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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3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오재국 옮김 / 범우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롭게 고전을 읽기로 결심하고 처음 고른 책이다

"죄와 벌"을 볼까 하다가, 영화로 만들어진 이 책이 좀 더 쉬울 것 같아 "닥터 지바고"를 골랐다

결론은 절대 쉽지 않다

중학교 때 본 러시아의 방대한 설원과, "라라"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어울리는 배우 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절대 이런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뒤에 해설을 보니, 원래 러시아 소설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왔다

내가 느끼기로는 라라와의 사랑도 중요한 모티브가 아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지바고를 통해, 혁명이 혹은 공산주의가 어떻게 개인을 말살해 가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이 책이 소련에서 출판 금지되고, 노벨 문학상 사퇴 압력을 받은 건 당연하다

이 정도 수위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나왔어도 당연히 금서 목록에 올랐을 것이다

 

러시아 소설이 어려운 이유는 일단 주인공들의 복잡한 이름에 있다

영어에 익숙해서 러시아식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고, 또 워낙 길어서 한 눈에 쉽게 안 들어 온다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몇 번이나 발음해 보고 겨우 익힌 것이다

지바고의 본명은 "유리 안드레예브치 지바고"인데, "유라"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얼핏 생각하면 "유리"라고 불릴 것 같은데 "유리"라고 부르면 존칭이 되고, "유라"는 가까운 사이에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역자가 친절하게 해석을 붙여 놨다

라라의 본명도 "라리사 표도로브나 기샤르"인데 "라라"라고 불린다

"유라"나 "라라"라는 애칭들은 어찌나 발음하기 좋은지 몇 번이나 중얼거려 봤다

소설 속에 묘사된 여주인공은 그 아름다운 이름에 잘 어울리는 멋진 여성이다

 

혁명에 의해 인텔리 지식인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여 주려는 의도 때문인지,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거의 없다

이를테면 지바고가 어떻게 라라를 사랑하게 됐는지, 토냐와 지바고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그 과정이 전혀 없다

함께 자란 토냐와 유라는 어느 날 갑자기 결혼했고, 전쟁터에서 만난 유라와 라라도 갑자기 사랑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의 심리 묘사가 제일 큰 재미인 법인데,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상당히 불친절 하다

대신 작가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혁명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뺏어가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혁명의 가장 큰 폐해는 개인의 의지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말이야 말로 공산주의가 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원래 삶이라는 게 도덕성과는 별 상관없이 흐르는 것이지만, 지바고가 가족을 버리고 라라와 사는 장면은 읽기 괴로운 부분이었다

그의 아내 토냐로 말할 것 같으면, 소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남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내며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정숙한 여자다

그런데도 남편은 중요한 순간마다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고 자의든 타의든 여러 차례 가족을 버린다

1차 대전 당시는 군의관으로 전쟁터에 있었고, 혁명 발발 이후는 빨치산에게 끌려 가 억류되었으며, 그들이 국외 추방의 위기에 놓였을 때조차 라라와 함께 살았다

귀족 출신의 토냐가 공산주의 혁명 이후 가해지는 압박들을 견뎌 나갈 때, 단 한 순간도 지바고는 그녀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가족에 대해 안타까워 하지만,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실천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체념하고 더욱 라라와의 사랑에 몰두한다

작가는 지바고의 시선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절대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사실 소설이나 인생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지만, 소설에서 소외된 토냐 가족의 슬픔이 면면히 전해지는 기분이다

 

토냐는 그야마로 정숙하고 헌신적인 여자로 나오는데, 지바고가 전쟁터에서 라라를 만났다는 편지를 받은 후, 미리 앞서가 가족 걱정하지 말고 그녀와 잘 지내라고 답장한다

물론 그 당시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는데, 토냐는 미리 물러서 버린 것이다

어떤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남편을 쉽게 포기하는 그녀의 행동들이 이해가 안 갔는데, 소설을 읽다 보니 남편을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토냐는 지바고를 상당히 우상시 하고, 고귀한 사람이라 믿기 때문에 그가 가족을 떠나도 잡을 수 없다고 미리 체념해 버린 듯 하다

