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린터 - 언더월드
정이안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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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르 소설에서 멋진 작품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읽으면서 완전히 빠졌다. 1권짜리 소설로 알았는데 3부작이다. 제목처럼 읽는데 가속도가 붙는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지만 다음에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따라 1부의 작품은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매년 한 권씩 나온다고 하니 나의 멍청한 기억력이 그때와 제목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거대한 설정이 가끔 한국 장르 소설의 고질병을 따라가지 않았으면 한다. 바로 용두사미의 마무리다.

 

단이가 화자로 나와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지하철에 갇힌 단이가 사건을 직접 마주한다면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되는 대통령과 국정원 요원 현국이 또 다른 하나의 시점을 제공한다. 분량에서 단이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현국은 왜 이런 문제가 생겼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그의 노력과 한 개인과 집단의 거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3부작의 첫 권이다 보니 많은 것이 가려져 있다. 특히 이번 소설의 마무리 장면에서는 의문을 더 강화시킨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관계를 꼬기 때문이다.

 

강단이, 지태, 연아는 한 형제처럼 자랐다. 서로 친한 부모님들이 함께 놀러갔다가 교통사고로 모두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태의 친엄마가 이들을 같이 키웠다. 이들은 모두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주 특별한 존재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고통으로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아주 단편적인 정보 밖에 나오지 않지만 이들의 유대는 아주 특별하다. 이 특별한 유대는 이들이 갑자기 발생한 지하철 테러를 헤쳐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엄마를 구하기 위해 아주 위험한 행동을 한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사건과 진실을 마주하는 계기가 된다.

 

강단이는 스프린터였다. 그것도 세계 최정상 선수였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도핑테스트에 걸려 트랙에서 끌려나온다. 열아홉 살 고등학생에게 이 사건은 꿈을 완전히 접게 만드는 사건이다. 꿈을 접기 위한 달리기를 한 번 시도한다. 그것은 지하철 첫 칸에서 마지막 칸까지 달리는 것이다. 문이 열리면 달리고, 닫히기 전에 들어오는 시도다. 당연히 성공한다. 2호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전철이 멈추고, 전기가 나간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때부터다. 지하철은 알 수 없는 생명체에게 공격을 받고, 사람들은 죽는다. 달아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사치다. 하지만 이런 현장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노력들이 있다.

 

완전히 희생적이지는 않지만 개인의 양심을 덜 수 있을 만큼 돕는다. 지하철 출입구가 무너져 다친 사람들이 많지만 현실적으로 그들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 한 임산부를 도운 것도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터지고, 인간의 이기적 욕심들이 폭발하면서 선의는 그대로 묻혀버린다.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이다. 괴물들은 어딘가에서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먹는다. 이성은 공포에 질식된다. 단이 혼자였다면 아마도 금방 괴물에게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태와 연아가 있다. 혼자만의 생존이 아니라 함께 도와가면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는 형제가 있다. 여기에 지하철에서 살아가는 아홉 살 소녀 화니가 함께 한다.

 

작가는 무서운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넣었다. 괴물이 사람을 먹는 장면을 보여주고, 사지가 찢긴 채로 등장한다. 군인들과의 대결은 이성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공포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명확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 때 그 공포는 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민중은 한 명 한 명 개인의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진실을 숨긴 채 허위정보만 돌아다니게 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비극이 더 커진다. 하지만 이 비극은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를 중간에 언급한 것도 이 사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하는 말도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정보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채.

 

