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혁명의 시대
이해영 엮음 / 새로운세상 / 1999년 12월
품절


신현준,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중 일부를 옮겨본다.

80년대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한(모두가 실제 치열하게 살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사람들에게 문화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선택했다고 해도 문화는 정치나 경제에 비해 우선순위 면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지배세력이든 저항세력이든 중도세력이든 80년대의 절박한 상황은 여유로워 보이는 문화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214쪽

1980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정된 제5공화국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8조)라고 적혀 있으며, 이를 대통령의 취임선서에까지 다짐하도록 규정했다(제44조). 또한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은 80년대 4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목표는 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확립된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권은 80년대의 문화정책을 '새문화정책'이라고 불렀지만 새로운 정책은 목표와 집행 양면에서 70년대의 연장이었다. 정책의 목표면에서는 민족 문화의 창달이라는 기치 아래 각종 관변인물에 대한 지원과 관변행사의 주최가 계속되었다. 집행 면에서는 관 주도의 각종 행사와 각종 윤리위원회의 검열이 지속되었다.-220쪽

70년대의 문화정책이 주로 전문/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80년대는 정책의 대상을 전문 문화예술인부터 국민 전체로 확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문화가 퇴폐화, 낭비화되었고 세대 간, 지역 간 문화갈등이 심화되었다"는 나름의 현실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기에 기초하여 국민정신개혁운동이라는 이름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중문화의 형식에 대한 관심이 기울여졌다. 즉, 정책의 외연이 이전 시기보다 확대된 것이다. -220~221쪽

둘째로 정책 대상의 변화는 정책 방향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퇴폐적, 향락적, 외래적이라고 간주된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가 육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완화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중문화를 억압 일변도로 다스릴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컬러TV의 조기방영, 프로스포츠의 확대, 영화검열(및 극장 설립규정)의 완화 등의 현안들은 모두 범국민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는 또한 좁은 의미에서 문화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국민의 일살적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낳았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통행금지 해제, 중고생 교복자율화, 대학로의 개장 같은 현상들은 80년대 대중의 삶이 70년대와 크게 달라지는 영향을 미쳤다.-221쪽

한마디로 80년대의 문화정책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향은 대체로 규제완화의 방향을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규제완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완화가 선별적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검열 완화의 경우 주로 저급한 영화에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불온한 문화의 금지는 여전했고 1981~83년 사이에는 이전보/다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온한 반대자들이 3S정책이라고 불렀던 표현은 당시 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말해 준다. 70년대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힌다는 것이 당시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한 것이다.-221~222쪽

따라서 정책의 성과가 그다지 문화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단적인 예로 앞서 언급한 국풍81의 경우 탈품과 그룹사운드 공연이 한자리에서 치러지고 민속놀이 줄다리기와 스케이트보드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행사의 내용이 다양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형식의 다양성 사이에 어떤 일관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국풍 81을비롯한 관제행사들은 새로운 문화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이라는 80년대 문화정책의 기조가 형성되었다는 성과를 빼면 말이다. -222쪽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인해 TV, 라디오, 오디오(80년대 후반부터는 VTR) 등의 전자 미디어의 보급률은 100%에 육박하였고 정부는 앞서 본 언론 및 방송 통폐합을 통해 이들 매스 미디어를 완벽하게 통제하였다. 아이러닉한 것은 각종 규제와 억압이 온존되는 상황에서 대중문화는 이전과 달리 화려하고 컬러풀해졌다는 점이다. 컬러/TV의 조기방영과 연예인 두발 규제의 완화와 더불어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 같은 청소년용 오락 프로그램이 성행하였다. 또한 극장 설립과 영화 검열의 완화에 따라 에로 영화 등 저질 음란물에 가까운 외국 영화들이 다소의 가위질만을 거친 채 허용되었고 FM방송을 통한 영미 중심의 팝 음악의 조류들도 이전 시기에 비해 시차를 현격히 줄이면서 소개되었다.-234쪽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성격과 청소년 지향적 성격을 동시에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달리 말한다면 80년대에 10대 시절을 시작한 세대, 흔히 영상 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는 대중문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감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80년대의 대중문화 대 민중문화의 구도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구도는 상업문화 대 비상업적 문화라는 일반적 대립 구도 가운데 10대 문화 대 대학생 문화라는 특수한 대립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대학생이란 대학에 실제로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대학생 연령의 세대라는 뜻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대중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10대 사춘기 시절의 경험에 고착된 철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아야 했다. -235쪽

