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습관들이기 나름인가 보다!” 

-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두 신사』 中








4,000년 동안 존재했던 인간사회 100여 개를 표본 삼아 분석한 한 인류학자는 식인풍습 사회가 34%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현재 식인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혐오감은 보편적인 일이 아니다. 인류에게 식인이 생각보다 낯선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왜 식인을 할까? 예를 들어, 비행기 추락사고의 생존자들이 굶어죽을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람들은 대개 먼저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식인을 왜 할까?
















특정 사회에서는 시체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먹는다. 인류학자들은 자기 부족 시체를 먹는 행위를 족내 식인풍습이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형태가 있다. 베네수엘라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은 시체를 장작불에 태워서 타고남은 뼈 조각을 수습해서 가루로 만든다. 죽은 자 친척들이 뼈 가루를 바나나 죽에 섞어 먹는다. 반대로 파라과이의 구아야키족은 시체를 잘라서 굽는다. 죽은 사람 가족을 제외한 부족 전체가 시체 살을 종려나무 수액에 곁들여 먹는다. 뼈는 잘라서 불태워 버린다. 족내 식인풍습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를 흡수한다는 의미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완전히 통합된다. 

















장례의식 절차로써 자손이 죽은 자를 먹는 것이 허락된 사회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다. 이런 사회에서 적절한 식인 의식이 거행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 삶이 불행해 질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같은 장례 만찬은 종교적인 일체감과 관계가 있거나, 죽은 자의 살이 살아있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생각과도 관계있다. 물론 그런 의식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정당성이 부여되더라도 오늘날에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회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든 문화에서 쉽게 인정하는 가치 – 고인의 마지막 소망을 존중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 사랑의 표현 –를 고려한다면 그렇다. 고인에 대한 존경이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면, 투피-구아라니족이나 카리브족처럼 많은 남미 부족은 전쟁 포로를 처형하여 의례적으로 먹었다. 아즈텍 사람들도 수십만 명을 식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즈텍 문명은 전쟁-인신 공양-식인풍습의 복합적 문화 풍습을 만들었다. 식인 대상은 주로 전쟁 포로였다. 아즈텍 군대는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 후 식인할 포로를 되도록 많이 잡아오는 일에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적의 항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무 많은 적군을 죽이게 될까봐 군사적 우세를 밀고 나가는 것을 종종 삼갈 정도였다. 아즈텍 문명의 피라미드는 가파른 경사로가 있는데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희생자 몸뚱이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쉽게 굴러떨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 희생자를 성직자가 거두어다 사람들에게 인육으로 배분했다. 아즈텍인들의 식인풍습은 종교적 의식 일환으로 사람을 겉치레로 먹는 시늉이 아니었다. 식인풍습은 불과 100년 전까지도 전 세계 광범위하게 생각보다 많이 행해진 문화였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사람에게 식인은 천성이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에 쉽게 길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천성이 아니지만’ 주변 생태 환경이 파괴되고 고갈되어 먹을 것이 없을 경우에만 식인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힌다. “다른 식량이 부족해 식인풍습이 생겼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일단 생겨난 인육에 대한 입맛은 식량부족 사태가 해결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인육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는 대상이 되었다. 원시 부족은 인육을 즐겨 먹는 것을 절대 수치로 느끼지 않았다. 아마 인육을 먹은 것이나 동물 고기를 먹는 것이나 도덕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식인 풍습은 한때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원시부족 중 식인풍속이 없는 곳은 거의 없었다. 멜라네시아에서는 친구들에게 구운 인육을 대접하면 추장의 사회적 명성이 크게 높아지곤 했다. 브라질의 한 현인 추장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인육보다 맛있는 사냥감은 알지 못 한다. 당신네 백인들은 정말 음식을 너무나 가린다.” 



아일랜드인, 이베리아인, 픽트인(로마 제국 시기부터 10세기까지 스코틀랜드 동부 및 북부에 거주하던 부족), 11세기 데인족(덴마크계 게르만족) 같은 후대 종족들도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고기를 주요 교역 상품으로 취급하고, 장례식 같은 건 모르던 부족도 상당수 달했다. 콩고의 우알라바 강에서는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를 말 그대로 식품 일종으로 산 채 사고팔았다. 뉴브리튼 섬에는 현재 우리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 듯 인육을 파는 가게가 있기도 했다. 솔로몬 제도 일부 지역에서는 잔치에 쓰기 위해 인간 제물을(여자를 더 선호했다) 돼지처럼 살찌우기도 했다. 한편 푸에고인들(남미 마젤란 해협 남쪽 섬사람들)은 ‘개고기에는 수달 맛이 난다’며 여자 인육을 개고기보다 높이 평가했다. 타이티 섬의 한 늙은 폴리네시아인 추장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백인 고기는 제대로 구우면 잘 익은 바나나 맛이 난다.” 하지만 피지인들은 백인 인육은 너무 짜고 질기며, 유럽 선원 인육은 먹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불평하곤 했다. 폴리네시아인 인육 맛이 더 났다는 것이다.



한편 16세기 철학자 몽테뉴 눈에는 죽은 사람을 구워먹는 것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고문하는 것(몽테뉴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다)이 더 야만적인 일로 비쳤다. 듀런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인간은 서로가 가진 착각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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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법칙과 도덕법칙은 원래 하나다.

- 헨리 조지


경제학은 수학이 아닌 사상이다. 

경제학에서 단호하게 주장될 수 있는 

일반 규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







17세기까지 유럽에서 경제학은 독립된 학문이 아니었다. 사업 경영은 대학 교과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중심으로 배우는 윤리학에 속했다. 상품의 ‘적정’ 가격은 시장이 아니라 길드 조직이나 왕실 대표단이 정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들어서자 경제와 도덕이 분리되었다. 당시 탄생한 근대 국가가 인구 규모와 생산성, 국제무역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자, 유럽 몇몇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이 합쳐진 정치경제학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가 마지막 정치경제학자가 되었다. 1870년대가 되면 경제학계에서 ‘개인의 경제 행위‘를 기초로 새로운 경제 이론을 세우려는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경제학’이 ‘경제학’으로 바뀌었다. 즉, ‘정치경제학’은 경제 영역을 사회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면서 경제 영역과 기타 영역(정치와 법률, 사상, 문화 등) 사이의 관계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반면 축소된 ‘경제학’은 개인(소비자, 생산자, 투기꾼 등)이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제 경제활동에 녹아있던 여러 정치적, 사회적 차원은 은폐된다. 경제학은 경제적 가치를 사회 전체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행위자에게 총 자산이 주어졌을 때 ‘한계적’ 증가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엘프리드 마셜은 이러한 새 패러다임을 종합하여 『경제학 원리』(1890)를 저술했다. 이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인문학이 학문의 전부였는데, 19세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과거 연구에 한정되자, 현재 상황을 중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사회과학인 경제학과 정치학, 사회학을 성장시켰다. 사회과학은 자본주의의 작동 메커니즘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 토대를 제공했다. 

















