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망가 섬의 세사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9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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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므흣’한 제목이다. 에로망가 섬이라니. 얄팍한 일본어 지식으로 보면 에로만화란 뜻이다. 당연히 므흣한 기분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설은 독자의 이런 기분을 살짝 비틀어버린다. 왜 배반이 아니고 비틀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냐고? 이 단편집 속 한 편인 <에로망가 섬의 세 남자>의 주인공 등이 그곳에 가게 된 목적 때문이다. 그것은 에로망가 섬에서 에로만화를 본다는 기획이다. 에로망가의 영문표기는 Eromango다. 현지 발음으론 에로망가에 더 가깝다. 그래서 야릇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름이 된 것이다. 

표제작에 나오는 세 남자는 각각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화자인 사토는 말장난에서 시작된 기획 때문에 여자친구와 싸웠고, 구보타는 애니메이션 오타쿠다. 거기에 원래 참석하기로 한 이자와 씨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오지 못하고, 그 후배인 히오키가 대신 오게 되었다. 각각의 개성을 지닌 세 남자란 조합이 묘한 반응을 불러온다. 특히 오타쿠 구보타의 행동과 반응은 설레발의 연속인데 긴장감을 풀어주고 웃음을 유발한다. 에반게리온의 열렬한 팬인데 진정한 오타쿠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반면에 히오키는 대신 왔다고 하지만 그 정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비싼 정장차림으로 나타난 것과 여행지에서 보여주는 반응들이 차분하다 못해 어둡기까지 한다. 그 이유가 마지막 단편인 <청색 LED>에서 드러난다. 

사토는 관찰자이자 화자인데 그 사이 사이에 여자친구가 등장한다. 그녀가 조용히 일탈을 생각하는 장면은 낯선 곳에서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 속에서 자유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그의 기분과 대조를 이룬다. 현지인 존 존이 연발하는 노 프라블럼이란 단어는 일상의 반복과 빠른 속도 속에서 지친 그를 잠시 여유롭게 만든다. 유쾌하면서 힘든 여행을 끝낸 후에도 이 단어가 잠시 동안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니 그 여행은 기획을 뛰어넘어 성공한 것 같다.

이 소설과 관계있는 단편이 마지막에 나온다.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낯익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속의 주인공이 바로 히로키 씨였을 줄이야. 이 단편 속에서 그가 왜 정장을 입고 그 여행에 오게 되었는지와 그 후의 상황에 대해 알려준다. 단숨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니셜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다섯 편이 실린 이 작품집에서 연관성을 지닌 두 편이다.

<여신의 돌>은 어떻게 그 사회를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미래의 묵시록적 현실을 꾸민 것인지 아니면 가상의 세계를 그려낸 것인지 헛갈린다. <알바트로스의 밤>은 야간 골프장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비약이 심해 약간 황당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유쾌하면서도 즐겁다. 아마 골프를 둘러싸고 있었던 과거와 그의 플레이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목에서 느낀 므흣함에 가장 가까운 것이 <새장, 앰플, 구토>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바람둥이 남자의 과거 행적을 회상 식으로 이끌어간다. 그런데 묘사가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관능 소설 특집 집필 의뢰로 쓴 소설이란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의 인스턴트 사랑과 과거를 돌아보는 주인공의 반응이 너무 건조한 탓인 것 같다. 하지만 한 통의 메일로부터 시작한 그 회상 속에서 그의 과거와 시대의 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수많은 여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모습에선 놀랍기만 하다.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낯선 풍경과 설정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과 일탈을 풀어내는 힘이 뛰어나다. 단편으로만 지금까지 그를 만났는데 장편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아직 하루키를 처음 접했을 때 같은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는 않지만 다시 한 번 더 그의 화려한 수상경력을 읽으면서 대단하군!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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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1 아서 왕 연대기 1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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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서 왕 연대기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이야기 첫 부분부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아서 왕의 전설을 깨트린다. 위대한 왕이자 성배를 찾아다녔고 그 유명한 원탁의 기사들은 온데 간데가 없다. 그는 브리튼 왕국 둠노니아 유서 대왕의 서자다. 그의 지위는 전투로 유명하지만 다른 지역의 왕에게 무릎을 굽혀야 할 정도다. 이런 낯선 장면들과 지위는 처음에 혼란을 가져온다. 그 복잡한 브리튼의 내정을 들여다보면 읽는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몰입하고 진도가 쑥 나간다.

