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목소리 1 - 남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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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객석에 연재했던 성악가 시리즈를 책으로 엮은 모양이다.
연재물이라 한 꼭지마다 분리가 돼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으나 워낙 모르는 성악가들이 많이 나와 시간은 꽤 걸렸다.
<클래식 코리아>라는 사이트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여기 소개된 아리아를 찾기 힘들어 서운했다.
일단 영어가 아니라서 원어를 외우기가 힘들고 한글로는 번역이 워낙 다양해서 그런지 찾기기 어렵다.
사실 가사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도 오페라 볼 때 아쉬운 점 중 하나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오페라의 아리아를 원어로 배워보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음악 시간에 좀 더 열심히 따라 부르는 건데.

엔리소 카루소로 시작해 루치아노 파바로티까지 스물 다섯 명의 명가수들과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경쟁자들을 함께 실었다.
아쉬운대로 성악가에 대한 어느 정도 개념이 생기는 것 같다.
악기 연주도 좋지만 역시 인간의 몸으로 부르는 성악은 최고의 감동을 주는 것 같다.
흥얼거리는 몇 개의 아리아 외에 많은 좋은 곡들을 소개받아 유익했다.
뒷쪽에 100편의 아리아가 실려 있는데 시간 되는대로 찾아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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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남경태 옮김 / 들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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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린 책이다.
주제는 참 흥미로운데 이상하게 이 사람 책은 나와 잘 안 맞는다.
서술 스타일이 나에게 잘 와 닿지가 않는 것 같다.
<배 이야기>도 문장 하나하나가 훌륭한 것 같은데 전체적인 틀은 쉽게 와 닿지가 않아서 고생하면서 읽었었다.
꽤 다양한 관심사를 지녔던 제너럴리스트였던 것 같다.
72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때문에 처음에는 기가 좀 질렸지만 내용은 이 사람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이 아주 쉽고 평이하다.
가볍게 읽어 보는 예술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도판도 풍부하고 챕터도 읽기 쉽게 짧게 나눠져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에 몇 챕터씩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한꺼번에 읽고 갖다 주려고 하니 나중에는 분량이 많아 꾀가 났던 것 같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훨씬 더 평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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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클래식 - 조우석의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 음악 이야기
조우석 지음 / 동아시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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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클래식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궁금해 집어 든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아닌데 싶다.
클래식의 문화 권력화를 비판한 것까지는 좋은데, 바흐나 모짜르트 등의 음악 자체를 멜랑콜리 하다느니 깊이가 없다느니 하는 말장난을 친 것이 결국은 책의 품위를 깎아 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 자체를 비난한다는 건 그 사회적 맥락을 비판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대로 스스로 느끼는 것, 아무런 편견 없이 자기 좋을대로 듣는 게 최고라면 클래식 애호가들 역시 자기만의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 작품 자체를 재즈 등에 비해 죽은 음악이라고 비난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대체 그 기준은 무엇이고 과연 작가가 그것을 이처럼 원색적이고 노골적으로 판단할 깜냥이 되는 사람인가?
특히 국악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대금에 비하면 플룻은 앵앵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하는 식으로 비교한 건 천박하기 그지 없다.
국악의 아름다움은 국악 자체로써 강조하면 되는 일이다.
모짜르트 이팩트나 천재 신화를 비판하는 건 나름 의의가 있는 일이나, 모짜르트 자체가 별 거 아니라느니 그 음악이 깊이 없는 달콤한 과자에 불과하다느니 라는 식으로 나오는 건 경청할 가치가 없는 소리다.