액션, 모험, 공포, sf적 장치, 음모론, 덕후 문화 등 많은 요소가 녹아 있다. 그 요소 하나하나가 이야기 속에서 엮이고 풀린다. 철덕이 단이 일행으로 엄마에게 인도하는 것이나, 밀덕이 동시 테러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등 덕후들은 현실의 사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위에서 모험하고 액션을 펼치고 공포를 느끼는 인물들은 단이 일행이다. 그리고 그들을 현실세계와 연결해주는 것은 연이의 SNS다.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유언비어가 현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이 현실이 단순한 서술인지 아니면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장치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시리즈가 이어지면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멋지게 시작한 시리즈 1부인데 과연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이것을 이어갈지 벌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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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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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리처 최신작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 시리즈를 참으로 순서없이 읽었다. 출간된 순서로 읽었던 적도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읽지 않은 작품도 상당히 있다. 책을 더 많이 읽을수록 더 많이 읽지 못하는 시리즈가 늘어난다. 아는 작가와 시리즈가 늘어나고, 이 모든 것을 읽기에 시간이 부족한 탓이다. 그래도 이렇게 한권씩이나마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고 반갑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1996년 어느 날로 돌아가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순서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다른 작품을 읽다가 이번 이야기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기존 출판사가 출간을 중단했고, 오픈하우스로 넘어오면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가끔 나의 기억은 혼란을 일으킨다. 그 중 하나가 잭 리처의 액션이다. 거구라는 이미지와 그의 액션 신들이 이 이미지를 굳게 만들었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리처의 액션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소한 액션은 있지만 뭔가 큰 한 방은 없다. 왠지 모르게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느낌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을 폄하해온 것일까? 기억보다는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 되새기고 싶은 부분이다.

 

1996년 35세 헌병 소령 잭 리처는 훈장을 받는다. 그 후 바로 다른 사건을 위해 차출된다. 그곳에서 FBI와 CIA 요원을 만난다. 이 세 명이 모인 것은 하나의 사건을 풀기 위해서다. 독일 함부르크에 심어둔 스파이가 전달한 메세이 하나 때문이다. “그 미국인이 1억 달러를 요구합니다.” 테러 조직이 지불하고 받을 것이 무엇이기에 1억 달러라 요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미국인은 누굴까? 이 두 가지가 소설 중반까지 분위기를 이끌어나간다. 이 황당한 문제를 풀기 위해 접선 당시 다른 사건에 투입되었던 세 곳의 정예요원이 차출되었다. 가장 먼저 혐의를 벗어났기에 선택당한 것이다.

 

이 부분까지 읽고 가장 먼 든 생각은 FBI와 CIA의 협력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였다. 하지만 이 기대는 사실상 빠르게 사라졌다. 접선의 장소인 함부르크로 리처와 그의 하사관 니글리 상사가 오면서 이 두 조직은 하나의 배경으로 변했다. 대신 함부르크 경찰 그리즈만이 수사 파트너로 등장한다. 이 연결을 이어주는 인물은 1억 달러를 요구한 그 미국인이다. 그가 저지른 살인사건이 둘을 이어준 것이다. 독자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진행되는 덕분에 금방 알지만 등장인물들은 아직 그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시차가 읽는 내내 답답함과 아쉬움을 전달해줬다. 긴박감을 조성할 수 있는 대목이 빠진 것이다.

 

1억 달러로 팔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 핵무기이다. 그런데 미국은 핵무기 관리법 등을 말하며 이 가능성을 별로 다루지 않는다. 일반 무기는 너무 양이나 부피가 크다. 아직 인터넷이 완전히 대중화되기 전이라 바이러스나 특별한 프로그램도 가능성이 낮다. 화학무기도 고려 대상일 텐데 왠지 모르게 빠져있다. 이 비밀을 풀기 위해 용의자를 찾고, 리처의 번뜩이는 착상으로 그 답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1억 달러의 비밀을 알 수 없다. 리처와 니글리의 수사와 조사는 계속 된다.

 

