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 칼릴 지브란의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이 책도 그때 읽었을 것이다. 문고판으로 나왔던 그 당시 책들은 사실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내용이 아니고, 감성적으로 파고들지도 못했다. 이런 기억만을 가지고 있던 중에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 낯익지만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류시화의 번역이다. 집에 이 시인의 책이 몇 권이나 있지만 늘 묵혀두고만 있다.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보다 젊었던 당시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처음 접하는 류시화의 번역이란 점이 다시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스물여섯 가지 삶에 대한 주제를 시적 언어로 썼다고 한다. 이전까지 이 책을 시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도 읽으면서 시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오르는 이야기 방식이다. 물론 훨씬 간결하고 읽기 쉽다. 이런 생각들 사이로 칼릴 지브란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크게 공감을 하고, 어떤 부분은 이해하지 못함의 영역에 머물고, 또 어딘가는 내 이성의 쓸데없는 구별로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다. 아마도 먼 훗날 다시 한 번 더 읽고 새로운 감상을 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 않다. 다른 책에서 이미 본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간된 지도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가는 현실과 이 책을 읽었던 수많은 작가들을 감안하면 이해가 충분히 된다. 여기에 시인에게 영향을 줬던 책들을 더하면 완전히 새로운 글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모으고 자신의 생각을 더해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내가 읽으면서 감탄했고, 다시 기억을 되살렸던 대부분은 차분하게 읊조리는 시인의 목소리와 이성과 감정과 선과 악에 대하여 풀어낸 이야기들이다.

 

예언자 알무스타파가 오르팰리스 성에서 살다가 떠나는 순간에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 배를 타고 떠난다는 설정을 죽음으로 해석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동의한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고 작별을 말하는 알무스타파의 이야기는 한 편의 잠언집에 더 가깝다. 신비주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문구들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계속해서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놓치는 것도 많고, 말의 혼란 속에 헤맨다. 나 자신 또한 이런 순간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나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라.”는 문구는 이런 경우에 딱 맞다. 이성과 감정을 바다 위를 향해하는 배에 비유한 것이나 선과 악의 구별을 다르게 풀어낸 부분은 조용히 읊조리면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 책은 부분과 전체를 구분하기보다 하나의 것으로 다루면서 조용히 나눈다. 개인적으로 고통에 관해서 풀어낸 부분은 나의 이해와 충동했다. 현실 너머를 말하는 이런 글을 볼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감이다.

 

칼릴 지브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두 개의 글이 있다. 하나는 번역자 류시화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 키랄라의 글이다. 조지 키랄라의 글은 칼릴 지브란의 삶을 신비화하고 과장한다. 현실에 덧칠했는데 이 부분을 지우는 역할을 역자가 한다. 몇 가지 분명하지 않은 에피소드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평가가 거의 없는 시인에 대한 아쉬움을 내뱉는다. 그리고 한 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말한다. 조지 키랄라의 글과 달리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시인의 삶과 비교하면 글과 현실의 차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닐. 앨범. 커버. 아트
오브리 파월 지음, 김경진 옮김 / 그책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말해 앨범 커버를 잘 모른다. 크게 관심을 가진 적도 거의 없다. 예전에 LP를 샀을 때도 앨범 커버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CD를 살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음반을 사지 않는 순간이 왔다. 가끔 헌책방이나 바자회 등에 가면 좋아하거나 듣고 싶었던 뮤지션의 CD를 사는 경우가 있지만 예전처럼 신보를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게 되면서 CDP 등도 어딘가로 치워놓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얼마나 열심히 들고 다니면서 들었던가. 저자가 LP에서 CD로 넘어가고, 뮤직 비디오 시대가 되면서 전업한 것이 저절로 연상된다.

 

앨범 커버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는 없었는데 최근에는 아주 조금 생겼다. 앨범을 사지 않으면서 그냥 둘러보다가 조금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정도지만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본다. 하지만 관심 분야가 아니다 보니 이 분야의 지식이 너무 없다. 역자가 쓴 글에도 나오지만 대부분 앨범 커버에 관심을 두는 음악 애호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이제 음악 애호가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내가 힙노시스란 음반 커버 제작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책에서 한두 번 정도 언급되었다면 봤을지 모르지만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름은 아니다. 이런 회사의 앨범 커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책 소개에 나온 뮤지션의 이름들 때문이다.

