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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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판을 위하여 : 폭력 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원인이 어떻게 작용하든 간명한 의미에서의 폭력이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윤리적 상황에 개입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의 영역은 법과 정의의 개념으로 지칭된다. 둘 가운데서 우선 법을 두고 보자면 모든 법질서의 가장 원초적인 기본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점은 분명하다.-79~80쪽

폭력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이러한 자연법론의 명제에 정면으로 맞서 등장한 것이 실정법적 명제로서 이들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로 본다. 자연법론이 모든 현존하는 법을 그것의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면,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정의가 목적들의 기준이라면 적법성이 수단들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는 공통된 기본 도그마에서 수렴하는데, 즉 정당한 목적들은 정당화된 수단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들은 정당한 목적들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 [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82쪽

법적 주체로서의 개별 인격체에 관한 한 유럽의 법 상황에서 특징적인 점은 이 각각의 개인의 자연적 목적들을, 그 목적들이 상황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 수도 있는 모든 경우에는,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법질서는 개인들의 목적이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지도 모를 모든 영역들에 법적 목적들을 세워둠으로써 법적 강제력만이 이런 식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끔 만들려고 한다. -85쪽

각각의 법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은 폭력은 그 법에 위험으로 작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법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추측은 '대'범죄자의 형상 자체가 그의 목적이 제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민중에게서 은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증명하는 폭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경우에 오늘날 법이 모든 행동 영역에서 개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폭력이 실제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가 제압되는 가운데서도 법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폭력의 어떤 기능 때문에 그 폭력이 근거를 갖고 그처럼 법에 위협적으로 보이고 또 법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지는 바로 현재의 법질서에 의거해서도 그 폭력을 펼치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는 곳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86쪽

사형의 의미는 법범 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법을 확립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법은 그 어떤 다른 법 집행보다 생사여탈의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서 스스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94쪽

법적 계약은 그것이 제아무리 평화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에 의해 맺어질지라도 결국에는 가능적 폭력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법적 계약은 각 당사자에게 상대편에 대해, 만일 상대편이 계약을 위반하게 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강제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계약의 원천 역시 폭력을 요구한다. 그 폭력은 법정립적인 폭력으로서 물론 직접적으로 그 계약 속에 현전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법적 계약을 보증하는 권력 자체가 - 그 권력이 그 계약 자체 속에 폭력을 적법하게 투입되지 않는다 해도 - 폭력적 기원을 갖고 있는 한, 그 계약 속에 들어 있다. -97쪽

법은 도덕적 차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 사기가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서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폭력적 사태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기를 단죄하기 시작한다. -100쪽

외교사절들은 주로 사적 개인들 사이의 합의와 유사하게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자신들의 갈등을 중재하였다. 이것은 중재재판을 통해서라면 더 단호하게 해결될 섬세한 과제이면서 근본적으로 중재재판적인 해결방식보다 더 상위에 있는 해결 방식인데, 그 이유는 해결이 모든 법질서를 넘어서, 그에 따라 폭력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5쪽

수단의 정당화와 목적의 정당성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은 결코 이성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에 대해서는 운명적인 질서, 후자에 대해서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106쪽

법 정립은 물론 법으로서 투입되는 것을 그것의 목적으로 삼아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가지고 추구하긴 하지만,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 소임을 다했으니],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도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을 만든다. 이러한 일은 그 법 정립이 없는 폭력이 없는 독립된 어떤 목적이 아니라, 그 폭력에 필연적이면서 내밀하게 연계된 목적을 법으로서 권력의 이름으로 투입하면서 일어난다. 법 정립은 권력의 설정이며,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이다. 정의는 모든 신적인 목적 설정의 원리이고, 권력은 모든 신화적 / 법 정립의 원리이다.-108~109쪽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것도 후자의 폭력은 모든 면에서 전자에 대한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111쪽

모든 신화적 폭력, 개입하여 통제하는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정립적 폭력은 배척해야 마땅하다. 그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보존적 폭력 역시 배척해야 마땅하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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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구판절판


