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가 살짝 넘어 일어나 내가 한 일은 밀린 설거지였다. 스티로폼 조각이 많은 걸로 봐서는, 난 그동안 수많은 배달 음식을 시켜먹었던 것 같다.(얼마나 많이 밀렸으면, '시켜먹었던 것 같다'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까) 원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배출구는 작고,적다. 그래서 다양한 음식 찌꺼끼 냄새가 내 게으름으로 인해 섞여 있을 때면 코끝이 찡하다. 보쌈 김치 냄새, 라면 국물 냄새, 언제든지 시키면 다 먹지 못하는 쟁반국수 찌꺼끼 냄새 등. 이 냄새들을 회피하고 윗층에 올라가 책만 팔 수 있지만, 그러기엔 나는 내 집에 애정을 갖고 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이 집에 가졌던 청결한 소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이어받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다. 전직 무용수 출신의 한 여성이 선물로 주고 간 커튼 장식이 너덜너덜해져가지만, 그녀가 잘 지켜온 하얀 벽지에 얼룩이 져 가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이 곳을 사랑하자라는 마음으로, 꽤 '근면지수'가 상위권을 유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 문제는 가끔씩 발동하는 오지랖이다. 인터넷 용어로 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오지라퍼(오지랖어)'일 수 있다. 알록달록한 선 캡을 쓰고, 골프 웨어를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살짝올린 채, 여유있게 "사장님.."하고 전화를 받는 부자아줌마들이 동네를 순회하며 한다는 그 '오지랖어'놀이는 솔직히 내 일과 중 하나다. 

 

김찬호의 <도시는 미디어다>를 읽고, 문득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거리며 살펴본 적이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그 누구도 자신의 삶 이외엔 신경쓰지 않는 오피스텔. 영화 <2046>처럼, 누군가가 있다는 건 단지 그 사람이 묵고 있는 방의 호수에 대한 눈도장. 내겐 그런 눈도장보다는 좀 더 나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주말이 되면 케케묵은 총각냄새가 내가 살고 있는 9층을 채운다. 처음엔 "아휴, 청소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로 비난도 자주 했지만, 요즘은 "그래, 적어도 자기 집에 대한 양심은 있네"라며, 문을 살짝 열어놓은 곳을 스쳐간다.  

배출구가 별로 없는 이 곳에 용감하게 청국장을 끓여먹은 곳을 인지할 때면, 이 곳이 꼭 젊은이들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반 정도 열려 있는 문에서, 런닝과 헐렁한 사각 팬티만을 입은 채, 부엌에서 청국장을 끓이는 한 어르신의 모습을 넌지시 본 적이 있다.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을 택배기사의 "계세요. 택배 왔어요"라는 말 정도로 확인하는 이 곳에서, 어르신의 공개된 모습은 내겐 신기한 장면이다. 

가끔 장을 보고 락 도어의 암호를 빨리 눌러 집에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 내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박적으로 들때면, 꼭 바로 옆 호의 사람들이 청소를 하고, 내 모습을 보거나, 같은 층의 총각들이 담배를 피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때도, 유지하게 되는 경계. 자신의 향긋한 샴푸 향기로 청소하시는 아줌마가 칠해 놓은 락스 냄새를 지워버리는 여자들은 자신이 갈 층수를 내가 내릴 때까지 누르지 않는다. 너무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과 그래,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라는 생각의 교차.  

