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르포르타주 - 이황 기자의 공항 취재 40년
이황 지음 / 북퀘스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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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관문인 공항!

낯선 나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아주는 공간이기도 하고 가장 마지막에 떠나오는 공간이

되기도 하는 공항에서 40여년을 한결같이 취재에 매달려온 공항기자의 기록문학이다.

 

한국일보의 기자로 1970년 기자생활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거친 파도를

넘어야 하는 난파선처럼 요동치는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그 격동의 시간을 공항에서 바라보는 색깔을 어떤 빛이었을까.

여의도에 최초의 대한민국 공항이 설립되고 이후 김포공항을 거쳐 인천 공항에 이르기까지의

공항의 역사는 60여년에 이른다.

여의도의 먼지 가득한 들판에서부터 논과 밭에 둘러쌓인 김포공항, 지명부터가 이미 오래전부터

공항으로 내정되어졌을 것이라는 영종도(긴 마루를 지닌 섬)에 지어진 인천국제공항의 역사는

대한민국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박물관 같기도 하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특권층만이 이용할 수 있었던 공항을 보기위해 수학여행단이나

관광객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오고갔던 모습에서 '공항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 공항 서비스평가

(ASQ)에서 '7년 연속 세계1위'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한 인천공항으로 탄생되는 공항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가는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 여관에서 밤을 지새우며 취재를 해야했던 열정적인 모습에서

이제는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지긋한 관찰자가 되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야사를 소개하고 있다.

 

귀빈실을 이용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권력에 취약한 사람들인가

생각케한다.

노무현대통령시절, 이른바 햇볕정책이 절정인 시절에 북한의 고려항공기가 일주일에 두 번씩 남한을

오가다니 정말 남북한 해빙무드의 놀라운 기록인 셈이다.

대통령의 망명과 범죄자들의 도피, 연인과의 결별,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민과 취업을 지켜보던

공항은 이제 한류스타들과 스포츠스타들의 환영과 환송을 지켜보고 수많은 외국인들의 방문을 지켜보는

대한민국의 앞마당이 되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승무원들의 고달픔과 공항직원의 애로점도 공항의 또다른 모습일 것이다.

정부의 온갖 부처가 파견되어 또 하나의 '국무회의'가 열린다는 공항의 전문성과 세관원들의 집중성도

놀랍기만 하다. 단지 여행가방하나 들고 잠시 스쳐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공항은 또 하나의 '나라'였다.

하루 수만명이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공간 '공항'에 선 노회한 기자는 또 어떤 것을 지켜볼까.

 

부모에게 버려져 해외로 입양을 떠나야 했던 어린 아기들을 지켜봤던 기자가,성장하여 다시 고국을 찾는

입양아들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었다면 이제는 가난한 이웃나라에 사랑을 전하는 대한민국의 '천사'들을

지켜보는 흐믓한 기사만을 전할 수 있는 행복한 기자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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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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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런것은 아니지만 나의 까다로운 파장과 딱 맞는 책을 만나면 그 때부터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어 소설속에 소설 한 편이 더 존재하는 것 같은 모호함에 휩싸인다.

대체적으로 그 작가의 책들이 비교적 나를 흡족하게 한 경우이긴 한데 작가들의 작품속에는

그만의 색깔이 분명하여 지난 작품들과 닮아있는 경우도 많고 아주 드물게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내가 알던 작가가 맞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시대의 입담꾼이라는 별명을 지닌 작가답게 말하고자 하는 폼이 넓다보니 읽기전에

마치 전혀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음식을 앞에 놓은 것처럼 약간은 설레고 약간은 주눅이 든다.

몇 편의 작품에서는 그가 지나왔을 시간과 공간속에 스며들었던 추억일 수도 있고

기행일 수도 있던 얘기들이 있었고 희한하게 음식과 추억이 머무려진 이야기도 있었다.

 

'단 한번의 연애'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으리라는 단정은 할 수 없지만 꽤 진부한 사랑을 풀어 놓았으리라고 짐작한다.

열마리의 용이 승천하다가 아홉 마리는 승천했고 한 마리는 남아 바다로 떨어졌다는 '구룡소'가

고향인 '이새길'과 '박민현'의 사랑 연대기라고 하면 맞을까.

