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공지영을 꼽는다. 초기의 작품에서는

그다지 감동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예사롭지 않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데올로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처까지도 드러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그 때부터 난 그녀의 이야기가 좋아졌다.

 

좋은 학벌에 좋은 인물에..도무지 그녀가 불행해질 이유를 들자면 흔히 '팔자'라거니

'성질'이 더러워서라느니...더구나 요즘은 진보의 선두에 서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그녀의 행보를 보자면 참 답답한 구석이 없지도 않다.

조만간 쉰이 되는 그녀의 용기인지..만용인지를 지켜보는 팬은 가슴이 조마조마할 뿐이다.

 



 

결국 이 책을 낸 그녀와 첫 만남을 가졌었다. 물론 개인적인 만남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예뻤고 당당했고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여전히 당돌하게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녀석때문에 고민입니다. 아빠없이 혼자 키우는 아들녀석의 사춘기가

어떠했는지요?"

"다시는 기억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서...정말 너무 힘들어서 애한테 그랬어요. 그냥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을 해라..내가 아는 사람이 많으니 일자리를 구해주겠다. 그랬더니 픽 웃으면서

'엄마 농담도 잘하네' 그래요."

 

힘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유별났던 결혼과 이혼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면서 온갖 시선을

견뎌야 했을 것이고 밥을 벌기 위해 밤을 세워 글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치고 힘들었을 때 달려간다는 지리산!

그곳에는 참 유별나서 유별난 그녀가 섞여도 전혀 유별날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행복학교'가 있단다. 처음 이 글이 신문에 연재되고 가뜩이나 여자등쌀에 몸살을 앓던 '버들치시인'은

지금 더 많이 여자들에게 둘러쌓여 있으며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져 시집도 내었단다.

정말 평생 네번도 아니고 네번 반만 여자를 안았을까...아 오늘 밤 궁금해서 잠자긴는 다 틀렸다.

남의 남자 잠자리 횟수가 뭐 그리 궁금할 일이라고............그러나 궁금하다.

 

고알피엠 여사의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전장에서 후퇴한 패잔병을 구원해준 용기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러게....정말 시인들은 사랑을 해야 글이 잘 써지는 모양이다. 물론 그 순간

그의 연인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될테고...근데 그게 언제까지 유효하지 않은게 문제지만.

 



 

지금은 주차장관리인 자리에서도 떨려났다는 최도사도 걱정스럽고 늙어가는 개 '지화자'가 또 뜨거운

밤을 보내고...뜨거운 낮일수도 있겠지만...또 헐떡거리며 새끼를 낳아야 하는 천형을 겪을지도 걱정이고.

아니..정작 밥이 끓던 죽이 끓던 만사태평인 그들은 행복에 겨워 학교까지 세웠다는데...보는 나는

왜 이리 걱정이란 말인가. 도시가 싫고 속박이 싫고 편견이 싫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다는 그들이

과연 몰려드는 사람들에 휩싸여 초심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난 어느새 언제 짐을 꾸려 슬그머니 묻어 갈까.

궁리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나 하나 더 얹혀져 들어간대도 뭐 워낙 품이 넓은 지리산이니 내 몸과

영혼에 덕지덕지 붙은 온갖 오욕과 불행의 찌거기들을 조금 풀어 놓는다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우선 '버들치시인'집에 전화를 걸어 그의 구수한 자동응답기 녹음부터 들어봐야 겠다.

"덥기는 덥지요? 고추밭에 빨갛게 익은 고추를 안 따고 놔두었더니 그만 뚝뚝 떨어져버렸네요.

집에 있는 꼬추들은 잘 간직하고 있겠지요. 이 더위에 꼬추가 축축 늘어져 떨어지지 않도록

잘 붙들어 매주시기 바랍니다. 전 지금 개울가에 있습니다. 뭐하냐구요? 빨래하지요. 안녕!"