경제학은 점차 추상적인 ‘순수’ 경제이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정치로부터 더욱 확실하게 단절되면서, 수학 특히, 미분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1872년에 프랑스의 경제학자 레옹 발라는 미분 방정식을 이용하여 경제학을 최초로 수학화한 인물이다. 레옹 발라는 경제 시스템의 균형점과 자연에서의 균형점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자연계를 보면 작용하는 모든 힘이 서로 상쇄돼 시스템이 균형 상태에 놓일 때, 비로소 균형이 이루어진다. 한 행성이 궤도에서 별 주위를 돌 때 행성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별의 중력과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는 원심력이 서로 만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레옹 발라가 경제학에 수학을 끌어드린 이유는 경제 시스템, 특히 가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기에 예측을 위한 안정적인 균형점만을 고려한 것이다. 

















경제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돌아보면, 짚어봐야 할 세 가지 문제점을 알 수 있다. (1) 현대 많은 경제학자는 경제학과 도덕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방식이고, 경제학은 세상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 (2)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도덕 관계, 문명사,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문제와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정치가가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규정했다. 하지만, 고도화된 현대 시기에는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하는가? (3) 경제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회과학자는 인간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고 법칙까진 아닐지라도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모종의 규칙을 따른다는 확신한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사회’과학‘인가?

















먼저, (1)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외부효과’(externalities) 이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리 기업 이득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총체적 ‘피해’에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이다. 외부효과란 개인이나 기업의 경제 활동이 사회에 피해를 주지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비용이나 가격이 너무 낮게 책정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단지 버스 이용보다 자가용 이용이 더 싸기에, 자가용 이용을 더 선호한다고 해 보자. 그런데 자가용 이용 비용이 덜 드는 이유는 그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교통이 더 혼잡해지고 공기가 오염되고 소음이 발생하고 지구 자원이 고갈되는 비용 전부를 내가 다 물어야 한다면, 버스 타는 일보다 자가용 모는 쪽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비싸다. 유럽을 예로 든다면, 이동 수단의 80%를 담당하는 승용차는 환경에 특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 혼자 승용차를 탈 때 1킬로미터당 배출되는 탄소 양이 장거리 비행 시 배출되는 탄소 양과 동일하다. 그래서 실제로 승용차를 모는 이들에게 차 소유에 따르는 비용 전체를 물린다면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자가용을 몰 수 없다. 여기서 소음이나 교통 혼잡, 대기 오염 등을 ‘외부효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산과 소비는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항상 외부효과를 낳는다. 그렇지만 내가 차를 몰지 버스를 탈지 결정하는 데 이러한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부효과를 차단하고자 오염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일단 오염 비용을 물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오염물질을 방출할 수 있는 특권(예컨대 탄소배출권)이 생긴다. 지불이란 사람들에게 일체의 책임을 면제해 준다. 탄소배출권은 환경오염에 도덕적 허가증이나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이렇게 확립된 시장에서 자신 특권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외부효과를 더 많이 늘릴 것이다. 즉 개인이나 기업은 자신이 사회에 전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용을 전가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특권화된 ‘외부효과’는 자유 시장 경제에서 자기 이익을 쫓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것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보편적인 공공의 불행을 극대화하는 데 소임을 다하도록 보장해준다. 

 















사람들은 탄소배출권을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대신 ‘지속가능경영’이나 ‘ESG경영’이란 이름 아래 당연한 제도로 받아들인다. 기껏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벌이는 “사다리 걷어차기”라고만 볼 뿐이다. 철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사회』에서 ‘지속가능’이란 단어는 ”사회의 이익이라는 환상 뒤에 자본 이익을 은폐하고 희생자들 저항 운동을 마비시키는 일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진정한 사고(思考)의 독(毒)이다. 이는 대단한 모순어법이다." 사실 사람들이 탄소배출권을 나쁘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려면 권한 기반까지 양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업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부수적인 환경오염을 참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기반 산업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귀중한 의약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환경오염은 참을 수 있지만, 고작 번지점프 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에 우리 희생을 양도하여 낭비시킬 수 없다. 탄소배출권 거래를 사고 팔 수 없는 정당한 이유는 번지점프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가 귀중한 의약품을 생산하는 업체보다 탄소 배출을 단지 더 강렬하게 욕구한다고 해서 법이나 도덕적으로 더 강력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욕구(desire)한다고 항상 요구(claim)할 수는 없다. 

 
















정치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정부는 대기에 과도한 오염물질을 뿜어대는 기업을 위해 오염권 거래제도를 도입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도덕적 오명을 씌우고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늘 그렇듯 도덕적 논리가 없이는 시장논리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도 이렇게 말한다. “도덕은 거래나 장사 대상이 될 수 없다. 도덕을 행하려면 자신이 직접 책임과 리스크를 지고 현실에 뛰어들어야 한다.” 

















두 번째, (2)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기 보다는 시장을 그냥 놔두는 일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이다. 시장에서 정부는 전혀 필요 없다. 시장경제는 소위 자연 상태에서 완벽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가 개인 이익 추구 원리와 더불어 수요·공급의 경제법칙이 만유인력의 운동 법칙처럼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들이 생겨났다. 자유방임 경제 철학은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뿐이므로 그대로 놔두라는 권고다. 경제학 법칙들이 – 자연의 법칙과 똑같이 – 신에 의해 확립된 이상 그 법칙들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했기에,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방임주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신이 경제학 법칙을 자연 법칙과 똑같이 확립했다고 생각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18세기 사상가들은 신이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고, 신의 계획을 뉴턴이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해냈다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찮은 인간이 무한하게 넓은 신의 마음, 특히 선한 신이 세상에 악(惡)을 왜 창조했는지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예전 믿음은 당시 새로운 생각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뉴턴의 발견 그리고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식으로 증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들 추론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 논리, 수학 등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이다.