말하는 섹스라는 상징은 우리의 사회를 나타내는 상징의 하나이다. 현장에서 적발되고 심문을 당하며 속박되고 동시에 수다스러운 상태에서 지칠 줄 모르고 대답하는 섹스. 스스로 비가시적이게 될 정도로 충분히 환상적인 어떤 메커니즘이 어느 날 섹스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섹스로 하여금 쾌락과 무의지적인 것, 동의와 심문이 서로 섞이는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와 타인들의 진실을 말하게 만든다. -97쪽

권력의 관점에서 분석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국가의 주권이나 법의 형태 또는 지배의 전반적 단일성을 애초의 여건으로 상정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들은 오히려 권력의 말단 형태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권력은 우선 작용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다수의 세력관계,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통해 다수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고 강화하며 뒤집는 게임, 그러한 세력관계들이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게끔 서로에게서 찾아내는 거점, 반대로 그러한 세력관계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괴리나 모순, 끝으로 세력관계들이 효력을 발생하고 국가 기구, 법의 표명, 사회적 주도권에서 일반적 구상이나 제도적 결정화가 구체화되는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112쪽

내재성의 규칙 :(전략) 성이 인식의 영역으로 성립된 것은 성을 가능한 대상으로 정립한 권력관계로부터이고, 역으로 권력이 성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앎의 기법, 담론의 절차가 성을 에워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앎의 기법과 권력의 전략이 제각기 특별한 역할을 맡고 상호간의 차이에 입각하여 서로 연결될지라도, 앎의 기법과 권력의 전략 사이에는 아무런 외재성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 -앎의 "국지적 중심"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 예컨대 고해하는 사람과 고해하는 신부 또는 신자와 고해신부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할 것인데,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억제해야 할 "육욕"의 영향 아래 갖가지 형태의 담론, 이를테면 자기 성찰, 심문, 고백,해석, 대담은 일종의 끊임없는 왕복 운동 속에서 복종의 형태와 인식의 도식을 전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람이나 침대 또는 침실에서 아무리 사소한 섹스의 표시일지라도 그것에 관심을 쏟는 부모, 유모, 하인, 교육자, 의사에 의해 교대로 감시당하고 둘러싸이는 어린이의 육체는 특히 18세기부터 권력 -앎의 또 다른 "국지적 중심"이었다. -118쪽

"징수"는 더 이상 권력의 메커니즘의 주된 형태가 아니고, 권력에 복종하는 세력들에 대해 선동, 강화, 통제, 감시, 최대의 이용, 조직화의 기능을 하는 다른 부품들 사이에서 단지 하나의 부품일 경향이 있다. 즉, 세력들을 가로막거나 굴복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력들을 산출하고 증대시키며 정리하게 되어 있는 권력. 그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그러한 권력의 요구에 기대고 그러한 권력의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게 된다. -153쪽

예전에는 이승의 지배자이건 저승의 지배자이건 군주만이 행사할 수 있는 죽음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이기에 범죄였던 자살이 19세기에는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 놀랄 이유가 없는데, 생명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의 경계와 틈새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죽을 권리가 출현한 것은 자살 덕분이다. 그토록 기이하면서도 그토록 규칙적이고, 발현의 측면에서 그토록 지속적이며 따라서 개인의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로는 그다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그러한 죽으려는 고집은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에 대해 최초로 경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의 하나였다. -155쪽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면을 지닌, 이를테면 해부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며, 개별화하고 명시하며, 육체의 수행능력 쪽으로 향하고 생명의 과정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 광범위한 기술체계가 고전주의 시대에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것이 될 것이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던 죽음의 오랜 지배력은 이제 은밀하게 육체의 경영과 생명의 타산적 관리에 포함된다. 다양한 규율, 가령 초등학교, 중등학교, 병영, 일터가 고전주의 시대에 급속하게 발전한 현상, 또한 정치적 실천과 경제적 관측의 영역에서 출생률, 수명, 공중보건, 주거, 이주의 문제가 대두된 현상,따라서 육체의 제압과 인구의 통제를 획득하기 위한 다수의 다양한 기법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상,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156쪽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앎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어느 정도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게 되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이게 될 것이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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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8

“강간범을 거세시켜야 할까?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의회 토론에서 미셸 알리오마리 프랑스 내무장관이 한 말이다. 인권에 대한 이런 시대착오적인 관점(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다른 분야에도 확산되고 있다. 정신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개혁의 결과로 수십 년간 쌓아온 성과들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몰고 온 변화들은 정신질환자를 치료가 필요한 한 인간이 아닌,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고 있다.
 