 

1967년부터 1984년까자 힙노시스는 373장의 음반 커버 디자인을 했다. 집에 있는 CD를 찾아보면 한두 장 정도는 분명히 있을 텐데 찾기가 귀찮다. 어느 날부터 CD를 듣지 않으면서 포장해서 처박아두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피터 크리스토퍼슨, 오브리 ‘포’ 파월, 스톰 소거슨, 이렇게 세 명의 친구가 모여 만들어진 힙노시스는 현대 뮤지션의 수많은 명반의 앨범 커버를 만들었다. 이 뮤지션의 이름 몇몇만 말하면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레드 제플린, 블랙 새버스, 피터 가브리엘 등이다. 이 이름들은 내가 즐겨 듣거나 언제나 주변에서 듣고 기억하는 이름들이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뮤지션의 이름들이 나온다. 아는 만큼 더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구성은 간단하다. 피터 가브리엘이 쓴 서문과 저자의 인트로와 앨범 커버 카탈로그와 아웃트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카탈로그다. 이 카탈로그를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그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이 작업 속에 힙노시스가 추구한 것은 무엇인지 등이 나온다. 어떤 커버는 매니저와 뮤지션의 갈등을 불러오고, 어떤 커버는 절대적 신뢰를 얻기도 한다. 이 짧은 글 속에서 그 시대와 앨범 커버 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짝 들여다볼 수 있다. 앨범 커버를 보는 재미에 덧붙여 그 시절 음악가들의 성향이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가끔은 내가 알고 있는 뮤지션의 앨범이 없어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글을 읽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재밌는 글은 “올바른 상황에서라면 ‘왜?’에 대한 모범 답안은 항상 ‘왜 안 돼?’입니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채화 채색이 꾸준히 지속된 이유도 재밌다. “영국 날씨는 자주 험악하거나 우중충해져서 컬러로 찍은 사진은 대부분 우울해 보였다.” 이런 날씨라면 채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 작업과 다른 사진이나 풍경 등을 오려붙여 만든 앨범 커버도 적지 않게 나온다. 그 시대를 생각하면, 아니 지금 기준이라도 남자나 여자의 나체 사진이 나오는 것은심의 등에 걸릴 수 있는데 꽤 많은 앨범 커버가 이 나체 사진을 담고 있다. 영국이라 가능한 것일까?

 

이들이 벌인 작업 내역을 보면 현재 포토샵으로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당시는 이런 프로그램이 없었다. 아니 개인이 컴퓨터를 소유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이들은 오려붙이고, 덧칠하고, 긁어내고, 뒤틀면서 한 장의 앨범 커버를 만들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앨범 커버가 나오게 하기 위해,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아주 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사진이 정면에 아주 크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앞부분에 이들이 어떻게 의뢰 금액을 올렸는지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부분은 사업 혹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냥 무심코 보고 지나간 앨범 커버 속에 담긴 의미와 의도가 새롭게 다가왔다. 천천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아주 재밌는 설정과 도구들이 보인다.

 

373장의 앨범 커버를 본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이야기가 곁들여진 앨범은 크게 나와 더 잘 보이고, 제작 동기나 방법 등도 나와 비교적 쉽게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면에 몇 개의 앨범 커버가 나오면 이전보다 대충 보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도, 집중력도, 보이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안까지 있으니. “천천히, 차분히, 오래 두고 보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책”이란 평가에 동의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앨범 커버 속에는 힐끗 본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나 상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기준에서 본다면 패션이나 머리 스타일 등 때문에 낡아 보이지만 그 시도나 구성 등은 결코 낡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부터는 앨범 커버를 결코 힐끗 보지 못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란 매력적인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문구는 늘 서평을 쓰는 나에게 너무나도 매혹적인 유혹이다. 한때 가벼운 글이라도 한 번 써볼까 하고 시도한 적 있는데 첫 문장도 끝내지 못하고 중단했다. 머릿속을 떠도는 이미지를 문장으로 표현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이후에도 비유와 묘사 부분으로 들어가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을 때 아주 긴 묘사가 들어간 소설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와중에 펼친 프롤로그는 하나의 주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은 글쓰기 준비 작업들이었다.