당시 사상가 대다수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은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 최상이라면 이 세계를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의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임이 틀림없다.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였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학 철학이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유방임주의 사상은 청교도주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중세와 근대와 달리 신학적 기반을 떠난 현대 사상에서 자유방임과 같은 자연 상태 이론은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불완전 이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시장에서는 개인들의 권력이 평등한 것도 아니고 개인만 자원 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더 큰 자원 배분 권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집단을 만든다. 그 결과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이러한 사람들과 집단들에 의해 권위적으로 배분된다. 토지와 화폐, 노동과 같은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항상 정치적으로 배분되고 그것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이 배제된 순수한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불가능하며, 시장에만 맡기는 그 순간에도 시장 내부에서 정치와 권력은 작동한다. 그러므로 경제에 정치와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이란 개념을 항상 자신 논리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 경제는 여러 시장이 통합되어 균형을 찾아가는 체제가 아닌, 항상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다. ‘묻어 들어 있음’이라는 용어는 자유주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가 정치와 종교, 사회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반면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기 조정 시장’ 체제는 거꾸로 사회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경제학자 랭카스터와 립시는 ‘차선(次善)’이론으로 자유방임 이론이 틀렸다는 점을 짚어낸다. 차선이론은 비록 자유방임 이론이 사실이라 해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차선’인 시장, 즉 완전경쟁 시장에 ‘거의 근접하는’ 시장이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은 시장, 혹은 아예 완전히 비경쟁적인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자유방임의 근본적인 전제는 만약 모형 전제가 현실과 닮았다면 모형 결과 또한 현실과 근접하리라는 추론이다. 유감스럽게도 자유방임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바로 그런 오류에 기대어 논의를 펼쳐왔다. 



완전경쟁 시장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시장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완전경쟁시장이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문제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장을 ‘가능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 결과는 이상에 확실히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랭카스터와 립시가 밝혀낸 오류였다. 경쟁과 관련한 모형의 현실성은 효율에 관한 현실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현실이 완전경쟁의 이상과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경쟁에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어떤 다른 차선책에서 얻어지는 결과보다 못하리라는 것이 다. 완전경쟁 요건을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 전부 충족시키지 않는 한 – 완전효율이라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진다.



특히, 앞에서 언급된 부정적 외부효과(공해, 소음, 악취 등)가 발생하는 부문에서 재화 가격은 모형이 예측하는 가격과 어긋나게 된다.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말한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상적으로 가격이 매겨지지 않더라도 나머지 부문을 전부 경쟁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가격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선이론이 바로 그러한 정책 해법으로는 효율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가격이 잘못됐으면 나머지 가격이 올라도 소용없다. 달리 표현하면, 다수 가격이 왜곡되어 있는 경제에서 하나만 시정하면 상황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차선이론이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주는 것은, 일반균형 모형에서 유용한 정책안을 끌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단순한 도구는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알려주지 않는다. 각각의 상황은 – 각 부문, 각 시장, 각 정책안은 - 그 각각의 장단점을 따져 평가해야 한다. 차선이론이 가져온 가장 주된 효과는 경제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겸손해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립시는 설명했다. 자선이론은 극도로 이상화된 하나의 모형을 근거로 시장의 효율성에 관해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끝으로, (3) 경제학은 사회‘과학’인가?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이 바로 사회학”이라고 규정지었다. 베버는 “행위의 규칙성 발견이야말로 사회과학이 천착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굳게 믿었다. 즉 그가 지향하는 사회학 목적지는 사회현상의 인과적 설명을 포함하는 해석적 이해였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속변수와 독립변수를 구별하며, 어떻게 하면 독립변수를 분리해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사회과학은 환원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환원주란 현실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보았을 때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모든 변수 값을 결정할 어떤 변수를 방정식 내에서 찾는 것이며, 인과관계 사슬에서 빼냈을 때 결과를 바꿀 요소를 찾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종속변수로 발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현상을 독립변수로 설명하는 일이다. 환원주의에서는 중요도 순으로 원인 등급을 매기는 것이 필수다. 환원주의는 독립변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
















사회과학자들은 환원주의 관점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과거를 일반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미래가 가진 문제는 과거에 비해 알려진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라는 특이점의 저편에 놓여 있기에 우리가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어떤 연속성이 미래로 확장되어 나갈 것이라는 점과, 거기에서 또 우연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물론 어떤 연속성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연에 영향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의식 자체가 우연성이 될 경우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 사회과학은 이런 문제를 너무나 자주 부정해왔다. 일반적인 경우 사회과학자들은 인간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은 찾아낼 수 있고 법칙까진 아닐지라도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모종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표준화된 사회과학 모델’은 사람들이 복잡한 여러 이유 때문에 특정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한두 가지 기본적인 ‘원인’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 행동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면서 정적인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또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상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 실제 경제와 정치 역사는 정확하기보다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선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회귀분석 등 외삽(外揷, extrapolation: 데이터가 없는 부분을 가깝다고 생각하는 데이터로 미루어 추정하는 방법)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거나(인구 증가, 전염병 확산), 구조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는 대상을 예측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1849년 마차가 증가하기 시작한 런던에서 예측한 자료에는 1940년대가 되면 런던 모든 거리에 말똥이 거의 3미터 높이로 쌓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1908년 포드 T-모델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구조적인 변혁이 있었고 말똥이 쌓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는 예측을 위한 변수가 많을수록 정확도가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측 모델에 변수가 추가되더라도 잘못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11년 강도 9.1 규모의 지진이 일본 후쿠시마를 강타한 원전붕괴 사고다. 처음에 일본은 몇 가지 변수로 후쿠시마에 진도 9.1 지진이 약 300년마다 한번 발생한다고 예측했다. 이런 발생 빈도가 적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전문가들은 일본 안전 성향과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일본이 이 정도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대비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은 후쿠시마 원자로의 지정학적 위치와 같은 몇 가지 변수를 추가했다. 이럴 경우 지진 발생 가능성은 1만3천 년에 한 번 발생하는 것으로 예측이 변경되어 일본은 대비를 충분하게 하지 않았다. 예측 변수가 많아지더라도 정확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황이나 사건의 전체 변수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게 된 추가적인 변수가 다른 변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변수를 지나치게 많이 반영하는 과잉적합(overfiting) 예측 모델은 신호(signal)가 아닌 알려지지 않은 소음(noise)에 더 적합하게 적용되어 결과가 매우 잘못될 수 있다. 

 















경제학은 부와 기회, 사회 복지 분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심오한 도덕적 문제를 초래한다. 따라서 경제 분석에는 반드시 윤리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경제학자는 빈곤이나 불평등, 환경, 사회 정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 더욱이 경제정책 실행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과정과 협상, 타협이 수반된다. 따라서 경제학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끝으로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은 인간 행동과 관련된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스템을 다루기에 정밀하게 모델링하거나 예측하기가 어렵다. 경제 현상은 문화적 규범이나 역사적 맥락, 제도적 장치와 같은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기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률이나 이론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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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인간만큼

노예 같은 인간은 없다.

