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읽는 이유 - 기시미 이치로의 행복해지는 책 읽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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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를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저자가 쓴 독서 에세이인가 보다.

제목부터 마음이 확 끌리는데 내용도 간략하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현학적인 내용이 없어 마음에 들고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다.

왜 책을 읽는가?

독서의 궁극적 목적은 생산적인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즐거움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수단으로서의 독서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독서라고 할까?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음악도 듣고 공연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옷도 사고 온갖 즐겁고 재밌는 일들이 많은데 독서 역시 바로 그런 즐거움을 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본질적으로는 추천 도서 목록 따위는 필요없다고 본다.

그냥 내가 이 책 저 책 손이 가는대로 호기심이 생기는대로 읽으면 된다.

좋은 책을 소개해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쉽게 절판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말 공감이 된다.

이렇게 쉽게 책이 없어지나 나도 깜짝 놀랠 때가 있다.

그래서 도서관의 역할은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를 구입하기 보다 쉽게 절판되는, 또 개인이 구입하기 어려운 책들을 갖춰 놓는 거라고 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도서관을 가끔 가는데 여기는 전시회 도록이나 비싼 미술책들이 많아 정말 좋다.

대출도 안 되고 열람 시간도 짧아 자주 못 가는 게 너무 아쉽다.

그래서 가급적 전시회 도록은 사려고 하는데 도판이 대부분이라 가격대가 있어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도록들이 도서관에 비치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도서관 측에서는 전시회 도록 구입은 안 해주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궁극적으로 나는 저자처럼 책이 전혀 비싸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문화 활동에 비하면 정말로 싼 편이고 계속 재독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보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항상 장서의 보관에 대한 문제가 독서가의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시간 확보.

저자는 시간이 부족해서 책을 못 읽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렇긴 하다.

시간은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내는 거니까 아무리 바빠도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일상에서 보다 많은 독서 시간을 만들고 싶어 남들은 어떻게 하나 궁금해진다.

내 경우도 다른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지만 매년 200 여 권의 책을 읽는다.

그래서 책은 더더욱 재미가 없다면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저자의 말처럼 정말로 너무 재밌고 읽고 나면 행복해지기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개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넓어지고 지혜가 쌓이고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이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거고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인상 깊은 구절>

125p

책을 읽는다고 배가 부르지는 않지만, 배고픔을 견디면서까지 침식을 잊고 책을 탐독하는 것이 나는 삶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과 열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과의 만남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한 글자도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의식적으로 노력해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책 읽을 시간이 전혀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99p

주어진 현실만 보면 내가 병에 걸렸을 때도, 아버지를 간병했어야 했을 때도 절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는 현실도피라기보다는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기쁨과 생명의 고취가 현실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독서는 내게 역경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었다. 간혹 마음이 약해질 때 앞으로 대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죽는 날까지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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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21-04-2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년 200권이라니 대단하십니다

marine 2021-04-20 16:41   좋아요 0 | URL
읽고 읽고 또 읽고~ 제 인생의 모토입니다 ^^
 
독서의 궁극 : 서평 잘 쓰는 법 - 읽는 독서에서 쓰는 독서로 더행의 독서의 궁극 시리즈 1
조현행 지음 / 생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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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면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어렵다기 보다는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작업이라 읽을 책이 쌓여 있고 시간은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건너 뛰게 된다.

그나마 알라딘에 읽은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해 간단한 감상문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럴 듯한 서평을 쓰고 싶은 욕구가 항상 있어 이런 책들을 읽게 된다.

그렇지만 늘 느끼는 바대로, 서평을 읽는 것과 직접 책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남의 서평은 그저 참조만 할 뿐이고 오히려 서평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이 책을 읽고 정리하는데 의의를 둬야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직업적인 서평가를 꿈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또 논술 시험을 보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게 아니므로 서평 보다는 오히려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문이 일반 독자에게는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서평이란 그저 아,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들면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된다.

서평을 읽고 책을 요약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 이런 호기심이 생긴다면 좋은 글이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주로 비문학을 읽기 때문에 감상문 쓰기가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내용을 요약 정리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400 페이지 정도의 책이 전하는 지식을 하나의 주제로 압축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대로 중요한 부분을 따로 적어 둔다.