대중문화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완벽할 수 없고 그 틈새에서는 무엇으로 개념화하기 힘든 현상이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매니아 문화의 확산이/다. 이는 대중문화를 일회적 오락의 차원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감상의 수단으로 삼는 현상을 말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극히 일부 계층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80년대는 이런 현상이 일반 청소년층까지 확대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대상으로는 영화나 대중음악 같은 오래된 대중문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같은 새로운 형식들도 포함되었다. -235~236쪽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나 민중문화 같은 외부를 갖지 않는 내재적 장이 되었다. 이는 대중문화를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대중문화 내부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80년대 말 운동권 출신 노래패(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 마을)와 운동권 출신 영화인(박광수, 장선우 등)의 절반의 성공이라는 사건은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의 점차적 변화를 가져왔다. -236쪽

80년대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한편으로 본격적인 산업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수용자층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정부도 재야도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37쪽

현대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매스미디어에 의해 대량으로 전달되고 대량으로 소비되는 문화라는 정의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즉, 대중매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준의 미디어가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문화라는 장은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장도 정치가 부재한 장이 아니라 복잡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장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237쪽

대중문화에서 대안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대중문화로 오염되지 않은 외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내부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를 이른바 비즈니스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정치적 가치는 어떤 비즈니스를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상업적 비즈니스의 형식을 취하는 실천의 본질적 한계를 미리 경계짓는 것이 아니라 허용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확장시킴으로써 문화정치가 수행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237쪽

현대의 국민적 대중문화가 산업화 과정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미국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대안을 추구한다면 순수한 국민문화의 부활이 아니라 혼성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미국이란 실제의 미국이 아니라 상징적 미국이며, 따라서 좀 어폐가 있지만 미국 이외의 나라를 포함한 나라의 대중문화도 포함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국민적 대중문화란 탈미국화와 재미국화의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238쪽

80년대 이전부터 추진되었고 변화를 추동한 힘은 한국의 문화산업의 자생적인 성장이라기보다는 대외적 압력의 효과였다. 80년대 후반은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가시화된 시기였고 태평양을 오가며 실무/협상이 이루어졌다. 80년대 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국내의 구조조정을 대체로 완료한 미국은 새롭게 재편된 산업구조에 부응하는 세계 시장의 형성에 나섰는데, 그중에서도 문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간주되었다. 시장개방과 관련된 협상들 중에서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는 다름아니라 저작권을 비롯한 지적재산권 협상이었다. 1987년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이제까지 외국의 저작물을 저작권 협약 없이 무단으로 출판했던 관행은 국제법적으로 제재받게 되었다.-238~239쪽

이는 단지 불법복제물의 단속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문화는 이제 단지 상품이 아니라 재산 혹은 자본이 되었다. 즉, 문화산업은 재화나 서비스를 판매한 대가로 수입을 획득한 것보다는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권리를 판매하고 이로부터 일정한 사용료를 수취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적 압력은 이미 이때부터 문화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산업구조의 전반적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1987년의 저작권 협약은 몇 가지 유예조항을 두는 등 제한적이었으므로 이런 변화가 보다 가시화되는 시기는 1996년의 저작권법의 개정을 전후로 하는 90년대 중반이다. 그렇지만 80년대 후반에도 가시적인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상징적인 변화는 1988년부터 시작된 다국적 문화산업의 한국시장 진출이었다. -239쪽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을 논하는 일이 우울한 이유 역시도 그 운동이 어떤 의미에서든 문화의 정치적 사용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도 아니며, 나름의 객관적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도 이런 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화는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하는가. 80년대의 인식은 이런 주장을 부르주아 예술관이라고 불렀고 나는 아직도 여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만 동의할 뿐이다. 문화와 정치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관습 자체를 탈피할 수는 없었을까. 앞서 지적했듯 문화 내부에서 정치가 전개되고, 이런 정치는 관습적 의미의 정치와 다르다고 사고할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문화의 정치적 사용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정치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이고 나아가 정치의 문화적구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240쪽

이런 논점들은 80년대에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건 다행일까./불행일까.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표현은 당시를 살아온 사람의 분열적 의식을 드러내 준다. 그건 참 다행한 일임과 동시에 불행한 일이었다. 외래문화로부터 독립되고 상업적 힘에 오염되지 않은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불가능함은 강화되었다. -240쪽

