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혀두지만 그 쪽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보는

사회지도층의 김주원의 편지를 받는 유일한 소외된 이웃이야

그러니 ,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못살게 흔드는 오후다

그쪽이 이 편지를 볼대도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이런 오후였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봤던걸 그 쪽도 봤으면 좋겠어

내가 서있던 창가에 니가 서있고

내가 누웠던 침대에 니가눕고

내가 보던 책들을 니가 본다면

그렇게라도 함께할수 있다면 그정도라면

우리 함께있는걸로 치자

그 정도면 우리 다른 연인들 처럼 행복한거라고 치자

내 생에 가장 이기적인 선택이 되겠지만

사회 지도층의 선택이니까 존중해줘

언제나 멋졋던 길라임 ! 앞으로도 꼭 멋져야돼

니가 아주 많이보고 싶을꺼야

사랑해 사랑한다

'시크릿 가든주원 대사 中 

 

 그냥 작은일 하나로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고 하잖아

그냥 조금만 솔직했으면 될것을, 아니면 조금만참았으면될것을

사람들은 다들 빙글빙글 돌려말하고 감추고 숨기고 하다가

이렇게 나중되서 후회를하는것같아

그래서 나 요즘 솔직해지려고 노력 많이해

 

 사람속에 묻혀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에게 안부를 묻는 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 또한 나에게 안부묻기를 어려워 하는건지

 

 그날 그사람이 그랬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그때가 내가 외로운 때였지요 라고

나도 그래.

내가 뭔가를 물끄러미 응시하거나

손가락으로 한가지 동작을 계속하고 있을 때

그런 때가 내 마음이 외로운 때야

 

 사람은 잃어 버리고나서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 깨닫는건 언제나 다시 서로 마주쳤을 때 였던것 같아

만약 지금 만나게 된다면 난 틀림없이 또 어리광 부리고 말겠지

그게 두려워서 이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어

 

 아직도 걸핏하면 눈물이 흐르고, 밤이 길게만 느껴질 때도 많았다.

고통도 여전했고, 어떨 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난 일년과 다를 것이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앞날이 지난 과거처럼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그 고통을 자신의 전부가 아닌 일부로 여길 수 있는 시간이 올 것

이다. 필요하다면 고통을 잠시 옆으로 밀쳐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한번 부서지고 끊어졌던 관계라는거

어쩌면 돌이키기 쉬울 수도 있지만

그만큼 다시 부서지고 끊어지기 쉽다는 것.

얼핏보면 다시 원상복귀 된것처럼 처음 그대로의 상태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보면 금이 가있고 상처가 있다.

그래서 한번 뒤틀린 사이, 다시 되돌리기 겁이 난다는거야

이미 관계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을테니까

어쩌다 실수로 그 약점을 건들기라도 하면 또 다시

악순환의 반복일테니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절대

오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기다리는데

그것이 왔다면, 거짓이다 무언인가가 제 때 오는 일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온다

너무 빨리 오는 것들은 나는 알아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왔을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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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아들이 귀한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는 아들을 낳으려고 온갖 치성을 다 들였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다.
하루는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기에 어머니가 쌍을 한 바가지 퍼 주었다.
그 때 스님이 아들은 열 다섯이 되기 전에 큰 봉변을 당하겠으니 절에 보내주면 잘 키워 주겠다고 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아이는 절에서 살게 되었고 이따금씩 집에 내려 와서는 돈이나 옷을 가져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날도 아이는 빈에 내려 왔다가 이른 새벽에 절로 떠났다.
아직 첫 닭도 울기 전인데 산 중에서 사람소리가 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어떤 처녀와 총각이 벼랑위에 서 있는데 아래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총각은 처녀에게 자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 강물로 밀어 넣어 버린다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처녀가 도도하게 머리를 흔드니까 총각은 그만 처녀를 벼랑 아래로 밀어 버렸다.
이를 보고 있던 아이는 남의 일일지라도 처녀가 너무 가련하게 생각되어, 가까이 다가가서 남자를 강물로 밀어 버렸다.
그래서 남자도 물에 빠져 죽어 버렸다. 그리고는 아이는 절로 들어갔다.
이제 아이의 나이가 열 다섯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스님은 밤중만 되면 어디로 나가서 새벽이 되어야 돌아오곤 했는데, 장삼에는 언제나 이슬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도 이상스러워서 아이는 스님 몰래 뒤를 밟아 보았다.
하지만 스님은 축지법을 쓰면서 걷기 때문에 도저히 못 따라갔다.
그래서 아이는 앞서가는 스님을 큰소리 불렀다.
저만치 앞에 가던 스님이 뒤돌아 보고는 아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타일렀다.
"너는 못 오는 곳이니 돌아가거라.
그러나 아이는 돌아가지 않고 자기도 한번 가 보겠다고 떼를 썼다.
할 수 없이 스님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빠르게 산중을 헤쳐 나갔다.
이윽고 넓적한 바위에 다다랐다.
스님은 아이를 바위 위에 내려 놓고는 휘파람을 부니 온갖 산짐승이 모여 들었다.
아이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그런데 스님이 장삼속에서 병을 꺼내 주더니 마셔보라고 했다.
아이가 그 약병을 받아 마시니 온 몸에 기운이 펄펄 솟는 듯 했다.
아이는 물었다.
"스님, 여기에 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조용히 말했다.
산너머 기와집에 구미호가 사는데, 온갖 산짐승을 데리고 잡으려 했지만 매일 실패만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아이는 자기가 그 구미호를 잡아 보겠다고 나섰다.
스님은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기어이 자기가 죽이겠다는 것이다.
스님은 긴 탈을 주었다. 아이는 재빠르게 산을 넘어갔다.
거기에는 커다란 기와집이 있었는데 서까래마다 초롱이 달려 있고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세 개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기에 예쁜 여자가 앉아서 수를 놓고 있었다. 아이가 들어오자 쌔액 웃었다.
"네가 사람이냐, 귀신이냐?"
"내가 바로 구미호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대뜸 구미호를 치니 금방 없어지고 윗방에서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를 쫓아갔더니 구미호는 호령했다.
"이놈아! 너의 스님도 날 잡지 못하는데 네 어찌 함부로 날뛰느냐? 날이 밝기전에 너를 죽일테니 돌아 가거라!"
이때 아이는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듯 하더니 마침내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결국 아이는 스님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절로 내려왔다.
스님은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전에 남을 도와 준 일이 없느냐?"
아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수를 갚아 준 일이 생각나서 스님에게 여쭸다.
그랬더니 스님은 아이에게 그 벼랑에 가서 통곡을 해보면 무슨 일이 생길테니 그리하라 일러 주었다.
아이는 벼랑으로 갔다.
그 끝에서 정말 통곡했다.
잠시 후에 물 속에서 전에 죽은 처녀가 나와서는 우는 연유를 물었다.
그래서 아이는 구미호에게 잡혀 먹히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따라오라고 하면서 물 속 용궁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전에 물에 빠진 처녀는 그 길로 용궁에 들어가서 용왕의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용왕은 옥황상제의 아들이었다.
거기에서 옥황상제의 영험과 용왕의 신비한 묘술을 배워서 세상으로 나왔다.
한편 구미호는 아이를 잡으려고 이리 저리 날뛰고 있었다.
아이가 가까이 가자 어디서 나왔는지 예쁜 여자가 길을 막아 섰다.
예쁜 여자가 구미호의 변신임을 알아 차린 아이는 용궁에서 배운 묘술을 써서 구미호를 이겨냈다.
죽이고 보니 그 예쁘던 여자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흉칙한 여우로 변했다.
그 꼬리를 떼어서 조선사람들의 목도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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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의 유래