푸하하..이제 꽃피는 봄이 왔으니 어떤 멘트가 녹음되어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꽁지작가! 솜씨 좋은 사람이 얼굴까지 예쁘면 성질이 좀 더러워지지 마련이긴 한데

그대 말처럼 계산 정확하고 남에게 신세 안지고 그리고 속이지 않는 것도 다 맞는데..

솜씨는 좋지 않고..얼굴도 별로이긴 한데 성질도 좀 더러운 사람이야...근데 그 사람도 계산

정확하고 남에게 신세 안지고..속이지 않고..가면 친구좀 해주실라나...누구냐고? 나지 누구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설픔 -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기웅 지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밥퍼주는 최일도 목사님은 문턱이 높은 병원이 야속해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병원을

지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 병원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적은 월급과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참 의사와 의료인의 자세로 봉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라고도 했다. 나는 그 병원이 아픈 몸을 치유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지치고 아무도

돌보는 없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 주는 진정한 병원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병원이란 곳은 정말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성적순으로 뽑힌 의사들은

아픈 몸만 열심히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어 버렸다.

물론 병원과 의사의 존재 목적이 그러하므로 그건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여기 그 의사로서의 단순한 소임을 벗어나 엉뚱한 치료에 힘을 쏟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나는 사람들이 아프기를 바라는 한의사입니다."라고 돌에 맞아 죽을 소리까지 서슴치 않는다.

어려서 부터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시달리더니..결국 혜안이 열린 것인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혼의 질병까지 들여다 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침도 놓지 않고 약도 처방하지 않는 이상한 치료법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 쯤되면 이 사람..한의사라기 보다는 나수자 같은 철학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모범만을 강요받는 시대에 제목자체가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어설픔'이라니...하긴 한의사라는 전문직업인으로는 상당히 어설퍼 보이긴 한다.

의학공부 열심히 해서 병고치는 명의가 되나 했더니..인도로 히말라야로..맥 놓고 떠돈 시간이

더 많아 보이기까지 한다. 얼핏 스님이 되거나 명상가가 되었더라면 더 어울릴 법한 남자!

천지에 부처가 가득하니 산에 들어가야만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어느 스님의 말마따나

산속보다는 이 속세에서 그가 할일이 더 많아 보이니 어쩌면 그가 도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숨어 버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기도 하다.

 



 

'세상을 깊이 들여다 보는 법'을 알아야 만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던 시인의 말도

생각났다. 바람소리, 나무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다보니 시가 되었다는..

저만치 떨어져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우주를 보는 법을 꾸준히 익히더니

이제 이 사람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을 만큼 혜안이 밝아진 모양이다.

어수선한 도시의 생활을 접고 논산에 쉼터라는 병원을 열고 진료를 시작한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깊은 사람들이었다.

사랑에 굶주리고 무관심에 병들고 혹독한 삶에 여정에 지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영혼을 어루만지며 자연의 품으로 인도하는 그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졌다.

나도 완벽한 삶을 이루기 위해 한시도 나를 내려놓은 적이 없으며 불면의 밤들이 길어지고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타같은 명의가 아니면 도저히 고칠 것 같지 않은

이 병도 그 곳에 이르면 말끔히 회복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침도 약도 고칠 수 없는 병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존재가 이 우주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과 집중과 사랑이 필요했는지...그렇기에 지금 비록 너덜너덜한

몸뚱이에 헐벗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지만 한 없이 소중하다는 자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절망한 여인을 구원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사람이니..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친구라도 삼아주지 않겠는가. 그런 바람으로 그를 찾아 이 봄..

햇살 가득한 그의 쉼터로 찾아갈 것이란 예감으로 벌써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당신에게 왕은 누구인가? 군주의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누구에게나 살아오는 동안 영웅이 있다.

아버지 일수도 있고 존경하는 스승일수도 있고 정말 어느 왕국의 왕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사오란 인물의 이름은...참으로 안타깝게도 대지진으로 참담한

현실을 맞게 된 일본과 상관이 있으며 광복이 되던 해에 태어난 마사오가 그의 부친이

빌붙어 지내던 일제의 헌병조수, 혹은 순사 끄나플의 경력과 무관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가 지금까지도 마사오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에는 일국의 왕의 이름

으로 ‘박정부’라는 독특한 본명이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바로 주인공 ‘장원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마사오가 왕으로

군림하던 곳이다.


