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과 열 세 남자,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 -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빈 우리 바닷길 3000km 일주 탐나는 캠핑 3
허영만.송철웅 지음 / 가디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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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남자들 겁이 없다. 마누라가 곰국 끓여놓고 나가면 무섭다는 중년의 남자들이

정작 자신들이 가출을 감행하다니...무식이 용감하다더니..가출하기 일주일전부터

헌신으로 부인에게 봉사를 감행한 후에야 공인가출이 가능했다니..

그만큼 이 가출은 이남자들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평균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은 남자들이 이렇게 거창하게 가출을 감행한 것은

우리 바닷길 3000km를 일주하여 바다의 백두대간을 점령(?)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때문이었다.

요트하면 파란 바닷물과 따사로운 햇살과 미인과 맛있는 샴페인을 연상했던

그들이 '웃자'로 시작해서 '죽자'고 고생한 눈물겨운 탐험기가 생생하기만 하다.

직업도 다양하다. 우리의 식객 '허영만'을 선장으로 치과의사에 등산정비점 사장에

사진작가, 목수에 회사원까지..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슨 야심으로

무시무시한 바닷로 가출을 감행했을까.

오줌누는 일조차 여의치 않아 안전벨트를 메고 식혜패트병에 일을 봐야 했던 일이며

자존심은 상하지만 '키미테'로 도배해 가면서 배멀미와 싸우면서..

더구나 옷을 뚫는 막강 모기에 시달리면서...그들이 얻은 것들은 무엇일까.

 



 

이름도 코믹한 '集團家出'호를 타고 장장 1년여에 걸친 생고생담이 그들의 눈물과

성취의 여정이라면..읽는 나는 흔들림없는 땅에 편안히 앉아서 킬킬거렸으니..

잠시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응큼하게 한참을 바라본 구릿빛의 누드는 과연 누구였을까?

뱃살이 느껴지지 않은 걸 보면 젊은 사람이 분명한데...기분 꿀꿀할때마다 들쳐봐야겠다.

 



 

단체로 '역마살'이 낀 이남자들 다음에 무슨 사고를 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아닌

기대가 된다. 혹시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탐험한다고 나서는게 아닐까.

그때까지 더 늙지말고 체력훈련 많이 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음 좋겠다.

 



 

자식을 잘 기르려면 여행을 시키라고 했던가. 마당발인 허영만 선장의 인맥도 부럽지만

가는 곳마다 환영해주고 격려해주었던 낯선 사람들의 인정이 나에게도 전해져 가슴이 참

따뜻한 여행이었다. 밑밥대장 김성선씨의 눈물겨운 헌신으로 잡혀 올라온 생선들의 빛나는

비늘이 그립다. 아 나도 '집단가출'호 타고 바다로 가고 싶다. 근데 여자들은 흔들리는 배안에서

어떻게 볼일을 해결하지? 이럴 때는 남자들이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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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
주원규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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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을 믿는가? 인간에게 있어 신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이 있다면..인간이 믿는 모든 신의 바램은 사랑과 헌신과 나눔이 아닐까?

한집 건너 교회가 들어서 있고 대형교회들이 성전(聖殿)이 아닌 성전(城錢)으로

우뚝 솟아 올라 인간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요즘...이런 모습이 진정 신이 원했던

인간의 모습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으로 가슴이 갑갑하고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의 상위에 오른 대한민국이건만 여전히 권력과 비리가

판을 치고 무자비한 공권력이 호시탐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나라.

더구나 거대한 교회의 성역화까지 더한 민감한 주제를 빠르고 실랄하게 그리고 있다.

 



 

익히 알고 있는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재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희생된 수많은 영세민들과

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밟고선 거대한 권력들과의 치열한 싸움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가난을 이기고 이곳에 이르기까지 이땅에 뿌려진 눈물과 피가 떠올랐다.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기고 더 어두운 그늘로 내쫓긴 사람들과 죽음으로 억울함을 알리려

했던 그들의 목소리가 저자에게까지 이른 것일까.

 

성직자라면 당연히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가슴은 아래를 향해야 하거늘..

오늘날의 종교는...성직자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

주일하루 수억원의 헌금이 걷히고 제왕처럼 군림하는 집단들이 늘어나면서 베드로가

세우려했던 교회의 모습이 진정 이것이었는지 그들에게 묻고싶다.

