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섬
이경자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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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오랜만에 옛친구를 만난것 같다. 아주 오래전 아직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던 그 시절 그녀의 소설을 만났었다.
'절반의 실패'라는 다소 불길한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 그녀의 소설은 아직 패미니즘이라는 말이 나오기전에 세상을
향한 여자의 통곡소리같았었다.
그렇게 세상에 일갈을 하고 당당히 대중앞에 섰던 그녀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글쎄 항상 있었지만 우리가 잊은 것이었을까.
표지의 사진에서 만난 그녀는 여전히 날카롭고 각진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만 나처럼 그녀에게도 세월이 보였다.
예전에는 높은 곳에 있던 그녀가 지금은 내곁에서 내손을 붙잡고 걷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세월탓인지..나도 그녀의 소설속 어딘가쯤에서 나올법하게 질곡을 겪었음인지...그전 세상이 아직 만만할 때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필 섬에 내려와 살게 된 나에게 그녀가 '건너편 섬'으로 다가왔다.
좀더 깊숙하고 좀더 애틋하고 좀더 완숙한 삶의 모습이 녹아있다.

'콩쥐 마리아'는 가난한 집안에 장녀로 제 몸 하나를 희생하여 가족을 돌봤으나 양색시의 과거때문에 가족에게조차 버림받는 여인의 이야기이다. 미국 이민 백년동안 이 땅을 떠난이는 수만에 이른다. 마리아처럼 미군과 결혼하여 제 식구들을 아메리칸드림으로 이끈 여인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전염병환자를 보듯 냉대받는 현실이 가슴아프다.
일본이 패전 후 여인네들이 미군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나라를 일으켰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내 집 일이라면, 내 이모가 고모가 그런 여인네였다면 나도 부끄러웠을까. 

'언니를 놓치다'역시 한국전쟁당시 사상을 달리한 언니가 북으로 간 후 50여년이 세월이 흘러 이산가족상봉으로 만나는 이야기이다.
나이차가 많이 났던 언니, 공장에서 돈을 벌어 어린 동생을 부양하던 언니, 모두가 똑같이 잘살게 해준다는 지극히 단순한 선전에 속아
북으로 간 언니. 동생 세희의 기억에 언니는 커다란 산같았는데...눈앞에 언니는 나이보다 폭삭 늙고 지쳐버린 여인네였다.
세희가 꼭 듣고 싶었던 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언니의 사과였는데...'경애하는 지도자동지'만 외치는 언니.
결혼도 못하고 자식도 없이 거친 삶을 살아온 세희가 어렵게 장만한 1000달러를 기다렸다는 듯 낚아 채가는 언니의 모습이 가슴 시리다.
이산의 아픔을 지닌 우리 가족 역시 언젠가 마주칠 가족들과의 상봉이 이런 모습일까...눈이 시큰해진다.

'박제된 슬픔'속에는 북으로 간 삼촌이 간첩이 되어 내려온 장면이 나온다. 빨갱이라면 때려죽여야 한다고 배웠던 그 시절, 그 서슬퍼런
시대에 간첩이라니...자신에게 미칠 해악을 알면서도 삼촌에게 향하는 그 피의 부름때문에 전도유망하던 석이는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죄로...빨갱이를 핏줄로 두었다는 죄로 평생 어두운 삶을 살아간다.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이런 억울한 시간을 살았던 이들이 있으리리..
아무 잘못없이 픽밥당한 인생이 한 둘이랴 만은 동족상잔이 비극이 부른 참담함이 서글프다.



소설가인 아내가 버거워 이혼을 하고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장에 온 남편은 떠난 아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분명 있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를 질투할 수도 무시할 수 도 없었던 유명 소설가 아내를 둔 남편의 심정이 잘 그려졌다.
유명 소설가의 모습에서 작가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헌신한 적 없는 독립된 개체로서 고독하게 살아갔을 그 모습말이다.
아스라히 보이는 건너편 섬에 그 무엇과 닿기 위해 쓰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작가의 고뇌가 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이 작품들이 몹시도 소중하다.
얼마나 많은 밤들을, 주변의 무언가를 죽여가며 써내려갔을테니 말이다.
내가 죽고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신작들이 사람들이 드글거리는 뭍에 와 닿기를 소망한다.