전체적인 구성은 수도사로 변한 데르벨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아서 왕에 대한 긴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이그레인 왕비가 그의 과거를 알고 전설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길 원해서다. 이미 전설이 된 왕과 함께 전장을 누빈 사람이 있는데 현실의 수많은 시인들의 노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듣고 바라는 모습으로 굳어진 아서 왕의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는 교묘하게 지금 우리시대에 범람하는 아서 왕의 전설을 왕비의 바람으로 바꾸어 비판하고 있다. 

먼저 아서 왕이 실존인물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작가도 그 실존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아마 전설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아서 왕은 중세를 넘어오면서 만들어진 하나의 전설이다. 그런데 이 전설 상의 왕이 너무 매력적이다. 내가 본 영화로만 몇 개가 될 정도고, 어린 시절 본 아서 왕 만화영화는 너무나도 강한 이미지를 지금까지 남겨주고 있다. 암흑시대이자 정확한 자료가 없던 그 시절을 묘사하면서 어떤 작가는 마법과 신화를 결부시키고, 또 다른 이는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꾸민다. 이 소설은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드루이드를 등장시키고, 마술과 저주가 강한 힘을 발휘하고, 현실적인 전투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설과 신화의 판타지를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것 같은 판타지로 바꾼 것이다.

아서 왕 연대기라고 하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은 데르벨이다. 그는 색슨 족이다. 드루이드가 그를 불구덩이에 집어던졌는데 살아나왔다. 이 때문에 대마법사 멀린의 노예가 되어 자랐다. 성장하는 과정에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전투기술과 읽기 쓰기를 배웠다. 이 글쓰기가 그 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연대순으로 펼쳐진다. 아서 왕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 비중을 본다면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다. 어떻게 그가 아서 왕의 장군이 되었고, 그와 전투를 같이 하였고, 죽음의 고비를 넘겼는지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교묘하게 모든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고, 기존의 전설을 사실로 정정한 것처럼 말한다. 신화와 전설과 판타지가 역사의 사실로 살짝 변하는 순간이다.

3부작 중 첫 권이다 보니 아직 원탁의 기사니 카멜롯이니 하는 전설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왕의 서자이자 조카의 보호자였던 그가 어떻게 브리튼의 분열을 가져오고, 통일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이 과정 속에서 멋지고 환상적인 아서는 사라지고, 인간적이면 현실적이고 살짝 허세를 부리는 아서가 등장한다. 역시 처음엔 이런 그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이 소설에서 다루는 아서가 역사적 실존인물인 것 같이 다가온다. 알면서도 당한다고 했는데 정말이다.

이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아서 왕의 전설을 모두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자신의 지식과 싸워야 한다. 아서 왕 연대기지만 화자가 데르벨이고, 그의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서 왕에 대한 전설과 역사를 중심으로 착각하면 그의 적은 등장에 불만을 느낄 것이다. 기독교적인 전설로 뒤덮인 그를 잊어야 한다. 작가는 드루이드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주술과 마법과 저주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지만 천지를 뒤흔들거나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마법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판타지 무협 같은 장면을 기대했다면 단념하라. 피가 튀고, 죽음이 가득하고, 땀으로 뒤덮어 있고, 현실 속 전투를 보기 원한다면 좋은 선택이다. 삼국지처럼 수십 만 명이 격돌하는 화려하고 거대한 전투를 기대했다면 역시 책을 덮어라. 이 시대의 전투는 몇 백 명이나 몇 천 명이 최대다. 

데르벨의 회상을 통해 전설과 신화로 윤색된 아서 왕을 현실로 내려놓았는데 이것도 역시 하나의 판타지다. 욕망과 살육과 전투와 죽음과 모험과 열정과 사랑과 광기로 가득하다. 서약을 중시하고, 강한 결속으로 이어지고, 한 손엔 방패를, 한 손엔 창을 든 그들의 모습은 남성적 열기로 가득하다. 처음에 낯설고 혼란스런 그 시대 현황을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가 기대하고 기다리던 아서를 만나게 된다. 비록 후세에 만들어진 그 이미지와 다르지만 말이다. 두께 때문에 단숨에 읽지는 못하지만 덮는 순간 왜 사람들이 다음 이야기를 그렇게 기다렸는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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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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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켄지 & 제나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한국에 출간된 순서로 보면 네 번째다. 이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씁쓸하다. 이 두 탐정이 만나는 현실이 결코 희망으로 가득하지도 않고,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빠져서 읽다가 그 끝에 도달하여 느끼는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가끔은 공허함과 황량함과 섬뜩함이 가슴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이런 현실도 가능한가! 하고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매력적이다. 재미있다. 이 모순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시리즈다.