때는 사단장이었던 어떤 군인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이지만 굳이 이곳이 어느 지역인지

는 알려고 하지 말자. 나와 당신이 자랐던 고향일 수도 있고 아마 이런 곳이 수십 곳일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우리나라에는 마사오같은 왕과 그를 추종하거나 견제하는 똘마니들이 있는 왕국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혹시 당신의 고향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주인공의 영원한 왕이며 그가 자란 지역의 왕이었던 ‘마사오’가 죽었다.

사실 주인공은 마사오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문상을 갈 필요도 없었다.

정승의 개가 죽으면 상가가 미어터지고 정승이 죽으면 썰렁하다는 속담대로 왕의 상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쓸쓸한 병원 장례식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지만 희미해진 왕의 실체를 제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사람도 같은 운명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두 인물,

바로 주인공과 재천의 관계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국 힘이 쎈 재천에게 빼앗긴 전력으로

보자면 분명 적에 가까워 보이지만 한 때는 친구라고 여겼던 시절도 있었으니 참으로 어정쩡한

사이처럼 보인다.


마사오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군대 시절 탈영을 하고도 일개 중대의 헌병들을

물리쳤다거나 엄청난 힘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진정 왕이 되려는 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없고

도움이 필요없으면 도와주는 사람도 없게 된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니

사람이 없으면 다스릴 백성이 없는 것이고 백성이 없는데 왕은 무슨왕. 약아빠진 인간보다 어리석은

인간이 왕이 되는 이치도 이와 같다.’ -290p

 


마사오가 굳이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자면 고작 이런 이유가 전부일 것이다.

마사오는 완벽하지 못했고 심지어 어리석기까지 했으므로.


그 지역에는 마사오보다 조금 머리가 좋거나 아부를 잘하거나 말 잘하고 소문을 잘 만들어내는

참모들이 너무 많았다. 왕의 자리를 탐내고 끌어내리려는 깍두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사오가 왕으로 있는 한 그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이 죽고 권좌를 향한 이인자 삼인자들의 다툼이 시작되면 왕국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이 영원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사오는 자신이 원했던 자리는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화려한 은퇴식을 고하서야

왕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칼을 기가 막히게 쓰거나 맷집이 좋거나 자신을 따르는 무리가 많거나 했던 놈들은

모두 죽거나 사라지고 정작 마사오가 버린 왕의 자리를 차지한 놈은 혀끝이 야물었던

놈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돈이나 칼보다 혀끝이 더 무서운 무기였음이 증명이

된 셈이다. 세치 혀로 이간질과 거짓 소문과 허풍과 아부가 이룬 결과였다.

 


어느 사회이든 줄을 잘 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찌질하게 퀴퀴한 지하셋방을 전전하고

있는 주인공보다는 그를 차버리고 재천을 택한 세희의 선택은 탁월해보인다.

스스로 여자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왕비의 자리는 차지한 셈이니 변방의 족속으로 속한 사내의 여자가 되는 것 보다야

훨씬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줄을 제대로 서지 못해 왕비는 커녕 왕을 먼 발치로

본적도 없는 일개 무수리의 삶을 살고 있지만 과연 내 마음의 가장 오랜 영토를 지배하는

영원한 왕은 누구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그 것은 잘 정리된 삶을 살아가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누군가 내 삶을 지배하는

왕이 있었다면 하층 백성의 삶을 살아도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말이다.

혹시 지금의 내 삶이 이렇게 고단하고 외로운 것은 자각은 없었지만 스스로가 왕이라고

생각하고 오만했던 결과는 아니었을까. 전혀 완벽하지도 않았고 수시로 도움도 필요했으며

심지어 어리석기까지한 나야 말로 왕의 자질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왕을 찾아서 온전히 내 마음의 영토에 영접하고 싶다.