아니 책을 덮고 나서 굳이 조정한다면 소년의 해바라기 사랑쯤이 더 타당한 정의일 듯 싶다.

 

일제가 물러간 후 호황이던 항구는 잠시 조용했지만 고래잡이로 다시 풍요함이 펼쳐진다.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던 고래잡이는 소년과 소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고향에서는

한창이었던 모양이다.

인간에게도 페로몬이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과는 상관없이 민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르게 뛰는 것을 느끼는 예민한 후각을 지닌 새길에게 민현은 영원한 마돈나였다.

자신이 가진 신비스런 이끌림의 능력을 이용하여 남자를 이용할 줄 아는 민현은 '걸레'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국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평범한 새길은 그녀가 '대학에서 만나자'라는 말 한마디에 죽을 둥 살 둥 그저 그런 대학에 입학하고

군사독재의 소용돌이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전경으로 군에 입대한 새길에게 정권의

하수인이라고 낙인찍은 민현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한다.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민현을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새길은 취조중인 경찰에게 유린되기 전

민현을 안게된다.

"어서 나를 가져. 저 사람들한테 내가 더 더러워지고 망가지기 전에."

어쩌면 민현은 그녀를 따라다니던 수많은 더러운 소문처럼 '걸레'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를 헤치지 않고 나를 독점하거나 내게서 뭘 빼앗아 가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준 유일한 사람'이었던 새길에게 몸을 연 그날이 그녀의 첫 경험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나나'였던 민현의 어머니는 힘든 파도를 가르는 새끼고래를 제몸에 얹어 세상에 끌어올리기 위해 바다로

떠났는지도 모른다. 결국 민현은 요정의 마담이 되어 정계, 제계의 막강한 힘을 얻은 어미의 도움으로

멋진 날개를 얻어 큰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넒고 넓은 바다에 고래 세 마리가 있었다. 도망치던 새끼가 힘들어 하면 어미가 지느러미에 새끼를 얹어

업고 갔다. 아비는 심장에 작살이 박혀 주변을 피바다로 만들고 죽을 때까지 가족의 뒤를 지켰다.

넓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171p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게 에비, 에미의 운명인 것을.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으로 집을 나간 엄마를 증오하며 혼자 남겨졌던 민현은 에미와 자신을 사랑하던

남자 새길에 의해 넓은 바다로 나가 큰 고래가 되었다.

여전히 민현을 사랑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새길은 철새처럼 찾아드는 민현을 위해 고향에 요새를 방불케

하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어쩔수 없이 새길의 모습에서 작가를 본다. 뭐 작품속의 배경이 그의 고향은 아니지만 워낙 역마살이 든

그가 맘속에 고향이야 한 둘 이겠는가. 신비한 끌림을 지닌 머리좋고 아름다운 여인 민현은 그의 첫사랑과

닮았을 수도 있고 막연하게 꿈꾸어 온 여인일 수도 있겠지.

정처없이 지나던 어느 바위산 속 동굴을 보면서 태양발전과 풍력발전을 끌어오고 샘솟는 맑은 물을 식수로

하는 궁리도 하지 않았겠나.

온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로 소외와 무지를 가뿐히 날리고 온전히 자연의 힘으로만 성장한

풀들을 먹어보겠다는 도락가의 소망도 버무렸겠지.

그래서 난 또 어쩔 수 없이 평생 꿈꿔왔던 사랑과 지극히 안전하면서도 안락한 공간속에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다. 글쎄 평생 결혼이란 족쇄를 차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과 평생 연애만

했던 새길의 모습도 역시 작가의 소망이 아닐까.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 자신이 녹아들지 않은 작품은 없으므로

나의 이런 상상은 완전히 허구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에 나도 '단 한번의 연애'의 주인공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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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텍스 - 관계에 대해 당신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
에스더 힉스 & 제리 힉스 지음, 유영일 옮김 / 나비랑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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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료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진심을 다해 기도하면 

우주의 기가 하나로 모여 그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했다.

우주의 에너지인 기로 존재했던 '나'는 물질차원인 육체의 겉옷을 입고 지구별에 도착한 존재이다.

물질 차원의 세상에 존재하는 내가 비물질적인 근원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볼텍스'이다.