한꺼번에 먹기가 아까워 조금씩 베어 물었던 달콤한 보름달빵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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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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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요나스 요나손의 책을 읽으려면 적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좀 알거나 알고 싶거나 하는
사람이 제격이다. 말하자면 시야가 좀 넓은 사람이라면 속도감있게 읽히는 책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면 읽는게 결코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을 알건 모르건 일단 유쾌한 이야기에 웃음은 보너스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더구나 올해는 사건 사고도 많고 태풍도 잦고 사는 게 별로 신나지 않은 해이니까 전작 '담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었던 사람은 물론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좀 웃어보자 싶으면 얼른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이야기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조금 떨어진 도시 소웨토의 공중 변소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1960년대 남아공에서는 집집마다 변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중 변소를 이용했던 것 같다.
우리의 오래전 화장실처럼 푸세식화장실인데 그곳을 관리하는 소장과 수거인들 사이에 조수로 일하고 있던 열 네살의 소녀
놈베코가 주인공이다. 비록 나이가 좀 어리게 보이긴 하지만 위생국 직원에게 눈밖에 난 전임 소장에 이어 다섯 살부터 분뇨
수거일을 했던 놈베코가 새로운 관리소장으로 지명된다.
공중 변소에서 자신을 성추행하려던(이건 놈베코의 주장이다)타보라는 사내를 만나 책을 읽는 법을 배우고 그녀의 속에 잠재되어
있던 수학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놈베코는 요하네스버그의 시내에 나갔다가 엔지니어의 차에 치에게 되고 어이없게도 도리어 그의 하녀로 빚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받게 된다. 사실 엔지니어는 남아공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핵개발 연구소의 책임자였고 부친의 명성으로 얻게 된 점수로 대학을
졸업한 멍청이였다. 나치즘에 빠져 있던 남아공의 수상은 엔지니어를 닥달하여 핵을 개발하려 하지만 워낙 멍청하고 알콜중독자인 엔지니어는 단순한 수학공식도 외우지 못하는 무늬만 엔지니어였던 것이다. 
놈베코는 자신의 뛰어난 수학실력과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엔지니어를 도와 핵폭탄 제조에 일조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엔지니어의 집에서 하녀노릇만 할 수는 없는 법. 탈출을 하기위해 같이 하녀노릇을 하는 중국의 세자매을 이용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남아공에서 암약하고 있는 모사드는 핵폭탄이 제조되자마자 엔지니어를 살해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베코는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향하는 비행기티켓과 핵폭탄을 교환하자는 조건을 미끼로 남아공을 탈출한다.
사실 모사드요원들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는 척하고 살해하려고 했지만 이를 눈치챈 놈베코의 기지로 탈출은 물론 모사드 요원에게 한방 먹이고 만다.

스웨덴에 도착한 놈베코의 활약은 눈부시다. 핵폭탄을 쫓는 모사드 요원과의 숨바꼭질은 물론 나중에 그녀의 연인이 되는 홀예르와의 만남, 중국의 후진타오와 스웨덴의 국왕은 물론 수상까지 남다른 인맥을 과시하게 된다. 물론 자의가 아닌 경우가 더 많긴했지만.
그 와중에 홀예르의 아버지가 레닌의 동상을 스웨덴국왕의 동상으로 변조한 후 막판에 깔려죽는 장면에서는 비극이지만 웃음이 터져나온다. 작가의 촌철살인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깔려죽은 잉마르는 평생을 국왕반대주의자였는데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변조한 국왕의 동상에 깔려죽다니...'카렐리아 화강암으로 만든 국왕의 동상에 깔려 죽어 기나긴 투쟁도 끝이었다. 게임은 무승부였다.'