그래야 울퉁거리고 이가 맞지 않은 엉성한 톱니바퀴같은 내 삶이 제대로 돌아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 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정민.김동준 외 지음 / 태학사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이 어떤 기록물보다 충실한 역사 자료가 된다.

당시의 인물과 풍물은 물론 역사의 현장까지도 우리 눈앞에 가감 없이 전해주기 때문이다.

'옛글을 읽는 묘미! 옛 문인들의 삶을 한눈에 보는 재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한문학,국어학,

철학,음악사,미술사와 같은 각종 한국학 양념들을 적절히 버무려 스물 일곱가지의 맛깔난 만찬이

차려진 괜찮은 식탁이 차려졌다.

 



 

학교나 전공에 상관없이 그 분야에서는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 가장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솜씨있게 뽑아낸 작품이니 아마 한국 최고의 교양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 선비들이 즐길 수 있었던 문화는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정도의 소박한 것들 이었을것이다.

굳이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다면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핀다는 매화 한그루를 작은 분을

옮겨 달빛을 벗하고 은은한 촛불아래에서 그윽한 매화향을 즐기는 '매화음'정도가 아닐까.

화원 신분의 김홍도역시 2000전을 들여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 술 몇되를 사서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을 마련하였다니 당시 매화 완상의 풍조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0년, 두릉에서 다산 초당으로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빛 바랜 낡은 치마,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년, 떨어져 산 세월이 어느 덧 10년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보기와 달리 곰살궂은 데가 있었다. 친한 벗과 제자를 위해 낡아 헤진 천을

잘라 멋진 글과 글씨를 써서 작고 예쁜 첩으로 만들어 선물한곤 했다. 그의 아내가 굳이 낡아 못 입게

된 치마를 보내온 것은 남편의 이런 소용을 헤아렸기 때문일 터.'       -본문중에서-

 

 

다산은 치마 솔기를 뜯어 잘라낸 다음 풀 칠하고 배접해서 공책을 만들어 잔뜩 풀 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나간 가르침이 '하피첩' 세 책이 되었다.

실물은 몇 년 전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덥혔다.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년 마침 강진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에게

시집간 딸을 위해 매조도(梅鳥圖) 한폭을 그려준다.

 



 

펄펄 나는 저 새가           

내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

 

안마당에 찾아든 새 두마리는 사위와 딸이다. 멀리 떨어져 가까이 데려와 짝지어준

기쁨을 '머물러 지내면서 / 집안을 즐겁게 하렴'으로 표현했다.

꽃이 많이 피어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다고 하여 딸에게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축원했다.

 

 

2009년 6월 다산의 매조도 한 폭이 새롭게 공개되었다. 글씨도 그림도 영락없이 그의 솜씨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었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시가 왠지 슬프다. 1813년 8월19일에 지었다. 앞서 시집간 딸에게 준 매조도를 7월 14일에

그렸으니, 이 그림은 그로부터 35일 후에 그린 것이다.

누구를 위해 그린 그림인가?

 

다산은 초당 생활 중에 얻은 소실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두었다.

혹시 이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닐까.

 

----------------------------------------------------------------본문발췌정리-----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소실을 두었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렇게 매조도를 그리고 시를 지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정실에게서 난 딸이 시집을 간 며칠 후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얻었다니 우리나이로 52세의 나이에

얻은 딸이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유배생활이 끝나고 1818년 두릉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홍임

모녀를 함께 데리고 왔으나 다시 초당으로 쫓겨 내려갔다. 본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어진 아내라도 어찌 시앗을 좋게 보겠는가.

다산이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네 어머니의 속이 좁다'고 탄식하였다니 무릇 남정네의 이기적인 속성은

다산도 어쩔수 없었던 모양이다.

소실 정씨는 떠도는 얘기처럼 주막집 노파의 딸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씨가 두릉 본가에서 쫓겨나서 강진으로 내려와 지었다는 '남당사'를 보면 눈물겹기만 하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가.