다시 돌아온 새벽 세 시의 이 곳. 경비아저씨가 내 쓰레기를 보는 게 싫어서 난 유난히 새벽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시작되는 곰팡이꽃 따라하기. 쓰레기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추측해보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흉내내고 있다. 근데 나는 소설처럼 그렇게 매혹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못한다. 보다 도덕적이라고 할까.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으레 부여되는 선입견에 맞지 않는 애늙은이의 도덕이 가끔 내 입을 휘감는다. "나는 그래도 1층까지 내려가 쓰레기를 직접 버린다구. 이 양반들아. 양심 좀 있으면, 자기 집 쓰레기는 자기가 좀 내려가서 비우지." 친구가 집에 놀러와도 그 놀이를 멈출 수 없다. 그리고 친구 참참은 내게 '동네 이장님'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한 호실은 죽어라 피자상자만 쌓아 놓는다. 한 호실은 죽어라 자신이 안 쓰는 램프와 악세사리를 문 앞에 갖다 놓는다. 한 호실은 너저분하게 국물도 씽크대에 안 비우고 준 짬뽕 그릇을 문 앞에 놓는다. 한 호실은 더 얄밉게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 자신의 일일 배출량을 전시해 놓는다.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게 되고, 혀에서 쯧쯧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경비아저씨는 자겠지? 아, 귀찮아서 음식쓰레기 검은 봉지에 감춰서 종량제 봉투에 담았는데 - 9층, 설마 뒤져 보진 않겠지? 내 토익 성적은 이번엔 잘 나왔을까?  -8층 참참이랑 꼭 롯데 경기보러 부산 가야하는데. -7층 또 친구 녀석들 결혼한다고 전화 왔네? 신기하다. -6층 졸업논문 잘 쓰고 있는거지? -5층 여름이다, 뱃살 빼야하는데. - 4층  아, 1층까지 내려가는데, 제발 중간에 사람 타면 안돼. 쓰레기냄새로 흉보이긴 싫단 말이야 - 3층 어, 멈춘다. 쓰벌. 이 새벽에 나 같은 사람이? 2층 조금만 견디자. 다행히 한 층이야. -2층. 띵. 1층입니다..-1층.  

밤샘하면 나는 남자 냄새 빼느라 고생하는 게 분명한 편의점 알바. 아직도 얼큰하게 술 한잔 기울이고 있는 어느 두 남녀의 모습이 보이는 술집.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새벽 냄새.  아씨. 쓰레기 봉투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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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5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5 23:04   좋아요 0 | URL
힘내라!
 

나도 한때는, '아, 대학원이나 가볼까 주의자'였다. '아, 대학원이나 가볼까 주의자'들에게 붙은 단서는, '아심뽀까'(아,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와 같다. '심심한데~'라는 그 앞 말이 붙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대학원 안에 들어오면서 조금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이렇게 공부라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었나를 확인/점검하게 되었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물론 나는 정말 모르는 놈이라는 것을 밝힌다) 질투심이 생기고, 내가 안 읽은 책을 누가 잡고 있으면, 슬그머니 눈으로 메모했다가 장바구니에 담거나 도서관에 들렸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애정보다 '절박함'이라는 게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 '절박함'을 때론 분노와 함께 동여매고 산다. 직장다니는 사람들을 술자리에서 만나면, 그들은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오빠, 형, 뭐뭐야.. 공부할 때가 좋은 거에요.."라는 그 진부한 칭찬도 아니고 비하도 아닌 말들. 그 말을 몇 년 째 듣다보니 요즘엔 그런 자리도 잘 안나가게 되었다. 한편으론 '공부 좀 더 해볼까'라는 그 말을 ' 다니는 대학원 어때요?'라는 말과 함께 붙여 물어보는 사람을 나는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귀찮아서 대충 대중문화를 공부하고 있단다라고 하면, '재미있겠다'라고 웃으면서 '형 ,오빠 뭐 준비해야 되요?'라는 말들, '영어 점수 몇 점 이상이어야 해요?', 등등을 물어보며, 나를 일일 입시 강사로 만들어주는 이들의 대화. 나는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서, 그런 친구들의 이름이 휴대폰에 뜨면 전화도 일부러 안 받곤 한다.  

 

친구와 함께 신촌의 모 카페를 들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장을 한 젊은 남자가 큰 노트북 가방을 들고 와서 혼자 팬케잌을 시켜 먹으며, 서핑을 하고 있더랬다. 나는 원래 공부하면서 사람 관찰을 잘 하는 편이라,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뭘 서핑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웃고 진지해지다가 그 사람은 전화를 받았다. 대화 중에 내가 유심히 들은 말.."나..지금 일 중이야...그러니까..가만 보자.." 나는 그 날 집에 와서 그 남자 생각을 했다. 그냥 인터넷 서핑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나를 돌아보니, 그 남자의 말이 이해가 갔다. 대낮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시간에, 서핑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은, 분명 스스로의 이미지에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는 것 같다. 어느 낮 시간. 누워서 공부때문에 뭘 생각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모처럼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예민한 친구들은 첫 인사가 여보세요가 아니다. "너 잤지?' 그러면 나는 좀 죄인 취급 받는 기분이 들어서 약간 신경이 곤두선 채로, "아니야. 책보고 있었어"라는 말로 때운다. 책보고 있다는 말은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를 아는 친구들에게 그나마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대학원에 있으면 내가 '죄인-게임'이라고 부르는 대화를 동료들끼리 한다. 유감스럽게도 낮에도 밤에도 쓰고 읽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자폐적인 게임은 이상한 우울함과 쾌감을 준다. 우울함을 쾌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임인 것이다. "어제 내 친구한테 전화 왔는데. 증권회사에 취직했대. 그 친구 예전에 별로였는데..인생 참.." 그러면 나오는 후렴구는 "에효..나는 뭔지.."  