리처의 액션이 많이 억제된 것은 그들이 쫓는 사건과 함부르크라는 공간 탓이다. 결코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건이고, 괜히 사고를 일으켰다고 외교문제로 비화되면 첫 번째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리처의 액션은 그를 찝쩍거리는 네오나치 몇 명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액션을 억제하다 보니 다른 쪽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접선 당사자의 등장과 행동이다. 그가 벌이는 사건에 비해 그 마지막은 너무 무력한데 소설만으로는 그 긴장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외교라는 틀 속에 갇힌 리처가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야생적인 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지닌 매력은 변함없이 전달된다. 이전 작품보다 조금 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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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보다 따뜻한
와일리 캐시 지음, 홍지로 옮김 / 네버모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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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는 기대했던 가독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나의 산만함이 한 역할을 한 것도 있지만 조금은 밋밋한 전개가 이것을 부채질했다. 화자가 세 명인데 처음에는 이것을 몰랐다. 아홉 살 소년이 화자라는 착각을 한 탓이다. 이런 착각이 몇 개의 문장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고, 바뀌는 화자는 조금 더 적응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솔직히 처음부터 강한 충격을 주는 소설이 아니다. 인물과 관계에 대한 두터운 바탕을 쌓아올린 뒤 순식간에 파국으로 이끌어간다. 이 과정을 보면서 그들에 닥칠 비극을 알게 되고, 운명 같은 삶의 관계가 엮이면서 이어진다.

 

애들라이드 라일은 노부인이다. 챔블리스의 교회에 다니다가 한 신도가 방울뱀에 물려 죽는 것을 보고 발길을 끊었다. 그 죽음은 은폐되었고, 목사는 라일을 위협한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산파로 아이들을 받아온 그녀는 이제는 교회 밖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혹시 교회에서 일어날 사건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교회 밖 관찰자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녀는 스텀프의 죽음을 보고, 숨겨진 사실을 알지만 그 어떤 진실을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독자들은 그녀의 속내와 감정의 표현과 과거사만 볼 수 있다. 이 과거사에서 또 다른 사실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제스 홀은 아홉 살 소년이고, 스텀프의 동생이다. 이 소년은 또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보여준다. 스텀프에게 있었던 사건과 그 후에 벌어지는 몇 가지 비극의 현장에 있음으로써 산증인이 된다. 처음 형에게 가해진 폭력에서 그가 내뱉은 한 마디는 광신의 무리에게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것만 믿고 보는 이들에게 사실의 무게는 아주 가볍다. 그리고 그가 본 불륜의 현장은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다. 아직 어리고 겁이 많은 소년이 사실을 제때, 제대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안관 클렘 베이필드는 노년이다. 그의 과거사 또한 결코 순탄하지 않다. 이 집안의 비극은 홀 집안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보안관이고, 스텀프의 죽음을 제대로 알고 싶어한다. 부검은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듣고 싶어한다. 그는 챔블리스의 과거도 알고 있다. 라일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할 뿐이다. 스텀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역할은 제스의 목격과 부검 결과가 맡는다. 신의 권능을 외치는 무리에게 인간의 법이 다가간다. 광신과 맹신으로 무장한 이들은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려는 의지조차 없다.

 