민중문화에 주목했던 80년대의 운동들이 정치적 강령에 대해 조금 유연한 태도를 보일수는 없었을까. 대중문화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할수는 없었을까. 외래 문화에 대해서도 그 맥락을 통찰하고 보다 여유롭게 수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민중형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를 계승하고, 이를 글로벌한 감각과 결합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려 국민적 독창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고루 갖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자연발생적으로 창조되는 국지적 문화형식들을 존중하고, 이를 보편적으로 전국적인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대중문화를 단지 안락한 수단으로 평가절하하지도, 그렇다고 독해와 맹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241~242쪽

대중문화의 윤리는 재미의 윤리다. 80년대의 문화운동이 아직 가치있다면 문화를 윤리의 문제로 사고했다는 점이고, 가치가 없다면 재미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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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00240.html 

-> 아바타에 주눅든 '한국영화 3D 딜레마' 

지난 주에 가장 닭살 돋았던 기사는 한겨레의 <아바타에 주눅든 '한국영화 3D 딜레마'였다. 이제 이런 구도의 기사를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내 스스로에게 일깨우기보다는 언론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마치 문화를 하나의 '침입'으로 보는 이러한 시선에 동조하며, 아이맥스관에 뱀이라도 풀어놓고, 삭발 투쟁이라도 해야할까.  

방송에서도 <아바타>에 대해 연일 찬사를 보내며, 우리도 영화 테크놀로지에 신경쓰자고 종일 외쳐댄다. 근데 말이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사에 한 켠에 쭉 자리를 차지할지는 몰라도, 그 혁신으로 말미암아, 영화 관객들이 그동안 지켜왔던 어떤 본질에 대해 손을 놓을 것이라는 점, 혹은 그동안 지켜왔던 가치관, 수용 방식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애정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만큼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그것은 지나친 설레발임을 우리의 역사는 그동안 증명해줬다. 

하지만 문제는 '쌍팔년도식' 발언으로 아직 살고 있는 영화인들 많네?라며 영화계를 질타하기에 앞서, 이러한 프레임을 일찍 만들어 놓고, 그런 대답으로 사람들의 향수를 자아내려는, 이 미디어의 태도다. 그들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문제화를 시키기보다, 이미 문제화를 다 시켜 놓고, 목소리를 '딴다'. 고로 봉준호의 저 말(캐머런이 전 세계에 민폐를 끼쳤다)도 왠지 앞,뒤 다 자르고 한 것 같다. 한 유명 감독의 유머로 인식이 되는 저 말도, 왠지 80년대 민족주의 영화비평의 그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마치 모든 영화에 3D의 외피를 입혀야할 것 같다는 설레발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런 외피를 입혀야 '살아남는다'는 그런 '공포 효과'는 그만 보여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 시간에 <500일의 썸머>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창의성,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보여주는 진정성 담긴 오마쥬를 심층적으로 다뤄주길 바란다.  

다른 한 편으론 <아바타>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야기가 진부하다' 대 아니다의 갑론을박도 왠지 식상한 풍경이다. 차라리 우리는 그런 식상한 풍경의 한 축을 담당한 이들을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응원하기보다는, 그런 식상함이 왜 매번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 솔직하게 한탄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런 측면에서 김봉석도, 정성일의 코멘트도 조금은 아쉽다. 언제까지 '이런 영화'에, '이야기의 혁신'같은 안티테제로 맞설까. 그 대항의 논리가 너무 녹이 많이 슨 느낌이다.  

'이런 영화'앞에 정말 필요한 자세는 대중들이 나에게 또 '에그, 이 사람 평론가란 사람치고 나보다 분석안이 시원찮네"라는 걱정에 미리 주눅 든 평자의 공포가 아니라, "이런 영화 앞에, 나 정말 영화비평 못해 먹겠다"라는 또 다른 인상적인 '비평의 공포'가 아닐까. 차라리 한 번 속 시원하게 망한 자신의 모습을 비평에 그대로 실어보는 건 어쩌면 지금 우리 영화비평계에 필요한 혁신일 것이다. 그런데, 모두 자기가 똑똑하지 못한 비평가라는 욕을 먹을까봐, 있는 비평의 언어에서 있는 것만 챙겨먹느라 바쁘다. 불쌍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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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헐리웃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꼽자면, 나는 조지 클루니를 언급하고 싶다. '섹시한 진보주의자'라는 수사도 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담담하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스크린 밖에서도 의미있는 발언들, 행동들을 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클루니를 비롯하여, 헐리웃 셀레브리티들이 또 일을 냈다. 아이티 사태를 위해 비욘세가 미니 콘서트를 열었고, 팀 로빈스, 리즈 위더스푼, 스티비 원더 등등 많은 연예인들이 직접 성금 모금 전화원으로 봉사했다.  