 

카페에서 본 그 남자에게 낮은 강박적 시간이었을 것이다. 낮에 자신이 해야 할 행위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채워야 할 어떤 업무들. 그 안에서 그 남자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카페에서 팬케잌을 먹으며,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을 '일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 '나 지금 바빠'라는 말로 감춘 채, 일말의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밑에 내가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닌 범주의 사람.그 안에서 공부는 잉여적 존재가 된다. '평생 공부'라는 말을 믿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살면서 많이 봐왔고, 지금도 보고 있지만, 그 말에 뜨거운 박수를 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입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팔자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걸 많이 봐 왔다. 공부를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사람을 존경이라는 가식적인 포장 아래 잉여라는 외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 그 사회 안에서 전혀 느껴도 되지 않을 죄책감으로 공부와 일의 우열관계를 회한으로 따지고 살아가는 운명. 과연 우리 시대에 일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일까. 이 골치 아픈 생각들이  요즘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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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4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4 01:13   좋아요 0 | URL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0-05-04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4 15: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비로그인 2010-05-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아심뽀까...
요거 울 남편한테 쓴 작업멘트였는데...
그딴 짓이나 하지말고...아심대까...했어야 했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잼있네요.
 
문화연구사전
크리스 바커 지음, 이경숙 외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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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Experience 문화연구 안에서 경험이라는 관념은 다소 역설적으로 보인다. 한편에서 이 관념은 체험된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말로 포착될 때,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언어의 틀짓기 작업 없이는 경험을 하거나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경험은 구체적인 하나의 범주로서 담론과 언어의 범주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첫 번째 사례에서 우리는 이먼드 윌리엄스에게로 가볼 수 있는데, 그에게 문화는 '총체적이고 개별적인 삶의 방식'으로 가장 해된다. 문화는 '살아 있는 경험'에 관여함을 강(71)조하고 그는 특히 노동계급과 그들의 적극적인 화 구성에 관심을 가졌다. 윌리엄스에게 문화 분석의 목적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기록된 문화를한 문화의 경험과 '정서구조'를 재구성하기 위해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11,12쪽

(중략)구성주의는 경험은 담론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방법에서라기보다 하나의 언어를 생산함으로써 '여성의 경험'을 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경험은 그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는 방식의 외부에서도 접근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경험은 말하는 방식 그 외부에 존재하지도 않는다.그리하여 우리가 경험을 알거나 그것이 의미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은 오직 담론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담론이 우리의 경험을 구성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경험기보다 경험에 대한 담론이다. 뿐만 아니라 성찰성은 '경험에 대한 담론'으로 이해될 수 있기에 성적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담론과 관계에 대해 그 이상의 담론을 구성하면서 일련의 담론과 관계에 여하는 것이다. -12 쪽

구성주의 Constructionism 의미 있는 범주와 현상을 문화적이자 역사적으로 특정하게 생성하는 것을 강조하는 반본질주의 이론에 주어진 일반적인 명칭이다. 이는 대상과 사건을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론과는 대조적이다. 예를 들면, 흔히 단순한 자연의 생물학적 소여로 여겨지는 육체가 구성주의에 의해 문화적 힘의 작용에 의한 결과물로도 이해된다. 예를 들면 '감정emotions)'의 기능은 다양한 문화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반응을 나타내는 증거들을 보여준고 (26)한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은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담론적 구성이라고한다. 즉, 정체성은 보편적인 실체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특수한 담론적 구성물이다. (중략)구성주는 언어에 대한 반재현주의의 입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언어는 독립적인 대상 세계를 반영할 있는 거울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이해된다. 언어는 '발견하기'보다 오히려 '생산해 내고', 재현은 세계를 '모사'하기보다 오히려 그을 구성한다.-25,26쪽