이 세 명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삶과 현실의 사건을 바라본다. 스텀프의 죽음은 신의 권능을 빌려 자행된 살인이다. 자폐에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소년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이미 이런 살인을 저질러온 그이기에, 모성보다는 신의 권능 아래 살기를 바라는 엄마 때문에 이 비극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 그 지역의 맹신적인 종교애를 앞에 풀어놓고, 이성이 얼마나 허약한 실체인지 보여준다. 예정된 파국과 과거의 비극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 이 마을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늘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에서 종교에 대한 맹신과 광신에 가려진 이야기 하나가 있다. 벤과 줄리의 부부관계다.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은 이 둘의 불안한 관계에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가 교회에 가서 맹신적인 믿음을 보여줄 때도, 불륜을 저지를 때도, 아내와의 유대와 사랑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줄리의 과거 속에 맹신의 씨앗이 있었다고 해도 그가 좀더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았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인 운명 탓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관계를 만든 것은 그 두 사람이다. 비극의 현장에서 줄리가 보여준 행동은 부부라는 관계가 얼마나 허울적인지, 광신이 얼마나 모성애보다 강한지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작가의 후기들이다. 보통의 후기와 달리 그가 이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았는지, 제목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등이 알려준다. 그의 후기를 읽다가 발견한 한 작가의 작품이 한국에 딱 한 권 번역되었고, 그것도 절판되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중고 거래 가격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고, 부디 요즘 아주 가끔 가는 헌책방에서 이 책을 봤을 때 그 제목을 기억하기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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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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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핫한 한국 소설이다. 인터넷과 언론에서 <82년 생 김지영>에 대한 언급을 너무 많이 들어 꼭 읽어야 하는 소설처럼 다가왔다. 보통 이런 소설에 관심은 두지만 잘 읽지 않는데 이번에는 읽었다. 소설보다 르포 같다는 누군가의 평과 “우리 모두 김지영이다.”라는 말 때문이다. 책을 받고 처음 에는 생각보다 얇다는 느낌이 들었고, 목차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저자 약력을 읽고 낯익은 제목이 있어 찾아보니 재밌게 읽었던 책이다.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게 수많은 호평을 받는지 궁금해 하면서 펼친 첫 장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김지영. 82년 생. 여자. 할머니, 엄마, 아빠, 언니, 남동생. 이렇게 여섯 명이 같이 살았다. 아버지는 공무원이다. 지금도 많지 않지만 그때는 더 적은 월급을 받던 직업이 공무원이다. 물론 뒷돈을 잘 받는 사람은 다르지만. 할머니는 아들 손자를 원했고, 딸만 둘을 낳은 엄마는 임신 중 딸이란 소식에 낙태를 한다. 다행이 막내는 남동생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아주 극진해서 같은 자식이란 느낌이 들지 않도록 만든다. 밥을 퍼는 순서가 아빠, 아들, 할머니 순이란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이런 가정에서 딸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김지영 엄마의 과거에서 잘 드러난다. 지영의 엄마는 이것이 한 맺혀 딸들의 삶이 주체적이길 바란다.

 

언니의 대학 선택을 둘러싼 갈등에서 기성세대의 시선이 드러나지만 엄마는 자신의 실수를 금방 깨닫는다. 사실 이 부분을 보면서 김지영은 아주 좋은 엄마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수많은 여자 선후배 및 친구들 이야기는 이것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97년 IMF사태는 삶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철밥통이었던 공무원을 퇴직해야 했고, 친구들의 허황된 감언이설을 엄마가 막아 집의 몰락을 저지했다. 이 시절 수많은 집들이 무리한 사업과 주식 투자 등으로 몰락했었다. 자신의 현실과 과거를 혼동하고, 너무 쉽게 사회를 마주한 탓이다.

 

이런 가정사 속에서 지영은 보통의 여자 아이들처럼 자란다. 그녀를 좋아하는 듯한 짝꿍의 놀림과 다툼을 겪고, 여성 차별이 보편화된 중고등학교를 거친다. 대학에서도 그녀는 성차별의 높은 벽을 마주한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순간도 많다. 등산동아리에서 일어난 몇 가지 에피소드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첫 사랑을 군대에 보내고,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는 과정은 일반적이다. 그런데 한 에피소드에서 한 선배가 내뱉은 말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내가 들어도 충격적이다. 이것은 남성의 문제라기보다 그 남자 개인의 문제인데 문맥 상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어렵게 취업한 그녀에게 놓인 현실은 일 잘 하니 더 열심히 일을 시켜야겠다는 것이 아니다. 언제 그만 둘지 모르니 남자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장이 있다. 여자 팀장이 아이와 가정보다 더 일에 집중해 인정을 받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은 다른 여직원들의 귀감보다는 장애물이 된다. 사장의 입장에서는 귀감일지 모르지만. 팀장의 한탄은 밖에서 보는 직장 여성의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거래처 부장과의 회식 자리는 몇 년 전 한 국회의원이 골프장에서 손녀 같아서 그랬다고 한 성추행이 떠올랐다. 자신의 딸은 지극정성으로 돌보려 하면서 다른 직장의 여사원은 왜 그렇게 대하는지.

 

결혼과 동시에 여성을 힘들게 하는 일 중 하나가 출산과 육아다. 출산도 쉽지 않지만 육아는 더 힘들다. 그녀가 가족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더 나서 설레발을 친다. 약을 해줘야 한다느니. 언제 나을거냐니 등. 이때 한 마디 쏘아붙이면 시원할 텐데 입을 다물고 웃고 만다. “어처구니없고 부당한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 입을 닫아 버린다. 그때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우리 사회가 여성 혐오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존재 자체가 얼마나 숱한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공감하는 대목이다.

