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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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권지예의 단편집이다. 2000년대 초반 화려한 수상 이력 때문에 기억하고 있고, 신작이 나오면 관심을 둔다. 그런데 이번에 검색해보니 실제 읽은 책은 거의 없다. 한창 문학상 작품들을 읽을 때 읽은 기억 때문에 작은 오류가 생긴 모양이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10년 만에 낸 단편집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들은 최근 2~3년 안에 발표한 것들이다. 최근에 다시 한국 단편들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예전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들이 다루는 소재나 공간 등이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번역 소설이나 장르 소설들을 주로 읽다가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예상하지 못한 정갈한 문장들에 잠시 빠져든다. 아마 내년에는 찜해놓은 몇 권의 단편을 더 읽을 것 같다.

 

하정우가 여행 욕구를 불러온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그런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여행의 즐거움보다 그 여행이 던져준 상황이나 현실이 결코 즐겁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열렬하게 가고 싶었던 쿠바에서의 일상을 다룬 <베로니카의 눈물>은 물자 부족과 빈곤한 현실이 먼저 눈에 들어와 괜히 불편하다. 관광을 왔다가 마음에 들어 독채를 장기 렌트한 소설가 화자가 마주한 아바나의 현실은 기대와 너무 다르다. 몇몇 가지는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삶으로 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이중 물가제를 이해한다고 해도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물자는 한국 사람에겐 너무 힘들다, 여기에 집 관리인 베로니카에 대한 오해와 친밀감은 읽는 내내 불편하다.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는 사진 작업 차 다시 파리를 찾은 재이의 파리는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몰래 연인들의 사진을 찍어야 하고, 비싼 식당 음식 대신 집밥으로 끼니를 떼워야 한다. 여기에 이혼한 남편과의 기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혹시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은 낭만과 욕망의 엇갈림을 잘 보여준다. 다시 쿠바 이야기를 다룬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은 남편이 유품으로 전달해달라는 상자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다룬다. 믿고 싶지 않고 피하려고 한 사실을 쿠바의 낯선 현실 속에서 마주한다. 쿠바 민중의 척박한 삶과 대비되는 자본의 유입과 성장은 우리 사회의 고도 성장기 이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부유하게 사는 친구 부부의 세미나에 대리 출석한 모녀의 미투 이야기다. 시간이 흘러 성에 대해 관대해졌다고 해도 어두운 곳에서 벌어지는 성폭행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성폭행 문제에서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고민하고 고통 받는 현실을, 미투 고백의 어려움과 현실적 문제 등을 잘 녹여내었다. 현주의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란 부분이 가슴 아프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은 빽빽한 일정의 패키지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와 화자 부부의 이야기가 같이 나온다. 단체 여행이 주는 불편함과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잘 녹여내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회상이란 부분에서 조금 낯설었지만 삶은 이런 기억들이 쌓인 것이다.

 

유일하게 한국을 배경으로 한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대학원을 다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고, 부잣집 딸로 생각한 친구의 소개로 키스방과 그 다음 단계로 나선 여인과 소득 1% 삶을 살다가 실업자가 되어 추락한 가장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풀어낸다. 이 둘이 머무는 공간은 최악의 공간인 고시원이다. 여자는 오피걸로 돈을 벌고, 남자는 퇴직금을 까먹고 있다. 자신들의 현실을 가족들에게 속이고 있다. 뻔한 결말로 나아갈 것이란 나의 예상은 현실 앞에 가볍게 무너졌다. 이 여섯 편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듯한데 불편함이 가득하다. 이 여섯 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은 뿌리내려 사는 곳이 아니라 잠시 동안 머물다 갈 곳들이다. 일상을 벗어난 곳의 일상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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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람 생활만화
송아람 지음 / 북레시피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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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람의 만화를 이번에 처음 읽었다. 이 만화가의 다른 작품은 가끔 제목만 봤다. 어쩌면 한 권 정도 더 집 어딘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확하지 않다. 책 읽기에 지칠 때, 시간 여유가 조금 없을 때 이런 만화를 읽으면 왠지 모르게 잠시 위안을 받는다. 나와 다른 삶이라 부럽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도 알고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인 줄 알았다. 나의 무식함이란... 가볍게 본 몇 장의 컷은 이 만화를 선택하는 것을 도와줬다.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많이 나겠지만.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일상, 다른 나라 여행, 다시 일상 등이다. 일상은 말 그대로 작가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아이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아이 엄마 이름을 몰라 일어나는 해프닝은 소소한 재미를 준다. 아침 산책을 보다 보면 그 여유가 부럽지만 그녀의 하루가 망가지는 것도 그 여유로운 산책 때문이다. 자기애에 빠진 장면에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그런 적이 없는가 돌아본다. 남편과 아들이 다른 집에 갔을 때 그녀가 보여준 행동은 계획과 너무나도 다르다. 갑작스런 시간의 홍수는 불안과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때만 해도 이 만화가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지 몰랐다.

