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 작가를 따라 작품 현장을 걷다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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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작가는 에필로그에 이 소설의 흐름 속에 있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제목만 놓고 보면 그렇게 끌리지 않는다. 아마도 하루키의 소설 제목에서 빌려온 듯한 제목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함정임이란 이름과 세계문학기행이란 소개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작가의 다른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것이 여행과 연결되면 더욱 끌린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전혀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면서 소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내가 놓쳤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부분들을 인용한 것을 보고 또 한수 배운다.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작가가 중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작가들과 작품이 이 에세이에 녹아 있다. 유럽과 미국과 일본과 한국 등을 오가며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과 그 도시의 모습을 차분하게 풀어낸다. 읽다 보면 다시 한번 프루스트와 플로베르의 소설에 대한 도전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 예전에 읽고 이것이 왜 고전인지 몰랐던 <마담 보바리>나 감히 도전조차 못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이다. 이 둘 모두 사 놓고 고이 모셔 두기만 하고 있다. 나의 이야기 중심 독서법을 생각하면 이 둘은 취향과 참 동떨어져 있다. <마담 보바리> 예찬은 워낙 많이 들어서 다시 도전해볼 예정이지만 기약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 보면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들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작가를 따라 작품 현장을 걸으면서 그 기록을 남긴 것이 이 책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기행을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전 같은 열정이 사라진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현장에서 본 것이 내가 머릿속에 상상한 것과 달라서 느끼는 아쉬움 때문이다. 어쩌면 그 공간에 대한 기억보다 이야기에 더 집중하는 나의 독서법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여행지 근처라면 둘러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곳에 가게 된다면 그 공간에서 작가에 대한 기억 등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빠질 것이다. 그 공간에 대하 진한 몰입은 아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가 쓴 수많은 글 중에서 내가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글이 한두 편 있다. 하나는 박완서 작가를 추모하며 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지원 작가에 추억을 풀어낸 글이다. 이런 글들을 보면 이전에 읽은 작가의 작품이지만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뭐 이런 마음이 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생겨났으니 꼭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는 책이라면 눈길이 절로 간다.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같은 경우다. 학창 시절 <마의 산>을 꾸역꾸역 읽은 적이 있기에 사실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다. 그보다 짧은 소설이니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 해본다.


작가는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에게 그곳을 무대로 쓴 소설 한 권씩 품고 가라고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더블린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넣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과연 이 책을 여행지에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 두툼하고 어려운 책을 말이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두 발로 걸어 다니며 보고 듣고 읽고 풀어야 한다.”란 말을 생각하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한 여행지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한 곳에서 하나의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보면 그 변화가 어느 순간 마음에 쏙 들어온다. 그때의 아름다움이나 새로움이 주는 환희는 경험자만이 알 수 있다. 후지산에 대한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읽다 보니 갑자기 그 경험이 떠올랐다.


<오디세이아>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은 있는데 원전은 아니었다. 완역본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지만 계속 뒤로 밀린다. 작가들이 이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찬양할 때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각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대한 글은 또 어떤가. 어렵다고 소문난 작가이지 않은가. 유명한 문구 하나 보다 그가 쓴 사진에 대한 글에 더 끌린 작가를 보고 나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글은 또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전 이름과 헷갈렸던 기억도. 나에게 조금 낯선 젊은 한국 작가에 대한 글은 새로운 독서 목록을 작성하게 한다. 다시 책을 뒤적이다 보니 읽은 책들에서 놓친 것들과 새롭게 읽고 싶은 책들이 눈에 계속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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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1
임레 케르테스 지음, 이상동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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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1번이다. 정말 많이 나왔다. 계속 나오는 중이다.

작가는 20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의 운명 4부작이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그때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놓았는데 현재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번 소설은 운명 4부작 중 3번째 소설이고, 앞의 두 권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가장 먼저 읽은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얇은 책이기 때문이다.

얇지만 읽기는 쉽지 않다. 문장은 쉼표로 이어지고, 문단의 구분은 거의 없다.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부분적으로 매혹적이다.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현재 내가 읽은 방식이나 이해력이 많이 떨어진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이후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었는데 단순히 그 이야기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이 소설의 화자는 작가이자 번역가인데 자전적 성격이 가장 짙다고 한다.