 

‘천천히’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늘 담아두지만 내 몸은 이 천천히를 거스른다. 계단도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이 천천히는 내가 의식하고 노력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책 읽기나 사물을 들여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읽고 다시 읽는 책은 거의 없다. 일 때문에, 리포트 때문에 다시 진중하게 읽는 경우를 제외하면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문 서적도 이런 식으로 읽었다. 그러니 이해하고 아는만큼만 머릿속에 남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내 속에 잠재된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이렇게 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책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도.

 

창작을 시작하기 전 그는 창작의 도구들을 보여준다.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설명으로. 김중혁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몇 권 가지고 있고,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가 웹툰 연재를 했다는 말은 의외다. 직접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역시. 컴퓨터와 기타 도구들을 보면서 옛 추억을 떠올렸다는 것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도구를 지나면 창작의 시작을 위한 준비 작업이 나온다. 여기서 천천히 읽기와 두 번 읽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글쓰기의 기본 마음가짐이나 시도를 풀어낸다. 메모와 스크랩에 대한 부분은 많은 작가들이 어떻게 그 방대한 문구를 인용하고 삽입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글을 쓸 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첫 문장이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로 한 문단이 끝날 때마다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지 고민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경험하는 일이다.”란 문장은 끝에 도달해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서평도 마찬가지다. 처음 쓸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몇 줄 쓰는 것도 힘들었던 초기에 비하면 지금은 분량이 많이 늘었다. 어떤 때는 덜어내야 할 분량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도 적지 않다. 게으르고 시간이 부족해 요즘은 퇴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이런 나에게 실전 글쓰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게 만들었다.

 

솔직하고 정직한 글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포털의 댓글들이 금방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거기에 어떤 ‘정리’와 ‘공감’도 없기 때문이다.” 댓글의 기발함에 놀라고, 그들의 원색적인 욕과 표현에 기겁했던 과거를 지나 이제 댓글에 시들해지는 나의 마음이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잘 정리된 SNS의 글들이 한 권으로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것을 가끔 보는데 이때는 그 당시 상황과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관찰이 중요한 그림 이야기는 한 그림 그리는 여행 이야기에서 읽었던 것이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다. 이 책의 구성 중 목차만 보고 ‘뭐지?’하고 의문을 품었던 5장의 대화 완전정복 편은 신선한 편집과 구성이었다. 몇 문제 맞추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상황 설정과 그 답의 도출까지 이어지는 과정들은 풍부한 독서와 깊은 사고가 없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읽기만 해서도 불가능하다. 밑줄 긋고, 필요한 자료를 모아둬야만 가능하다. 물론 이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정리도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한 작가의 창작비법은 다방면에 걸친 이야기와 도구를 거치면서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글 쓸 준비가 되었는가, 첫 문장은 언제 쓸 것인가. 일단 무엇이든 써야 한다. 이 서평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리 홀레가 오슬로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올레그가 연류된 살인 사건 때문이다. 경찰은 올레그를 살인자라고 생각한다. 증거가 그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닌 신분으로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이전처럼 경찰의 도움을 직접 받을 수도 없지만 오랫동안 쌓아둔 인맥은 언제나처럼 이 사건을 수사하는데 도움을 준다. 전작들처럼 강한 흡입력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이번 작품에서 라켈과 다시 만난다. 올레그의 엄마이니 당연하다. 이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 만든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강렬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같이 나온다. 하나는 해리가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구스토라는 청년이 내뱉는 죽은 자의 말이다. 해리 특유의 수사 방법이 긴박감을 만들고, 사건 해결에 한 발씩 다가간다면 구스토의 말은 그의 삶과 해리의 수사 과정에서 생략된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이 둘은 구스토의 살인에는 같이 도착하면서 누가 진짜 살인자인지 알려준다. 이것은 추론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많은 미스터리에서 살인 이유를 추론하면서 범인을 잡아내지만 실제 행위에는 이것 외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은 늘 탐정물을 읽을 때 느낀 아쉬움인데 이 부분을 이 설정을 통해 아주 멋지게 해결한 것이다.