 

만화가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이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이 나면, 필요한 종이가 있으면 그렸다고 한다. 제목 그대로 생활 만화다. 일상에서 본 것, 느낀 것을 이야기로 묶기도 하고, 한 컷으로 그려내었다. 내가 더 많이 공감하지 못한 것은 여자도 아니고, 애 엄마도 아니고, 만화가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 속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몇 가지 행동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분노와 허세가 뒤섞인 이야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요가를 하면서 들은 음악에 필 받아 붕붕 뜨는 그녀를 나에게 그런 노래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뭐 어떤 노래는 나오면 절로 흥얼거리지만 말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 이야기에서 최고의 것은 당연히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아들을 데리러 가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다룬 <픽업 스릴러>다. 속된 말로 살아 있어 재미난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런 환경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지 잠시 들여다보게 된다. 아빠와 와인 한 명이 집의 술을 거덜낼 정도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의 주량에 다시 놀란다. 두 번째 작품으로 앙골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 가게 되고, 가면서 오면서 주변 도시를 돌면서 생긴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에서 나의 머릿속은 또 다른 생각들이 샘솟는다. 물론 부러움도 한몫한다. 사인회에서 이름을 책에 적어주기 위해 독자들의 이름을 적은 부분은 작은 감동을 전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렇게 자신의 일상을 만화로 표현한 책들을 볼 때면 부러움이 먼저 든다. 다른 작품에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봤지만 이런 에피소드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는 나의 일상이 너무 반복되어 보인다. 물론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르게 표현하면 재미날 부분도 있을 테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니 작가 부부가 아들을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는 부분에서 내 생각들이 겹쳐지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머릿속에 자리잡는다. 맥주 한 캔, 야구 시청, 졸음 등의 기억도 그녀가 그린 와인 한 잔에 잠시 다녀간다. 책장을 한 번 뒤져 이전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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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머린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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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4년 일본에서 발간된 <칠드런>의 후속작이다. 솔직히 말해 <칠드런>을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한참 일본 소설들을 읽고 있던 시기고, 몇몇 작가의 작품들을 뒤섞어 읽던 시기라 더욱 그렇다. 저질 기억력 탓도 있겠지만 아마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생각한다. 책은 책장 어딘가 분명히 있을 테지만.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작가 이름으로 검색하니 아직 읽지 않았지만 집에 모셔둔 작품들과 읽을까 고민하는 작품들이 무수히 나온다. 상당수의 작품들은 재간되어 나왔고,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 당시 사지 못한 절판본을 살 수 있는 기회니까.

 

전작을 읽지 않아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작품 속에 전작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10년 이상의 간극이 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바뀌었다고 하니 나중에 <칠드런>을 읽고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뭐 이렇게 말해놓고 읽지 않은 수많은 소설들을 생각하면 조금 머쓱하다. 전작이 진나이의 강한 캐릭터를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 중심이라면 이번에는 소년 범죄 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처음 도입부 등을 보면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이야기가 끝으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사실 최근에 이런 방식에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한다. 여러 권을 함께 읽고, 한 번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책 읽기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독서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 이전에 한 번 들고 끝까지 읽던 시절과 분명히 다르다. 물론 이렇게 읽는다고 해서 이해를 잘 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도 며칠 걸려 읽었는데 앞부분에서 조금 헤맸다. 혹시 읽었는지 과거를 돌아보고, 진나이라는 캐릭터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소년 범죄자를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연관성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둘은 별개의 사건이다. 무면허 난폭 운전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차로 치어 죽인 다나오카 유마 사건이 중심이지만 ‘죽어’란 공포 메시지를 보내고 자수한 오야마다 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토는 이 두 소년 범죄의 담당이다. 등교거부학생인 오야마다 순에게서 자신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보낸 메시지는 모두 인터넷 등에서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살해 등을 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에게 갔다. 그가 어떻게 개인정보를 얻게 되었는지 말하는 부분은 개인정보보호의 허점을 잘 보여준다. 사회 곳곳에서 품어져 나오는 분노와 증오의 글들을 보면서 실행 가능성을 파악하는 그의 능력은 사실 대단하다. 실제 그가 예상한 일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예방하는데 무토와 진나이의 활약이 있었다. 뭐 그렇게 멋진 액션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위험을 막은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의 핵심인 다나오카 유마가 행인을 치어죽인 사건은 유마의 과거와 연결된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초등학교 친구도 자신과 같은 소년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 무토는 이 사건을 파헤치면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말하고, 순간적인 감정을 토로한다. 작가는 이 소년 범죄를 무비판적으로 다루지 않고, 이 죄가 얼마나 한 사람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진나이의 섬세하지 않은 말투에는 소년 범죄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쉽게 면죄부를 주지 않고 그 사건의 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문제가 되는 사건을 볼 때 평면적으로 보는 문제에 대한 반론이다. 쉽게 흥분하고 욕하지만 두 사람의 삶이 걸린 문제란 것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까지 생각이 더 나아가지 않는다.