한 철학자와의 만남으로 시작해 아내와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홀로코스트의 경험이 들어오고, 다른 분위기를 띈다.

학살의 경험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났다.”고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범죄는 태어나는 것이다.”란 문장을 인용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 인간의 가장 큰 범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생계를 위해 번역하고, 글을 써야 했기에 썼다고, 그는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 오면 전 아내가 한 아이를 데리고 온다.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말한다.

그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의 아내는 이혼 후 아이를 가졌다.

그가 겪은 경험들이 그의 삶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천천히 생각해본다.

읽기 어렵지만 가끔씩 펼쳐 몇 문장을 읽기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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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마쓰다 아오코 지음, 권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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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을 보고 오해했다. 나중에 이 소설의 분류가 SF란 것을 보고 신청했다. 일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읽다 보면 그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아주 재밌다. “’아저씨’의 눈에 소녀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약간의 소란이 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소녀들이 아저씨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서 일어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알려준다. 좋게 포장하면 소녀들의 복수이자 반격이지만 다른 형태의 단체 폭력과 닮았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해를 기억하라고 한 후 현재와 미래의 두 시점이 나란히 진행된다.


아저씨의 눈에 소녀들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소녀들만 사는 곳이 한정된다. 이때 든 의문 둘. 새롭게 태어난 여자 아이들은 몇 살부터 이곳으로 가게 될까? 소녀들은 몇 살이 되면 이곳을 나오게 될까? 작가는 이런 세부적인 항목은 알려주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불친절한 설명이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에서 소녀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섭고 힘들고 편파적인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일본의 성차별적 현실을 날카롭게 들여다보고 폭로하는 소설’이라는 소개는 내용과 아주 부합한다. 후반부에 일본 여자 아이돌과 한국 여자 아이돌을 비교한 부분은 솔직히 말해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 물론 그 차이가 극명한 지점도 있을 것이다.


미래의 소녀들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현재를 해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의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녀들처럼. 일본 여성들이 결혼 후 남자의 성을 따라 하는 문제와 남자인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문제를 동시에 지적한 부분은 발표회의 소녀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임의적으로 지어 부르는 장면과 이어진다. 문제를 인식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경우 그 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바로 이어졌다. 현실의 한계 속에서 나의 생각들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게이코. 어쩌면 주인공이라고 불러도 될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게이코는 비정규 직원이었다. 직장의 한 남자의 은밀한 성희롱과 성차별에 의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성희롱의 가해자는 이 둘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게끔 행동했다. 소설 속 다른 화자 가가와도 이 둘의 관계를 보고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했다. 게이코가 성희롱을 고발했을 때 이런 오해가 게이코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가가와가 분홍빛 스턴건을 보여주었을 때 게이코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은 것도 이런 일의 연속 때문이다. 지하철 치한이나 밤거리를 돌아다닐 때 느끼는 공포 등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이런 일들의 중심에는 아저씨들이 있다.