 

지금도 석연치 않게 끝나버린 ’망루’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들이 빼앗긴 자신의 땅위 하늘가까이 지은 ’망루’에서 이루고자 했던 소망은 무엇이었는지..

간절하게 이세상에 다시 오실 신(神)을 기다리며 치켜들은 깃발은 이제 하늘위에서나

펄럭일 것이다.

 



 

추천인들의 글처럼 마지막장을 덮을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긴박감과

결국은 선(善)이 악(惡)을 이길 수 있을것인가 하는 숙제가 남은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진다.

자신의 행복을 접고 깃발을 들고 앞장설 수 밖에 없었던 윤서와 존경받는 목사의 자리와

타협하지 못했던 민우가 도달하려고 했던 곳은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들이 더이상 오를 곳이 없는 하늘에서 핍박받지 않고 온전하게 자신의

터전에서 안식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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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헤어질 때 왜 사요나라라고 말할까 - 사요나라에 깃든 일본인의 삶과 죽음, 이별과 운명에 대한 의식세계
다케우치 세이치 지음, 서미현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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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할 때 하는 인사는 나라마다 다 다르다.
단순히 각나라말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른 것 뿐만이 아니라
헤어지는 느낌을 담은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이별의 인사가
사실은 그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시각으로 이책의 머리말은 시작된다.
중국의 재견(再見)!은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프랑스어인 'Au revior'역시 한번 더 만나자는 의미로..
영어의 Good bye나 스페인어의 'Adios'처럼 신의 가호를 비는 의미로서
작별의 인사는 많은 아쉬움과 기원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작별인사 사요나라는 어떤 의미의 인사일까.
앞에 일어나는 일을 받아, 뒤에 일어나는 일과 연결해주는 접속사 '사라바'는
'그러면, 그렇다면, 그럼'과 같은 의미이다.
이 '사라바'에서 시작된 '사요나라'는 끝맺음이면서도 끝내지 못한 아쉬움을
가득 담은 이별의 인사말이다.
사요나라~ 그럼...안녕히...하는 차마 뒤돌아서지 못하는 주저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사실 일본사람들의 정서를 보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친절하면서도 결국 속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장막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일본인들이 이별의 인사에 '사요나라'를 쓰게된 것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누구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자유로울수 없는 인간이기에 죽음에 대한 시선은
무겁고 두려우며 아픔이 존재하는 의식이다.
일본인들의 정서에서 죽음은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간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내일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라는 윤회의 사상에 근접해있다.
지금 비록 이별은 슬프지만 언제가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과 체념이 반반씩 녹아든
사생관이 이별의 인사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한국어의 '안녕히 가세요' '잘가세요'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넘어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인사말이다.
그래서인가. 유독 죽음에 초연한것일까.
자신의 배를 가르는 극단적인 죽음이나 자살이 유독 많은 것들 보면..
천상병시인의 말처럼 지금의 삶은 그저 잠시 소풍나온 것이라는 초연함마저
느껴지는 일본인들의 이별관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나로서 나 나름대로 죽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나'는
커다란 자연, 대지에서온 존재이며, 그곳에 돌아가는 것뿐....-240p

그저 나 자신은 커다란 강물의 '한 방울'에 지나지 않은 존재일 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그렇게 죽음과 '친숙함'과 '즐거움'을 지닌 일본인들의
사생관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거듭난 삶으로의 확신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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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 3일 1
이주호 지음 / 예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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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의 시간을 지닌 조선의 역사에서 당쟁이 없었다면 좀 더 생명이 길지 않았을까.

아니 어차피 국제정세에 휘말려 존속이 어렵다고 했더라도 일본이나 청이 노릴

수 없을만큼 강대국이 되지 않았을까.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몇명만 더했더라면 분명 조선의 역사를 다르게 쓰여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게 내 믿음이다.

 

성군은 하늘에서 낸다는 말이 맞는지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날개를 펴지못한

소현세자나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런점에서 너무도 안타까운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만인지상인 임금도 어쩌지 못했던 당쟁의 희생양으로는 단연 사도세자를 꼽을 수 있으리라.

더구나 친아버지에 의해 드라마틱한 삶을 마감해야 했으니 죽어서도 저승길이 어찌 들었을지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온다.