이 책에서 공감했던 부분은 서양 고전 음악의 권력화를 비난하는 부분이었다.
천재란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가 만들어 낸 발명품이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마이클 셔먼의 책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대체 모짜르트가 단 한 번의 수정도 없이 처음부터 완벽한 악보를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냔 말이다.
주체성을 갖고 내 식대로 듣는 것, 어쩌면 예술을 감상하는 모든 감상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지도 모른다.
임동창이라는 퓨전 국악인이 소개되는데 이런 적극적으로 자신감 있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너무 오버해서 서양 클래식 듣는 사람은 죄다 서구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다는 식으로 매도하면 그 때부터는 방향을 잃고 만다.
서구 사회도 그렇지만 요즘은 대중음악에 비해 클래식이 하도 밀리고 있어서 그나마 젊은이들 사이에서 클래식을 듣자는 바람이 부는 걸 문화적 다양성 측면에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서구에서는 노인네들이나 공연장에 가는데 우리나라는 서구 선망 때문에 젊은이들이 저런 한심한 음악을 들으러 간다고 비난하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극단적인 논리에 한숨이 나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국악이나 재즈 혹은 민속음악이 클래식 보다 우월하다는데 이런 비교 자체가 벌써 문제가 있지 않을까?
클래식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 그것도 틀린 주장이나 반대로 그들보다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냔 말이다.

나는 어떤 예술이든 사회적 위상이나 이른바 권력 속성에 좌우될 필요 없이 자기만의 눈과 귀로 즐겨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책을 읽은 것은 지적이고 교양있는 척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 요즘 책 많이 읽는다면 오히려 따분한 사람으로 본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그 완벽한 충족감과 지식욕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클래식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귀에 듣기 좋고 가끔 생기는 감정의 고양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루벤스나 뒤러의 그림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게 지적인 체 하려고 일부러 고생스럽게 아무 감동도 없는데 하는 일이겠는가?
마음으로부터 느끼는 감동, 속에서 올라오는 울컥 하는 기분, 나도 모르게 고양되는 의식들.
직업적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스로 느끼는 그런 강렬한 미적 체험의 즐거움 때문에 기꺼이 돈과 시간을 들여 예술품을 감상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재즈나 국악에도 관심이 생기긴 했다.
다양성의 원리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일이므로 보다 많은 민속 음악들이 소개되고 각 분야에 자극을 줘서 새로운 형식들이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한 가지 더 비판하고 싶은 것은 저자의 그 과도한 오리엔탈리즘 극복 의식이 오히려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흐르고 심지어 보편적인 정서나 과학까지 무시하는 옥시덴탈리즘은 아닌지 하는 점이다.
의학은 그저 의학일 뿐이다.
인간의 몸을 보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회적인 그런 담론의 수준이 아니고 실제로 몸의 작용과 기능, 질병의 원인과 병인론에 대해 살펴본다면 민족의학이나 서양의학이니 하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어설픈 사회학자들이 의학에 대해 관념론적인 시각을 들이대면 참 한숨이 나온다.
의학에 대해 공부를 좀 하고 떠벌였음 좋겠다.
민족의학, 민족음악 이런 구별짓기 자체가 벌써 보편성을 무너뜨리고 차별적인 시선을 만드는 시도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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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 보스에서 렘브란트까지 그림 속 중세 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세상 중세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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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이 무척 화려한 흥미로운 중세 여행이었다.
사실 이 책보다는 저자의 전작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가 더 좋았다.
아마도 전공이 근대 미술사 쪽이 아닐까 싶다.
중세 이야기도 재밌게는 읽었지만 본격적인 중세 미술론으로는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저 도상학적으로만 봤던 중세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살펴 본 유익한 기회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던 중세 그림은 하나도 안 나온 것 같다.
중세화라면 조토나 치마부에처럼 평면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언급한 그림들은 르네상스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르네상스를 포함해 근대 이전을 모두 중세로 보는 것일까?
히에로니무스 보쉬나 페테르 브뤼헬 같은 이들도 중세 화가에 들어가는 걸 보고 좀 놀랬다.
물론 그들의 종교화난 풍속화는 확실히 라파엘로 등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투시원근법을 차용하지 않았으나 조토의 제단화 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중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나 선택한 그림들은 대부분 르네상스 시대 것이라 다소 의아했다.
그러나 중세인들을 관통하고 있던 하나의 시대적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 같다.
도판도 훌륭하고 한 화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점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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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없는 미술관 - 대중시대 미술관의 모색과 전망
심상용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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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이 독특하고 표지가 마음에 들어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했는데 나온지 오래되서 서고에 있는 책이라고 대출이 안 됐던 책이다.
이번에 파견나와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후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됐다.
사실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제목만 가지고 나는 단순히 미술관 시스템이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현대 미술 전시회에 관한 일종의 감상문 연작이었다.
책도 출간된지 꽤 오래되서 세상에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1990년 전시회부터 있는 것이다.
도판도 요즘 나오는 책과는 달리 거의가 흑백이었다.
표지는 저렇게 멋들어지게 해 놓고서 안의 사진들도 좀 보강을 할 일이지...