축령산에는 남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그를 잃은 백성들의 안타까움이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남이섬, 남이바위등 아직도 그의 이름이 붙은 지명들로 해서 그가 역사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인물이 아니라 축령산과 함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남이(14411468)장군의 본관은 의령으로 그의 어머니가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옹주니 그는 태종의 외손이다. 세조3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남이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후의 일이다. 궁중에서 숙직을 하던 남이는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것이 나타나게 될 징조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유자광은 왕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했다. 오래전 부터 남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예종은 이것을 빌미로 남이를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남이는 스물 여덟의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그가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어려서 무예를 닦던 산을 축령산이라 이름붙였다.

치악산의 유래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고려의 유신 운곡은 고향인 치악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하기 전 이방원에게 글을 가르쳤던 적이 있다. 왕이 된 태종은 스승 운곡을 찾아 어릴 때 머물며 글을 읽었던 치악산 각림사를 찾았는데, 운곡은 조선의 왕인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관련된 여러 명소가 전해오고 있다. 태종이 잠시 머물었던 횡성군 강림면의 태종대(주필대), 태종이 운곡의 행방을 묻었을 때 할미가 엉뚱하게 가르쳐 주었던 바위, 황지암을 비롯하여 후일 임금에게 거짓말을 한 죄를 뉘우쳐 할미가 빠져 죽은 늪, 노구소(할미소,구연)등이 그곳이다. 이밖에도 운곡이 숨어 살았던 고깔바위(변암)가 치악산 동남쪽에 있으며, 태종의 수레가 지나갔던 수레너미재, 대왕재, 원통재 등의 고개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비로봉 서쪽의 입석대 아래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운곡의 묘가 있으며 바로 아래에 운곡의 재실이기도 한 석경사가 있다.

칠갑산의 유래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칠갑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아흔아홉계곡을 비롯한 까치내, 냉천계곡, 천장호, 천년고찰인 장곡사 등 절경지대가 펼쳐져 있다.두개의 대웅전으로 유명한 장곡사는 그윽한 산사의 기품이 넘치는 사찰이다. 칠갑산은 본래 이름은 칠악산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곱 성인의 칠()자와 십이간지의 첫 자인 갑()자를 합하여 붙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 속에 명당자리가 일곱군데 있다고 해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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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마셔두,눈을감아두,

씻을때두,웃을때두,

힘들때두,니가자꾸만

그립고생각나......

보고싶어...돌아와...
 

 

사 심

랑 장

해 이

요 너

그 무

래 아

서 프

    

  요

 .

 .
 

 
너랑만날때갔던곳들을생각해봣는데

가본곳이별로없더라....

추억은이렇게나....많이있다는데......

 

 이제부터사랑하지않겟습니다.

사랑한다고말하지않겠습니다.

이제부터사랑때문에아프지않겟습니다.

이제정말널버리겠습니다......

 
조금만이해해주세요

조금만참아주세요

조금만섬세하게봐주세요

조금만관심가져주면

다보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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