어떤 이는 아직 베풀어야 할 구조의 차원에서 미리 발을 뺄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먹고사니즘, 생활의 보수화에 따른 국제적 연대의 미흡은 매번 아쉽다. 예전에 일요일일요일밤에 <단비>란 프로를 보다가,  가슴 아픈 댓글을 봤다. 어떤 유저는 "우리 먹고 살기도 바쁜데, 왜 엄한 외국 아프리카에 가서 우물을 파줘"란 댓글을 남기더라. 솔직히 씁쓸했다. 우리나라 언론만큼 국제면이 부족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필요할 때만, 국제라는 말을 당겨 쓴다.  

강심장이라는 프로가 케이블에서 재방송 분으로 나왔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제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서 자신들의 고생담을 말하는 것을 중단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힙합하는 친구들은 그 놈의 '라면 먹고 헝그리 정신으로 버텼다' 등등의 가사는 그만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개인의 고생을 참고 버텨라고 하는 그런 냉정한 차원의 주장이 아니다. 대중들은 이미 그런 고생담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  차라리 그런 자리가 마련되면,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고생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미덕을 발휘해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제 시상식이나, 연기대상 시상식에서도 자기 작품 홍보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런 자리에서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영화계의 현실, 방송계의 현실들, 대중이 함께 지켜봐줬으면 하는 작품들에 대해 언급해보는 것은 어떨까. 몇 년 전, 메릴 스트립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상을 받았을 때, 그녀는 정말 인상적인 수상 멘트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영화도 소중하지만, '판의 미로'나 알모도바르의 '귀향'같은 좋은 작품이 있는데, 그런 작품들이 널리 상영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이런 영화들이 좀 더 널리 대중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 놈의 고생담 좀 그만해라. 자신들의 먹고사니즘만 강변할 뿐이다. 차라리 당신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요구하던 그 '명성 효과'로 지금 연대가 필요한 땅에 씨를 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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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0-01-2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연예인들도 다 알텐데 미디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굳이 튀지 않는게 상책이란 생각 때문에 시청자가 원하는 대답만 해주는게 아닐까요? 저도 연말 시상식에서 누구누구 고맙단 말을 듣자면 좀 답답해요. 어떻게 해야 좀 더 넓게 생각할 수 있을지.

얼그레이효과 2010-01-28 22:35   좋아요 0 | URL
한국 시상식 문화는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arch님이 언급하신 부분은 소중한 지적이라고 생각되네요.

쟈니 2010-01-2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에 와닿고, 저 자신도 부끄러워 집니다.
먹고사니즘에만 너무 천착되어있는 제 자신에 대해서도 새삼 고민을 하게 한 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1-28 22:36   좋아요 0 | URL
저도 막상 격앙된 목소리를 취했지만, 자숙 또 자숙하며,,어떤 실천으로 세상을 빛나게 만들수있을까,고민하며 삽니다. 쟈니님의 성찰이 곧 빛과 소금이 되겠지요.

sis 2010-01-2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는사람만 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차인표부부,김연아선수 등..물론 알려지지 않게 좋은일 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셀레브리티들의 전반적인 기부인식 부족이 아쉽습니다.근래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구가 "행동하는 위선이 행동하지 않는 선보다 낫다 입니다." 남모르게 선행하라 라는 말따위는 이제 그만해야합니다. 명품백이나 사치품들을 자랑하듯이 선행을 자랑하고 경쟁적으로 기부를 하는 세상을 바래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1-2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회와 기부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감정적 차원 이상의 것을 고민해보진 못했는데요, 좀 심화된 고민을 해보고 싶습니다. sis님의 덧글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드네요. 함께 고민해보지요.
 