 

'볼텍스'는 이미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내장되어 있는 근원에너지의 집합소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이 '볼텍스'의 기적을 꺼내려면 그동안 내재되어있던

온갖 잘못된 편견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주의 기, 혹은 만물의 정기란 바로 신의 정기의 일부이며 신의 정기가 곧 그 자신의

영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을 얻는 순간, 자신이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인생을 살면서 진정 나와 같이 할 '소울메이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내 내면에 있는 근원, 곧 영혼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진동과 일치를 이루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며 내 의도대로의 멋진 만남을 위한 기회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관계'로 이어져 있고 이 '관계회복'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한다.

부모와 자식, 배우자와 친구등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볼텍스'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긍정과 정화의 의식이 필요하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나의 순수하고 무저항적인 진동에 반응하고 창조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구성요소들을 끌어 모은다.

 

과연 나는 자신의 창조와 진동적으로 일치된 상태일까?

 

'볼텍스'의 비밀을 여는 많은 물음에 '아브라함'은 친절하게 우리들의 바램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준다. 그의 대답은 쉽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기

때문에 지구별에 온 순간 잊혀졌던 고귀한 영성을 일깨워준다.

내 안에 있는 에너지와 행복으로 가는 안내시스템을 일깨워주는 에스더와 제리 힉스 부부의 가르침에

밝은 내일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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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이면 - 사람을 읽다, 책을 읽다
설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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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이렇게도 들여다 볼 수 있다니.

내가 책이 되고 혹은 저자가 되어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이야기이다.

책의 이면(裏面)이라 함은 책의 속, 내부의 깊은 면이란 뜻으로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책을 썼을 당시의 저자의 상황이나 시대의 흐름등을 독자의 입장이 아닌 책의 입장으로

풀어 쓴 아주 독특한 내용이다.

 

중종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조광조는 화려한 등장과는 무색하게 빠른 몰락을 맞고 만다.

그것도 지극하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군주에 의해 사사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조광조는 한창 임금과의 사이가 좋았던 어느 날 '근사록'은 학문에 가장 긴요한 것으로

궁리하는 학문이 없으면 묘리를 탐구하지 못하니 열과 성을 다하라는 조금은 오만한 조언을

하기에 이른다.

'근사록'은 성리학의 입문서로 일상 생활에 절실한 사실을 묻고 생각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나의 문제부터 출발하여 깊은 이치에 이르도록 한다는 말이다.

결국 왕에게 자신의 문제부터 돌아보라는 무엄한 조언을 한 셈이니 '근사록'은 불과 1년 후 목숨으로

그 댓가를 치르게 한 조언의 씨앗이 된 셈이다.

 

 

유자(儒者)였던 심노숭은 아내와 아이을 잃고 참담한 슬픔을 가눌 수 없어 제문을 지어

올리며 삶을 힘겹게 버틴다. 전생의 업이 무엇이길래 인과가 무엇이길래..하는 하소연은

유자에게는 부끄러운 노릇일지 모르나 음심에 빠진 아난을 음욕의 현장에서 꺼낸 세존이

길고 긴 설법을 폭포수처럼 뿜어낸 결과물인 '능엄경'이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가.

 

'열하일기'를 앞에 놓고 패관기서라고 윽박지르는 박남수를 말리는 박제가와 이덕무의

모습과 한잔 술과 거문고 줄로 한숨을 삭이는 남공철의 얼굴이 겹쳐진다.

 

스물 일곱의 어여쁜 나이에 명을 놓아버린 난설헌을 못잊어 자신도 스물 일곱의 나이에

그네를 쫒아 이생을 떠나겠다는 허경란의 눈물방울이 '난설헌시집'위에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다.

 

박제가가 쓴 '북학의'와 한교의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서얼임에도 뛰어난 재능으로 인정받고

세상에 나왔으나 사람들의 멸시를 견디었던 설움이 전해져 온다. 도대체 권력자들이란 뒷방 늙은이들처럼

궁시렁거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오랑캐에게 노략질 당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백성을 위해

필력을 세웠던 이들보다 나았던 것이 무엇인가.

 

김시습의 '매월당집', 조부가 손자 양육 과정을 기록한 이문건의 '양아록'등 귀에 익었던 책들을

이렇게 만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돌아가 종이위에 붓을 놀리고 있는 주인공들을 만나고 온

느낌이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책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노라니 세월무상이요,

당시에 뜨거웠던 주인공들은 사라졌으나 이렇듯 책은 남아 당시를 증언하니 어찌 책이 귀하지 않을 것인가.