<전쟁 전 한 잔>에 이어 다시 켄지의 아버지가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켄지를 학대하고, 괴롭혔던 그가 죽은 후에도 그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몸에 남겨 놓은 흉터가 아닌 그가 저지른 악행을 말한다. 한 지역에 오래 산 악당이 남겨놓은 유산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과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현재와 이어진다면 어떨까? 끝까지 읽은 후 다시 이야기를 조용히 복기하면서 하나씩 그 연관성을 되짚어본다. 촘촘하게 연결된 인과의 고리가 조금씩 이어지면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켄지에게 에릭 골트가 전화를 한다. 디안드라의 사건을 의뢰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모이라 켄지라는 여자를 만났고, 그녀가 동네 마피아 케빈의 애인이라고 말했단다. 그러다 그녀의 아들 제이슨의 사진이 우편으로 왔다. 혹시 그 마피아가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아들을 돌보며 보호해주길 바란다. 이에 이 둘은 제이슨의 일상을 따라다니며 위험 요소를 파악한다. 물론 그 전에 다른 마피아를 통해 케빈이 협박을 한 적이 있는지 확인한다. 없다. 열흘 이상 따라다녔지만 위협이 될 것이 없다. 무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사를 멈춘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 여자가 죽었다. 그녀의 손에 켄지의 명함이 있다. 당연히 그가 경찰에 불려간다. 그가 술집에서 명함을 준 동네 미녀 카라다. 참혹하게 죽었다. 왜? 누가? 이런 일을 벌렸는지 모른다. 과거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하니 이와 비슷한 사건 하나가 나온다. 책형으로 죽은 남자가 있다. 아직 이 사건과의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없다고 판단한 제이슨이 산산조각 난 채로 발견된다. 이제 사건은 연쇄살인사건으로 변한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사이코 살인마 알렉 하디만이 켄지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만남은 단순히 살인자와의 인터뷰가 아니다. 잊고 있던 잔혹한 과거로의 여행이다. 처음엔 단순히 불쾌한 만남이었지만 그 한 번의 만남은 뒤에 수많은 단서와 연결되면서 중요성을 더해 간다.

죽음, 살인, 공포, 위협, 고통, 불안 등이 가득하다. 힘이 지배하는 암흑가의 현실이 살아있고, 언제 살인자가 나타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지 모른다. 공포와 불안이 고조되는 것은 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과거 속에서 하나씩 진실을 발견할 때마다 공포와 불안은 더 커진다. 자신 속에 억압되어 있던 감정이 표출되고, 현실의 어둠을 인식하는 순간 피가 들끓는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지 않으려고 두려워한 탓에 한계를 지었는데 이제 그 봉인이 깨어지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변함없이 위력적이고 매력적인 부바가 멋진 조연의 힘을 보여준다. 살인마 알렉의 모습에서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렉터의 흔적이 살짝 보인다. 물론 렉터 같이 무겁고 공포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벌인 사건을 보면 다음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자신과 싸우면서 범인을 향해 나아가는 켄지의 모습은 역시 멋지다. 그 속에 드러나는 그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대단하다. 그가 그 일을 하면서 결국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고 한 여자친구의 표현이 가슴 깊숙이 와 닿는다. 이 시리즈를 읽은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힘든 일들을 겪고도 밝게 살아가는 모습에 놀랄 것이다. 비록 앤지의 사랑이 옆에 있다고 하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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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미닛 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2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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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두 명의 은행 강도가 은행을 털려고 한다. 기관총을 쏘고, 은행원을 겁준다. 그런데 이 둘은 너무 여유롭다. 은행을 털 때 지켜야하는 2분 규칙을 어기고 있다. 2분 규칙은 은행을 털 때 돈을 챙기든 챙기지 못하든 2분 안에 은행을 나와 튀는 것이다. 이 2분은 은행원이 비상벨을 울리고, 경찰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다. 한껏 여유를 부리고, 돈을 챙기고 나온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경찰 병력을 맞이한다. 멋지게 총을 쏘지만 결국 죽고 만다.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은행털이 맥스는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다. 이런 그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온갖 불법행위로 감옥을 들락거린 그에 비해 아들은 착실하게 자랐고 경찰이 되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무색하게 훌륭하게 자란 것이다. 비록 그 아들이 아버지를 부정했을지라도 말이다.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총격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 네 명과 같이 죽었다. 맥스가 원한 것은 누가? 왜? 죽였냐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들이 너무 사건을 허술하게 다룬다. 화가 난다. 아마추어인 자신이 보아도 다른 범인이 있는데 사건을 빨리 종결하는 것이다. 이에 그는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는 바로 그를 잡았던 FBI요원인 캐서린이다.