작가는 아저씨를 단순히 남성과 나이로 구분하지 않는다. 행동과 생각 등으로 구분한다. 아저씨들의 행동을 보면서 ‘개저씨’란 단어가 떠올랐다. 혹시 나도 이제 이런 부류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일본에 살면서 느낀 불안감과 차별을 게이코가 캐나다 한 달 살기를 한 후 절실하게 깨닫는다. 강요된 겸손이 의사소통과 자신을 흐리멍덩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게이코가 느끼는 많은 부분에서 한국 사회가 그대로 투영된다.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판타지라고 비판하는 남자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이 느끼지 못했다고 그 현실이 없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게이코가 일본에 돌아와 갑자기 한 아이돌 그룹에 빠진다. 그 아이돌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센터는 단순하게 XX라고 표기된다. 기존의 일본 아이돌과 다른 노래와 무대 매너를 보여준다. 솔직히 일본 아이돌에 대해 무지해 그들의 어떤 활동을 하는지 모른다. 가끔 나오는 기사만 보고, 졸업이란 단어만 익숙할 뿐이다. 일본 시장이 한국보다 몇 배가 크기 때문에 한국 아이돌이 현지화한 후 공략한다는 것 정도가 단편적인 지식의 전부다. 앞에서 말한 한일 아이돌 차이에 대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아저씨들의 기사나 게시물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아저씨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파행을 하는지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돌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이래도 낳을 테냐, 아직도 낳을 셈이냐, 그렇다면 더욱 낳기 어렵게 만들어주마.”라고 말한 대목은 아주 놀랍다. 현실 속에서 과연 맞는지 모두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자연분만을 비보험으로 처리한다는 글이 보인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놀라운 대목이다. 페미니즘에 입각해 쓴 소설이지만 이 소설 속 문제 제기는 현재 한국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가독성도 상당히 좋다. 페미니즘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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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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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발표된 고전 추리다. 언제부터인가 고전 추리를 잘 읽지 않는다. 한때 아주 열심히 읽었는데 최근 작품들에 집중하다 보니 점점 뒤로 처진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도 사놓고 묵혀 두고 있는 것이 많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반장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전집이 그대로 쌓여 있다. 그래도 고전 추리에 계속 눈길이 간다. 이 소설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잔혹 코믹극이란 분류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느린 템포로 시작하는 전반부는 왠지 취향에 맞지 않는다. 중반을 넘어가면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개인들의 숨겨진 사연들이 나오면서 그 재미가 급격히 늘어났다.


애들레이드 애덤스는 리슐리외 호텔에 장기 거주 중인 독신 여성이다. 이 소설에서 애들레이드는 호텔에 머무는 투숙객들에 대한 관찰자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자신의 기준으로 투숙객들을 관찰하고 나눈다. 오랫동안 머물면서 관찰한 것이라 개인의 애정도에 따라 평가가 조금씩 엇갈린다. 각자 비밀을 가진 채 이 호텔에 머문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이 비밀은 그냥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애드레이드의 방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 후 이 비밀은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이전까지는 이 호텔 투숙객들의 일상과 미묘한 관계들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애들레이드가 처음 시체와 접촉했을 때 장면은 아주 섬세하고 압축적인 서늘함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나의 몰입도는 높아졌다. 시체에 대한 묘사도 아주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이 사건 이후 경찰이 도착해서 수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게 투숙객들의 정보를 파악한 채 심문을 한다. 죽은 사람의 정체가 탐정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무슨 일로, 왜 그는 이 호텔에 투숙했고, 어떤 일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그리고 첫 번째 용의자가 나온다. 그 용의자는 달아난다. 호텔 안을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 그녀가 떨어져 죽은 채 발견된다. 목이 졸려 죽은 후 떨어졌다. 확실한 처리 방법이다.


첫 살인이 있은 후 애들레이드는 방을 바꾼다. 사건 현장이니 어쩔 수 없다. 5층 방으로 옮긴 후 그녀에게 쪽지 하나가 온다. 협박이다. 천 달러를 주지 않으면 어데어 모녀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한다.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범인을 기다리지만 실수로 총을 발사한다. 총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온 인물은 의외로 스티븐 랜싱이다. 잘 생긴 화장품 영업사원이자 바람둥이다. 늦은 밤인데도 그는 정장을 입고 있다. 정체가 수상하다. 경찰도 수상하게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애들레이드의 현실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발에, 틀니를 낀 그녀의 모습을. 스티븐의 표현에 의하면 장대한 기골까지. 이 사건 이후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진다.