2008년 12월 2일은 프랑스 정신의학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현직 프랑스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정신병원(파리 근교의 앙토니 병원)을 몸소 방문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그가 한 발언 때문이기도 하다. 역대 프랑스 국가 최고통치자들 중 이처럼 정신병에 낙인을 찍는 발언을 했던 예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단호하다. 그가 보기에 정신병 환자들은 위험한 존재다. 그런 생각은 그의 발언들 속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의 노력은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이 퇴원시킨 환자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에서부터 “정상인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때로는 실현 가능성이 적은 희망 때문에 (…)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까지. 그의 발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는 정신병 환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정신병 환자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버젓이 길을 활보하는 사람들 중에도 위험한 환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발언들을 더 잘 음미하고 싶다면, 전문가들의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노숙자들 중 30%가 정신이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자라는 말이다. 이들은 병원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차가운 길에서 죽어간다.

사르코지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교도소와 병원, 경찰 간 3자 공조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3자 간에 균형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좀더 분명해진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교도소 안도 위험하고 교도소 밖도 위험하다. 오늘날 정신병은 무엇보다 안전의 문제이다. 이제 정신병 환자들도 아동성범죄자와 테러리스트들에 이어 공포에 떠는 대중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의 범죄율보다 높지 않다.(1) 또한 정신질환자들이 작거나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중 상당수가 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정신병원에 필요한 건 안전요원이 아니라 충분한 수의 전문의다. 정신질환자들은 무관심과 따돌림, 폭력의 희생자로서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많으며 ‘정상인들’에 비해 기대수명도 짧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사르코지의 재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둔갑 

 그의 발언은 우연한 시점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르노블에서 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젊은 남자를 살해한 사건(2)이 있은 며칠 후에 그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 언론플레이에 능한 사르코지에게는 대중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좋은 기회였다. 그는 곧바로 ‘정신병원 보안강화 계획’이라는 정책을 세우고, 여기에 3천만 유로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신병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환자의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환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환자들에게 위치추적 장치를 부착해 탈출하면 경보장치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필요한 모든 병원’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폐쇄병동이 도입되고, 200여 개의 폐쇄병실이 마련될 것이다. 또한 기존 5개의 폐쇄병동에 4개의 중환자병동(UMD)을 추가하기 위해 4천만 유로가 투입될 예정이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코지는 강제 입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그는 잘못된 통계 수치를 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강제 입원이 전체 입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에 이른다. 환자 자신의 동의 없이 정신병동에 입원시키는 경우를 강제 입원이라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제3자, 주로 환자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2008년 4월 보건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환자의 행동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강제 입원을 시킨 경우는 전체 입원의 2%에 불과하다. 사르코지에게는 2%라는 수치가 인용하기에는 너무 적었을 것이다.

사르코지는 새 법안에 통원치료를 포함한 의무치료 조항이 명시돼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의무치료 조항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간호사들이 경찰과 함께 몰려와 반항하는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치료 행위는 기본적으로 환자들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과 의사 기 방이옹의 말처럼, 환자들은 “그를 둘러싼 사회가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3) 사르코지도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치료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의 동의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리가 돈 2급 시민들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으니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환자들의 퇴원과 관련한 규정도 강화될 것이다. 환자를 퇴원시키려면 담당 의사와 간호사, 외부 정신과 전문의 3명의 소견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소견을 밝히는 것에서 끝난다. 최종 결정은 행정 담당자가 내린다. 그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게 사르코지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에 앞서 안전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병원 밖에서는 행정자치단체장이, 병원 안에서는 병원장(경영자)이 ‘사장’처럼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경영자’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의 역할은 병원을 관리하고 병원 내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떻게든 예산을 절약할 방법을 궁리하고 불합리한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사르코지는 내무부 장관 시절에 이미 제안했던 계획을 다시 들고 나왔다.(4) 국가 차원에서 강제 입원 환자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자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의학계의 분노