확실히 필사를 하면 어려운 문장도 더 쉽게 이해가 된다.

글을 쓰면서 한 번 더 곱씹어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사는 정말 힘이 많이 들고 시간도 꽤 걸리며 필사한 노트를 다시 읽어보면 전체 맥락에서 동떨어져 있어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를 때도 있다.

책에 나온 것처럼 단순히 필사를 한다고 문장력이 좋아질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다.

저자는 감상문과 서평의 차이에 대해, 서평은 타인의 동조를 구하고 주장에 대한 근거를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간단히 이 책은 읽어 볼 만 하다. 왜냐면 이런 점이 좋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남들도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밝힌 게 서평이라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서평을 못 쓴다는 말에 공감이 됐다.

적어도 2/3 정도는 책의 내용을 이해해야 글이 써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독이다.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을 때는 워낙 새로 배우는 내용들이 많아 일일이 표시를 해 둔 후 옮겨 적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요즘에는 표시한 부분만 다시 읽고 있다.

도서관 책은 이 점이 아쉽긴 하다.

재독하고 싶을 때 바로 읽을 수 없고 표시한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반납해야 한다는 점.

한 권의 책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적어도 세 번 이상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단 간섭 효과가 있으므로 시간차를 두고 읽는 게 제일 좋은 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써 보고 왜 동의하는지, 혹은 왜 반대하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보다 입체적인 독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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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예술의 하모니 : 구약편 - 말씀을 풍요롭게 하는 음악과 미술의 이중주 성경과 예술의 하모니
신영우 지음 / 코람데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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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편은 좀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모르는 명화들이 많이 나와 보는 내내 그림 보는 즐거움이 컸다.

특히 샤갈이 이렇게 많은 성경의 일화들을 그렸는지 처음 알게 됐다.

보통 성경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은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는데 샤갈의 성화들은 색채부터 환상적이라 너무나 신선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인지 구약의 주제들이 많아 이 책에 많이 실려 있다.

렘브란트 역시 신약편에도 많이 나왔지만 구약에 관한 그림들이 정말 많다.

오히려 가톨릭을 대표하는 루벤스의 그림들이 성경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더 많은 느낌이다.

나는 렘브란트 보다는 루벤스를 더 좋아하는데 이번에 렘브란트의 명화들을 보면서 많은 관심이 생겼다.

도판 상태가 훌륭해서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인상깊은 구절>

119p

교회음악을 듣는 삶은 은혜와 축복을 느끼게 되므로 항상 기뻐하게 되고, 거룩함과 영적 성장에 의해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며, 매사에 마음의 평정과 여유로움이 생겨 범사에 감사하게 되니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내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195p

니콜라 푸생은 렘브란트, 루벤스와 동시대 화가지만, 빛을 추구하지 않고 뚜렷한 윤곽선에 강렬한 색채와 정밀한 필치로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고전주의를 이끈 화가로 특기인 풍경을 배경으로 성경 이야기를 담아 많은 성화를 남겼다.


<오류>

113p

렘브란트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베를린 국립미술관

-> 이 그림은 베를린 회화관, 즉 Gemaldegalerie 에 있다. 국립미술관이라 번역되는 곳은 다른 곳이다.

129p

코르넬리우스 '바로의 꿈 해석' 베를린 국립미술관

-> 이 그림은 베를린 Alte National galerie 즉 구 국립미술관에 있다. 구국립미술관 과 신국립미술관이 전혀 다른 곳이므로 정확히 구분해 줘야 할 것 같다.

149p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왕이 당시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 프리드리히 왕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3세이다.

168p

미켈란젤로는 페루지노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모세의 발견>와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제단화 <성모의 승천>이 위치한 벽 전체를 <최후의 만찬>으로 덮어버리게 된다.

->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다.

183p

렘브란트 '돌판을 깨뜨리는 모세' 베를린 국립미술관

-> 이 그림은 위에 나온 베를린 회화관에 있다.