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절판


이것이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대이론가인 그람시가 옹호하는 주장이다."인간은 누구나 철학자이다"라는 것이다.그람시는 흥미 있는 세부적 내용을 제시한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민중 언어에서 "철학적으로 사태를 대한다"는 표현은 그 자체가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포함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 관념은 합리적인 필연성에 대한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고통스러운 사건에 직면하여 "사태를 철학적으로 대하/는"자는 거리를 두고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자이다. 자신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는 수동성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그람시는 말한다.('철학자이다'는 말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신의 일이나 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또한 대개의 경우 필연성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며 이러한 체념 속에 틀어박힌다는 말이다.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리면서 자신의 내적인 사적인 삶, 자신의 작은 일들에 파묻힌다는 것이다).-41~42쪽

우리는 대문자 철학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겠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사회들에서만 대문자 철학이 관찰된다. 1.사회적 계급들(따라서 국가)의 존재 2. 과학들(혹은 과학)의 존재 -46쪽

즉시 지적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사회'의 개념을 매우 일찍이 (1847년에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과 가진 논쟁에서부터)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척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용어는 도덕적, 종교적, 과학적 울림이 과부하되어 있다. 요컨대 그것은 사회 구성체(마르크스, 레닌)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해야 할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단순히 하나의 낱말을 다른 하나의 낱말로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체의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라는 관념적인 개념이 연결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개념들의 체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들의 이론적 체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생산 양식이라는 개념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이 개념 체계를 개진할 수는 없다. 다만 각자 모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할 수 있는 점은 하나의 사회구성체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구체적인 사회를 지칭한다는 것이고, 그같은 사회는 개별화되어 있고, 따라서 그 사회에서 지배하는 생산 양식을 통해 여타 동시대의 사회들 및 그 자신의 과거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54쪽

생산 양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한편으로 생산력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생산 관계라 부르는 것 사이의 통일체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산 양식은 그것이 지배적이든 피지배적이든, 그것의 통일체 안에 고유한 생산력과 생산 관계를 소유하고 있다. -56쪽

하나의 생산 양식이 지닌 생산력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등장시키는 복잡하고 정연한 판의 통일체에 의해 구성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노동 대상(단순한 바람이나 흐르는 물이 되었든 어쨌든 '손에 넣거나'-중력처럼- 이용해야 하는 자연적 에너지를 포함해) 여러 형태의 자연뿐 아니라, 무엇보다 수동적 원료(광물)와 활동적 원료(짐승, 땅)
- 생산 도구 - 직접 생산자(혹은 노동력). 마르크스는 노동 대상과 노동 도구(혹은 생산 도구)를 합쳐 생산 수단이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노동 과정의 행위자들 전체, 그러니까 비/협동 노동이나 협동 노동에서 요구되는 형태의 기존 생산 수단을 기술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개인들 전체가 수행하는 활동의 다양한 형태들 전체를 노동력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을 다시 고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문제의 등식을 갖게 된다. 생산력 = 생산 수단 + 노동력으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이 모든 것을 일정한 하나의 생산 양식을 위한 것이다. -62~63쪽

하나의 정해진 생산 양식에 고유한 생산력과,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구체적인 사회 구성체 안에 존재하는 생산력 전체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이미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는 이해했을 것이다. 사회 구성체에는 지배적인 생산 양식 아래 여러 개의 생산 양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63쪽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은 제1의 목표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의 생산이 아니라 잉여 가치의 생산과 자본 자체의 생산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은 이익의 추구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표현하는 것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동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을 생산하는 수단을 통한 잉여 가치를 생산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생산 수단을 통한 착취의 중단 없는, 따라서 확장된 증대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의 생산은 잉여 가치에, 다시 말해 자본의 확장된 생산에, 마르크스가 '가치의 가치화'라 부르는 것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중략) 이 생산 양식은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유일한 목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그 상품의 구매를 통해 재화들을 상품으로 생산한다. 즉 초과 생산의 가치와 임금의 가치라는 두 가치 사이의 불평등한 게임을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것, 다시 말해 갈취하는 것이다. -73~74쪽

우리가 노동의 사회적 분할을 통해 지칭하는 것은 생산 과정의 내부 자체에 있는 착취 관계로서의 생산 관계의 효과이다. 우리의 적은 다시 한번 동일한 것인데, 다/름 아닌 우리가 경제주의적이라고 부르면서 특징지을 수 있는 기술지상주의적-기술관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이다.-75~76쪽