사르코지의 발언에 정신병원 종사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중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안전의 밤’이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2월 7일, 파리 근교 몽트뢰유에서 열린 한 집회에는 2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가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앙토니 병원에서의 사르코지의 발언은 마른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다. 이미 25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돼온 프로세스가 갑자기 제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이 프로세스를 이해하려면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정신의학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2차 대전 중에 레지스탕스 운동 내부에서 정신병 환자 강제 수감- 때로는 평생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에 반대하는 ‘탈정신병운동’이 발전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광기의 인간성’(5)을 탐구한 프랑스 정신의학의 아버지 필리프 피넬이 있었다. 정신병 환자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람들에게는 ‘미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자 수용소의 벽을 허무는 것만으로 그런 생각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광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고 환자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될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공동체’ 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지역별·기관별 심리치료사들은 새로운 정신의학을 창조했다.(6) 정신과 의사들은 더 이상 ‘의료종사자’(7)가 아니라 환자가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전문 상담사’(8)들로 재정의된다. 이런 정신의학 혁명에 참여한 정신과 의사 뤼시앙 보나페는 “일반인도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우리는 그 잠재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누구든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정신병 환자들도 다른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병원이 가지는 중심적 역할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치료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시 말해 치료팀이 병원 안팎에서 환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생 동안 환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조직돼야 한다. 이 운동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장 에임은 “각 지역에 공립학교가 있듯이 지역별로 사회·의료팀을 두어야 한다”(10)고 주장한다.

환자를 인간 주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새로운 정신의학이 나날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끊임없이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 개선점을 찾아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현재 정신의학이 맞고 있는 ‘위기’는 이런 개념의 정신의학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개념의 정신의학을 추방하고 싶어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광기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여 통제·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것이 사르코지가 제안한 정책들이 뜻하는 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질환자들에게 투입되는 비용은 불필요한 인간들에게 투자되는 불필요한 비용이 된다. 온갖 평가(11)나 증명들을 요구하고 성과에 비례해 재정 지원을 하는 등의 정책을 강요하는 것에 의료종사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신병원 시스템이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 그것이다. 가령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주부나 자살 위험에 직면한 기업 간부들도 진료해야 한다. 그러러면 정신과 의사들은 광기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오늘날 광기는 부정된다. 이제 정신질환자는 평범한 신경증 환자들과 똑같이 취급된다.

돈으로만 환산되는 치료

우리는 지금 차가운 타산적 이성의 승리를 목도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성이 아니라 회계사들과 기술 관료들의 이성이다. 광인은 사회와 진정한 관계를 누릴 자격이 있는 특이한 주체가 아니라 뇌질환 환자로서 뇌를 ‘스캔’하고 유전적 형질을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문제 있는 행동을 일삼고 비정상적인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로서, 가능하면 빨리 정상인으로 되돌려져야 할 존재로 간주된다. 주류 ‘생체정신의학’의 이런 ‘과학적’ 시각은 정신질환자들의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 정신질환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순수한 의미의 손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젠가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때까지 약으로 광기를 억누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제약산업에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행동치료요법도 다시 인기를 끌게 될 것이다.

광기는 이제 이 세계 속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나 광기는 우리에게 삶이 숫자나 그래프로 요약될 수 없다는 것, 사람들 간의 관계가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광기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인간’이나 ‘시장형 인간’으로 정의되는 개인의 개념에 대항한다. 이 개념으로 정의된 인간은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할 줄 알며, 인간관계보다는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침투한 ‘거래’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프랑수아 토스켈은 말했다. “광기의 인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12)

글·파트리크 쿠프슈 Patrick Coupechoux
저서로 <광인들의 세계: 우리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들을 학대하는가>(2006), <피억압자의 우울증: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연구>(2009)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범죄학 교수 장루이 스농은 살인범의 2~5%, 성범죄자의 1~4%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정신질환자들이 크고 작은 범죄의 희생자가 될 확률은 일반인에 비해 17배나 높다(2008년 1월 16일, 안전구금에 관한 법률안 상원 공청회에서 한 발언).

(2) 2008년 11월 12일, 뤽 뫼니에(26·학생)가 이제르의 생테그레브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3) ‘안전의 밤’ 운동의 일환으로 보낸 공개 편지. www.collectifpsychiatrie.fr.

(4) ‘광기마저 순수성을 잃어버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7월호 참조.