230p

렘브란트 '삼손의 결혼' 베를린 국립미술관

-> 베를린 회화관에 있다.

234p

렘브란트 '삼손의 눈을 멀게 하다'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관

-> 국립미술관이 아니라 슈테델 미술관에 있다.

317p

루이 에르장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 앙제 미술관, 파리

-> 파리의 앙제 미술관이 아니라 앙제에 있는 Musee des Beaux-Arts, 즉 앙제 미술관에 있다.

386p

크라나흐 '율법과 은총' 궁전미술관, 고타

-> 이 그림은 고타에 있는 Herzogliches Museum 즉 공작령 미술관에 있다. 궁전이 아니라 ducal의 의미다.

415p

아하수에로 왕은 다리오 왕(다리우스 왕)의 아들 크세르크세르 2세로

-> 다리우스 왕의 아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이다.

486p

보엘 '세상의 허무함에 대한 우의화' 릴 미술관, 벨기에

-> 벨기에가 아닌 Palais des Beaux-Arts de Lille 즉 프랑스에 있는 릴 미술관에 있다.

489p

샤갈은 첫 부인 벨라와 사별한 후 딸 이다의 권유로 재혼하는데 연인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25살이란 나이 차이에도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긴 시간을 해로하며

-> 샤갈은 1887년생이고 발렌티나는 1905년생이므로 둘은 25세가 아니라 18세 차이가 나고 1952년에 재혼하여 샤갈이 1985년에 사망했으므로 33년간 혼인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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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예술의 하모니 : 신약편 - 말씀을 풍요롭게 하는 음악과 미술의 이중주 성경과 예술의 하모니
신영우 지음 / 코람데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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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미술에 관심이 생긴 남편이 구입한 책인데 아직도 다 못 읽고 있다.

500 페이지가 넘어 두껍기도 하고 처음 미술을 접한 사람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구성이다.

대신 도판이 그런대로 볼만 하다.

특히 그림의 크기와 제작년도, 소장처를 모두 표시해 두어 찾아보기가 쉽다.

소장처 표시를 안 해주는 경우도 많은데 이 책은 이 부분에서 꼼꼼하게 명시해 둔 점이 마음에 든다.

성경과 예술의 하모니라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명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교회 음악에 중점을 뒀다.

오히려 그림은 부수적인 느낌이다.

교회음악에 포커스를 맞춘 책은 본 적이 없어서 그 점은 신선했지만 잘 모르는 분야고 관심이 없어 지루하기도 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음악가들, 바흐는 말할 것도 없고 베토벤이나 말러, 혹은 현대 음악가들까지 이렇게도 많은 미사곡과 오라토리오 등을 작곡했다니 놀랍다.

확실히 유럽인들에게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이자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벤스의 제자였던 반 다이크가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린 성화를 봤는데 전형적인 바로크 풍의 성화라 깜짝 놀랬다.

그냥 봤으면 루벤스 그림이라 오해했을 것 같다.

반 다이크는 초상화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역시 대가들은 어느 분야에나 다 정통한 것 같다.

의외로 렘브란트의 성화가 많아 놀랬다.

루벤스처럼 전형적인 종교화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등장인물을 소재로 많은 그림들을 남겨 새로운 명화들을 많이 접하게 됐다.

성스럽고 영웅적인 성인들이 아니라 고뇌하고 부족한 인간을 그린 둣하여 명상적이고 현대적이다는 느낌이 든다.

조토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무려 700년 전에 그린 프레스코화는 어찌나 색감이 선명한지 깜짝 놀랬다.

자세히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니 왜 조토를 르네상스 회화의 시작으로 보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확 된다.