말하자면 감히 내가 붙잡고 있을 분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지바고가 없는 동안 정적인 라라와 잘 지내고 (그녀의 도움으로 해산을 한다) 국외 추방을 당하면서도 지바고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눈물어린 편지를 쓴다

라라와의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가족이 해외로 쫒겨난 상황에서도 하인의 딸과 재혼하는 지바고가 다소 뻔뻔해 보인다

아내가 낯선 나라에 정착해 아이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안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재혼 후에도 가족을 러시아로 불러 들일 계획을 세운다

사실 이건 현실적이지도 않고 단지 마음의 죄책감을 벗기 위한 제스쳐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좀 더 솔직한 심정으로, 토냐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겼음 좋겠다고 말한다

 

지바고의 직업은 의사인데, 전형적인 의사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다

의사라면, 즉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냉정하고 감성이 메마른 성격을 상상하기 쉬운데, 지바고는 오히려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 예리한 감수성 때문에 혁명에 동참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낯선 마을에 들어섰을 때, 한 노파가 요즘 같은 혼란한 세상에는 의사 따위의 직업이라고 속이는 게 편하다고 충고하는 것처럼,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이 혁명에 휘둘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도 의사는 밥 먹기 살기 위한 직업이었을 뿐 (그래도 그는 오진을 안 하는 유능한 의사로 나온다) 사실은 시인이었던 지바고는 혁명 정신에 위반되는 행동들을 많이 보여, 결국 체포 위기에 놓인다

그가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비참한 일생을 마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지바고는 모스크바로 간 후 갑자기 등장한 이복 동생의 도움을 받아 시를 쓰고 병원에 출근하면서 재혼을 하고 잘 산다

비록 귀족이었던 옛날의 영화를 되찾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살아 간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겨우 40을 갓 넘은 가엾은 나이이긴 하지만), 혁명 때문에 극적인 인생을 산 건 아니다

가족과 헤어지긴 했으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어쨌든 살아 간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현실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혁명 정신에 대항하는 주인공의 삶은 극적이고, 큰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작가는 사건의 극적 구성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플롯이 약하고 우연성에 의존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 건지도 모른다

 

라라의 남편으로 등장한 파샤를 보면서 문득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최대치가 생각났다

10권짜리 소설로 읽었는데 (그런데 희한하게 소설보다 드라마 각색이 훨씬 낫다) 공산주의에 자신을 함몰해 가는 최대치의 피폐한 인간성이 잘 그려졌다

파샤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과정을 마치고 지성인이 되지만, 혁명 정신에 몰두하여 가족을 떠나 전쟁에 자원한다

(여기서도 왜 그가 라라를 떠나 전쟁터로 나가는지 자세한 묘사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난다는 식이다)

죽을 위기를 넘긴 후 위대한 혁명가가 되어 돌아 온 파샤는, 대부분의 열성적인 혁명가들이 그렇듯 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결국 자살한다

그는 라라를 무척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떠난다

혁명 과업을 완수시킨 후 멋지게 나타나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결국 평생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지바고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아이와, 지바고의 가족을 생각해 남편과의 재결합을 원했던 라라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라라가 원한 건 그 따위 업적이나 명예가 아니라, 파샤 그 자신인데 정작 당사자는 아내에게 그럴듯한 업적을 선물하기 위해 계속 피해 다니는 것이다

파샤 역시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함몰시키고 만 불행한 사상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장하림을 사랑하면서도 의무감 때문에 최대치를 기다리는 (평생 기다리고만 마는) 불행한 윤여옥의 모습이 겹친다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폐해는 개인의 의사를 하찮게 여겨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비단 공산주의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인텔리 계층의 지식인이 개인의 사고와 개성을 압박하는 공산주의 혁명 아래서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를 "닥터 지바고"에서 잘 보여준다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경과 숙명적인 여인 라라와의 사랑도 더불어 잘 조화된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렇지만 절대 독자에게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등장 인물이나 지역 이름 때문에 쉽게 읽혀지지는 않으나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범우사에서 1988년에 출판됐는데, 역자에 따르면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복권이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금은 아마도 작가적 위상을 확립했을 것 같다

국외 추방 명령에 대하여 "러시아를 떠나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고 흐루시초프 수상에게 간청했던 파스테르나크의 조국 사랑이 이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는 결국 그 충격 때문인지 1년 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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