(5) 피넬은 광인들이 부분적 이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성에 접근함으로써 치료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6) 레지스탕스 내부에서 ‘탈정신병운동’의 두 조류가 탄생했다. 프랑수아 토스켈로 대표되는 첫 번째 조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제도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조류를 대표하는 뤼시앙 보나페는 지역별·분야별로 정신과 치료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7)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Gallimard, Paris, 1976.

(8) 뤼시앙 보나페, <소외로부터의 해방: 광기와 사회>, Presses universitaires du Mirail, Toulouse, 1991 중, ‘정신과 의사의 역할’ 참조.

(9) <Recherches>, 17호, 1975.

(10) <Chronique de la psychiartrie publique>, Erès, Paris, 1995.

(11) “미소(항공기 승무원의 미소가 아니다)는 정신병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미소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쿠르슈베르니의 라보르드 클리닉의 창립자 장 우리가 한 말이다.

(12) <광기 속에서의 종말 체험>, éditions de l‘Arefppi, Toulouse,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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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핑 중, 영국에서 흥미로운 대중음악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세한 소식은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09&idx=58178&cpage=1 

내가 우리나라 음악 시장에 느끼는 그 기분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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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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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에게는 우리가 [오늘날] 생명vita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단일한 용어가 없었다. 그들은 의미론적으로나 형태적으로 구분되는 두 용어를 사용했다. 즉, 모든 생명체 (동물, 인간 혹은 신)에 공통되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조에, 한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비오스bios. 근대의 언어들에서는 이 대립이 어휘에서 차츰 사라져갔다. -13쪽

인간(역량을 지닌 존재로서의, 다시 말해서 제작할 수도 있고 제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자신을 잃을 수도 발견할 수도 있는 존재)은 삶이 행복에 부여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14쪽

권력체계에서의 의학적-과학적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인 기능을 차지한다는 사실, 그리고 정치적 통제를 목적으로 과학을 빙자하는 사이비 개념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즉, 주권자가 각각의 상황에서 삶의 형태에 대해 조작해왔던 벌거벗은 생명의 추출과 똑같은 추출이 오늘날에는 신체, 질병, 건강에 관한 사이비-과학적 표상에 의해, 또한 삶과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의료화'함으로써 대대적이고 일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19쪽

따라서 권리선언은 신적인 기원을 가진 왕의 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의 이행이 실현되는 장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선언은 구체제의 붕괴에 뒤이어 나타난 새로운 국가질서에 삶이 편입되도록 보장해줬다. 선언을 통해 신민suddito이 시민cittadino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은 출생, 즉 자연적인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여기에서 처음으로(이런 전환의 생명정치적 귀결을 우리는 이제야 가늠하기 시작할 수 있다)주권의 직접적인 담지자가 됐음을 의미한다.-31쪽

인민popolo이라는 용어의 정치적 의미에 관한 모든 해석은 이 말이 근대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언제나 가난한 자,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 배제된 자를 가리켜왔다는 특이한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즉, 동일한 하나의 용어가 구성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권리상은 아니더라도 사실상 정치로부터 배제된 계급도 가리키는 것이다. -38쪽

보호검속에서 문제가 된 자유의 '보호'는 아이러니하게도 긴급사태의 특징인 법의 중지로부터의 보호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은 이제 이 제도가 자신이 근거하는 예외상태에서 이탈해 정상상태에서도 효력을 지닐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수용소란 예외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열리는 공간이다. 이 점에서 본질적으로 법질서의 일시적 중지였던 예외상태는 이제 영속적인 공간적 배치를, 즉 그 자체로 정상적인 법질서의 바깥에 항구적으로 머무는 배치를 얻게 된다. -49쪽

그렇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잔학행위에 관한 올바른 물음은, 다른 인간 존재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가라는 위선적인 물음이 아니다. 훨씬 더 정직하고 유용한 물음은, 인간 존재가 어떤 법적 절차와 정치적 장치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리기에, 더 이상 범죄처럼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이들에 대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지점(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에 이르게 됐는가를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다. -51쪽