- 괴테







소설가 포스터는 『소설의 이론』에서 “플롯(plot)이란 사건이 전개되거나 반전될 때 사건 간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연관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단순한 정보 나열과 플롯 문장을 대비하여 예시로 들었다.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 이 문장에는 단지 정보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다음 문장과 비교해 보자. ‘왕이 죽었다. 그러자 왕비가 슬픔에 빠져 죽었다.’ 두 번째 문장에는 플롯이 반영되었다. 플롯 문장에는 사건들의 필연적 연관 관계인 ‘그러자’ ‘슬픔에 빠져’가 추가되어 내용 범위가 좁혀졌다. 곧, 왕비가 죽은 이유가 설명되어 첫 번째 문장에 비해 다른 가능성이 배제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정보만 나열된 문장을 접했을지라도, 다른 가능성이 배제된 두 번째 문장으로 파악하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두 가지 정보가 어떤 의미를 가진 한 가지 정보로 통합되면, 플롯은 기억하기도 쉽고 남에게 전달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질수록 더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 상상 속에서 우연이라고 하면 무질서한 영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플롯을 들은 사람은 다른 가능성, 예컨대 ‘왕비는 정말 왕이 죽은 사실을 슬퍼했을까?’라는 의심조차 안 하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플롯은 마치 진실인 양 우리 마음과 신념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플롯으로 정보가 전달되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또 다른 중요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사건들의 필연적 연관 관계로 내용의 범위를 좁히는 우리 습성을 검증하기 위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린다 문제’라고 이름붙이고 다음과 같이 실험했다. 먼저 린다라는 사람의 특징을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린다는 31세의 독신 여성이며, 머리가 매우 좋고 본인 생각을 뚜렷하게 이야기하는 성격이다. 그녀는 철학을 전공했으며, 사회정의와 인종차별에 깊이 관여했고, 반핵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설명한 후 린다가 (1) '페미니스트'일 확률이나 (2) '은행원'일 확률, (3) '은행원이면서 페미니스트'일 확률을 예측해보라고 했다. 실험 결과는 응답자 85%가 (1) ‘페미니스트’ > (3) ‘은행원이면서 페미니스트’ > (2) ‘은행원’ 순서로 린다 직업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응답자들의 예측 결과는 합리적이지 않다. 린다가 '은행원이면서 페미니스트'일 확률은 '페미니스트'이거나 '은행원'일 확률의 교집합에 속하기에 ‘페미니스트’나 ‘은행원’ 확률보다 더 클 수 없기 때문이다. 

 
















카너먼은 린다 문제와 비슷한 또 다른 실험도 했다. 실험대상자들에게 내년에 두 가지 재난이 각각 일어날 확률을 예측해보라고 했다. 먼저, 첫 번째 재난은 (1) 내년에 북미 어딘가에서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서 1,000명 이상이 익사한다. 두 번째 재난은, (2) 내년에 캘리포니아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 여파로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 1,000명 이상이 익사한다. 실험 결과는 (2)가 일어날 확률이 (1)보다 높다고 판단한 사람이 더 많았다. (2)는 ‘원인’을 설명하며, 캘리포니아라는 특정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1)은 단순하게 사실만 나열했으므로 (2)를 더 설득력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린다 문제’처럼 (2)는 조건부 확률이기에 (1)보다 가능성이 클 수 없다. 우리는 사실의 ‘이유’나 ‘원인’이 부가되면, 즉 플롯을 접하면 더 그럴듯하게 느끼며, 사실에 더 가깝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플롯 짓기 오류는 인간이 날것의 진실보다 압축된 이야기를 편애하는 성향과 연관 있다. 이 오류는 단순한 사실도 억지로 설명하려드는 인간 한계를 보여준다. 이유를 덧붙여 설명하면 납득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 잘못된 이해일 수 있다. 

















카너먼 실험은 우리가 쉽게 편견에 빠질 수 있기에 자신 판단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플롯 짓기를 통해 문제 범위를 특정 인과관계로 축소시켜 세상을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처럼 만든다. 이처럼 사실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 욕구는 주변 환경을 이해함으로써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은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유 대부분은 주변 환경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물리학자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우리가 자신 삶을 통제하거나 적어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자신 상황을 통제하길 원한다. 사람들은 스카치위스키 반병을 마시고도 자동차를 운전하지만, 자신이 탄 비행기가 조금만 흔들려도 기절한다.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은 우리 자아상과 자존심에 중요하다. 연구에 따르면, 절망감과 통제력 상실이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질병과도 관련 있다. 모든 통제권을 박탈당한 실험쥐들은 발버둥을 포기하고 곧바로 죽는다. 병원의 중요한 검사에서 환자에게 검사 순서를 결정하는 무의미한 권한을 주는 것마저도 환자 불안 수준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우리가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하는 성향 때문이다. 사건이 우연하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 반면 우리가 사건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건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우연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기업들은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하는 우리 성향을 이용하여 마케팅을 한다. 예컨대, ‘7명의 리더가 전하는 행복의 조건’이나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위한 6가지 법칙’과 같은 자기계발서가 끝없이 나온다. 우리 삶이 문제없이 잘 흘러가려면 반드시 정해진 필연의 길이 있으며, 이를 따라가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사업가의 숫자가 많기에 그중 한 사람이 우연히 탁월한 실적을 올릴 가능성도 커진다. 우리는 전체 사업가의 숫자를 셀 수 없을뿐더러 아예 볼 수도 없다. 우리는 오로지 승자만 볼 수 있다.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월등하게 노력했음에도 실패한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승자만 보게 되며, 그래서 우연을 잘못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인가? 우리는 모든 것이 본인에게 달렸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이 더 똑똑하거나 더 부유하거나 더 날씬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 운명의 통제권을 갖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대부분이 자기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 성공과 자식 성공도 마찬가지다.

