이후 애들레이드와 스티븐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바람둥이의 유들유들한 표현이 조금씩 먹혀 들어간다. 그리고 의문 하나를 던진다. 왜 탐정은 애들레이드의 방에서 죽은 것일까? 그 방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죽음도 마찬가지다.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투숙객들의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이 비밀 속에 엇갈린 관계가 드러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최근 소설 같은 긴박감이나 속도감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반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아주 흥미롭다. 마지막 진범이 나타날 때 즈음이 되면 홈즈의 명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단서들이 모여 애들레이드에게 번뜩임을 줄 때 사건이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은 더 복잡하다.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비밀이 욕망과 뒤엉키면 어떤 식으로 번질 지 모른다. 이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의 비밀은 은밀하고, 아주 탐욕적이다. 과도한 탐욕이 이성을 뒤틀고, 연쇄살인으로 이어진다. 이 살인 속에서도 사랑의 기운은 곳곳에 스며든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맴돌거나 주저한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안다. 안타까운 장면도 나온다. 이런 와중에 멋지게 중심을 잡으면서 사건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애들레이드의 존재는 추억 속 할머니 탐정을 떠올린다. 그 할머니처럼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지만 유쾌하고 섬세한 마음이 읽는 동안 잔잔한 재미를 계속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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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 - 사르담호 살인 사건
스튜어트 터튼 지음, 한정훈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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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다. 600쪽이 넘는다. 최근 이런 두툼한 책이 조금 부담된다. 하지만 재밌는 책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이 책을 선택할 때 2021 CWA 대거상 최종 노미네이트와 ‘터튼의 밀실 미스터리는 <보물섬>을 거쳐 마이클 베이의 영화와 만났다.’란 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보물섬>도, 마이클 베이의 영화도 좋아한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1634년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란 점이다. 왠지 모르게 요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손이 잘 나가지 않는다. 재밌게 읽는 책들도 많은데 말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 책도 재밌게 읽은 책에 속한다.


탐정이 처음 나온 것은 언제일까? 1634년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세계 최고의 탐정 새미 핍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인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송된다. 처음 소개글을 읽고 새미가 주인공으로 활약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새미의 경호원이었던 아렌트 헤이즈와 총독의 아내 사라 웨셀이 주인공이다. 아렌트는 새미가 무사히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수 있게 그를 지키고, 사라는 폭압적인 남편이자 총독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배를 타기 전 혀가 잘린 문둥병자가 저주를 쏟아 내며 불에 타 죽은 사건이 생겼을 때다. 이 첫 만남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항해 중 이 둘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한다.


혀 잘린 문동병자가 저주를 쏟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정체도 처음에는 모호했다. 사라는 승무원을 돈으로 유혹해 그의 이름을 알아낸다. 과학적 사고를 하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저주와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사르담호에는 총독이 원하는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다. 이 때문에 배가 8개월 동안 항해하면서 먹을 음식이 충분히 실리지 못한다. 인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새미는 총독의 명령에 의해 배의 가장 낮은 곳에 갇힌다. 그의 죄명은 아직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작고 더러운 선실에 갇히는 것을 새미는 두려워한다. 아렌트는 총독에게 말해 수감된 방을 바꿔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완고한 총독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동병자의 저주는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악마 올드 톰의 표시가 하나씩 나타날 때만 해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불빛이 나타나고, 배의 동물이 잔혹하게 죽으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이 올드 톰이란 악마는 기이하다. 왜냐하면 악마의 표시는 아렌트의 팔에 난 흉터와 닮았고, 그 표시를 처음 사용한 것도 아렌트였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난 상처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갔다가 혼자 살아온 후 정신을 잃었고, 그때 생긴 것이다. 혼자 살아온 그를 마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멀리하자 그가 어린 마음에 그에게 밉보인 사람의 집 문에 이 표시를 새긴 것이다. 이 작은 장난이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왔다. 올드 톰이라고 불린 사람이 죽기도 했다.


이 소설의 진정한 장점은 17세기 선박과 항해의 현실을 잘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원들과 군인들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에 이르면 왜 그렇게 많은 선상 반란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계급으로 나누어진 구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해적과 무시무시한 태풍의 위협 등은 하나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올드 톰이란 악마의 존재는 항해와 미스터리 속에 초현실적 두려움을 풀어놓는다. 올드 톰이 배에 탄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을 때 그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순간적으로 나의 이성에 잠시 눈을 감는다. 초현실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고.


두툼한 만큼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힌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17세기의 마녀사냥꾼 이야기가 엮이고, 올드 톰과 인간의 욕망이 뒤엉키면서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포세이돈이란 불리는 물건의 존재가 나왔을 때 인류의 항해술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물건 하나가 생각났다. 그런데 작가는 이 물건을 십대 천재 소녀 리아가 만들었다고 가정한다. 리아는 아주 뛰어난 발명가이자 천재다. 여자 아이의 이런 능력을 시대는 마녀로 간주한다. 남성들의 기득권과 시대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항해 도중에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선원과의 대결 등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재미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소설이다. 작가의 또 다른 장편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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