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늘 대두되던 문제였다. 이제 영화전문기자라든가, 영화평론가들은 알아서 기는 듯, 아니면 진짜 풀이 죽은 듯, 상당히 '타인지향형'적인 기사와 비평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한의 효과가 '혁신'이기보다는, 약간의 '각성'정도로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늘 체험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위기담론의 위기를 내놓으며, 또 종언담론의 종언을 주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는 남아있지 않겠냐라는 안타까운 옹알이를 해댄다.  <씨네21>의 최근 몇몇 글 중 나는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아바타>에 대한 평자들과 글쟁이들의 시각을 보면서, 감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영화비평'의 어떤 수준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수준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바타>를 통해 그들이 제시하는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그런 영화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들의 미래를 고심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런 우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족한 소견 몇 개를 끄적여보면 다음과 같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9&article_id=59314  

-> 김중혁, 카메론의 시간은 거꾸로 가나 

엄밀히 말하자면, 김중혁은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 문단에서 나름 유익한 발견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이다. 작가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지각을 인식하며 그 지각에 자극을 주는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꾼이다. 그래, 이 측면에서 그가 <아바타>에 느끼고 있는 실망감의 타겟. 바로 이야기의 허술함을 꼬집는 건 이해해주겠다. 그런데,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이번 글은 이 좁디 좁아진 영화잡지에서 엄하게 큰 두 페이지를 책임질 수 있는 내용으로선 최하의 레벨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아바타>를 대하는 시선은 늘 이럴 때 나오는, 내가 '홍대주의'라 부르는 특유의 스노비즘이다. 그는 마치 모두가 다 환호하는 것에 나는 그 환호가 그리 대단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90년대식 홍대형 스노비즘을 보여준다. 근데 그의 이런 시선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이럴 때 나오는' 어떤 관행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영화에 나타나는 어떤 측면, 그 측면이 갖고 있는 새로움이 사실상 별 새롭지 않다는 류의 지적은 내가 보기엔 어떤 '문화적 고집'으로서 갖는 비평의 지향이 아니라, 마치 7080담론의 과잉이나, 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과잉에 머무른 지양되어야 할 평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지양되어야 할 시각은 <씨네21>에 <아바타>를 평한 이들이 모두다 한 걸치고 있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이 '호들갑스러움'의 스펙터클을 좀 차분히 보기 위해서 이런 비평의 수사를 활용한다. "사실 <아바타>가 보여준 면모들은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평자들은 영화적 교양주의를 다시 챙겨, <아바타>를 정리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어서, <아바타>를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 그 위치에서만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창조력' 제로인 비평이라는 점이다. '창조력 제로'인 비평의 위치에 근접한 평자들이 쓰는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로 결국 영화세계사 책을 다시 끄집어 내게 하여, <아바타>에 숨어 있는 다른 영화들의 기시감을 언급하는 수준으로만 끝나는 비평들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나마 허문영이 737호에서 <놀라운 현실감 갖춘 퇴행적인 동화>란 비평에서, <아바타>를 둘러싼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형태의 시각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용어를 제대로 알고 써라라고 말하는 점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가 하나의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의 특징을 해부하면서, 주는 쾌감은 기껏해야, "내가 이 영화를 예전에 알았나, 봤나"정도로 마무리되는 '정보 차원'의 언급이다. 그러한 언급은 영화를 성찰할 수 있는 '진정성'의 에토스를 확보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바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옛 영화를 알고 있다는 '스노비즘'에 머무른 채, 아무런 발전 없는 시각에 머무르고, 그 머무름을 머무르지 않음으로 착각하는 위치까지 나아가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러운 글은 736호 <아바타, 과연 혁명적인 대작인가>라는 제목의 4인 대담이다.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선수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다가와, 영화를 자극했을 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영화적 본질이란 지켜보자라는 구태의연한 자장 안에 눌러 앉은 시선으로 영화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혁명'이란 수사 앞에서, 평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바타>의 '혁명'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평적 시선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만다.  

영화 평론가들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영화가 새롭다, 혁명적이다 라는 것을 평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에 기반한 자세가, 퇴행적이어야 하나. 그리하여, 혁명적임을 조금 누그러뜨려, 그 퇴행이 아바타를 둘러 싼 광풍 어린 혁명이란 수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만약 과감하게 외치는대로, 아바타가 그리 혁명적이지 않은 영화라면, 그들마저 혁명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맞불을 놓을 필요는 없었다. 즉, 그들은 아바타의 혁명이란 수사를 영화가 갖고 있는 어떤 역사적 본질이란 견고한 덩어리로 무너뜨리려 했는데, 그 역사적 본질의 틀이 과연 영화를 둘러싼 불변의 진리인지는 의문에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문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행적 비평으로 혁명이란 수사를 깨뜨리려는 우를 범한다.  