 

'아빠 언제와"'하며 이제 대 여섯살 난 딸이 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또 다른 유배의 모습이 아니던가.

결국 그녀는 평생 다시 다산을 만나지 못한 듯 하다. 그렇게 모녀는 무심히 잊혀졌다.

만년의 다산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인륜의 정도 여인의 투기앞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두 모녀의 삶이 슬프기만 하다.

홍임모녀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추정되는 다산의 두 번째 매조도는 절친인 이인행에게 건네어져

이인행의 집안과 누대 연비로 맺어진 문한가의 종손에게 물려진 모양이다.

 

정실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시집간 딸과 소실의 딸인 홍임을 위해 두 점의 매조도를

남겼다니...치마를 보낸 정실의 입장에서 보면 원통할 일이었을 것이나 다행히 정실부인이

살아생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을테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

정민교수님은 유배지인 초당에 열 여덟의 제자들이 와글와글하여 살림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였으리라고 변명(?)을 해주셨지만 남정네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다산도 남자인 것을.

다산과 소실 정씨와 딸 홍임의 사연이 어린 매조도를 보니 사랑하는 이에게 잊혀지고 홀로

쓸쓸이 늙고 죽어갔을 한 여인네와 아비를 그리며 평생 서녀로 살아갔을 홍임의 삶이 아프기만 하다.

 

 

 '나는 초정 박제가(1750~1805)가 중국 지식인과 교류하는 과정을 주목하고서 그 증거물을 물색해왔다.

조선과 청의 지식인들은 시문과 서책, 그리고 서화를 주고 받았으나 그 밖에도 적지 않은 물건을 주고 받았다.

박제가는 그들에게 주로 청심환과 조선종이와 접부채를 선물했다. 또 조선 소주를 가지고 가서 맛을 보이기도

했고, 조선의 갓과 복건, 일본도 따위도 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중국 지식인도 적지 않은 물건을 박제가에게

선물했다. 박제가가 나빙(1733~1799)에게 준 시에 "나는 은화를 주고 산 물건이 하나도 없나니/ 시 주머니

그림 축이 엉성함을 비웃노라"고 읆은 구절이 있는데 그가 조선에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은자로 산 것보다

선물로 받은 것이 많음을 실토했다.'                 

 

'박제가에게 많은 물건을 준 인사 가운데 손형이란 사람이 있다. 총독을 지낸 손사의의 아들이다.

그는 유독 박제가를 만나고자 늘 목을 빼고 기다렸고, 늘 선물을 주려고 안달이었다. 그 손형이 1790년에

초정 박제가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했다. 다름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 의종(1628~1644)이

황궁에서 사용하던 현금(玄琴)을 선물한 것이다. 검은 옻칠을 했고 휘는 자개로 만들었다.

줄은 일곱이고 길이는 가로로 무릎보다 길며 복판은 푹 파여 비어 있는 물건이었다.'

 



 

'손형이 박제가에게 이 물건을 준 이유를 명나라 황제의 물건이라 꺼림칙하여 자기 집에 두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설득력이 충분한 추정이다. 숭정제의 유품을 꺼림칙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본문중에서------------------------------------------------

 

청나라 건룽제 치하에서 총독까지 지낸 손사의의 아들 손형의 입장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유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청조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해석 될 수도 있었겠다.

박제가는 1790년 선물받은 숭정제의 유물를 가지고 귀국하여 1792년 돌연 석재 윤행임에게 찾아가 건넸다고 한다.

윤행임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심양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 윤집의 후손이다.

당연히 청나라에 의리를 지키는 집안이 유품을 지니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후에 윤행임은 사사되는 사건을 발생하여 숭정금은 다시 떠돌아 추사 김정희에게 흘러 들어갔다가 1853년 후손인

윤정현이 돌려 받았다고 한다.

 



 

안대회교수님은 윤행임의 사후 이 숭정금이 추사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를 추사가 쓴 <숭정금실>이란

네글자로 추정하고 있다. '글씨의 내용이 숭정금이 보관된 집이란 의미이므로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최완수 선생의 '숭정고금가 서문'을 들었다.