확실히 서양은 색채감에 있어서는 놀라운 전통이 있는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415p

"내 인생 여정은 모두 끝났으니 

거친 항해를 통해 나약한 육신을 통해

정박할 평범한 항구를 통해 모든 행동의 원인과 이유를 통해

선학과 악함을 통해

예술을 통해 이룩한 열정적인 환상은 

나 자신과 형상을 위한 절대권력을 만들었지만,

확신하는 것은 죄로 가득했던 나의 삶 모든 사람이 바람과 반대되었던 삶

내 탐미적인 생각 중 다가오는 것은

한때는 즐거웠으나, 또 다른 때는 허망한 것

죽음을 향해 내가 나아가니

한때는 확실했으나, 지금은 두려운 것

내 작품과 조각은 모두 헛된 것일 뿐

거룩한 사랑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

우리를 안아주시는 십자가에서 벌리신 그 분의 팔에 비한다면"

-미켈란젤로 소네트 238번, 1554년-

 로맹 롤랑이 "천재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가? 천재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가?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를 보라"고 토로한 바와 같이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묘를 장식한 조각이 그가 천재임을 대변하고 있다.

417p

"우리의 삶이 순례자의 길이라는 믿음은 매우 오래된 선한 믿음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의 이방인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절대 외롭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순례자고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천국으로의 기나긴 여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빈센트 반 고흐

433p

프레스코화 위에 세코 기법인 템페라화로 처리했으나 박리 현상으로 배경의 산과 나무가 많이 훼손되어 선명치 않지만 프레스코화로 옷의 주름과 무늬, 나뭇잎, 구름 등을 이같이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프란체스카만의 특별한 장인적 디테일이며 헉슬리의 찬사 또한 합당하다.

438p

조반니 벨리니는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로 당시 플랑드르에서 사용되던 유화 기법을 이탈리아 최초로 받아들여 풍부하고 자연스런 채색으로 티치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로 이어지는 베네치아 화풍의 기반을 가진 화가다. 벨리니의 특기인 배경을 한 폭의 아침 풍경화로 묘사하고 있어 등장인물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스토리가 엮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443p

칼뱅의 신교를 따르던 렘브란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가의 주장에 동참하여 예수님 부활의 상황을 구교의 전통 도상을 배제한 채 철저히 성경 본문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

446p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와 함께 벨리니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있으면서 유화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채색법을 실험하여 색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발전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여온 청금석을 갈아 만든 울트라머린 물감으로 베네치아의 파란 물과 하늘을 묘사하여 절찬을 받는다

477p

종교개혁 이후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적 권위 부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내용의 성모 찬양 음악을 규정하고(1568) 있으며,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를 확정한다.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에 이르러야 마리아를 은총의 중재자란 교리와 성모 마리아의 부활, 승천(1950) 교리를 확정한다. 그 밖에 성모 마리아의 아버지 요셉도 교회의 수호신으로 책봉되기에(1870) 이른다. 이같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단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신격화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483p

성모의 부활 승천, 대관식은 반종교개혁의 한 부분인 성모 공경 운동으로 확대되어 오다 19세기부터 정식 교리로 인정된다. 이로써 성모의 육신과 영혼 모두 천국으로 올라가 천상의 여왕으로 왕관을 수여받는 대관식이 벌어진다.


<오류>

124p

판 에이크 '수태고지' 런던 국립미술관

-> 런던이 아니라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 있다.

349p

렘브란트 '베드로의 부인' 라이스크 미술관, 암스테르담

-> 라이크스 미술관이 어딘가 봤더니, Rijksmuseum 즉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다.

다른 출처와 형평성을 위해 국립미술관으로 번역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412p

비토리아 콜론나(1492-1548)는 미켈란젤로보다 15세 연하의 귀족 출신 여인으로

-> 미켈란젤로는 1475년생이므로 콜로나는 17세 연하이다.

438p

조반니 벨리니(1403-1516)는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로

-> 벨리니는 1403년생이 아니라 1430년생이다.

439p

벨리니 '그리스도의 부활' 베를린 국립미술관

-> 이 그림은 베를린 회화관 (Gemaldegalerie)에 있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은 다른 곳이다.

510p

마틴 '최후 심판의 날'

-> 이 그림은 세 폭으로 이루어졌는데 'The Last Judgment' 'The Great Day of His Wrath' 'The Plains of Heaven' 이고 본문의 그림은 진노의 날 정도로 번역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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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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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너무 좋다.

하루키 글은 그냥 너무 좋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21세기 개인주의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라이프 스타일과 문체를 가진 작가 같다.