 

소소한 이벤트와 과거 사건의 당사자가 등장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고 꼰다. 유마의 친구가 죽은 사건의 소년 범죄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고, 그 삶의 무게도 말한다. 진정한 반성이 얼마나 힘든지도. 물론 반성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현실적으로 모두 제대로 반성하면서 살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까지 진나이가 관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나이는 무심한 듯, 귀찮은 듯, 황당한 듯 말하면서 누구보다 진한 근성과 열의를 가지고 있다.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다. 소년 범죄의 위험성과 잔혹성만 부각한 소설과는 차별점이 분명하다. 또 다른 관점에서 소년 범죄를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재밌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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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2 - 왜 정치는 불평등을 악화시킬까? 강남 좌파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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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과 소득은 높으면서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좌파 성향을 띤 사람을 강남 좌파라고 한다. 우파가 좌파를 조롱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데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외국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한다. 사실 저자의 전작 <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를 읽지 않았다. 그 당시 왠지 모르게 이 단어에 거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읽었다면 강남 좌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문득 생긴다. 그리고 저자도 말했듯이 얼마 전 ‘조국 사태’에서 강남 좌파의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표출되었다. 우리가 조국 법무장관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 속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이 책은 다루고 있다.

 

거대한 프레임 중 하나는 1%와 99%의 대결 구도다. 좀 더 나가면 10% 대 90% 정도일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20% 대 80% 사회로 보면서 우리 사회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높은 중산층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에서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강남은 아니지만 강북에 집이 있고 연봉도 1억인 지인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보고 싶어하지 않는 현실을 보고 과연 누가 중산층일까 하는 의문이 든 적이 있다. 아마 고소득 전문직 정도 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상위 몇 개 대기업 부장급 정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실제 부동산 정책에 어떤 결정을 할지는 많은 부분 알 수 있다.

 

저자가 가장 먼저 불평등을 말하면서 1% 대 99% 사회를 내세운 것은 위와 같은 한국인들의 왜곡되고 과장된 기준도 한몫한다. 노동 귀족에 대해 나 자신이 열심히 주변 사람들에게 변호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그들은 이미 기득권 세력화되었다. 이들은 한국 사회 전체로 보면 상위 10%에 포함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지역에서는 충분히 10%에 포함된다. 이것을 대물림하기 위한 투표를 했다는 사실과 과반 이상이 찬성했다는 부분에서 노동 귀족이란 표현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진보가 1% 비판에 집중하면서 노동 내부의 계급화를 놓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 중 하나다.

 

조국 사태를 단순히 진영 논리로 보는 것은 확대 해석이다. 검찰 개혁이 지나치게 과잉대표돼 있다고 하지만 수많은 사건들에서, 사법농단에서 우린 검찰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거나 자신의 조직에만 충성하는 것을 봤다.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동시에 놓고 본 것은 검찰이 어떻게 조국과 그 집안을 털었는가 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초기 검찰이 적폐 청산의 칼이 된 것에도 동의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조직 비리에 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봤다. “진영 논리에 열광할망정, 평등엔 무관심하다.”란 지적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보수 언론에서 청와대 고위직들이 강남 부동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공격한 것도 이런 아픈 부분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권 실세들은 소위 386세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이들을 빼고 운동권을 말하기는 힘들다. “운동권이 거시적으론 권위주의 정권에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미시적으론 권위주의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다.”란 지적은 맞다. 우린 알게 모르게 나이와 직위의 권위를 내세운다. 시대의 효용이 끝났지만 과거의 영광에 매몰된 그들이 위에 있을 때 진보는 보수화된다. 진보의 위선을 말할 때 나는 순간 뜨끔했다. 나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최소한 위선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해당되는 것들이 몇 개 보이기 때문이다. 불공정함에 둔감한 것도, 알면서 눈을 깜는 것도 권위주의 사고와 관계있다.