엔지니어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물며 경영진이 되는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 박물관의 전시품 같은 것이 된다. 이 전시품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믿게 하며, 사회적 계급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로 태어나고 노동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기 위해 전시된다. 매우 단순하고 적나라한 현실은 이런 파렴치한 전시에 항의한다. 노동자의 엄청난 다수는 종신토록 노동자이다. 그 반대가 훨씬 맞는다. 즉 엔지니어나 고위 간부는 재앙적인 경제 위기가 닥친 경우를 제외하곤 결코 노동자의 조건으로 추락하지 않는다.-79쪽

동시에 법은 포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실상의 어떤 법률적 발견으로 허를 찔리지 않도록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가능한 사례들의 포괄을 지향하는 규칙들의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이런 발견을 통해 체계의 완전성을 저해하는 비법률적 관행들이 법 자체 안으로 도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8쪽

법은 기존 생산 관계에 따라서만 존재한다. 법은 생산 관계에 따라 존재하는데, 이 생산 관계가 법 자체에 완전히 부재하는 조건이 충족됨으로써만 법의 형식,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적 체계성을 지닌다. 법 자체가 완전히 빼버린 내용(생산 관계)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법의 이런 이상한 상황이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고전적 표현을 설명해 전다. 즉 법은 그것의 규칙 체계 속에 이 생산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니까 그것을 감추면서 그것을 표현한다. -110쪽

국가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고전파가 국가 장치라 부르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법률적 실천의 요구에 입각해 그 존재와 필요성을 인정한(좁은 의미의)문화된 장치, 즉 경찰-법원-감옥뿐 아니라 군대를 말한다. 군대는 '국가 방위'의 기능(프롤레타리아는 이 경험의 대가로 피를 흘려야 했다)을 넘어서 경찰(그리고 보안 기동대와 같은 전문화된 경찰 조직들)이 사건을 감당하지 못할 때 최후의 보급 진압군으로 직접 개입한다. 이 모든 것 위에 국가 장치로는 국가 원수, 정부와 공무원들이 있다. 이런 형태로 제시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 이론은 본질과 관련되고 있으며 이것이 본질이라는 점을 단 한순간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125쪽

국가의 제1문제는 국가 권력의 보유 문제이다. 모든 정치적 계급 투쟁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55쪽

국가 장치는 다음과 같은 두 유형의 장치들을 포함한다. 1) 억압적 국가 장치(정부, 행정 조직, 군대, 경찰, 전문화된 진압 조직, 치안유지군, 법원, 사법관, 감옥 따위). 이 장치는 중앙집권화된 유일한 기관이다. 2)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우리의 사회 구성체에서 교육, 종교, 가족, 정치, 노동조합, 정보, 문화 등에 속하는 장치들). 이 장치들은 다양하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국가 이데올로기의 전체, 혹은 부분을 통해 분명한 체계로 통일되어 있다. 억압적 국가 장치는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억압에 따라 지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지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156쪽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체계의 게임에 (수정주의적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법이 존중되면서도 회피될 수 있는 가능성에 달려 있다. -183쪽

국가는 국가 권력하에서 한편으로 억압적 국가 장치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다.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통일성은 국가 권력을 보유한 자들의 계급 정치에 의해 확보된다. 이들은 계급 투쟁에서 직접적으로는 억압적 국가 장치를 통해,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속에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현을 통해 행동한다.-217~218쪽

이데올로기는 상상적인 임기응변적인 물건과 같은 것이고, 완전하고 실증적인 유일한 현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존재를 물질적으로 생산하는 구체적, 물질적 개인들의 구체적 역사라는 현실의 나의 잔존물들에 의해 구성된 비어 있고 헛된 순전한 꿈이다.-268쪽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이데올로기가 부인하는 그 부정이 이데올로기의 효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나는 이데올로기적이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293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완벽하게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모든 주체들의 의식 속에 생산 관계를 재생산하지 못하게 될 때, 그때 다소간 심각한 이른바 '사건들'이 터진다.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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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구판절판


상품시장에서 소비자의 이탈은 상품공급자인 기업에게 소비자의 선호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자기조정의 효과를 갖지만, 선거시장에서 유권자의 이탈은 정당이라고 하는 정치기업에 변화를 강제하는 효과가 약하다.-24쪽

나는 해방 이후 국가의 특징을 정의하기 위해 '과대성장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이것은 원래 파키스탄의 정치경제학자 함자 알리비가 탈식민사회의 국가를 분석하는 데 사용했던 개념이다. 그것은 식민통치를 위해 제국주의 국가의 잘 발달된 국가기구가 식민지 사회에 이식된 결과,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토대나 사회적 기반보다 과도하게 강한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55쪽