그러나 저자의 성실한 집필 태도와 그의 말마따나 수준있는 관객, 훈련된 관객이 보는 전시회는 역시 다름을 느꼈다.
내가 현대 미술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던가?
나는 현대 미술이 관객의 보편적인 미의식을 외면한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했다.
특히 다다이즘 같은 반예술을 혐오했다.
내가 처음으로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칸딘스키의 그림을 직접 본 다음이었다.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 출품된 작품인데 그 색감과 사물의 발랄한 배치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들리는 그림, 음악적인 그림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실감했다.
그 다음부터 가능하면 미술관에 가서 직접 그림을 보려고 노력한다.
책에 실린 어설픈 도판 가지고는 위대한 명화가 갖는 매력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 미술은 더더욱 직접 대면했을 때의 첫 느낌이 중요한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이 조각가이기 때문에 현대 미술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과 지식을 갖고 있어 전시회를 감상하는 것도 나 같은 무지한 대중과는 한 차원 다른 수준을 보여 준다.
또 마음에 들었던 것이, 꽤나 성실한 저자의 집필 태도다.
얼마나 꼼꼼하게 리뷰를 하는지 그 자세에 반했다.
이런 점들이 책의 부실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책의 가치를 높혀 주는 것 같다.

요즘은 구상화를 하면, 즉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더러 심지어 진보라는 시대 정신을 역행하는 보수라는 의심까지 받는 것 같다.
미술의 대세는 설치미술, 행위미술, 개념미술, 오브제 등이라고 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각광받는 것도 양식적으로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여기 소개된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해 전부 공감하지는 못했다.
특히 뒷쪽에 주목받는 현대 미술가로 나오는 레베카 혼의 퍼포먼스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또 지금도 다다이즘은 관객에게 아무런 미의식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무책임한 장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있었다.
꼭 아름답다는 감탄이 아니라 할지라도 뭔가 울컥한다거나 명상적이 된다거나 충격을 받는 등의 감정 동요가 종종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이해하는 현대 미술은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과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인 것 같다.
관습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독특하고 혁신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것, 어쩌면 현대 화가들이야 말로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워낙 파격적인 작품들이 많아서 이런 생각도 해 봤다.
사회적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합법적인 일탈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현대 미술이 아닐까?
현대 미술이 극한까지 가는 인간의 창의적 발상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진보는 아닐까?

그러나 여전히 냉정한 비판의식은 남아 있다.
저자도 지적한 바지만, 충격과 센세이션만 노리고 심지어 팝아트의 개념을 확장시켜 대중 매체와 접목해 자본주의의 댓가까지 취하려는 상업주의적 접근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낸시 랭이다.
대중의 지지를 얻고 파격적인 것을 선보여 눈길을 끌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대체 미술가들을 예술가로 대접해 줄 근거가 뭐란 말인가?
모든 게 상대적이라면 평가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인간의 창의성과 진보성을 탁월한 기술로 재현해 내는 것, 작가의 치열한 예술 의지가 없다면 대중 매체 연예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너무 파고들다 보니 이제는 초미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해 이른바 예술이 광고성화 되고 있음을 저자는 염려한다.
언제나 균형의 유지와 작품에 대한 치열한 탐구 의식이 중요하다.

현대 미술에 대해 한 발 다가가게 만든 좋은 책이었고 저자의 집필 자세가 꽤나 마음에 들어,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조각을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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