 

강남 좌파를 존중해야지만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화는 곤란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진보의 우선적인 사명을 불평등 해소와 완화, 정치는 불평등 악화를 막아야 한다는 부분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이것을 한꺼번에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다. 80% 계층 사람들이 정치에 더 많이 나서야 하지만 현재 정치 구조에서 이것은 쉽지 않다. 하나씩 바꿔나가야 한다. 검찰총장과 앞으로 생겨야 할 공수처장의 임명을 대통령이 하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동의한다. 로스쿨이 또 다른 권력 세습이나 자기 조직 강화 등으로 가는 길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진보 학자의 올바른 지적이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도 진보 진영은 이것을 검토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86세대와 그 이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높은 벽은 이제 점점 사다리 걷어차기가 되어가고 있다. 읽으면서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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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크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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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할스 앤더슨의 원작을 그래픽노블로 만든 작품이다. 성폭행 당한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가는 여고생의 일상과 내면의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목처럼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그 상황을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한 멜린다의 모습은 수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그것을 해내었을 때 삶이 또 어떻게 변하는지 이 그래픽노블은 잘 보여준다. 읽으면서 실어증에 걸린 것인가 하는 생각을 먼저 했지만 완전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데 힘들 뿐이다. 소설을 찾아보니 어딘가 낯익은 표지가 보인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올라간 멜린다는 이전에 친했던 친구들과 멀어진다. 파티에서 그녀가 성폭행 당한 사실을 신고하려고 한 것 때문에 오히려 왕따가 된다. 그들은 그녀를 경찰에 신고한 아이로 기억하지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실 그녀 자신도 그 당시에는 이 성폭행을 크게 자각하지 못했다. 성폭행 당한 사실을 부모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작가는 왜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 사이가 멀어져 있고, 부모와 소원한 관계란 것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그녀가 부모와 더 멀어지게 만든다.

 

말하지 못하는 그녀는 많은 오해를 산다. 왕따의 원인이 된 경찰서에 전화한 애라는 소문이나 자신이 당한 일을 어릴 때 친구에게 용기 내어 전하지만 질투 탓이란 반응만 돌아올 뿐이다. 이런 일상은 그녀의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만든다. 전학 온 친구가 친한 척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좋은 클럽에 가입해서 인정받는 것이다. 멜린다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학내 상황을 알려주는 장면들을 보면 예전에 본 많은 소설이나 드라마 속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주류로 나가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 말이다.

 

멜린다를 성폭행한 남자 앤디가 다시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아주 강하다. “기억을 없앨 수 있다고 해도, 그 짐승은 내 안에 남아 나를 옥죄어 올 것이다.” 이 문장은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자신만의 공간 속에 숨어 자신의 머릿속 생각들을 껴안고 있을 수 있다고 느끼며 현실에서 멀어지고 싶어 한다. 그가 그녀의 곁에 오고,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 구토한 것은 그 날의 공포와 두려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앤디를 조심하라고 화장실 벽에 글을 남겼는데 여기에 덧붙이는 글들도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공감하는 글들이다.

 

표지의 나무는 미술 수업 시간에 미술 선생이 준 소재다. 그녀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려고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돌아본다. 집에서 잘린 나뭇가지를 보고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절망감과 고통을 작은 조형물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섬뜩하다.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선생과 이야기하는 공간이 미술실이다. 성폭행 당한 여성들의 글 등을 보면 이것이 그때만의 기억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계속 반복되는 아픔과 고통임을 말한다. 몸에 새겨진 아픔은 상처가 치유되면 사라지지만 마음에 새겨진 고통은 살아있는 동안 반복된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은 2차 피해자를 줄이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것도 상당한 일이다.

 

이 그래픽노블에서 그녀가 소리치고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 한 번 등장한다. 앤디가 그녀만의 공간에 들어와 다시 성폭행하려고 할 때다. 처음에는 공포에 짓눌리고 입도 뗄 수 없었지만 한 번 터진 목소리는 그녀 속에 갇혀 있던 두려움을 털어내고 그 폭행에 대항해 싸우는 힘과 용기를 준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녀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도망치고, 경찰에 전화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을 이번에는 제대로 해낸다. 멋진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과연 이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에 그녀가 현실 속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소설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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