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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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미디어와 소비 트렌드
박은아.우석봉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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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목표로 삼고 달려온 덕분에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한국 사회는 외형적으로 삶의 모습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가치관도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물질주의 가치관이 자리한다.-3쪽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모습은 지난 20여 년 사이에 크게 변했다. 아끼고 절약하여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던 또순이형 주부가 1980년대 모습이라면 결혼 후에도 미혼 때의 외모와 라이프스타일을 지속하고자 하는 1990년대 미시주부들의 모습은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 소비자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잘 보여준다. -39쪽

유행을 따르거나 다른 사람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는 것처럼 타인이 어떤 행위를 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그 행위를 따라하는 것을 동조(conformity)라고 한다. 동조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소속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지 않으려는 동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조현상은 집단문화나 또는 소속감이 중시될 때 더욱 강하며 이러한 소속감은 청소년에서 특히 중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109쪽

70~80년대 '필요'에 의해 물건을 사던 시절, 학자들은 구매결정을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라 불렀다. 소비자들이 그만큼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마치 수학문제를 풀듯이 구매를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376쪽

미디어 애착 (media attachment)-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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