역사책을 보면 분명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기에, 세상은 우연이 아닌 필연의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항변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설명할 때, 일본 정부가 미국과의 모험적 전쟁을 선택한 이유를 미국의 대일 석유금수조치로 설명한다. 석유금수조치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접수한 데 따른 대응조치였음을 설명한다. 물론 일본의 인도차이나 접수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패배한 덕분으로 설명하고, 아울러 일본의 중국 대륙 정복 좌절에 따른 대안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1930년대에 일어난 권위주의와 군국주의를 설명한다. 이 시기 권위주의와 군국주의는 대공황과 관련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가 불공평했다는 당시 인식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은 항상 필연으로 보이는 이유는, 수많은 우연 가운데 실현된 사건 하나를 보고 이를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계된 수백만 개, 심지어 수십 억 개 사실들이 쏟아진다. 그렇지만 일이 터지고 나면 우리는 그 가운데 단 몇 개 사실만을 가지고 사건을 이해해 버린다. 한 분야의 사건은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수 있는 우연의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일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연을 우연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기껏해야 입으로만 우연을 인정할 뿐, 속으로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을 다진다. 기본적으로 우리 뇌는 ‘우연’이라는 설명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약한 신호만 보아도 거기서 패턴과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그리하여 우연한 만남을 인연으로 착각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자신들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중한 만남에 대해서는 우연을 부정하고 필연으로 가장(假裝)하려 한다. 반면에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면 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시험 당일 심한 배탈이 나서 시험을 망쳤다면, “재수가 나빠서 시험을 망쳤어”라고 말하지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소망하는 일이 생겼을 때만 필연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진 존재다[불교 용어로 말하면 연기(緣起)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힘에 늘 휘둘리며 살고 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다른 것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 힘만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는 속박을 받고, 조건 지어져 있다. 이런 관점은 개인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연에 의해 생기는 일은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인간은 이 경우에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내리는 결정 중 상당수는 의식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자동적 과정의 결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부분이 대부분 사람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를 차지하는 비율은 본성(nature)+양육(nurture)=100퍼센트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형성되며,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인생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신념과 가치관, 성향을 근거로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기본적으로 우리 결정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지금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울지 모르지만, 다른 방법은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공정하다고 생각해서 부의 재분배를 위한 조세제도를 지지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공정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분명히 우리는 이 문제를 충분히 숙고한 뒤에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타고난 성향, 우리가 습득한 정보와 사고의 결합이다. 본성과 양육의 결합인 것이다. 다른 것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스스로 충분히 자각할 만큼 나이가 들면, 인격과 인생관을 결정하는 핵심요인은 이미 결정이 끝나 있다. 

















문화역사학자 잭슨 리어스는 미국 문화를 우연의 윤리의식과, 통제와 책임 윤리의식이 벌이는 각축장으로 보았다. 우연의 윤리는 우리 삶이 인간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개인 통제력에 따른 보상을 주지는 않기에, 인생에는 우연의 인정과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구약성서 <전도서>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반면 통제와 책임 윤리는 인간 선택을 중심에 놓는다. 리어스는  자기통제 윤리가 복음주의 개신교 내부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계열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는 성공을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통제와 책임 윤리의 핵심이다. 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소득과 재산, 권력과 명예)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책임자이며 통제 불능의 힘에 몰려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여기도록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삶에 대한 통제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최고 자리에 올라앉은 사람과 바닥에 떨어진 사람은 모두 다 그럴 만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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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5-17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수많은 필요조건 중 임의의 판단에 따라 선별된 소수의 요인들로 그 사건을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건이 상황과 선택의 결과라고 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불변의 법칙을 통해 확정적인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보다 다는 결론에 가깝게 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나마 최선인 것 같네요...

북다이제스터 2023-05-17 19:01   좋아요 1 | URL
저는 학교 때 그리고 회사에서 상관관계 분석이나 인과관계 분석, 다변량 분석까지 배우고 활용히면서 확률적 ‘필연’을 믿었지만,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차피 선별된 변수조차 우연의 세계에서 누락을 배제한 아주 소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은 제 공부가 좀 부족하여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호시우행 2023-05-17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진리!!

북다이제스터 2023-05-18 18:00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8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라는 책도 추가하고 싶네요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5-18 17:58   좋아요 2 | URL
맨 밑에 있는 책이 공정하다는 착각 입니다. 근래 표지가 바뀌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8 18:20   좋아요 0 | URL
앗! ㅎㅎㅎ 역시 북다이제스터님bb 영알못이라 마지막 책이 무슨 책인가 했습니다ㅎ

유전과 양육, 자유의지와 선택. 참 흥미로운 주제인 거 같습니다. 이에 관련된 재밌는 책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ㅎ?

<자유의지>라는 책은 품절되었네요.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5-18 18:30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주제는 아마도 <운명의 과학>에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
근데 내용을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추천드립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8 18:44   좋아요 1 | URL
<운명의 과학> 재밌을 거 같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 하이젠베르크







‘진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로 답한다면, 그 믿음은 회의주의(상대주의)다. 인간 한계로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회의주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절대주의(객관주의)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회의주의자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다. 그는 호모 멘수라(homo mensura),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회의주의를 명쾌하게 정의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유일무이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며, 특정 조건에서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진리만 있다고 말했다. 상반되는 주장이라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시기에  모두 똑같이 진실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진리와 선, 아름다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모든 것의 기준이나 척도는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 민회에서 자신 회의론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많은 것이 우리 인식을 혼란하게 한다. 대상은 모호하고 우리 인생은 너무 짧다.” 아테네 민회는 신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부정적 견해에 당황해하며, 그를 추방하고 모든 아테네인에게 그의 책을 불태워 버릴 것을 명령했다. 

















과학 이외에 다른 분야라면 시대나 문화 변천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과학은 회의주의(상대주의)를 거부한다. 과학은 객관적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탐구방법과 증거에 기초한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같은 결과가 반복해서 나오고 방법상 어떠한 오류도 없다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는다. 이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과학에서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마다 서로 달라 보였다. 고전역학에서 뉴턴은 중력을 ‘서로 당김[만유인력]’이라고 보았고, 근대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같은 중력을 ‘공간의 휘어짐’이라고 보았다. 과학자는 외부 대상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지식과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가설, 곧 과학자의 직관과 마음에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과학자들 마음을 살펴보는 것으로 자연법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정리하고 조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눈이 아니라 뇌가 물체를 인식한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형식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통해 뇌에 들어온 신호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때론 무시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기에 간혹 착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 말을 인용하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 형태의 법칙이 실제 존재하기에 자연에 객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 변수에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행위는 항상 기존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이론 부가’(theory-burdened)적이다. 결국 우리 지식이나 경험은 그 지식이나 경험이 예상되는 기대 범위 내에서 관찰자에게 인식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된다. 이것은 구조, 즉 게슈탈트가 모든 인식과 모든 행동을 조절한다는 의미다. 구조는 모든 인간 활동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견해를 제시한다. 구조는 가치를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도덕과 윤리, 목표, 목적을 결정한다. 따라서 ‘과학이 찾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진리는 현대 구조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답변밖에는 구할 수 없다.