캐서린은 함께 일하던 남편 때문에 FBI를 그만 둔 상태다. 남편은 어린 다른 여자와 놀러갔다가 사고로 죽고, 그녀의 경제는 점점 나빠진다. 엄마는 새롭게 남자를 사귀라고 말한다. 삶이 정체되어 있고, 힘겹다. 그런 순간에 맥스가 보낸 한 통의 편지는 그녀를 이 허술한 조사와 뒤를 알 수 없는 사건 속으로 끌어당긴다. 맥스에 대한 의심이 마음 한 곳에 살고 있지만 진실에 대한 열망과 그 속에 담긴 옛 일에 대한 열정이 그녀를 강하게 몰아붙인다.

잘 읽힌다. 한 번 잡으면 끝을 보게 만든다.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던 맥스를 회개한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강한 부성애로 무장했다. 작가는 그에게 탁월한 능력을 주기보다 아버지의 위치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사실 머리를 쓰거나 중요한 추리를 하는 것은 캐서린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만들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은 역시 맥스다. 아들이 죽은 원인과 정확한 범인을 알고 싶어 하는 그의 절규는 가슴 속까지 울리게 만든다. 그가 울게 될 때 가슴 한 곳이 아리고, 그가 한계에 부딪힐 때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잘 만들어진 캐릭터와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와 뻔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경찰과 뒤에 나올지 모르는 반전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하나씩 사실이 밝혀지고, 새로운 의문이 생기고, 묘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안타까운 사실이 드러나고, 다시 진실이 알려지는 순간 긴 숨을 내쉬게 된다. 이런 순간들의 연속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경찰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맞서 아들을 둘러싼 의혹을 벗겨내려는 그의 행동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멋진 아버지의 모습이다. 진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그에게 박수를 친다. 새롭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작가가 한 명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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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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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잠을 자고 일어나니 투명한 벽이 생겼다. 이 벽 너머 풍경이 보인다. 그곳엔 세수하다 죽은 듯한 노인이나 나무 위에 멈춰선 새 등이 있다. 그들의 모습에서 폼페이의 화석 등을 연상한 것은 죽을 당시 표정이나 동작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벽 너머의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고, 그녀가 머무는 벽 속의 세계는 자연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벽을 따라 혹시 끊어진 곳이 있나 찾아보지만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녀는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으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먼저 생각났다. 고립과 외로움과 생존을 위한 노력이 비슷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르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 밖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살아남아 구조되길 바라는 반면에 그녀는 벽 밖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잃고 있다. 희망이 없는데 그녀는 삶을 계속한다. 도시인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구의 종말일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근육은 당겨지고, 초보 농사꾼으로 살아간다. 대단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강인한 생명력과 생활력은 단순한 풍경과 상황 속에서 긴장감을 전혀 늦추지 않는다. 

작가는 그녀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을 만들었다. 먼저 그녀가 사는 산장이 바로 핵전쟁 등이 발생하면 오랫동안 먹고 살 식량을 비축해둔 것이고, 다음으로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줄 동물로 개 룩스와 어미 고양이 한 마리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임신한 암소 한 마리를 주변에 놓아둬 풍부한 우유를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중 의복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것이다. 옷이야 추위나 다른 곤충이나 벌레를 막을 정도면 되고, 옷장엔 옷들이 꽤 많다. 보여줄 다른 사람이 없으니 기본 기능만 제대로 되면 문제없다. 이런 기본에 산이란 공간이 지닌 풍부한 열매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같이 있다. 비록 그녀가 도시인으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살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다.

책 속에 다루어지는 시간은 2년 반 정도다. 첫해에 겪었던 시행착오가 되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점점 적응한다. 다만 풍족하지 못한 음식과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 때문에 고생할 뿐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농사일이란 것이 반복의 연속이다. 새로움도 있지만 땀과 정성으로 일궈지는 것이다. 거기다 그녀 주변에 동물들이 가득하다. 개, 고양이, 암소 등의 가금류뿐만 아니라 고기를 제공할 들짐승도 있다. 고양이와 암소는 임신한 상태고, 새끼를 낳는다. 이 가족이 점점 불어난다. 불어난 가족 덕분에 그녀의 할 일은 점점 많아진다. 쉬고 싶은 순간도 있고,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몸을 이끌고 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만이 지구에 홀로 남은 상황에서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다. 과거 속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녀에게 큰 아픔이나 의미를 주는 것 같지 않다. 단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갈 뿐이다. 작가는 풍경에 대한 묘사와 그 속에 담긴 그녀의 심리와 행동을 섬세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려낸다. 문장은 간결하다. 감정이입을 강하게 시키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설명한다. 약간 건조할 수도 있지만 덕분에 그녀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홀로 남았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고, 힘들지만 오늘 하루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는데 말이다.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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