작가의 모국인 스웨덴은 중립국인데다 도덕성을 중시하는 모범국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넘어온 까막눈이 여자
놈베코 덕분에 스웨덴은 자신도 모르게 핵보유국이 되고 만다. 그것도 20년이 넘게 말이다. -어쩌면 소설이 아니라 진실일런지도 모를일-
이스라엘로 가야할 3메가톤급 핵폭탄과 스웨덴으로 가야할 10kg의 영양육포가 바뀌는 바람에 일어나는 헤프닝은 전세계의 핵 현실과
서로의 이익이 교차하는 외교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막판에 이스라엘의 외상이 핵폭탄을 암시하는 '10kg의 영양 육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장면 역시 폭소가 터진다.
우연인지 요즘 전세계를 분노케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따른 피의 참상을 보면서 전세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노리는 모사드의
본산인 이스라엘의 존재자체가 신의 뜻인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비록 작품에서는 냉혈해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실수 투성이의 덜 떨어진 모사드요원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라면 10kg의 영양 육표 대신 
분노에 찬 지구인들의 항의서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니 말이다.
비극적인 죽음조차 유쾌한 죽음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위트에 더위를 잊게 된다.
더구나 제법 오래전부터의 세계사를 줄줄 알게되었으니 전작처럼 고맙지 않은가 말이다.
도대체 요나스 요나손은 언제 이 많은 정보들을 꿰뚫고 있는 것인지 그의 독서량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혹 주인공 놈베코가 작가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면서 어느새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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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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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용헌의 책을 받아들면 일단 뿌듯하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세상에 나를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그가 저명한 컬럼리스트가 될 수 있을만큼 축적한 지식과 정보의 양은 참으로 방대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건져냈을까.
대부분 고서와 학자들을 통한 것들이겠지만 그의 지적인 욕심은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전국팔도를 누비고 다니면서 세상잡다한 것들을 들여다보는 그가 자동차면허증이 없다니 참으로 의외였다.
하긴 남의 차 타고 다니는게 얼마나 편한 일인지 실제로 운전을 해보면 알일이다.
그런 그에게도 요즘은 슬슬 면허증을 따야할지를 궁리중이라니 남의 발품을 빌리는 일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그는 조선의 명가나 부자들에 대한 정보가 많은데 그의 다른책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 같아 그의 부에 대한 단단한 사고가 늘 반갑다.
신교는 물론 구교, 민간신앙에 이르는 그의 종교관도 놀랍기만 하다.
오히려 많이 알기때문에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악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산들이 사실 '기'가 충만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그저 흙산에 비해 관절에 무리가 갈까싶어 등산을 주저했는데 그의 말처럼 좋은 정기가 많다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반드시
산을 타야할 모양이다. 
책표지에 나온 사진을 보노라면 꽤나 부지런해보이긴 한다. 저 조그만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어찌나 밝은지 그의 심중에
있는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의 인격이나 지적이 수준등등이 그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일런지 모른다.
아니면 운전도 못하는 사람이 기차타고 버스타고 하면서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니니 어찌 지인이 많지 않을까.
이렇게 욕심 충만해 보이는 그가 의외로 소박하고 담백한 삶을 소망한다니 의외이다.
하긴 손안에 쥔 돈보다 더 많은 재산이 있으니 어디인들 가난할 것인가.
출간한지 오랜 책이지만 언제 읽어도 신선하다. 아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망설임없이 집어들 수 있는 책이 아닐까싶다.
좋아하는 등산 열심히하고 자동차면허도 따서 더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전해주었으면 싶다.
어차피 내능력으로는 그가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하나만 얹는 수밖에 없으므로.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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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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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라면 일단 망설임없이 펼쳐본다. 서점가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 작품은
그동안의 그의 작품과는 또다른 색감이 느껴진다. 확실히 재간꾼임이 틀림없다.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몸매가 육감적이고 어딘가 개구리를 연상시키는 얼굴상을 가진 이토이 미유키라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고를 진학했지만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의 변신은 전문대학을 들어가고나서 부터였는데 확실히 외모부터 풍기는 자태까지 달라졌다고 주위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공부도 재능도 별볼일 없었던 그녀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색기를 알아보고 달려드는 부나방같은 사내들 덕분이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색기를 이용하여 부나방들을 하나 둘씩 살해하지만 명백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녀가 살고 있는 소도시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남달라 그녀에 관한 소문으로 행적을 쫓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는 것뿐.
자동차대리점의 사장도 토건회사의 사장도 수중에서 잠든채 익사하고 만다.
누군가는 그녀가 약을 타서 먹인 후 익사시켰다고 확신하지만 남편이 정부와 놀아나다 우스운 꼴로 죽었다는 걸 알리기 싫어 입을 닫는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범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주변사람들의 소문에 의해 범죄일 것이란 짐작만 들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속담 '아닌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말이
맞긴 한가보다. 소문의 한가운데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그녀의 활약이 그다지 밉지 않다.
어차피 착실한 인간들이라면 그녀곁에서 그렇게 죽어 넘어가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다'라는 말이 딱인 작품이다.
지금쯤이면 꼬리가 밟히겠구나 싶어 자꾸 책장을 넘기다보니 마지막장이 보인다. 도대체 그녀의 팜므파탈에 종지부가 찍힐 것인지
누구라도 책장을 넘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암튼 늘 새로운 색감으로 다가오는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으로 잠시 더위를 잊는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소문에는 소문이 생긴 원인이 끼어있는 법, 살펴보면 의외의 실마리가 있다.
혹시 주변에 이상한 소문이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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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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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일단 작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수상작들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음으로 나는 안심하고 책을 연다.
책을 덮는 순간 느꼈던 것은 박범신작가의 추천사처럼 '물샐틈 없는 꼼꼼한 바느질 솜씨'가 연상되었다.
가끔은 삐뚤빼뚤 할법도 하건만 한 땀 한 땀 간격도 정확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한 바느질이 떠올랐다.
기계로 일목요연하게 박음질된 그런 바느질에서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냄새가 쏙쏙 박힌 그런 배열들말이다.