여기서 언어의 한계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지적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인데,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문화 배양은 우리의 가치, 의미 그리고 지식을 구성하기 때문
이다. 그리하여 구성주의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존재에게 문화적으로 초월적이거나 비역사적인 요소들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구성주의의 측면에서 개성의 요소를 형성하는 자원은 언어와 특정한 시
간과 장소의 문화적 실천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한 관념 그 자체가 문화적 변인이다.(중략) 간략히 우리는 문화적으로 공유된 물질을 사용하는 사회적 과정 속에서 개인으로서 형성되고,의미는 사회적 관계,(26)언술 실천과 대화가 결합된 행위 속에서 형성된다.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도와 구성 개념은 단순히 개인적 해석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각 문화의 구성이 사용할 수 있는 담론적 설명,자원,그리고 의미의 광범위한 문화적 레퍼토리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심지어 태도,감정, 그리고 내적 마음과 같은 기본적인 심리학적 관념도 공유된 언어의 탐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26,27쪽

담론분석 Discourse analysis 담론분석은 텍스트의 작업에 대해 조사하는 언어적 탐구의 한 형식이다. 여기서 담론의 개념은 푸코가 개발한 방식으로 반드시 사용되지만은 않으며,종종 문장의 단위보다 더 큰 언어의 공간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기술적으로 말해서,이러한 맥락에서 담론은 언어적 요소를 결합시켜서 부분의 합보다 더 큰 의미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에 관여한다. 담론분석은 문서이든 발화이든 간에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조사에 기초하기 때문에,텍스트적 은유가 발화 주체에 대한 분석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그리하여 담론 분석은 특정한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의사소통하는 언어 사용자에 의해 완성되는 사회적 행위에 관계하게 될 수 있다.-65쪽

담론분석가는 규칙지배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의미 생성에 관심을 갖는데,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미시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탐구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하여 담론분석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언어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66쪽

문화변용 Acculturation 어느 한 문화로 '여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모방과 실천 그리(120)고 실험을 통해 언어와 가치,그리고 규범을 학습하고 습득하는 것이 요구된다. 문화변용이란 개념은 우리가 한 문화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사회적 과정을 일컫는다. 문화변용이 일어나는 주요 장소와 행위자에는 가족,동료집단,학교,노동조합,그리고 매체가 포함될 수 있다.문화변용의 과정은 소위 '자연 대 양육(Nature vs Nurture)'논쟁에서 양육의 측면을 의미하는데, 문화 이론가는 문화변용의 과정이 행위자에게 삶의 방식과 보는 방식을 습득할 토대를 제공한다고 여기고 있다. 문화연구의 핵심 주장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문화변용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특질은 상황 구속적이며 문화적인 특정한 생산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이러한 생산에서 사람은 '언제나'사회적이며 문화적임을 의미한다.-120,121쪽

본질주의 Essentialism 본질주의의 개념은 동반자인 반본질주의와 함께 독립적인 객관세계(실재)와 관련하여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그 의미가 유래한다.그리하여 본질주의는 기호는 그들의 실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정된 지시체로부터 끌어올 수 있는 안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이러한 방식으로 단어는 그들이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대상이나 범주의 본질을 지시한다.-155쪽

사회적 Social 사회적인 것의 개념은 공통적으로 '사회의 혹은 그 안에'를 의미한다고 간주되며,여기서 사회는 규칙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의 조직화에 의해 구성된 활동의 자율적 공간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문화연구 이론가는 '사회적인 것'은 지시 대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론가들에게 사회적인 것은 대상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에 대한 다양한 묘사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담론적으로 구성된 논쟁의 영역이다.-166쪽

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y 어떤 차원에서 상호텍스트성의 관념은 확장된 문화적 자의식의 표현으로서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를 의식적으로 인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상호텍스트적인 역사적 경계흐리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안에서 조우하는데,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재현이 의미의 새로운 약호를 생산하기 위해 전에는 연결되지 않았던 기호를 병치시키는 하나의 브리콜라주 안에서 함께 펼쳐진다.-179쪽

수행성 Performativity '수행문'은 그것이 지적한 관계를 효과로 끌어들이는(존재하게 하(192) 는)언어학적 진술이다. (중략)수행성은 단발성 행위가 아니라 항상 현존하는 규범과 관습을 인용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형법상 판사들은 법이나 재판의 권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참조하고 의존해야 할 관습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권위의 기원이나 보편적인 토대는 없다. 나아가 바로 그러한 실천과 인용이 권위를 만들고, 그 법을 재구축한다. 법의 유지는 이미 작용하고 있는 일련과 관습의 재작동의 문제이며, 이는 반복과 인용 가능성을 포함한다.-192쪽

