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1953)은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가 쓴 SF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화씨 451도(섭씨 약 233도)는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입니다. 20세기 미국 문학 고전으로 인정받는 『화씨 451』은 장편 영화와 연극, 오페라 같은 여러 매체로 제작되었으며, 영화 <데몰리션 맨>과 <이퀄리브리엄>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화씨 451』은 1984년 미국 SF 문학상인 프로메테우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1881~1958)의 글을 서문 대신 인용하며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들이 가지런히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써라.” 한마디로 주어진 익숙한 길로만 가지 말라는 내용이 『화씨 451』의 주제입니다. 소설은 스스로 선택한 길만이 올바르다고 판단하고, 다르게 생각하거나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 사회를 냉소적으로 비판합니다.



소설은 책 읽기가 금지된 25세기 한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에서 자신 직업에 점차 의문을 제기하는 방화수(fireman) 가이 몬태그의 일상을 따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몬태그는 방화서(放火署)에서 일합니다. 그는 숫자 ‘451’이 크게 쓰인 방화수 헬멧을 쓰고 책을 불태우는 자신 직업에 만족하며, 심지어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신비한 분위기의 소녀 클라리세 매클런을 우연히 만납니다. 소녀는 몬태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몬태그가 방화수임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사람들은 보통 방화수를 무서워하지만, 소녀는 몬태그에게 친근하게 질문합니다. “그동안 태웠던 책 중에서 읽어보신 것은 없나요?” 몬태그는 웃으며 답합니다. “그건 법을 어기는 거지!” 몬태그는 자랑스럽게 방화수 공식 슬로건도 알려줍니다. “월요일에는 밀레이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소녀는 화제를 바꾸어 몬태그가 틀림없이 모를 법한 사실을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옛날에는 방화수라고 하지 않고 소방수라고 했다는 게 정말인가요? 그리고 그때는 불을 지르는 게 아니라 불을 끄는 게 일이었다면서요?” 몬태그는 확신에 차 반박합니다.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 아니죠. 집들은 전부터 항상 화재 예방시설이 되어 있었기에 불에 탈 수가 없죠. 내 말이 맞아요.” 소녀는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예전에는 밤늦도록 집에 전등을 켜놓고 가족들이 서로 대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몬태그에게 묻지만, 그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소녀는 몬태그와 헤어지며 행복하냐고 묻는데, 이 질문이 그를 밤새 사로잡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소녀를 회상하며, 그녀를 만난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합니다. 그녀 모습은 마치 지혜나 깨달음의 여신인 것만 같았습니다. 몬태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문제와 자신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자 점차 그는 사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자신 직업과 사회가 추구하는 잘못된 가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결국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 같은 시대”에 그는 살고 있으며, 사회가 “사람들 취급하는 게 코를 풀고는 휴지를 뭉쳐서 던져 버리는 식”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도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 아래 노예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길 강요받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신분적 ‘모욕’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이 쭈그리고 앉아 주문받고, 백화점 영업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에 직원들이 입구에 늘어서서 ‘어서 오세요, 고객님, 환영합니다’를 30분간 복창하고, 마트에서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여성 계산원이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근무한다.” 사회가 개인을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원자론적 인간으로 여기면, 개인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저 “휴지처럼 취급되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화씨 451』에서 몬태그 아내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은 양 귓구멍에 ‘골무 모양의 조그만 라디오’를 틀어막고 자신만의 세상에 살며,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대화하더라도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밖엔 안 합니다. ‘그런 것들이 뭐는 얼마나 멋있냐’는 둥 그런 얘기뿐입니다. 사람들 기억력도 감퇴합니다. 같이 사는 남편이나 아내를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욱 심각한 일은 ‘귀마개 라디오’를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집 거실 벽면 사방에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드라마를 항상 보며 세상 현실에 눈감고 있습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남들에게 관심을 갖고 시간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며’, ‘수풀 속을 돌아다니면서 새들을 보거나 나비를 채집’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들 앞에 펼쳐진 인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연속극이 실제라고 믿지는 않더라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모습은 정확히 그들이 사회화된 방식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여러 미묘한 방식으로 경험의 범위를 한정 짓는 게 사실입니다. 한 가지 신문만 읽는 사람은 자신이 사는 앎의 영역을 심각하게 제한합니다. 같은 견해를 공유한 이들하고만 정치 토론을 벌이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담을 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려는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면 스스로 구축한 작고 편안한 세계의 벽 너머는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몬태그가 소녀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소녀는 세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세상이 참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건 물론 좋지요. 그렇지만 그저 떼거리로 모여 있기만 하면 뭐해요?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모여 있기만 해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요. 대개는 침묵한 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해요. 이미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죠. 도대체 말도 안 돼요.”



사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볼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비추어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 삶에 구석구석 배어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세상의 관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을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정해진 해답만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핵심이 바뀌고,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우리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부여한 가치는 우리가 아는 것을 기반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이 변하면 세상도 변하며, 모든 것이 함께 바뀌게 됩니다.



몬태그는 점차 자신의 방화수 일에 회의를 느끼며, 과거 역사에 대한 궁금증만 커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책을 숨기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됩니다. 몬태그는 동료들과 함께 1,000년은 더 되었을 오래된 집으로 비상 출동합니다. 현관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든 그들은 한 늙은 여자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노파는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에서 많은 금서(禁書)를 발견합니다. 책들이 몬태그 어깨 위로, 팔 위로, 얼굴 위로 마구 쏟아졌습니다. 몬태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에 떨어진 책 중 한 권을 움켜쥐고 옷 속 겨드랑이 사이에 숨깁니다. 그 와중에 노파는 체포에 저항하며, 책들과 함께 불에 타 자살합니다.