1960년대에 이미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더슨은 '소용돌이의 정치'라는 말로 한국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자원과 가치가 서울과 권력의 정점으로 집중하/는 현상을 한국정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핸더슨의 집중화테제는 유교적 관료문화를 거의 유일한 동인으로 강조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59~60쪽

결빙효과 :립셋, 로칸이 서유럽 정당체제의 형성과 관련하여 사용한 개념. 대중정치로의 이행기였던 1920년대에 형성된 정당체제가 이후 장기간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63쪽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을 사인적 권위주의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세자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중략) 제도화된 정부구조 안에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할 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야당은 권위주의 정부의 '충성스런 야당'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야당은 제도화된 정치권 밖에 있는 시민사회로부터 운동의 형태를 띠고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약해지거나 그들의 태도가 비판적이 될 때 국가기구를 통해 억압의 정도를 높이는 과/정, 즉 권위주의화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는 헌법을 포함하여 제도는 민주주의적인 반면, 정치적 실천은 권위주의적인,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의 기묘한 결합을 만들어 냈다. -66~67쪽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도입되고 실천된 민주주의의 주요 특징의 하나를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조숙하다는 의미는 한국인들이 역사,문화,의식면에서 서구인과 같이 민주주의를 할 수준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 빨리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최초 도입의 국내 정치 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던 분단국가 형성 과정에서 하나의 제도적 세트로 도입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분단국가의 제도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토착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 제도적 형식만 들어온 필연적 결과, 그 내용을 채울 역사적, 정신적, 이념적 면을 결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71쪽

이념적 불러내기 : 사실이나 현상에 대해 사회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동원되고 접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으로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종속적인 주체로 호명되면서 지배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구조나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단순히 생산관계상의 계급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부 구조의 중층적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치사회 : 그람시, 토크빌 등이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중간층위로서 설정한 개념. 코헨, 아라토, 린츠 등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사회는 정당, 정치조직 등 공적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정치 세력들로 구성되고,그 핵심적인 제도는 정당, 선거, 선거규칙, 정당연합, 의회이며,정치체제 구성원들이 공공권력과 국가기구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려는 정치적 경쟁을 위하여 스스로를 특수하게 조직하는 영역이다.-79쪽

198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정치학계에서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 사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등장한 군부권위주의정권의 발생원인을 이론화한 오도넬의 BA(관료적 권위주의)이론의 1972년 유신체제 성립에 적용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의 BA모델은 수입대체산업의 고갈과 산업구조의 심화라는 경제적 변수를 통해 권위주의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수입대체산업화가 가져왔던 내수시장의 성장을 통해 사회의 광범위한 계층을 끌어안는 민중주의동맹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산업 구조의 심화단계에서 해체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전투적이 된 민중부문을 억압하기 위해 민간경제부문 군의 테크노크라트, 외국의 다국적기업을 주축으로 한 쿠데타동맹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로 권위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중략) 관료적 권위주의이론은 유신체제발생을 둘러싼 인과적 설명보다는 유신체제의 통치양식으로서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83~84쪽

립셋으로 대표화되는 근대화론은 간단히 말하면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중산층을 성장시키며 교육과 문화적 태도의 확산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가치가 널리 수용되고 정치참여의 증대를 가져오며, 사회적 갈등을 제도화하여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84쪽

민주주의 공고화 : 쉐보르스키의 정의에 따르면 주어진 정치적, 경제적 조건하에서 특정한 제도들의 체계가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 되었을 때, 즉 어느 누구도 민주적 제도 밖에서 행동할 수 없는 상황, 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패배한 바로 그 제도 내에서 다시 경쟁을 시도하는 것 뿐인 상황을 일컫는 개념이다.-87쪽

지시적 개념 : 1950년대 이래 프랑스의 경제개획 모델을 지칭하는 개념. 이는 정부의 고위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사기업에게 성취할 목표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목표를 제시해주는 방법을 통하여 운/용되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와 자유시장경제 사이의 어느 중간에 위치하는 경제체제이다. 지시적 계획은 어디까지나 고위정부관료와 대기업의 경영진 사이의 자발적 결탁행위가 본질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과 조직 노동의 대표들은 배제된다. -90쪽