문화의 순환 Circuit of culture '문화의 순환'이라는 관념은 문화유물론 그리고 구체적으로 경제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발전되었다.문화의 순환이라는 비유는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켜 설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와 상부구조'모델에 내재한 결정주의와 환원주의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이다. 이 모델은 서로 접합되거나 상호 연계되는 복잡한 구조나 규칙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서 사회구성체(1970년대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전개되었다)를 기술하는 것으로부터 파생되었다.-127쪽

'문화의 순환'이라는 은유는 1980년대 초기 맹아적 형태로 출현했으며, 1990년대에 더욱 성숙한 단계로 발전했는데, 이 은유는 실천 수준의 접합이라는 기초적인 관념을 경제와 문화의 문제에 접목시켰다.여기서 문화적 의미는 생산-재현-정체성 소비-규제라는 순환의 각 수준에서 생산되고 그 안에 각인되어 있기에, 각 수준에서 일어나는 의미 생산은 바로 그 수준에서 생산될 의미를 결정하지 않은 채 그 다음 단계와 접합한다. 그리하여 문화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위해 자율적이지만 다른 실천과 접합한다.(중략) 즉, 우리는 '경제적인 것'이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방법을 파악하고자 한다.-127쪽

문화의 순환이라는 은유가 지닌 장점은 순환의 각 단계의 구체적인 특징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 사이의 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모델은 투박한 토대와 상부구조 모델보다 좀 더 유연하고,보다 유용하며,보다 세련되었다. 그러나 이 모델에서 '수준' 혹은 '단계'는 단지 발견적인 장치일 뿐이고, '삶의 모든 방식'을 조직하는 분리할 수 없는 구성적인 측면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할 위험을 안고 있다.-128쪽

소비 Consumption 소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용하거나 양분을 몸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적 소비의 과정은 시장에서 순환하는 상품이 사용되는 것과 관련된다. 특히 문화연구의 맥락에서 소비는 소비 과정에서의 의미 생성에 중점을 둔다. 당대 서구 문화가 보여주는 소비 실천에 대한 비평은 자본주의와 상품화 양자에 대한 분석과 긴밀히 연계된다. 즉,(1850년대 마르크스,1940년대 아도르노,그리고 1970년대 알튀세의 주장처럼)상품은 자본주의의 이해에 봉사하는 상품에 각인된 이데올로기적 의-187쪽

미를 수반한고,이는 바로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소비자에 의해 실행된다고 한다.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행해지는 소비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 노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상품이 자본주의 사회질서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수반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으며, 상품 자체가 일탈과 저항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경험적 연구에 근거하여 소비자는 능동적 생산자라는 주장이다. 즉 소비자는 비평가가 상품 '내부'에 있다고 감정했던 그러한 의미를 단순하게 취하지 않고, 오히려 상품과 소비자의 문화적 능력이 상호작용함으로써 그들 고유의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8쪽

소비지향적인 문화연구는 음악,영화,텔레비전,그리고 패션의 생산이 초국가 자본가 기업의 손에 달려 있지만, 의미는 소비의 수준에서 생산,병형, 그리고 관리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피스크는 대중문화는 텍스트 안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의미보다 사람들이 구성하는 의미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가 기업이 대부분의 대중문화를 생산한다는 데 있어 명확한 입장이지만, 그는 이들 기업 세력을 회피하거나 저항하는 전략에 더 관심이 많다. 피스크는 문화산업이 우리로 하여금 대중문화를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주 열심히 일해야만 하며, 소비자는 수동적인 멍청이가 아니라 예리한 능동적 의미 생산자라고 주장한다.-188쪽

시민권 Citizenship 시민권은 정치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 정치적 정체성의 한 형태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시민권의 의미는 그것이 실행되는 언어 게임과 문화적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예를 들어 시민권에 대해 고전적 자유주의의 개념화는 개인의 권리와 의무에 초점을 두며, 거주,이주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선거권 같은 이슈를 포함시킨다. 시민권이라는 용어를 사회 민주주의적으로 사용하면, 이러한 이슈 외에도 복지국가와 관련된 집합적 권리를 포함시키는데, 교육의 권리, 가난의 구제,의료 서비스 등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202쪽