 

구스토. 아주 매혹적인 청년이다. 그의 미모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여자들에게 더 강렬하다. 그가 입양된 집의 엄마와 딸 모두 그에게 빠졌다. 막장 드라마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그 집은 풍비박산이다. 하지만 그의 의동생은 그를 잊지 못한다. 다시 재회하는데 이것이 그 여자의 삶을 산산조각낸다. 구스토의 매력을 읽을 때면 언제나 이 멋진 외모라면 영화나 모델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물론 그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마약까지 곁들여지면서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다.

 

올레그. 뛰어난 운동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해리가 떠난 후 삶이 조금씩 무너진다. 구스토와의 만남은 일상을 벗어나게 만든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그도 마약 세계에 빠진다. 처음에는 판매자였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중독자가 된다. 이런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구스토의 여동생 이레나다. 새로운 삶을 생각하지만 약물 중독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처음 해리가 면회 왔을 때 보여준 반응과 다시 만났을 때 보여준 반응은 그가 해리에 대해 가진 감정을 아주 잘 표출해준다. 그가 한때 경찰이 되려고 했다는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두바이와 바이올린은 오슬로를 휘어잡은 마약 세계를 대변하는 이름들이다. 바이올린은 새로운 마약 이름인데 너무나도 강렬한 중독으로 중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 마약을 파는 마약상들이 입는 옷은 아스널의 운동복이다. 아스널의 광고주는 아랍에미레이드 항공이다. 이 마약을 공급하는 인물을 익명으로 부를 때 두바이라고 한다. 이 운동복 하나가 해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두바이는 익명으로 숨어서 공포와 마약으로 오슬로의 밤을 지배한다. 이 지배에는 권력과의 유착이 필수적이다. 공권력은 어둠을 한 곳으로 밀어넣고, 그곳만 관리하면 너무 편리하고 보기 좋다. 미드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르웨이의 모습을 뒤집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복지국가 이미지의 이면을 아주 신랄하게 파헤친다. 허구가 반이라고 하지만 밖으로 알려진 모습 뒤에는 언제나 이른 어둠이 있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인상적이었던 문구 중 하나는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짧다는 말이다. 그로 인한 교통 혼잡 시간에 대한 것은 그 이면과 상관없이 부럽기만 하다. 그리고 강렬한 권력 욕구가 만들어낸 비극도 일상의 이면으로 가려진다. 정치인의 불륜과 정치 경력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부분도 신선하다. 다만 미성년자라면 문제가 다르다.

 

곳곳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더 많은 단서가 나타난다. 비밀이 드러나길 꺼리는 무리가 등장하고, 자신의 비리를 숨기려는 경찰도 나타난다. 구스토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 몇 가지 사건들은 거시적 풍경과 미시적 현실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공권력과 결탁하고, 그 돈으로 더 많은 시장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 사이에 끼어든 바이올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다. 예상하지 못한 비극들은 바로 이 과정에서 생긴다. 마약 중독은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자리잡은 어둠과 악의는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집어삼킨다. 구스토의 이야기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변함없이 이번에도 해리의 활약은 대단하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거침없는 행동은 아주 거친 남성의 야수성을 폭발시킨다. 하지만 라켈과 연결되면 그 야성은 말랑말랑한 감수성으로 변한다. 전작들에서 손가락을 잃고,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면 이번에도 아주 큰 상처를 얻는다. 언제나처럼 이 상처는 죽음을 비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이야기가 반전으로 이어지고, 이 반전 속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언제나처럼 해리 홀레는 나를 사로잡았고, 이 이야기의 다음을 역시 손꼽아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묵자가 필요한 시간 - 2000년간 권력이 금지한 선구적 사상가
천웨이런 지음, 윤무학 옮김 / 378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때까지 내가 알던 묵자가 아니다. 많은 책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읽었지만 묵자의 존재는 아주 미미했다. 묵자보다 한비자의 비중이 더 높았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유가와 함께 묵자를 같이 놓아둔다. 가히 쌍벽의 존재였지만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은 사라졌다. 이 사라짐은 그 위세와 비교했을 때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 저자는 묵자의 실존부터 시작하여 그 무리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변하게 되었는지 따라간다. 그리고 그가 이룬 성취와 과업의 의미와 한계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 속에 중화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묵자에 대한 많은 논쟁을 앞부분에 배치했다. 묵의 의미, 생몰연도, 출생지, 선조와 출신, 유학의 공부 여부 등이 대표적인 논쟁거리다. 많은 자료가 사라진 탓에 이 논쟁은 남은 자료를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묵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유학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다면 조금 의아한 부분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그 세력이 강대했기에 더 강한 탄압과 박멸의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읽고 분석해야 했다. 읽으면서 그 의미가 퇴색했던 한 인물을 되살려내려고 노력한 수많은 학자들에게 감탄했다.