아감벤은 여기서 수단 없는 합목적성, 목적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 매개성, 목적 없는 수단을 각각 구분하고 있다. 첫째, 춤은 본디 춤 자체가 목적인 미학적 차원에 속하지만, 신체 운동의 매개적 성격을 전시하는 수단의 차원에서만 몸짓일 수 있다. 둘째, 포르노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몸짓은 본디 관객에게 쾌락을 주는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차원에 속하지만, 그 몸짓의 매개성 자체가 수단으로-존재함 속에서 포착되고 중단되는 한에서만 몸짓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와 달리 무언극(마임)은 목적 없는 순수 수단이 전시하는 몸짓의 차원의 매개성을 가장 분명히 보여준다. -70쪽

노출은 정치의 장소이다. 동물의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동물들이 항상 이미 열림 속에 있고, 스스로의 노출을 전유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것에 개의치 않고 열림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동물들은 거울에, 이미지로서의 이미지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재인하고 싶어 하기에, 즉 자신의 겉모습 자체를 전유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사물과 분리해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인간은 열림을 하나의 세계로, 그러니까 어떤 병영도 없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킨다. 진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 투쟁은 역사storia라고 불린다. -104쪽

진리, 얼굴, 노출은 오늘날 지구적 내전의 대상이다. 그 전쟁터는 사회적 삶 전체이고, 그 돌격대원은 미디어들이며, 그 희생자는 지구상의 모든 인민이다. 정치인들, 미디어 통치가들, 광고업자들은 얼굴, 그리고 이 얼굴이 여는 공동체의 비실체적 성격을 이해했다. 그들은 얼굴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확고하게 통제해야 할 비참한 비밀로 변형시킨다. 오늘날 국가권력은 더 이상 정당한 폭력 사용의 독점(각 국가가 국제연합이나 테러리스트 조직과 같은 여타 비주권적 조직과 점점 더 가까이 공유하고 있는 독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의견 doxa)의 겉모습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고 있다. 정치가 자율적 영역으로 구성되는 것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얼굴이 분리되는 것과 한 짝을 이룬다. 스펙터클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소통이 그 자체에서 분리된다. 이렇게 노출은 그 스스로를 이미지들과 미디어들을 통해 축적된 하나의 가치로 변형한다. 새로운 관료계급은 이런 [노출의] 지배를 경계의 눈빛으로 지켜본다. -106쪽

사실 주권자가 예외상태를 공포하고 법의 효력을 중단시킴으로써 폭력과 법의 비구분 지점을 표시하는 자라고 한다면, 경찰은 항상 그런 '예외상태'에서 움직인다 경찰이 매 사례마다 결정을 내릴 때 제시하는 '공공질서'와 '안전'이라는 이유는 폭력과 법 사이의 비구분 지대를 이룬다. 이 지대는 주권에서의 비구분 지대와 완전히 대칭을 이룬다. -116쪽

오늘날 지구상에서는 잠재적으로 범죄자가 아닌 국가의 수장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오늘날 주권이라는 슬픈 법의를 입고 있는 자라는 누구든, 동료들로부터 언젠가는 범죄자로 취급되는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찰관과 사형집행인의 복장을 하기로 기꺼이 동의한 주권자는 마침내 오늘날 범죄자와의 원초적인 인접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19쪽

정치철학의 기초가 되는 '행복한 삶'이란 더 이상 주권이 자신의 고유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전제하는 벌거벗은 생명일 수 없으며, 우리가 오늘날 신성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근대 과학과 생명 정치에서 말하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불가입적 외부성일 수도 없다. 반대로 '행복한 삶'이란 '충족한 삶', 절대적으로 세속적인 삶이며, 삶 자체의 고유한 역량을 완성하고, 그것의 고유한 소통가능성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 삶이다. 이 삶에는 주권도 법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 -125쪽

혁명은 자본, 권력과 타협해야 하곤 했다. 마치 교회가 근대 세계와 협정을 맺어야 했듯이 말이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주의의 전략을 이끌던 좌우명이 그런 식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다. 모든 것에 양보해야 한다. 반대파와 모든 것을 화해해야 한다. 지성은 텔레비전, 광고와 화해하고, 노동계급은 자본과 화해하며, 언론의 자유는 스펙터클한 국가와 화해하고, 환경은 산업발전과 화해하며, 과학은 의견과 화해하고, 민주주의는 투표기계와 화해하며, 죄의식, 개종은 기억, 충실성과 화해해야 한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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