오늘날 우리는 또한 시민권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정체성 집단의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도 듣고 있다. 그리하여 시민권에 따르는 시민권의 범위, 습관, 그리고 일상의 일이 시대를 걸쳐 점차적으로 형성되었고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늘어나는 다수의 사람을 포함시켜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민권 범위의 확대와 시민권과 관련된 권리의 확대는 흔히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시민권의 개념은 어원으로 볼 때, 타인과 살아가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교양(civility)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었고, 그리고 협조적인 삶의 습관과 일과로서 문명화(civilization)와도 연결되어 왔다. 이처럼,시민권은 역사적으로 문명화되었다고 여겨지는 자들에게만 제한되었으며, 예를 들어 노예와 같은 그 외 사람의 시민권은 부정되었다. -202쪽

비록, 시민권의 개념이 처음에는 도시의 탄생과 연계되었더라도 이 용어를 현대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기능으로 부터 파생되었고 이러한 국민국가 안에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획득(202)하게 되었다. 특히,시민권에 대한 근대적 담론은 시민권을 가지면 평등을 성취한다고 강조한다. 누구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시민권을 제1계급의 시민권자와 제2계급의 시민권자로 분리할 수는 없는데,그 이유는 시민권은 보편적이며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민권이라는 언어는 국민국가의 영역 안에서 더 많은 자유와 인정을 누리고자 하는 피지배 집단의 문화정치에 유용하게 되었다. (중략) 시민권 개념은 재현과 정체성의 미시 정치를 제도적이며 문화적인 권리라는 공식적인 거시 정치와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이다.-202,203쪽

신사회 운동 New Social Movements 신사회운동은 시민의 권리투쟁,페미니즘,생태정치,평화운동,청(소)년운동,문화 정체성의 정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신사회운동은 종종 정체성의 정치라는 '새로운'사회 정치 운동(1960년대 발생하여 그때부터 급격히 증식하고 성장한)이 되어왔으며, 이러한 운동은 문화연구의 지지자들을 공급해 왔다. (중략)신사회 운동이 계급 정치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일 수 있지만, 1960년대 이후 갈등은 노동자와 관리자 간의 대립의 문제에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개발의 방향을 통제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투쟁으로 대체되어 왔다. 특히 신사회 운동의 갈등의 축은 정체성,자아실현,'탈물질주의적'인 가치 등의 문제로 이동해 왔다. (중략)신사회 운동은 공통적으로 엉성하고 민주적이며 행위지향적인 그들의 조직 형태와 함께, 반권위적, 반관료적 심지어는 반산업적 관점을 지향하는 것으로 흔히 특징된다. 결과적으로 가치지향성, 특-205쪽

수한 목표, 서로 겹쳐 있어서 유연하게 이동하는 '구성원'의 중첩 현상으로 인해 특정한 운동 사이의 경계는 종종 희미해진다. 신사회운동은 종종 '직접적인 행동'에 관여하지만, 이 행위가 정통적인 대의정치 당국과 담당자(예를 들면 의회나 국회의 구성원)가 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요한 상징적 저항은 기업,연구 기관, 군사시설, 정유 회사, 도로 건설 프로젝트 등등 같은 시민사회의 행위자나 기관들을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206쪽

NSMs의 정치는 상징적인 사건과 환기적인 언어를 통해 제도화된 권력 관계의 문화적 코드에 도전하는데, 이러한 행동은 그들에게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일관된 모습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신사회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그들 행위의 핵심이며 그 운동의 형식과 내용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또한 NSMs의 많은 행위는 그들 자신을 대중적으로 소구하기 위해 기획된 미디어 사건이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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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 

그러나, 한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었던 남자. 

그리고 다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남자. 

국진이빵이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가 인생 40을 넘어 '모든 롤러코스터엔 안전바가 있다'더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까지.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고, 또 살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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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에 24번의 죽음 - 로라 멀비의 영화사 100년에 대한 성찰, Hyunmun Theoria 1
로라 멀비 지음, 이기형.이찬욱 옮김 / 현실문화 / 2007년 9월
품절


서문 : 움직임과 정지 사이에서 발견되는 시간의 재현 中 - 1970년대 초반에 내가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1초에 24(또는 대략 그쯤) 프레임으로 영사되는 영화는 언제나 어두운 방에서만 볼 수 있었다. 오직 전문가인 감독과 편집자만이 편집 테이블에 쉽게 접근하여 '자연스런'움직임의 환영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속도를 멈출 수 있었다.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 다양해졌고,속도의 조절 방식도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중략)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영화 미학은 역사적인 본류 전반에 걸쳐 직면하고 있는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들과 그것이 생산해내는 새로운 관람 방식들에 훨씬 더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9쪽