아버지 영조는 뒤에 두고두고 자식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다니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지키고

최장수의 삶을 누린 그의 일생이 홍복이기만 했겠는가.

 

영민하여 성군의 자질을 가졌다는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여전히 명백한 것이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표현되는 영,정조시대의 틈에서 사라져간 사도세자에 대한

작품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냉정했던 영조와는 달리 부성애가 강하고 현명했던 사도세자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친

'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 3일'이라는 작품은 그런점에서 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자신의 측근들이 연이어 살해되면서 서서히 자신을 조여오는 죽음의 세력과 맞서야 했던

사도세자의 고독한 싸움이 시작된다!

 



 

죽은자들의 입에 물려있던 귀룽나무가지의 뜻은 무엇인가?

 

 



 

죽은 자의 곁에서 발견된 호작도의 비밀은?

 



 

암호문처럼 나열된 글자의 비밀은 또한 무엇인가?

 

마치 미드의 CSI의 활약상을 보는듯 민첩하고 의로운 유문승과 원찬식은 과연 이 비밀들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뿌옇기만 한 안개가 서서히 걷혀지듯이 점차 선명해지는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이 연쇄살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왕을 능가하는 거대한 세력에 과연 영조는 무관하기만 한 것일까...

도무지 책을 놓을 수 없는 긴박감에 폭염의 기세도 느낄 수 없다.

역사에 얼마나 근접한 결론이 나올지 모르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도세자의 한(恨)은 어쩌면 이 한권의 책으로

조금쯤은 풀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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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를 이끈 20인의 실험과 도전 - 이야기로 보는 의학사 주니어김영사 청소년교양 6
크리스티안 베이마이어 지음, 송소민 옮김, 정재봉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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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발전사를 한눈에 보는것 같다.

지금도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히포크라테스선서’를 할만큼 의학계에서 그의 존재는 대단하다.

하긴 주술이나 종교가 강한 힘을 발휘하던 그 시대에 의학의 기초를 세우고 의술을 펼친다는 것은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은 막막함과 위험이 뒤따랐을 것이다.

 

 

병이 왜 생기고 어떤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적인 증명도 없이 순전히 의사의 판단만으로

진행되었던 시절에 비록 오류가 있고 체계가 부족했지만 학교까지 세워 후계자를 양성했던 그의

의지는 충분히 추앙받아 마땅할 일이다.

수명은 타고 나는 것이라 믿고 병으로 힘없이 죽어갔던 과거의 의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뒤엎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삶의 질을 향상 시켰다.

세균을 발견하고 면역체를 만들고 주위환경을 개선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런 의학자들의 목숨을

건 노력들이 얻어낸 열매였을 것이다.

실제로 콜레라균 액을 마신 막스 폰 페텐고퍼나 인간의 몸을 열지 않고도 인체를 투시할 수 있는 X선을

발견한 뢴드켄 역시 자칫하면 주작용을 일으킬만한 광선을 자신의 몸에 쪼임으로써 의학계에 혁신적인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시대의 선구자로 혹은 이단자로 대부분의 삶이 평탄하기가 어려웠을 그들이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역시 이 글을 읽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의 희생과 실험을 통한 그들의 사투가 감동스럽게 펼쳐져 있다.

비록 시작은 이발사였고 초기 의학자들은 밥을 걱정할 만큼 대접도 받지 못했지만 주위의 시기와 비난에도

꿋꿋하게 질병과 싸워온 그들이 있어 수명은 늘어나고 삶의 질도 향상되었으니 이렇게 역사책에라도

그들의 업적을 적어 후세에 전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심장을 비롯한 장기를 이식하고 체외수정을 통해 아기를 만들고 유전자를 선택하는 시대에 이른 지금..

우리는 의학의 고귀한 목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도를 넘어서는 않는 의학의 선택이 어디까지 갈지

잠시 고민하게 된다. 정말 복제인간이 나타나 무한의 삶을 주는 시대가 올런지..

돌연변이의 출현으로 멸망의 길을 걸을지...

저자의 우려처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놀라운 의학의 성과들이 앞서간 의학자들의 힘겨운 도전의 결과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류에게 허용된 선을 넘지 않는 지혜를 찾아야 할것이다.

또한 이 지구상에 이런 의료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좌절과 실패를 겪고 기적을 일군 앞서간 의학자들의 궁극적 소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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