제목처럼 작가는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을 겪으며 느꼈던 상실의 아픔들을 얘기하고 있다.
인간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대충 그 출현은 짐작할 수 있지만 가는 것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물론 시한부 삶이라면 대략 짐작이야 하겠지만. 어느 날 자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상황이라면 너무도 기가막혀 아주 한참동안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역시 막내동생의 죽음이 그러했으니까.
아무 예고도 없이 닥친 죽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떻게 확정지어야 할 것인지 심리적인 공황에 빠지게 된다.
교회 권사였던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결혼후 호주로 이민간 언니는 카톨릭신자가 되었고 자신은 불교도인 버라이어티한 가족의 종교관에맞춰 어떤 예법으로 장례식을 치러야하는지에 대한 혼란과 예부터 전해져 오는 우리 장례식의 의미까지 하나의 죽음에는 엄청난 시간과 역사와 의식과 의미까지 더해져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가 살아온 시간들과 군인으로 평생직업을 마무리하고 여전히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누리고 싶어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병마까지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하는 숙제가 남은 자식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는 펙트가 느껴진다.
누구나 부모는 있으니까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도 다가오거나 이미 겪었을 일들이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망자를 보내야하는 과정을 그래도 작가는 꽤 이성적인 시각으로 지켜보았던 것같다.
고집불통에 타협하기 힘든 아버지를 달래고 윽박질러 엄마가 없는 삶을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도 참 지난하다.
부모의 기대와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언니와 이쁜 막내자리를 꿰찬 두 자매와는 달리 자기밥 찾아먹기 바빴던 둘째 딸이었기 때문에 더 단단해졌는지도 모른다. 주변에 둘째들은 대개 이런 성품을 지닌 것을 보면.



자칫 방관자나 단단한 이성자처럼 보일지도 모를 위치에서 때로는 아플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제 몫 이상 역할을 잘 해냈다.
그러면서 담담히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과 부모님과의 시간들. 아버지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마치 내일처럼 다가온다.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당했던 치욕스런 일들을 보면서 문득 나에게도 그런 치졸한 선생이 있었음이 떠올랐다.
지금은 교단을 떠나 어디선가 늙어가고 있을지 아님 벌써 세상을 떠났을지 모르지만 늙어가는 있는 뇌에서도 절대 늙어지지 않는 기억을
가지게 된 아픔을 놈들은 절대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혹시 그가 자신의 실수와 비인간적인 태도를 지적했던 제자의 글을 보게 된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그나마 여고시절 길에서 만난 선생앞에서 침을 뱉고 돌아섰다는 장면에서 조금 위안이 된다. 바보같은 놈.
그런 놈들이 여전히 세월이 흘러도 어디선가 교단에 서있을 것이란 사실이 분노스럽다.

작가는 너무도 평범한 삶을 살다간 엄마역시 언젠가 모두에게서 잊혀지겠지만 그 죽음에는 수많은 시간과 역사와 사랑과 아픔들이 내재해
있음을 되살렸다. 그래서 평범치 않은 죽음으로 승화시킨 노력이 참 이쁘다.
막힘없이 써내려간 것처럼 편하게 다가왔던 이 글이 1년 넘게 5천장이 넘는 글이었다는 것을 알게되니 갑자기 책이 묵직해지는 느낌이다.
하긴 65년의 삶과 70이 훨씬 넘은 시간과 40년이 훌쩍 넘는 시간들이 교차된 무게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늘 으르렁 대는 것 같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지막이 인간답기를 바라는 딸자식의 기원이 느껴져 그것도 이쁘다.
이 글이 쓰여질 수 있게 된 것은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이었지만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 선물같은 작품으로 탄생되었으니 천당에서 엄마는
행복하겠다. 늘 뜨뜨미지근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이 수상으로 뜨거워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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