흑백 영화에서 칼라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이, 그 전이의 공포가 준 역사적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들은 그 역사적 체험의 교훈에 찰싹 붙어, 그 교훈이 주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따르는 듯하다. 물론 <아바타>가 가진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판의 엄청난 변혁을 도모하진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3의 지점을 찾아보려 하지 않은 영화평자들의 자세가 안타깝다. 기술의 다가옴, 영화와의 접촉,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에 대한 부정과 영화가 갖고 있는 본질의 고수. 이 안에서 호불호가 갈리고, 그 호불호를 깨는 새로운 틀의 시각은 시도조차 않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늘어나는 것은 영화의 내부가 아닌, 영화의 외부다. 어떤 '경제주의'에 침윤된 일련의 현대 영화비평이 갖는 위험성을 여기서 바라본다. <디 워>의 난분분한 비평 장이 그랬듯이, 결국 <아바타>를 수놓는 돈다발, 그것을 촉발한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커넥션.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를 둘러싼 숫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숫자 안에서 멀티 플렉스와 아이맥스, 입체안경 등의 수용 환경과 문화 산업은 영화 내부에 대한 심층적 해석의 자리를 강탈한다.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바타>를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게으른 그리고 정체된 그 무엇의 시선을 느낀다.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문화이 접촉하는 그 지점 안에서, 나오는 반응들, 그리고 그 반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자들이 내놓는 시선의 정체와 퇴행은 비평의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새겨 넣게 만든다.  

그들은 비평 속에서 실컷 과학과 영화를 매개하는 새 시대의 영화철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들이 고수하는 것은 영화에 내재된 '인문주의'를 어설프게 옹호하면서, 각자가 어설프게 공유하려는 듯한 영화적 교양주의를 설파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을 고작 지금의 수준에서 활용한다면, 나는 영화의 미래보다 비평의 미래가 더 불확실함을 과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영화적 고집'이 오히려 평자로서의 강인한 고집이라기보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한다는 기죽음에서 발생한 '타인지향적 고집'이기때문에, 그들이 보여준 고집의 시선은 더 퇴행적으로 느껴진다. 깔려면 더 새롭게 까고, 옹호하려면 더 진득하게 옹호해라. 죽도 밥도 아닌 눈치 보는 비평을 하지 말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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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1-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창조적 비평'이란 정말 가능할까요. 어떤 비평이 창조적일때, 왕왕 텍스트는 그 비평을 위한 재료로서만 제약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형태가 될 때, 비평은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으로 들어서고, 그럼 면에서는 작품분석을 넘어서 철학적 텍스트로 비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컨데 비평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읽고 몇 자 적고 싶어서 빈약한 댓글 남겼습니다. 건필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1-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부터, '꿈'보다 '해몽'을 좋아한 터라, 비평이 가져야 할 야망의 파이에 대해서 나름 희망을 갖고 있나봅니다.^^' 부족한 글에..덧글 고맙습니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의 지점은 텍스트 안에서 적확하게 놀아야겠지만, 비평의 자장은 그 텍스트를 넘어서는 무엇이라 생각해서요. 거기서,,창조적이라는 수사에 대해 고민을 해봅니다. '해몽'이 꿈보다..다만..그 꿈을 허황되지 않게..꿈을 존중하는 해몽이..환호받는 세상이 되길 고대해봅니다. 그런 점에서..작품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과의 거리에서..작품을 가끔 넘어설 수 있는 이상을 체감할 수 있는 가능성의 비평이..바로 창조적 비평과 가장 근접한 무엇이 아닐까..지금으로선 그 정도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아직 머나먼 무엇이지만요..덧글덕분에..신중하게 되네요. 지적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2010년 1월 4일 WWE RAW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충분히 기록될 가치가 있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무려 12년 만에 브렛 '더 힛맨' 하트가 친정 WWE로 돌아온 것이다. 하트 가문이 나은 최고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그는 WWE와의 앙금을 정리하고 팬들 앞에 섰다. 근 15년 간 WWE 골수 팬을 자처하는 내게 이 날은 가장 설레이는 날이 될 것같다.  

다들 알다시피 브렛 하트는 1997년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성사된 숀 마이클스와의 WWF 챔피언쉽에서 '몬트리올 스크류잡'이라고 일컫는 프로레슬링계 역사에서 길이 남을 논란 경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당시 WWE와의 계약 상태, 그리고 회장인 빈스 맥마흔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미스테리를 남긴 이 경기를 통해 브렛 하트가 회장 빈스 맥마흔에게 경기가 끝난 후 뱉은 침은 각본이 아닌, '리얼'임이 밝혀졌고, 브렛 하트는 이후 WWE를 떠나 WCW에 새 둥지를 틀게 된다. 상대자였던 숀 마이클스도 물론 이 논란에서 벗어나진 못한 터. 브렛 하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은 캐나다에서 숀 마이클스가 경기를 할 때면 반겨 주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난 최근 RAW에서도 역시 숀 마이클스는 캐나다에서는 미국에서의 큰 환호를 기대할 수 없다.  