한 권의 책에 담긴 기막힌 이야기와 역사가 한 걸음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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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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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채워지지 못한 사람들의 허름한 인생사가 잡초처럼 질기게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민들레처럼 제 존재를 흩뿌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마음 한 구석이 골절되거나 온전한 울타리를 갖지 못한 어설픈 가족들 사이에서

버려지고 상처받아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생떼같은 자식을 차가운 땅에 묻고 돌아와서도

밥은 먹어야 하는 에미처럼 눈물 섞고 설움 섞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이미 충분히 말랐음에도 살찌지 않으려는 여자 소희는 먼저 간 남편이 과도한 간섭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아내가 온실안에 빚깔고운 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길 바랬던 남자는 그 자신도 억압과 폭력을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세상에 주눅 들었던 소희는 사랑이라고 믿어지는 남자들에게 쉽게 몸과 마음을 열고

다치면서도 죽일 놈의 사랑을 향해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곤 한다.

닭집 여자 효임은 제대로 된 사랑하나 물어다 줄 요량으로 얼굴이 반쪽이 된 소희를 위해 통통한 닭 한마리를

튀긴다. -그늘 바람꽃-

 

오직 저 남자와 눈부신 아침을 맞고 살을 부비고 살고 싶어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고향으로 전근되어 할 수 없이 시어머니와 살게된 여자는 낮술로 답답한 일상을 이기고 있다.

아들을 보려고 들였던 후실의 자식이었던 여자는 태생의 열등감으로 시어머니에게 주눅들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남편과의 나들이에서 그토록 고고했던 시어머니 역시 후실의 자식임을 알게되고 비로서

스스로 옭아맨 족쇄에서 풀려난다. 아슬아슬했던 삶에서 벗어나와 제법 힘을 내서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그 집앞-

 

'엄마 시집가'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딸은 저를 닮은 딸 하나를 낳고서야 제에미를 찾아왔다.

사업에 실패한 사위를 위해 제 집을 팔고 딸집에 얹혀 살게된 한내댁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돈의 뒷치닥거리를

하며 늙어가는 딸의 인생을, 자신과 딸을 닮은 손녀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오늘도 성경이 든 가방을 움켜쥐고 새벽길을

나선다. -어스릅녘-

 

'오래 한곳에 박혀 있던 돌을 들었을 때, 그 바닥에 고여 더 짙어진 흙 빚깔, 여자의 어딘가에 그런 빚깔이 고일 거야.' -11p

 

 

9편의 단편들에게서는 바닥에 고여 더 짙어진 흙 빚깔같은 무게감과 오래된 도배지에 피어난 곰팡이꽃의 알싸한

내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해가 지기 시작한 골목에서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과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엄마의 묵은 옷에서

맡아지는 이상한 서러움 같은 것.

 

선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선 신축 아파트 옆에 허름하게 자리잡은 판잣집에서 우울하게 퍼져나오는 흐린 전등불처럼

'그래도 저 안에 누군가 치열한 삶을 살고 있겠구나'싶은 이상한 안도감과 서글픔. -우리들의 털켜-

 

이혜경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아주 오래된 한국문학단편집을 읽은 느낌이다.

문장 하나 하나가 수 많은 자갈돌에서 잘 생긴 것만은 골라낸 것 같은 정성스러움과 애틋함이 깃들여있다.

우울하고 어둑한 유년의 기억과도 만나고 시장에서 목욕탕에서 등산길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의 비밀스런 삶을

들여다 본 것같다.

이미 무거워진 삶의 무게에 조그만 짐 하나가 더 얹어진 묵직함이 슬프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앙 다문 입술에 찍힌 시퍼런 잇자국처럼 기어이 일어나고 말 것같은 희망을 자꾸 구부러지는 허리춤에 찬 복대처럼

둘러 놓았기 때문이다.

우린 때때로 자꾸 느슨해지는 일상을 벗어나 빛나는 어느 시절, 혹은 어두웠던 어느 시간들을 향해 똑바로 맞서야

한다. 아련하긴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그 집앞'을 찾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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