원래부터 개인주의 전통이 강했던 서구권이 아닌 일본이라는 집단주의 사회에서 이런 작가가 나왔다는 사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상실의 시대>를 대학교 때 읽고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랄까, 내가 평소에 보던 소설과는 다른, 뭔가 자유로운 개인이 어떤 존재인가, 혹은 사랑은 칙칙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매여 있지 않은 산뜻한 것이라는 걸 느끼면서 팬이 됐다.

은희경의 소설을 읽을 때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읽은 소설들은 솔직히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하루키가 그려내는 환상의 세계와 플롯이 전혀 현실적이지가 않고 이게 말이 되는 설정인가? 자꾸 이런 반발심이 생겨 소설 읽기는 중단했다.

어쩌면 내가 소설이라는 형식, 즉 있을 법한 이야기에 대해 별 흥미가 없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항상 진짜 사실인 논픽션, 혹은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정교한 플롯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작가의 진짜 매력은 에세이에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의 모든 에세이가 전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냥 이 분은 개인주의 그 자체 같다.

너무 자유롭고 권위나 집단에 속박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그러면서도 주변인들에게 강렬한 매력을 내뿜는 사람 같다.

문체 자체가 너무나 가볍고 산뜻하다.

문학상에 대한 작가의 소회 부분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평단의 평가나 외형적인 상이 아니라 독자들이 돈을 내고 읽을 만한 소설인지라는 것이다.

물론 평단의 평가도 중요하긴 하다.

명성을 얻으려면 대중의 열광만 가지고는 역사에 남기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정말로 본질은 직접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기 돈을 들여 선택해 주는지, 혹은 그 책을 읽고 나처럼 이렇게 깊이 감동하고 열정적인 감상문을 쓸 수 있는지라는 그의 작가론에 너무 공감이 된다.

아무나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전업 작가로서 오래 버티기는 어려운 법이고 꾸준히 책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할 만하다는 말에 공감이 된다.

소설가의 진짜 본질, 자부심의 원천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냐는 것이다.

당연히 팔리는 책을 써야 하는데 단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해 뻔한 소설을 쓰라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은 말초적인 가벼운 것만 좋아할 것 같아도 시장은 또 얼마나 냉정한가.

권위적이고 예술지상주의 작가론만 보다가 이런 본질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나도 모르게 가슴이 탁 트이고 글을 읽으면서 쾌감이 느껴진다.

오지리널리티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다.


112p

'아아, 이렇게 멋진 음악이 있다니, 이런 울림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음악은 내 영혼의 새 창을 열고 그 창으로는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공기가 밀려듭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행복한, 그리고 한없이 자연스러운 고양감입니다. 다양한 현실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내 몸이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쯤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것이 나로서는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의 합당한 모습입니다. 매우 단순하게.


바로 이런 느낌을 갖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혹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내가 하루키의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런 감정의 고양을 느꼈고, 지금 푹 빠져있는 가수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감동, 충만한 행복감이 든다.

이런 게 바로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적인 정의도 있겠지만 예술인지 아닌지는 그 작품으로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면서 미적 쾌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지가 진짜 본질이 아닐까?


<인상깊은 구절>

43p

나에게는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청춘의 나날을 즐길' 여유 같은 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먹고사는 게 힘들어도, 책을 읽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 함께 나에게는 언제나 변함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76p

요즘 책에 무관심하다, 활자에 무관심하다, 라는 얘기가 자주 들리고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5% 전후의 사람들은 설령 '책을 읽지 마라'고 위에서 강제로 막는 일이 있더라도 아마 어떤 형태로든 계속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처럼 탄압을 피해 숲에 숨어 모두 함께 책을 암기한다-라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몰래 숨어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을까요. 물론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책을 읽는 습관이 일단 몸에 배면 -그런 습관은 많은 경우 젊은 시절에 몸에 배는 것인데- 그리 쉽사리 독서를 내던지지 못합니다. 가까이에 유튜브가 있건 3D 비디오게임이 있건, 틈만 나면 (혹은 틈이 나지 않더라도) 자진해서 책을 손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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