암튼 브렛 하트가 WWE 명예의 전당에 오른 후, 컴백 이야기가 루머로 솔솔 오르고 있었던 터, 결국 이 루머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게스트 호스트로서, 레슬매니아 기간까지 계약이 된 브렛 하트는 내가 보기에는 빈스 맥마흔과 VS 구도를 형성할 것 같다. (빈스는 이 날 RAW에서 결국 또 악역을 자처하며 브렛의 거기를 차고 아유를 받으며 퇴장했다) 

브렛 하트, 돌아와줘서 고마워. 이제 더 락만 오면 되나! 



브렛 하트의 친정 복귀를 반기는 열렬히 반기는 여성 팬, 옆에 아주머니가 입은 옷이 숀 마이클스의 DX라 더 재미있는 광경 





브렛 하트가 링에서 보여주었던 전형적인 퍼포먼스. "나보고 어쩌라고~" 



브렛 하트가 고대하던 순간을 만들었다. 12년 만에 적수이자 동료였던 숀 마이클스를 링 안으로 부른 것이다. 



결과는 조금은 어색한 화해 



숀 마이클스는 이 날 스위친 뮤직을 먹이려는 포즈로 훼이크를 쓴 뒤, 브렛과 화해의 포옹을 했다. 

이로써 역사는 다시 써졌다. 이 둘이 화해할 날이 오다니. 그보다 이 둘을 한 링 안에서 다시 볼 날이 오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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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2-2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숀마이클스를 정말 무척 좋아하는데, 브렛힛맨하트와 예전에 록커스였을때 경기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알라딘에서 WWE 에 대한 글을 보는것도 반갑고 ㅠㅠ

며칠전에 로얄럼블을 보는데 숀마이클스가 나와서 중간에 탈락하는 거 보고 참 속상했었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3-0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숀마이클스가 언더테이커랑 커리어매치를 하던데,,언더테이커의 레슬매니아 연승기록을 밀어줄지, 아니면 숀마이클스의 커리어를 계속 연장시켜줄지 궁금하군요..결론은 이 두 옹들이 아직 수고를 해야 하는...wwe의 구조가 안타깝네요.wwe 글은 종종 올리겠습니다.^^
 

1월 6일. 그 분을 떠올리며  



 

얼마전에 후배가 책을 한권 보여줘요. 그림 책이더군요.
글도 써있고 그런 책인데, 그림 하나가 아주 눈길을 끌어요.
와인잔 안에 살던 붕어가 그 와인잔이 좁다고 느꼈던지
와인잔을 깨고 허공에 이렇게 떠 있는 빨간 붕어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어진 틀 안에 살지요.
스스로 만든 것이든 뭐 타의로 이루어진 것이든
생각과 여러가지 행동, 인간관계...

근데 그 붕어 그림을 보고 나는 붕어처럼 내 틀을 벗어날
용기가 있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는 없더군요.
좁으면 어때? 좁은 대로 살지.
뭐 그정도 더라구요. 사람들은 누구나 선택하고 포기하고
그러고 지냅니다. 포기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지요.
그 아쉬움이 길게 오래 남을 수도 있고 금세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선택한 부분에 대해선 나름대로 책임을 져가면서 지내지요.

저는 짜장면 집에 가면은 짬뽕이랑 짜장이랑 같이 시켜서 둘다먹고
나오는데요 왜냐하면 짬뽕 시킨날은 반쯤 먹다보면
'아~ 오늘 짜장이었구나' 뭐 그렇게 아쉬워하고 또 짜장면 시킨날은
짜장면도 반쯤 먹다보면 '아~ 오늘 짬뽕이었구나'그래 자꾸 아쉬워해요~

그래보신 경험들 있으세요? 짬뽕먹다가 짜장 생각하신 거.
자꾸 아쉬워해요. 아주 묘한 짜장과 짬뽕의 갈등입니다.
아쉬워 하는게 싫어서 둘다 시켜서 둘도 맛을 보고 나오는데요.

현실에서는 둘다 선택할 수가 없지요. 뭔가 하나를 선택하면은 분명히
하나는 놓아야 하거든요. 붕어는 나가는걸 원했고 저는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을 선택을 했구요.

누구나 태어나면서 어떤 용기를 가지고, 그런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시는
분들도 있고 또 그저 저처럼 이렇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요.
어떤것이 좋다 나쁘다 따지기 전에 그저 나름대로 선택한 부분에서
잘 살길 바라면서 그냥 봐야죠.