내 출발점은 명확한 일상의 리얼리티이다.말하자면, 비디오와 디지털 미디어는 오래된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예측할 수 없는 조우는 영화 학자에서 영화 팬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슷하다.(중략) 영화를 통한 과거로의 회귀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사용,특유한 필름 조각을 되돌리고 반복하는 가능성과 함께 발전해온 관객성에 의해 역설적으로 촉진되었다. 되돌리고 반복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영화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속에서 영화와 시간의 복잡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10쪽

1.흐르는 시간 中 -기계와 화학 기술이 점차 전자 기술로 향하고 보다 극적으로 디지털로 나아감에 따라 나이를 먹어가는 영화에 대한 애수 어린 반추는, 훨씬 직접적으로 영화의 실페가 물질적인 객관으로 변화하는 것을 발견했다.(중략)비디오의 발달이 영화를 위해 점점 중요해졌을지라도,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식들은 이제 시대의 말미에 더욱 정밀하게 단일 시스템 부호들을 사용한 이진수 코드로 번역 가능케 되었다.상호 텍스트적이고 크로스 미디어적인 그 밖의 관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특이성, 즉 그것의 물질적인 기초와 시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융합된다.-22쪽

사진과 영화를 향한 테크놀로지의 충동, 순식간에 지나가는 불안정한 리얼리티와 시간의 흐름을 고정된 이미지로 저정하고자 하는 열망은 항상 생명을 불어넣었다.빛을 집중시켜서 어떻게 이미지들을 붙잡을 것인가. 그것들의 리얼리티는 인덱스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어떻게 새겨 넣을 것인가가 항상 문제되었을 것이다.인간의 상상력은 항상 이런 종류의 기계적인 재생산의 마술적인 측면에 사로잡혀왔다.-23쪽

(중략) 새로운 삶(영화는 새로운 소비 양식들을 부활시키고 회복시켰다)은 또한 오래된 영화의 소비 방식을 변화시킨다.옛날 옛적에,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움직임의 환영을 창조하기 위해 적정 속도로 영사되고 주어진 이야기 시퀀스를 따라가는 영화 안에서만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이제 영사되는 영화가 가장 잘 지켜왔던 비밀인 영화의 정지성은 단순한 버튼 조작만으로도 쉽게 드러난다.또한 그것은 정지된 프레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사진의 정지성을 드러내도록 해준다. 한편으로 영화 이전의 정지성은 사진의 자리에 위치한다. (중략) 영화 이후의 정지성은 물질적인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영화와 달리 디지털에 위치하지만, 기계적이고 셀룰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움직이는 이미지를 멀티미디어의 미래속으로 가져간다.그러나 영화 이후의 매체는 영화 이전의 매체를 불러냈다.-27쪽

영화의 속도를 조작하기 위해 처음으로 힘을 발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도착하고 1980년대에 기반을 잡은 비디오였다. 비록 전자 이미지의 불안정성이 이러한 경험이 가져온 흥분을 감소시킬지라도,비디오가 지배하게 된 지난 몇 십 년간의 축적된 경험은 디지털 시대로 전달되어질 수 있다.그러나 현재의 정황은 이 새로운 상호 작용적인 관객성의 중요성을 더욱 강화시켜왔다.-28쪽

새로운 모습들은 순수한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유사-박물관과 같은 상태로 이동하면서 과거 영화에 대한 이해를 또한 강화한다. 과거의 특별한 영화광,영화팬,영화 애호가를 넘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반면, 영화 체험은 1초에 24프레임의 질서가 주어진 속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 전통적인 영화 관객의 체험으로부터는 멀리 이동하게 된다. -34쪽

일단 영화를 소비하는 과정이 몰입된 관람이라는 절대 고립(어둠 속에서 1초에 24프레임으로,외부의 침해 없이 서사적인 질서 속에 있는)으로부터 분리되자 서사의 결합력은 외부 담론으로부터 오는 압력 아래 놓이게 된다. 그것은 제작 배경, 뒷이야기, 역사와 같은(34)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관객성은 또한 서사 내부의 패턴에도 영향을 준다. 특 특권화된 위계들을 뒤엎고,원인과 결과가 투여된 의미의 사슬을 대체하는 예상치 못한 연결들을 만들면서 시퀀스들은 쉽게 건너뛰거나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작용적인 관객성은 텍스트 본래의 결합력을 공격하면서 이해와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려지는 텍스트 분석 과정 속에서 즐거운 회상을 함께 가져온다.-34,35쪽