 

하층 수공업자 출신과 유학을 배운 후 자신만의 학문을 만들고 겸애를 부르짖은 묵자.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하지만 그와 그 제자들이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하나씩 파고 들어가면 훨씬 대단한 묵가를 만나게 된다. 머리끝부터 발뒤꿈치까지 모두 닳아 없어진다고 해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기꺼이 한다는 맹자의 말은 이 묵가의 정신과 행동을 아주 잘 표현해준다. 한비자가 “세상의 가장 유명한 학문은 유가과 묵가이다.”라고 말한 것은 유학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주장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런 말들과 함께 남아 있는 묵경을 통해 하나씩 풀어낸 묵자의 철학과 업적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먼저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부제는 2000년 간 권력이 금지한 선구적 사상가이다. 이 책 속에는 권력이 금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들어있다. 하나의 학설이지만 진의 천하통일 이면에 묵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가정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권력이 금지하고 탄압하는 와중에 묵가의 외피는 계속 바뀌고, 다른 모습을 가진다. 종교와 비교한 부분에 이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느끼고, 그들의 강한 규율을 읽으면 결코 쉽지 않은 조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기본이 되는 정신이 겸애인데 나와 남, 빈부, 신분, 혈연, 지역에 상관없이 나와 남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이란 시대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나왔다는 것이 대단하다.

 

겸애와 함께 다루어야 할 것이 비공과 절용이다. 비공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절용은 근검절약이다. 부국강병으로 나라를 키워나가던 그 시절에 이런 주장이 큰 세력을 얻었다는 것은 그 시대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고, 왜 완벽한 주류가 되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는지 그 단서를 알려준다. 송나라 침공을 막았다는 묵자 최고의 업적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기술자이자 수성 전문가인지 알려준다. 공성에 대한 방어 부분을 기록한 자료를 읽다보면 그 시대의 뛰어난 과학 기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수반과의 고사는 아주 재밌고, 다양한 해석으로 이어진 부분도 흥미롭다.

 

묵자와 함께 저자가 치켜세우는 것이 중화민족이다. 한족이 아니라는 부분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읽다 보면 동이족이 나오는데 이 동이족이 한민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인지는 저자의 진짜 속내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읽다 보면 동이란 단어가 한국의 강한 민족사관에 입각한 학자들이 주장한 것과 일치한다. 이것이 지역과 연결되면 많은 논쟁과 함께 국민의 자부심과도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묵자의 과학기술과 논리학 부분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과한 해석 같기 때문이다.

 

원전을 읽지 않았고, 다양한 저자들의 다양한 분석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쓴 글이다 보니 결코 쉬운 독서가 아니었다. 한자의 특성 상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면 묵자가 말년에 흑은사에 은거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절(寺)이 불교의 그 절이라면 시대가 맞지 않다. 단순히 그 지명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라면 정확한 문장이 아니란 아쉬움이 있다. 또 저자가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글을 분석한 것과 달리 과학기술이나 논리학에서 현대적 해석의 잣대를 너무 쉽게 들이대는 부분은 왠지 살짝 반감이 생긴다. 아직 세계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부분은 더 많은 연구 결과 이후 논의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의 사상가를 이렇게 일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자료가 풍부하지 않다면 더욱 힘들다. 자료의 빈 곳을 고증과 연구 등으로 채워야 하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묵가의 일부가 유협으로 흘러갔다는 대목에서 무협 속 협객들이 떠올랐다. 민중의 반란들 속에 보이는 묵가의 흔적은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그 사건을 보게 한다. 한동안 잊고 있던 중국철학에 대한 관심이 샘솟는다. 민중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부분에 대한 한 학자의 냉혹한 평가는 그 사상과 시대뿐만 아니라 그 사회정치사상이 지닌 한계도 같이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다. 이제 묵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