구조는 연구 과정과 절차를 제공한다. 연구자들은 증거를 수집하지만, 증거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는 판단은 이미 구조에 의해 부여된 가치들에 좌우된다. 사건과 관계없다고 여겨지는 어떤 데이터도 무시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무엇보다도 대상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관한 학문이 아니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편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에 관한 모든 관찰은 이론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 임의적이기에, 자연에 관한 특정 사실을 예상하는 체계적인 도구를 이용해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이 없다면, 심지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에조차 답할 수가 없다. 미지 세계는 구조 용어로 먼저 정의되어야만 조사가 가능하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과학은 오직 동시대 용어로 정의되고 동시대 도구로 연구된 동시대 문제에만 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인위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시기의 모든 견해는 마찬가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절대적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이 변하면 우주도 변한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물리학자이자 심리학자, 생리학자, 역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는 어떠한 형태의 절대주의도 반대했다. 마흐는 모든 이론과 법칙이 현상을 묘사하고 예측하기 위해 고안된 계산상 장치에 불과하다는 조지 버클리의 자연에 대한 도구주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론과 법칙은 실재를 설명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특정한 현상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공간과 시간 결정은 다른 현상을 결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별 위치를 시간 견지에서 정의 내리는데, 그것은 실제로는 지구 위치에서 본 견지에서다. 공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현상과 견주어진 결정에 비추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으로부터 위치를 인식한다. 질량과 속도, 그에 따르는 힘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마주치는 것, 우리가 받는 힘 모두 상대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또는 코페르니쿠스 설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둘 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마흐에게 크게 영향을 받고 상대성원리를 내놓았다. 더욱이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듯이 실재를 묘사할 때는 언제나 근원적이고도 불확실성이 동반되고 관찰자는 관찰하는 동안 그 현상을 변하게 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진리는 영원하지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글로 썼건 또박또박 명시했건 냉철한 시간에 분별 있는 인간들이 얻어낸 것일지라도 뭐든지 얄팍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똑같이 건전하고 똑같이 이성적인 다른 사람들이 논박하고 나서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런 것은 실재에 참된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근대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우리가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결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은 무뢰한이거나 바보이다. 바보라 함은, 우리 인간이 감각 지각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궁극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무뢰한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 한계를 알면서 자신의 그릇된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 정신은 오히려 일종의 신체 반응으로, 이성은 개인 생존과 욕망 실현을 위해 필요한 분석적, 계산적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률 또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묵계 산물로 인간 본성 산물이지 객관적 진리와 무관하다. 근대 유럽철학은 흄에 이르러 비로소 진리라는 몽상과 이 몽상에 바탕을 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불완전한 이성 한계를 자각해야 한다. 이성 한계는 경험이다.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면 필요 없는 사변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독단과 몽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흄 철학의 기초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을 논거로 삼을 수도 없다. 경험을 논거로 삼을 수 없는 이유는 경험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은 독단에 대해 비판하고, 상식에 맹종하는 일상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상식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흄에 따르면, 나의 손가락 생채기보다 전 세계 파멸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며, 낯선 사람 편의를 위해 나 자신 파산을 선택하더라도 이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다. 즉 이성은 진리를 인식하고 자신 자유의지에 따라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의 실현을 위해 이후에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은 자신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진리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주장 자체가 그러한 진리를 인정한 것이기에 자기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회의주의자들은 종종 웃음거리가 된다.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다”(아낙사르코스)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낙사르코스 자신도 환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누군가가 “모든 진리 주장은 알고 보면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이 명제 자체도 그 사람의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자기지시’(self-reference)의 모순은 흔한 일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이해의 주체인 ‘내’ 자신이 될 때는 필연적으로 풀기 어려운 자기지시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깍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만의 머리를 깍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같은 문제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자기지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보여준다. 이처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철학자 섹시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가 함축하는 이런 자기지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좀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켰다. 엠피리쿠스는 진정한 회의주의자라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라는 식의 모순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회의주의자는 판단을 유보할 뿐이다. 회의주의 목적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독단주의를 치유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회의주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된 것들과 생각된 것들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대상과 생각이 팽팽히 맞서기에, 우리는 판단중지(epoche)에 이르게 되며, 그로써 평온함(ataraxia)에 도달하게 된다.” 회의주의는 일종의 치유다. 독단주의자를 치유함으로써 독단이 가져올 문제점을 풀고자 하는 것이다. 회의주의 목적은 독단주의자들, 즉 확고한 의견을 가진 자들의 자만과 경솔을 치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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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화는 

헤겔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방향도, 

어떠한 최종단계도, 

어떠한 완성도 있을 수 없는 

맹목적인 누적적 인과관계의 체계다.” 

- 쇼스타인 베블런







인간이 진보를 이룩해 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중단되지 않고 멈추지 말아야 할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이 시대에 진정한 종교와도 같은 힘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가난했던 옛날을 경멸하고 비웃는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고대 로마의 어떤 황제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진보는 나날이 발전하는 새로운 과학과 기계문명의 기적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성취한 수십 년을 앞으로 더 나은 진보와 발전의 예비 단계로 여긴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도 진보라는 개념을 믿었다. “세상은 점점 나이를 먹어가므로 지난 시대는 언제나 고대다. 지금 우리 시대도 지나고 나면 곧 고대가 된다.” 그는 어른이 아이보다 더 지혜롭듯이 후세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고대 문명은 주로 정적이거나 순환적인 우주관을 믿었다. 초기 히브리인들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성경 <전도서>를 보면 그들의 순환관을 알 수 있다. “우주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영원히 떠도는 하나의 기계다. 일출과 일몰, 탄생과 죽음은 단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순환일 뿐이다. 그리고 ‘태양 아래에서 새 것이란 없다.”(<전도서> 1:9)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인들도 문명이 황금시대를 지나면 몰락한다는 순환론을 믿었다. 군주정은 참주정을 낳고, 참주정은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무정부주의를 거쳐 다시 군주정으로 돌아간다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름지기 ‘사회적 생명’은 순환적인데도 사람들이 그걸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사이클 국면이 인간 수명보다 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럽 중세 사상가들에게도 완전한 지식은 과거에 속했다. 최초 인간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담의 지혜는 이브와 함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후 점차 잊혀졌다. 따라서 중세 사상가들은 진보에 대한 의식이 없었으며, 지식이란 과거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찾아내어 복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앞선 시기 사상가일수록 아담과 더 가깝기에 아담 지혜를 더 많이 기억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사상가들은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과거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과거 중국인들도 사람이 희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고대에 있었던 황금시대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자신이 당시 지혜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고 믿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 사상이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옳았다. 공자는 깊은 향수에 잠겨 주나라 초기시대, 그보다 오래된 은과 하의 시대, 전설적인 삼황오제 시대를 되돌아보았다. 과거를 바라보는 그런 눈으로, 공자는 당대 핵심문제와 씨름했다. 묵자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익을 안겨 줄 도구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국가는 더욱더 무질서해진다. 교활하고 빈틈없는 행동이 많아질수록 이상한 간계도 많아진다. 법을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도둑과 강도도 많아진다.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면 거친 음식도 맛나게 생각하고, 검소한 옷도 아름답게, 누추한 처소도 안식처로, 평범한 일도 즐거움의 원천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적 사고로 역사가 진보한다는 진보 사상이 형성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각 시대가 새로운 지식을 첨가함으로써 인간 지식과 경험이 더 풍부해진다고 확신했다. 그들에게 역사 진행 속 지식과 경험 축적은 진보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이성에 근거해서 고대시기에 대한 숭배와 교회의 도그마적 신앙에서 벗어나 진보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역사에는 우주적 목적이 있으며, 인간은 자연법에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목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뉴턴이 행성 법칙을 밝힌 것처럼 역사와 진보의 자연법도 원칙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내부에는 언제나 이웃 이익을 돌보는 사회적 존재와 자기 자신만 돌보고 성공과 독립을 실현하려는 이기적 존재의 갈등이 있다. 이 항구적인 갈등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사회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에서 모두 진보를 이끌어낸다. 이 창조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려면 강력한 국가로 사회생활을 규제하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 허용해 개성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칸트는 진보의 도덕적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 목적은 최대 다수가 자유로이 자신 개성을 구현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데 있다.

