산업화 시기 한국의 국가는 BA이론에서 말하듯이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활성화된 민중부문처럼 사회의 강렬한 반대세력과 대면하지도 않았고, 체제변화의 사회적 기원이론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지주계급과 도시의 상업부르주아지 등 그 어떤 강렬한 세력과도 대면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국가주도의 빠른 산업화는 바로 이런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군부 엘리트가 주도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부와는 달리 지지를적극적으로 동원했다. 그 핵심적인 수단이 고도성장을 통한 산업화이다.-92쪽

박정희 정권 하에서 경제기획원으로 대표되는 경제관료체제는 1920~70년대까지의 일본 통산성과 거시경제 기획 및 집행과정에서 경제 관료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경제관료가 단기적인 정치적 사이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장기적인 국가경제의 이익을 위해 행위할 수 있는 자율성을 충분히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중략)즉, 정치(권력)의 논리가 경제관료의 기술합리성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97쪽

기술관료적 경영주의 : 막스 베버의 관료주의의 목적합리성과 현대 기업조직의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영적 원리를 결합한 개념. 수단적 가치와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조직 및 조직운영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비정치적 내지는 반정치적 가치를 핵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는 사기업조직과 정치적인 권위주의체제와 잘 상응한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 갈등에 기초하고 이를 조정하고 타협하며, 효율성보다는 갈등의 조정과 통합을 중심 원리로 하는 민주정치의 특성과는 상반된다. 엘리트 내지는 전문가 중심의 폐쇄회로식 결정방식과는 달리 결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것이 공적 통제하에서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민주주의적 정치과정 및 정책결정과는 정반대되는 조직이나 제도의 운영원리이다.-109쪽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을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만 규정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협약에 의한 민주화, 두 과정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전적으로 운동에 의한 민주화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것은 정치 엘리트간 협약에 의한 것이었다. -127쪽

위로부터의 개혁 : 한국정치체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분리된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을 배제한 채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개혁을 수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람시와 무어가 사용한 수동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와 같은 의미-128쪽

편향성의 동원 : 사츠슈나이더는 모든 형태의 정치조직들이 특정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는 선호하는 반면, 그외의 갈등에 대해서는 그것을 억압하려는 성향. 즉 일종의 편향성을 갖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를 편향성의 동원이라고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정치사에서 계급 갈등의 상쇄를 위해 인종 갈등을 이용하거나 급진적 농민운동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지역 갈등을 이용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131쪽

민주화로 인한 국가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국가를 두 수준으로 나누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하부구조적 수준에서의 국가이다. 우리가 보통 국가를 항상적으로 제도화된 역할의 체계라고 말할 때 그것은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구현하는 방대한 관료기구와 이를 운용하는 국가기구의 관리자로서의 인적 집단을 말한다. 베버가 말하듯이 그것은 비인격적, 비개인적 충원, 공적 목표, 역할, 업적평가의 체계를 갖는 대규모 조직으로서 관료행정적 형태로 제도화된 체제를 말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국의 국가를 강력한 국가라고 말할 때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국가의 하부구조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정부적 수준에서의 국가이다. 정부는 초헌법적 힘의 사용을 통해서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든 권력을 획득하고, 특정 형태의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일단의 정치 세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권력의 획득과 행사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를 조직하고 동원하고자 하는 특정의 이념적 정향 내지는 정책적 정향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3쪽

오도넬, 위임민주주의 : 위임민주주의의 경우, 대통령은 그 어떤 정당이나 조직화된 이해의 상위에 위치하고 의회나 정당, 법원은 대통령의 정책의지를 방해하는 제도로 인식되거나 자주 이를 우회하여 정책결정과 변경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통령의 주도하에 정책의 수립과 변경이 쉽게 이루어지며, 집권 초 대통령의 정책을 사회의 조화로운 이익을 실현하는 것으로 환호되지만, 곧 정책집행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비용의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둘러싼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제도화의 수준이 낮음에 따라 정책의 실패는 대통령 개인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고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집권 초 높은 대중적 인기를 향유하다가 집권 말에 이르러서는 저주에 가까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163쪽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시장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국가가 경제의 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여기에 민간기업을 동원하여 자원의 할당과 분배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한 국가주도성이다. 둘째는 이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육성된 소수의 거대 기업이 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의 성장목표를 대리 추진하면서 국민경제를 지배하는 재벌 경제체제이다. 셋째는 노동의 배제이다. 이는 생산적 자원의 할당과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나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에서 사회의 대표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의 참여와 대표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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