헌데 뭔가 새로운거, 새로운 느낌,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상황은 지금 익숙한
그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시작이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늘 가집니다.
붕어가 부러워요. 계속 부러워하다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붕어가 부러워요.

- 김광석, [노래이야기, 인생이야기] 중에서 콘서트 토크 시간 - 

 김광석- 나른한 오후

아~~참 하늘이 곱다 싶어 나선 길
사람들은 그저 무감히 스쳐가도
또 다가오고....
혼자 걷는 이길이 반갑게 느껴질무렵
혼자라는 이유로 불안해하는 난
어디 알만한 사람 없을까 하고
만난지 십분도 안되 벌써 싫증을 느끼고
아~~참 바람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아~~참 햇볕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사람으로 외롭고 사람으로 피곤해하는 난
졸리운 오후 나른한 오후
물끄러미 서서 바라본 하늘

아~~참 바람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아~~참 햇볕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사람으로 외롭고 사람으로 피곤해하는 난
졸리운 오후 나른한 오후
물끄러미 서서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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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자들은 정신 차렸다. 남초 사이트에서 남자들이 예전에 정신 못차렸던 것 중 하나가 '나쁜 남자'에 대한 정의였다. 그들은 '순수하게' '나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가 권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잘 알아가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이제 이 '나쁜'의 필수사항을 안다. '나쁜'은 우리가 뻔하게 알고 있는 '감정'의 차원이 아니다. 이 '나쁜'을 채우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갖추면 좋은 능력과 그 능력에 달라붙은 물질들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서, 오늘 처음 시작한 <파스타>를 보면서 점점 '나쁜 남자'가 어때야 하는지를 내 주위의 남자들이 아는 게 흥미롭다. 남자들은 이제 화를 버럭낸다는 것에서 자신이 충분히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멍청한 생각을 버리고 있다. 그들은 '화를 낼 수 있는 남자'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습득하며 살아간다. 강마에(김명민)나 최현우(이선균)나 그들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위상학에 알맞는 캐릭터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구성된 캐릭터가 내뿜는 과시의 언어는, 그들이 그만큼 걸어온 노력, 혹은 성공을 갈망한 삶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이기적으로' 재현한다. 남자들은 이제 여자들에게 굳이 '나쁜남자'가 진정 어떤 남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듣지 않아도 된다. '버럭의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권리의 행사가 그 누구에게나 자신을 왕자님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상상은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는 것을.   

버럭의 차가움과 그 버럭을 망각하게 만드는 순간의 따사로움으로 채워진 이 트렌디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어쩌면 이 사회가 우리에게 선사해 준 빈약한 확률의 로또인지 모른다. 이 로또, 텔레비전으로만 쳐다 보거나, 혹은 실제로 한 번 크게 당해본 후 , 미련 가득한 소주잔을 반복적으로 되뇌이며 술자리의 '희망안주'로 올려놓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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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봉지가 되고 싶습니다.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리지 않고 넣어, 구멍이 뚫릴지라도 원망하지 않으려 합니다.  차라리 그 원망을 초월하여, 그저 그런 관용이 아닌, 초월적 관용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혹은 초월적 헌신의 삶을 살고 싶기도 합니다. 어두운 밤거리의 고독과 방황을 가득 담은 구토물이 저에게 담길지라도, 차라리 그 구토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제 안에 든 무엇이 더러워, 매만지길 두려워하더라도, 저는 검은 봉지가 되지 않으려 합니다. 차라리 제 속이 비치는 하얀 봉지가 되어, 상처를 어리숙하고 조급한 동정의 시선으로 덮지 않고, 상처를 상처 그대로 인정하는 시선을 가지려 합니다. 

봉지를 통해 저는 '담김'과 '바라봄'을 사유하고 싶습니다. 담김은 과잉된 욕망의 '채움'을 벗어난,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채우는 것'이 아닌, '타인'을 비움으로써 타인을 담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타인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관계 그 자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며 살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비움의 자세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시각의 육질에서 조금 더 여유로이 저를 다스리면서, 모든 현상을 비움으로써 본질을 바라보려는 자세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봉지가 되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라는 것보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고백할 수 있는 확언의 시간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저 봉지를 바라보는 두 사람처럼, '상상력'을 기꺼이 현실로 전유하려는 욕망에 벗어나, 상상력을 상상력의 영역에 고이 놓아두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상을 상상에 놓아두기.   

그것은 곧 시각성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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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8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해엔 멋진 '봉지'로 거듭나시길!!^^ 새해 복 많이많이 만들어요.

얼그레이효과 2009-12-28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롱씨도 행복한 대학원 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2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엔 공부가 더 수월해지시기를 빕니다 ^^

얼그레이효과 2009-12-2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모리님 올해 알게 되어 반갑습니다. 알게 모르게 블로그 들어가서 글들 보고 좋은 생각들 공유하고 있답니다. 내년엔 따스한 기억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