초기 사회학자인 생시몽도 진보 이론을 내세웠다. 당시 신흥 사회과학이었던 사회학에서는 진보의 개념이 주요한 초점이었다. 그는 진보를 단지 이론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 탄생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일환이었다.) 다음은 잘 알려진 그의 글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황금시대를 인류의 요람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찾은 것은 철의 시대였다. 황금시대는 우리 과거에 있지 않고 우리 미래에 있다. 사회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 곧 황금시대다.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장차 우리 후손들은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그 길을 닦는 게 우리 임무다.” 프랑스 혁명의 폭력과 비합리성에 환멸을 느낀 생시몽은 산업화만이 유일한 전진의 길이라는 믿음에서 기계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특징은 자연과학의 방법과 방식을 처음으로 인간에게 적용하려 한 데 있었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은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다. 그 반면에 심리학이나 사회학, 경제학 등 인문과학은 대폭적인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예측의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사회과학자들은 지리적 혹은 문화적 성격을 가졌던 ‘지역’에 관한 연구를 법칙정립적 학문들과 융화시키기 위해 천재적인 지적 대안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발전’(development) 개념이었다. 독립적인 단위의 사회가 모두 동일한 기본방식으로 하지만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한다는 가정이었다. 사실 이 요술에는 실용적인 측면이 있었다. ‘가장 발전한’ 국가는 자신을 ‘덜 발전한’ 국가들에게 모델로서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였고, 덜 발전한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 모델을 모방하도록 부추겼고, 그 무지개 끝에는 보다 높은 수준과 보다 자유로운 정부구조(정치적 발전)가 놓여 있다는 약속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연 경제 성장률 2퍼센트나 3퍼센트는 낮아 보이지만, 분석에 따르면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사회의 붕괴와 종말은 2030년부터 2070년 사이로 잡고 있다. 부의 축적이라는 꿈은 그때가 되면 악몽으로 뒤바뀔 것이다. 양적인 망상은 ‘복리(複利)의 위압적인 효력’ 하에 우리를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일인당 국민 총생산이 연 3.5퍼센트 증대하면 경제 규모는 100년 후 31배가 된다. 중국의 현재 경제 성장률(연 10퍼센트)를 가정할 경우 경제 규모는 7년 후 2배가 되고, 100년 후에는 736배가 될 것이다. 중국 경제 성장은 또 다른 의미도 갖고 있다. 중국 환경부에 따르면 중국 경제 성장이 유발하는 생태계 파괴의 연간 비용은 그 국내 총생산의 10퍼센트 또는 12퍼센트에 해당한다. 즉 국가 경제 성장률과 똑같은 수준이다. 시간 경과에 따라 경제 성장이 만족스러운 삶을 자동으로 만들어낸다면 지금쯤 우리는 진정한 낙원 속에서 생활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눈앞에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이 아찔할 정도의 경제 성장은 생태계 파괴의 증가를 의미한다. 국민 총생산이 마치 ‘국민 삶의 질의 총계’ ‘국민 쾌락의 총계’ ‘국민 행복도의 총계’ 혹은 ‘국민 완성도의 총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 총생산 = 국민 오염 생산의 총계’라는 방정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일부 ‘진보된’ 지역에서조차 대부분 사람이 가졌던 최고 희망은 그저 육체를 보존하고,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살고, 머리에 지붕이 있는 집이 있고, 충분한 옷을 가지기에 충분할 정도만큼 버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주장은 ‘발전된’ 나라에서도 그다지 동의를 얻지 못했다. 후진지역에서도 진보라는 개념은 환영받지 못한 개념이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후진지역 사람들에게 진보란 침략이나 기껏해야 착취, 억압, 고향으로부터의 박탈, 떠돌이 생활 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란 특히 도시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외부에서 수입했던 까닭에, 뭔가 개선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옛날의 정착된 방식을 방해하는 그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거추장스러움을 가져왔다는 증거는 엄청나게 많다. 새로운 것이 개선을 가져온다는 증거는 확실하지도 않았고 불투명했다. 세계는 진보하지도 않았고, 진보한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이든 옛날의 지혜와 방식이 최고였으며, 진보란 젊은이가 늙은이를 가르칠 수도 있다는 식의 의미를 함의했다. 
















사실 인류는 전진하거나 후퇴할 수 없다. 인류는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합적 실체는 의도나 목적을 지닐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목적론으로 결부시키는 시도를 거부했다. “사람들 편견은 모든 자연물도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하며, 게다가 신이 모든 만물을 어떤 목적에 따라 이끈다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만물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은 자신에게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도 인류 진보는 열정과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학 지식 발전도 이러한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진보를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무정부주의자나 과학기술을 믿는 실증주의자는 윤리와 정치를 과학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기에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이 미래 진보를 가져온다고 믿으며 사회 발전은 누적된다고 믿는다. 즉 하나의 악을 제거하고 나면 그 다음 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이 과정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지만 인간사는 그렇게 누적되지 않는다. 이미 성취한 것이라도 눈 깜박할 사이에 잃어버릴 수 있다. 인간 지식은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결과 인간 문명 수준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든 형태의 야만에 빠질 수 있다. 지식 성장은 인간의 물적 조건을 향상시키지만, 인간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의 야만성 또한 증폭시켰다.” 