몬태그가 궁금해 하는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요?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1941~ )는 역사란 과거 사실을 단순하게 묘사하거나 현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유용한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짐이 된다면, 역사학자 역할은 분명 이 짐을 덜어내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과거에도 반드시 그러했던 것이 아니므로 미래에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학자의 몫이다.” 역사는 어떤 새로운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고 다수가 그 행동을 반복할 때 비로소 바뀝니다. 역사는 인류가 의미를 찾고, 의미에 살고, 의미 핵심을 후대에 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파가 숨진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몬태그는 다음날 아내에게 어젯밤 일을 이야기합니다. “책 속에는 뭔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들어 있어. 그 여자가 불타는 집 속에서도 빠져나오지 않고 남아 있게 만드는, 분명히 뭐가 있어. 그저 괜히 불타는 집에 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 하지만 그의 아내 답변은 시큰둥합니다. “노파의 정신이 이상한 거예요.” 몬태그는 전날 밤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지경인데, 아내는 별일 아닌 듯 대답합니다. 몬태그는 아내가 답답합니다. 



사실상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편견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공감능력은 내가 상대방 감정 안으로 들어가 그가 느끼는 고통을 나도 느끼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 고정관념을 돌아보고 바꿀 계기가 됩니다. 다른 사람 상황을 단순히 그 사람 탓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와 연관 지어 더 넓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 생각의 폭이 넓혀져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특히 공감능력은 개인적인 능력일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해야 할 중요한 역할입니다. 



노파가 죽은 다음날 몬태그가 오랜 시간 출근하지 않자 방화서 서장이 몬태그 집으로 찾아옵니다. 서장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합니다. “방화수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겪게 되지. 도대체 이 일을 왜 하는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무척이나 회의가 생기지. 우리 직업의 내력도 궁금해지고. 이제 내가 얘기해 주겠네. 20세기가 막 동틀 무렵이었지. 또 라디오, 텔레비전. 그때부터 모든 것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네. 그 때문에 모든 것은 갈수록 단순해졌네. 한때는 책이란 것도 이곳저곳 모든 사람에게 대접받았지. 경제적 부담이 적기도 하고. 세상은 아직 여러모로 여유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갈수록 인구가 늘고, 대중 규모도 커지고, 따라서 대중 매체도 변화하기 시작했네. 인구가 두 배, 세 배, 네 배로 계속 늘어났지. 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책들이 점점 단순하고 말초적으로 일회용 비슷하게 전락하기 시작했네.”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1911~1989)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지적하며, 미디어가 이데올로기 장치로 이용되어 가족이나 학교, 교회와 더불어 국가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란 사람들 믿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을 지칭합니다. 권력 집단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에서 떠도는 지배적인 생각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지배 집단 이해를 감추거나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철도 노사분규 관련 뉴스는 파업하는 노동자들보다는 정부와 기업 편을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응원하기보다 내일 아침 출근길의 불편함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미디어는 개인 생각과 행동을 크게 좌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방화서 서장은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며 말을 이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정치적으로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양면을 가진 질문을 해서 그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대답이 하나만 나올 수 있는 질문만 던지라고. 물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제일 낫지.” 서장은 이러한 말들을 남기고 몬태그 집을 떠납니다. 



방화서 서장은 양면을 가진 질문이 사회에 틈과 균열을 만들어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사회 변혁은 누군가 엄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틈과 균열 속에서 우연히 등장하고, 그 국면을 놓치지 않으면서 치열한 의지로 공감대를 확산하여 사회를 변혁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평소에 필요한 일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왜?’라고 질문하고,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어느 순간 가까운 사람들의 생활이 바뀌고, 바로 거기서부터 사회 변혁이 시작됩니다.



다음날 몬태그는 체념한 듯 책 한 권을 들고 방화서로 출근하여 책을 서장에게 넘겨줍니다. 방화서 서장은 책을 받자마자 불태웁니다. 그때 방화서에 경보기가 울립니다. 몬태그와 서장을 포함한 다수 방화수가 차의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현장에 도착하는데, 그 집은 바로 몬태그의 집이었습니다. 어제 만난 아내의 동네 친구들이 몬태그의 집을 책 보유 혐의로 신고한 것입니다. 집은 책과 함께 타올랐습니다. 몬태그는 서장과 감정적으로 심하게 충돌하게 되고 서장을 방화기로 살해한 후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이후 소설은 계속 이어지지만, 이제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뜻을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가상사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 역시 기술 발전으로 세계 어디에 있는 누군가와 손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침묵하며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이 골고루 존중받지도 못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주어진 길만이 최선이라 여기거나, 그 길이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 여깁니다. 



누구나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으면, 생각은 패턴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하게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일이 중요할 때도 많지만, 느끼고 사고하고 상상하는 방식을 바꾸면, 익숙한 일도 낯설게 보이고, 놓치고 있는 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 세상에 대해 아는 것과 앞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우리 기억과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 기억이 잘못되었다면? 그리고 그 집착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우리 기억은 단편적이기에, 과거도 현재와 비슷했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단순히 현재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현재와 달랐던 과거를 투영한 새로운 미래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우리 능력은 어떤 전후 맥락에서 그 어려움을 보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때 가장 중요하게 보였던 일이 갑자기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 암묵적인 가정에 의존하는데, 그 가정은 집단 기억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집단 기억은 우리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집단 기억은 주로 과거 믿음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상을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집단 기억에 낯선 과거를 추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의 낯섦이 부각된다면 현재의 일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천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그대로의 인간이 될 뿐입니다. 사회학자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1863~1947)가 제시한 이른바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우리가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에 따른 결과만큼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을 넓히고 인식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 미래는 소설 『화씨 451』에 나온 미래와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