만일 영화를 디지털로 보는 것이 서사 붕괴의 감각에 공헌해왔다면, 디지털 편집 시스템은 영화를 보다 쉽게 인용되고 참조되게 만들었다. -37쪽

2.불확실성 : 주술 그리고 속임수의 예술 中 영화 기술이 일상 속으로 완전히 들어와서 그것의 작동들이 더 이상 신비롭지 않게 됨에 따라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퇴출되었듯이 홈 비디오나 테크놀로지가 보여주는 평범한 리얼리티에 의해 추월당했다. -46쪽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폭발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테크놀로지에 대한 대중적인 믿음이 증가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환영 생산 과정의 신비와 맹신의 가면은 벗겨지게 된다. -55쪽

<시각적인 쾌락과 서사 영화>를 쓴 이후 언젠가부터 나는 대안적인 관객을 발전시키려고 애썼는데, 그러한 관객이란 페미니즘과 아방가르드라는 새로운 영화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관객들로서 그들은 관음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크린을 판독하려는 호기심과 욕망에 의해서 추동되는 관객들이었다. 호기심, 보고 알려는 충동은 시각 문화를 요구하는 정치적인 것을 위한 유토피아적인 공간에 여전히 주의를 기울였으며,또한 판독 과정 중의 하나는 퍼즐과 수수께끼를 푸는 인간의 오랜 흥미와 쾌락에 대해 대답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호기심이 강한 관객은 사색적인 관객의 선조이다. -252쪽

그리고 지연의 영화는 엘리트뿐만 아니라 소비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독의 쾌락을 풀어준다.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 사이의 관계인데, 즉 지금 나이를 먹어온 영화에 대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효과이다. -252쪽

동일한 좋아하는 영화, 동일한 특정 시퀀스, 동일한 특정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사색적인 관객의 충동 속에는 모두 어떠한 반복(253) 강박의 측면이 있다.-253,254쪽

옮긴이의 말 중 - 멀비가 말하는 '정지'와 '지연'은 어떤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들이 흔히 집에서 영화를 보며 리모컨 버튼을 사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나 근사한 이미지,옛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또는 '옥에 티', 화면에서 자신만이 발견한 '겨우 존재하는 이미지',이해하기 힘든 부분 등을 다시 보기 위해 움직이는 이미지를 계속하여 정지시키거나 되돌려보는 일상적인 관람 행위를 말한다. 이를 멀미는 이 책에서 편의상 이미지를 소유하려는 페티시적인 관객과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움직임과 연결들이 만들어내는 영화 안팎의 사건들(컨텍스트)을 사색하려는 관객으로 나누고 있다. -260쪽

9. 소유적인 관객 中 - 영화적인 체험은 매우 덧없는 곳이기 때문에 앞선 순간들,이미지들, 특히 우상들을 붙잡는 데 항상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영화 산업은 팬 문화가 형성되던 최초의 순간부터, 그러한 영화 자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일련의 방어물, 즉 스틸 이미지들을 생산했다. 그것은 바로 제작 과정에 대한 사건들, 포스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핀업이라 부르는 미남 미녀의 사진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2차적인 이미지들은 영화 팬들에게 소유의 환영을 갖게 하도록 디자인되며, 그 이미지들을 통해 팬들은 되돌려볼 수 없는 영화의 스펙터클과 각 개인들이 상상하는 것 사이를 연결하게 된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팬들은 빠져나가버리는 이미지를 소유하고 붙잡고 싶은 욕망 때문에 영화관으로 되돌아가서 같은 영화를 계속해서 보는 식의 반복적인 관람 행위를 하게 된다. (중략) 전자적인 또는 디지털적인 보기와 함께 영화적인 반복 강박의 속성은 변화한다. 영화는 지연되고 이처럼 선형적인 서사로부터 좋아하는 순간이나 장면으로 파편화되기 때문에 관객은 예전에는 붙잡기 어려웠던 이미지를 붙잡거나 소유할 수 있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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