윤정현이 함경 감사로 재직 할 때 마침 이 지역에 유배온 추사를 만나 선친이 애지중지하던 숭정금의

존재를 물었고 추사는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했고 모두 서울로 돌아온 위 추사는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보냈다고 한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추사가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돌려주며 숭정금을 보관하고 즐기는 집이라는 의미로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정작 김정희는 숭정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남기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의

하나로 들수 있다는데..

추사가 숭정금을 실제로 보관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왕이 애지중지하던 거문고가 어찌어찌하여 조선의 박제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윤씨집안으로

흘러들어왔던 사연이 기구하게만 느껴진다. 그후 숭정금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이렇듯 한 학자에 의해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한 때는 찬란했던 명나라의 시간들이

퉁땅뚱땅하면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지나간 시간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 한장 한장을 들여다 보니 그 곳에는 종이와 물감이 아닌

살아있는 인물과 사연들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훅 펼쳐서 3D의 생생한 입체감으로 전달해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속을 다녀온듯 뿌듯하기만 하다.

13년의 세월을 순수한 학문의 열정으로 나누고 조언하고 비판하며 이 책을 만들어 주신 젊은 인문학자

27분에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내 서고에 아주 소중한 유산으로 남길 책을 만들어 주셨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 열기 - 최일도 목사가 시편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 개정판
최일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농부는 갈라진 논 바닥에 물 들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고

가난한 엄마는 자식입에 밥들어가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소외되고 밥 굶는 사람들에게 밥퍼주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목사님이 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한다’는 뜻을 가진 ’다일공동체’의 설립자이며

수녀였던 아내와의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신 최일도 목사님이 전하는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이다.

 



 

성경구절 중에서도 하필 시편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는 무엇일까.

 

’도대체 시편이란 무엇이었나? 시편 속에 실린 시 한 편 한 편이 결국은 당시의 유행가

가사를 채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71p

 

실제로 당시 시편은 예배 교독문으로 낭송되기 위해 쓰인 것뿐만 아니라 당시 히브리인들이

악기 반주에 맞춰서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랫말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찬양과 경배로 가득한 노래를 지은 시편속에 깃든 진실함이 너무 좋아서 청량리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내내 성경의 시편으로 내내 기도했다고 했던가.

 

성적순으로 의사가 되고 법조인이 되는 이 시대의 풍조는 확실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남다른 사람은

의사가 되며, 사회정의 구현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당연한 진리를 무시한 사회이다 보니 이 땅의 의사는 그저 돈만 아는 단순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죄를 심판하는 법조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반말이나

하는 불경을 서슴치 않는 몰상식의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면 가난하고 병든자에게 밥만 퍼주는 봉사자가 아닌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진정한 의사가 바로 최일도 목사가 아닌가 싶다.

 

정작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못하고 이웃에게만 봉사하는 삶에 대한 고뇌는 너무도 안타깝고

그런 이웃의 어려움을 모른척 하고 살아가고 있는 내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또한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여 돈을 벌고 양육하는 짐을 나누어진 아내의 헌신이 어찌나

고맙고 존경스러운지...부창부수라고 하더니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사는 가정의 모습이

너무나 부럽기만 하다.

 

때로는 멀쩡한 몸을 지니고도 당당하게 밥을 얻어먹고 구걸을 하며 폭행을 일삼는 무뢰한들에게

미운마음이 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에서는 차라리 너무나 인간다워서 더욱 가까운 느낌마저 든다.

 



 

라면을 끓여주다가 밥을 퍼주는 남자가 된 목사님이 이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허기진 영혼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삶의 양식을 차려 놓으셨다.

여전히 바람은 차갑고 세상 곳곳은 전쟁과 기아와 지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 뿐이다.

그래서 일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목사님의 말대로 마음을 열고 소중하게 나눈다면 이 가난한 영혼이 채워진다니 그저 나누어

주신 이 책을 양식삼아 허기를 채워볼 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