문명 수준이 더 높고 진보했다고 믿는 현대인이 윤리 측면에서 원시인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역사학자 윌 듀런트는 설득력있는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한번은 영국인이 ‘원시인’ 사모아인에게 런던 빈민에 관해 이야기 해 주자 그 ‘야만인’은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음식이 없다고요? 친구도 없어요? 살 집이 없다고요? 그 사람이 자란 곳이 어디인데요? 그의 친구가 가진 집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마을 어딘가에 옥수수가 자라는 한 음식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원시인’ 호텐토트족 경우,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모두 똑같아질 때까지 잉여분을 나누는 것이 관례다. 이들은 배고픈 자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받느니 차라리 자기 배가 고프고 마는 편을 택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생각한다. 
















‘진보’라는 목적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설명이 가능한 건 필연이고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우연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것은 역사가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역사에 어떤 법칙이 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내재하는 법칙에 의해 역사 흐름이 필연성을 띠고 발전해간다는 것을 말한다. 근대 역사철학은 그런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이론적 증명이다. 원래 목적론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목적에 비추어 설명하면 결과가 원인이 되는 순환론, 동어반복 성격을 탈피할 수 없다. 현상에서 목적을 빼면 생성만이 남는다. 현상은 목적을 향해 접근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연으로 점철된 변화의 과정이며, 무한한 생성의 흐름이다. 생성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강조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실증주의자들이 그런 상식을 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연속성이란 시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의 흔적을 시간에 남긴다.’ 그런데 실증주의는 시간 차원을 완전히 배제하고 주체가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착각한다.” 
















목적론적 관점(그리스어로 텔로스, 영어로는 끝과 종말을 의미)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기독교들은 역사에 예정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역사가 끝나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역사의 종말을 믿었다. 마르크스와 후쿠야마 같은 사상가들은 기독교의 목적론을 이어받아 '역사의 종말(천년왕국)'이라는 주장의 바탕으로 삼았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순환의 통일성을 거부하도록 일반인을 부추기고 ‘우리’와 ‘그들’의 대립구도로 여론을 몰아간다. 서양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잇따라 쏟아내는 경고의 메아리는 언론과 출판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떠들더니 버나드 바버가 지하드(성전) 대 ‘맥월드’(맥도날드적 세계)의 대결을 외친다. 로버트 카플란은 임박한 ‘무정부’ 상태를 우려하고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논한다. ‘악의 제국’ 소련이 붕괴하자 서양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슬람과 중국을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거론한다. 악이 파괴될 수 있다는 신념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속한 종말론 분파에서는 핵심적인 신념이었다. 이런 천년왕국 신념이 미국 아들 조지 부시 정부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선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역사에 악이 극복될 종착점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를 진보적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했다고 믿어지는 금세기 들어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또 지금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데도, 극심한 빈곤이 퇴치되거나 고통받는 노동자 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빈부 격차는 더 심화되고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물질적 진보라고 하는 추세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의 필수 요소를 기준으로 볼 때, 최하층 상태를 개선해 주지 못한다. 아니 실제로 최하층 상태를 오히려 압박한다. 물질적 진보는 오랫동안 품어온 희망이나 믿음과 달리 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이 향상되었지만, 하층 사람들은 무너지고 있다.



“현실에서 빈곤이 진보와 함께 나타나는 진정한 원인은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지대(地代)를 차지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토지 사유제 때문이다.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증대하는데도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않는 이유는 지대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향상된 생산력은 지대로 흡수되어 버리고 임금과 이자는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생산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생산물인 부(富)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한 대가로 모두 분배된다. 즉 지대, 임금, 이자로 분배된다(부=지대+임금+이자). 이중 “지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부-지대=임금+이자’가 된다. 이처럼 임금과 이자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물 중 지대를 공제하고 난 뒤 잔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다. 지대가 지나치게 오르면 노동과 자본은 적은 대가로 만족하거나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생산 중단은 수요 중단으로 나타나고, 다시 또 다른 부문의 생산을 제약한다. 지대 또는 토지가치의 투기적 상승은 토지 소유자가 노동과 자본을 배척하는 효과를 낸다. 노동자가 물자 부족을 겪으면서도 실업이 발생한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가장 큰 원인은 지대를 전유할 수 있는 토지소유의 불평등 때문이다.” 
















헤겔 역사철학의 가장 중요한 논제는 역사를 자유의식의 진보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세계사란 자유의식에 있어서의 진보 과정이며, 우리는 그 과정의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진보 이념이 근대 역사철학 전체에 대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근대 역사철학 자체는 진보 이념과 더불어 탄생하고 진보 이념과 더불어 소멸할 것이다. 진보나 경제 발전으로 너무나 큰 부가 극소수 사람에게 집중되는 바람에 연간 소득 분배는 엄청나게 불평등해졌다. 자본가들이 그 어마어마한 부의 보유에서 얻는 연간 소득은 너무나 커서, 아무리 낭비적이고 사치스럽게 소비를 하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양의 과잉 소득 –또는 저축 –이 남게 되어, 이들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자본축적에 투자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소득 분배는 너무나 불평등하여 심지어 노동자 소비 지출 모두에다 자본가가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이들이 아무리 사치를 부린다고 해도 상품을 사와서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궁극적 제약 요소가 있기에 그 양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돈을 다 합친다고 해도, 자본가가 강제로 저축하게 되는 양은 여전히 엄청나다. 그리고 만약 이 저축을 모두 생산 설비를 늘리는 데 썼다가는 소비재를 생산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의 성장 속도가 그 수요(이는 노동자 소득과 자본가가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최대 능력으로 제한된다)의 성장 속도를 훌쩍 뛰어넘게 된다. 생산 능력이 소비자 수요보다 빠르게 늘어나면 금방 생산 능력의 과잉 상태(소비자 수요에 비추어)가 나타나며, 따라서 국내에는 이윤이 나올 만한 투자처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해외 투자가 그 유일한 대안이다. 하지만 모든 공업화된 자본주의 나라에서 이와 똑같은 문제가 존재하므로, 그러한 해외 투자는 오직 비자본주의 나라들이 ‘문명화’되고 ‘기독교화’되며 ‘고상해질’ 때만, 즉 그들의 전통적 제도를 강제로 파괴하고 사람들을 시장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아래로 강제로 끌고올 때만 가능하다. 이제 자본은 국내시장을 넘어서는 더 넒은 경제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해외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은 자본의 해외수출에서 상품들을 수출하거나 대부자본(화폐자본)을 수출하는 것보다는 해외에서 철도나 공장을 짓는 직접투자가 훨씬 더 경제영역 확대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해외직접투자는 본국으로부터 화폐자본뿐 아니라 생산재 등 상품들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외직접투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본국 정부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지원이 필수불가결하게 되며, 자본주의 열강 사이에 식민지와 종속국 등 경제영역을 둘러싼 투쟁과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다고 힐퍼딩은 전망한다. 그리고 힐퍼딩은 금융자본의 경제정책인 제국주의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타도를 통해 경쟁을 완전히 지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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