 

육아에서 흔히 남성들이 하는 실수 중 가장 큰 것은 아마 아내를 돕는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같이 하는 일이 아니라 돕는 일이란 표현은 내 일이 아니라 내 시간을 쪼개 도와준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여직원과의 대화에서도 자연스럽게 서로 주고받는다. 집에서 얼마나 도와줘요? 라는 말로. 나도 이 말을 했다가 김지영처럼 아내에게 큰 구박을 여러 번 들었다. 첫 장 2015년 가을 김지영이 다른 사람들 흉내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과 2016년 그녀를 진찰한 의사의 속내는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현실을 비춰주고,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간결하고 건조한 이야기지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30대 이상의 여성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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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스페셜 에디션)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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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이야기 산문집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이번 스페셜 에디션에는 미발표 에필로그가 부록으로 붙어있다. 이전 판본을 읽은 사람들이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번 책은 개인적으로 산문집이란 부분보다 이야기에 더 방점을 두고 싶다. 한 편의 소설이라고 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은 구성과 전개이기 때문이다. 의문으로 시작해 만남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사랑과 헤어짐으로 연결되는 과정이 소설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소재나 주제를 다루지 않고, 자신의 삶과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산문집을 읽으면서 과연 소설인가?, 아니면 산문집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위에서 말한 전개 때문이다. 한 여자와 자신에 대한 집요한 기록은 결코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과연 이 기록들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고, 사실에 충실한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의 성격, 삶의 방식, 성적 취향 등이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이것 또한 사실과 거짓으로 충분히 꾸밀 수 있다. 이런 의심들을 뒤로 하고 이야기에 집중하면 아주 흥미로운 감정의 변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중간에 삽입한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남자 이야기는 재밌는 단편 소설로 읽힌다.

 

이석원의 전작을 읽고, 음악을 찾아들으면서 생각한 이미지가 이번에 많이 깨어졌다. 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하고 욱하는 성질 등은 이전 산문집을 잠시 떠올려준다. 결코 밝지 않았던 그 산문집은 이번 책을 읽기 전에 약간의 걱정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주 어둡고 무거운 내용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하고. 물론 이 걱정은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한 남자의 심리 상태와 감정 변화를 따라가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끝까지 한 여자와 자신의 글쓰기 등으로 채워나가는 것을 보고 산문집을 빙자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더 깊어졌다.

 

몇 개의 음반과 한 권의 책만으로 이석원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다. 그가 보여준 그의 성격이 실제 그대로라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있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여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 자신의 약점을 부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뺀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랫동안 밴드 생활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하면서 정신을 놓는 모습은 내성적인 성격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뭐 억눌린 감정들이 한순간에 폭발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란 제목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사랑해’였다. 나의 섣부른 판단이자 착각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자 김정희가 그에게 보내는 문자 ‘뭐해요?’가 그 말이다. 아마 처음에 이렇게 적었다면 공감하지 못했겠지만 끝부분에 이 부분을 쓰면서 충분히 공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말은 그가 가장 기다리는 말이기도 하다. 김정희와 만남은 언제나 이 말을 적은 문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엇갈림’이라는 이석원의 연애선생 나리의 말은 가슴 한 곳에 조용히 똬리를 튼다.

 

사랑 이야기 외에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당연히 글쓰기다. 방점 하나 때문에 정신없이 담당에게 욕을 했다는 부분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섬세하다면, 이런 부분에 예민하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비상적이고 미성숙한 행동이다. 그렇지만 이 일이 한없이 정체되어 있던 그의 글쓰기에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한다. 한 노 작가의 전기 덕분이다. 이때 나오는 이야기는 오히려 평범하고 교훈적이라 심심하다. 늘 작은 메모를 하고, 짧은 글 등을 블로그 등에 기록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재미있었고, 흥미진진했다. 그가 쓴 유일한 장편 소설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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