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ㅣ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평점 :

과거 없는 지금은 성립될 수 없고, 지금 없는 미래는 도래할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는 그래서 한 권의 책과 같다. 다른 시간대는 모두 같은 선상에서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야 온전히 한편의 서사를 완성시킨다.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공유돼야 힘을 갖는다. 그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왜 위대한지를 깨닫게 한다. (p.12)
망국의 끝자락, 절박함에 숨죽이며 지구 반대편으로 달려간 사내들, 거기서 마주해야 했던 깊은 무력감 (p.178)
지난 책, 「뭉우리돌의 바다」를 읽었을 때의 느낌을 이제야 한 줄로 정리해본다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가슴 저린 역사”였다. 사실 그 책을 읽은 당시에는 마음에 일렁이는 감정이 꽤 커, 감히 무엇이라 정리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책, 『뭉우리돌의 들녘』. 그런데 『뭉우리돌의 들녘』을 읽고 나서는 '나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셨어요'하는 마음이 너무 들어 이 감상문을 쓰는 것조차 버겁다. 내가 뭐라고, 이분들의 이야기를 평가하거나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독립운동가에 사로잡혀 10년을 가까이 세계를 떠돌며 흩어진 이야기들을 주워 모으는 작가님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전작 「뭉우리돌의 바다」에서는 멕시코와 쿠바,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기록되었는데,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던 이야기들이 더 많았기에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뭉우리돌의 들녘』을 읽으며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전작에 비해 익숙한 지명 등을 만나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요동쳤다.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 죄송했고, 이제라도 제대로 기억하겠다 결심했다.
『뭉우리돌의 들녘』은 러시아와 네덜란드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모은 책으로, 연해주, 연추, 헤이그, 블라디보스톡, 하라롭스크 등의 지역 위에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았다. 내가 굳이 “모았다”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말 그대로 시간과 길 위에 흩어져, 그대로 사라져버리게 될지도 모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힘겹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때로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글로 담아내는 과정이 결코 수월할 리 없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진은 때때로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쉽게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을 남긴다.
그의 사진을 감상하며,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곤 했다. 특히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실린 사진들은 더욱 그랬는데, 텅 빈 벌판에 서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또 그보다 훨씬 이전에, 척박한 삶이었을 분들은 그 벌판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훔쳐야 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 책에서 가장 오래 바라본 사진은 자유시 참변 터 사진이었다. '치유'는 상처를 마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다 했던가. 이제야말로 우리는, 과거를 온전히 바라보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말처럼, 뼈아픈 과거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뭉우리돌의 들녘』은 그래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인정하기에 아프고 힘들다고 등을 돌린 후, 이제는 점점 잊어가는 이들을 '소환'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간도 품도 결코 녹록히 않은 작업을 기꺼이 해내는 그 덕분에, 우리는 국외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찾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영화 '영웅'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단지'에 대해 읽으며, 가늠해보지 못했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단지는 효의 실천보다 나라의 존립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미 아닐까. 그것은 효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밀어내 그 자리에 독립이란 두 글자를 채우는 일·(P.89)”이라는 말을 읽으며, 어쩌면 그들이 끊어냈던 것은 삶과 가족에 대한 미련은 아니었을지 생각해봤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에 임하기 전에서야 통성명을 했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름까지야 몰랐겠느냐 만은 서로조차 서로를 몰라야 했기 때문인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을 알고 서로라도 기억해주기 위함인지 알 수 없지만,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감사의 대상'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슬픔을 너머 부끄러운 마음까지 든다. 『뭉우리돌의 들녘』은 그렇게 세월에 묻히고, 시간에 빛바랜 이야기들을 먼지 털어 고이 담아낸다.
고단할 그의 발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가 훨씬 더 오래도록 전 세계의 뭉우리돌을 모아주면 좋겠다. 그래서 이름 없이 잊힌 분들이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다. 『뭉우리돌의 들녘』을 덮으며 가만히 다짐해본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잊지 않겠다고,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