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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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공포 게시판에 처음 공개된 이야기가 소설로 출간되었다. 소설의 도입부만 놓고 보면 소위 말하는 진짜 경험담 형식을 담고 있다. 파커라는 이름의 정신과 의사가 한 정신병원에서 경험한 일을 풀어놓는 방식이다. 아주 흔한 형식이다. 가독성이 좋아 잘 읽히는데 분량도 많지 않다.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어진다. 아마 이 부분이 이 소설의 흥행에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 취향과 동떨어져 있는 소설이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도입부나 초반 진행은 상당히 시선을 끈다. 뻔한 이야기지만 정신병원의 괴담 같은 환자에게 끌리고, 그 환자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과 가장 오랫동안 담당했던 직원 네시의 자살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환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본다. 어린 나이에 병원에 입원한 후 바로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했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퇴원하지 않았고, 그 환자를 담당했던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나쁜 일들이 생겼다. 자신만만한 파커는 더 많은 기록을 보게 되면 자신이 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환자의 이름은 조셉 E.M이다. 그의 상사인 브루스는 파커의 시도를 보고 화를 낸다. 이때 병원장 로즈가 나타나 그에게 그 환자를 치료하게 해준다. 로즈는 누군가가 조셉의 파일을 요청하면 자신에게 통지하게 만들어 놓았다. 몇 개 숨겨둔 파일도 그에게 전달한다. 파커는 의욕적으로 그 환자를 치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환자와의 첫 만남 이후 그는 환자가 부당하게 오랫동안 병원에 감금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를 감시하는 듯한 간호사들이 주변을 맴돈다. 조셉을 병원에서 탈출시키려는 시도를 하는데 간호사에게 잡힌다.


그가 그 환자에게 농락된 것이다. 병원장 로즈뿐만 아니라 그 이전 병원장까지 나타나 조셉이 어떤 환지인지 말한다. 그 환자를 담당했던 의사 등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아이였던 그 환자가 묘사한 설명과 인터뷰 테이프를 다시 듣고 병원장들의 가설을 다시 검토한다. 이 과정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심리학 관련 소설의 전개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야기 사이 사이에 뭔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의 나이와 행동 등이 이상하다. 병원장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조셥의 집을 방문한다. 거기서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마주한다. 소설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파국의 수레는 바쁘게 굴러간다. 이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소설이 아닌 영화라면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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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검은 강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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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시리즈 3번째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은 아직 읽지 않았다. 최근에 읽은 중국 추리소설에 상당히 만족했고, 이 시리즈의 평이 좋아 역주행하려는 마음으로 선택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역주행하고 싶은 시리즈다. 팡무란 인물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와 그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몇몇 인물들은 이전 작품에 등장해서 같이 사건을 수사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읽을 때 이번 소설 때문에 감정이 격해주는 순간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그리고 대단한 가독성을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내용의 잔혹함을 생각하면 가볍게 읽지는 못할 것 같다.


한 남자가 호텔에 들어가서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그 살인자를 좇아간다. 칼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총을 쐈는데 숟가락이다. 그리고 공안들이 바로 온다. 이 남자가 바로 C시 공안국 부국장 싱즈썬이다. 소설은 이렇게 문을 열고, S시로 출장을 간 팡무의 대활약을 보여준다. 여배우 페이란 납치 사건이다. 납치범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고, 페이란의 알몸을 자극적으로 찍은 영상을 보낸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팡무를 보고 있으면 냉철하고 담대한 진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이미지가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면서 팡무란 인물의 이미지가 많이 흐트러졌다.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S시의 사건 해결 후 싱 부국장의 살인 사건 이야기를 듣는다. 현직 공안 간부가 호텔에서 무기도 없는 민간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가 주장하는 여성의 시체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호텔의 CCTV는 그날 점검으로 꺼져 있었다. 어디로 보나 수상한 상황이다. 이 사건을 안 언론이 공안을 질타한다. 그를 법정에 세워 법 앞에 심판받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팡무는 싱 부국장을 면회 간다. 구치소 안에서 폭행을 당해 얼굴이 엉망이다. 현직 공안이 들어왔으니 범죄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구치소 소장도 살인으로 들어온 그를 특별 대우할 마음이 없다. 싱은 팡무에게 한 사람을 찾으라고 말한다. 잠입수사를 지시한 딩수청이다.


딩수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인맥을 통해 그 흔적을 좇는다. 이 과정에서 팡무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폭압적이기보다 온정적이다. 물론 돈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팡무가 사건의 피해자나 연락책 등에게 주는 돈은 그 당시 돈으로 생각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중국에서 출간된 연도가 2012년이다. 그의 월급을 생각하면 과도한 지출이다. 그가 S시 사건 해결 후 샤오왕이 전달하는 돈을 거절한 것을 생각하면 그가 지출한 돈은 그의 월급을 초과한다. 그의 정확한 월급을 모르니 그냥 지나가자. 돈과 인정으로 작은 단서 하나를 얻는다. 그곳에서 딩수청과 한 소녀를 찾아낸다. 그곳에서 그는 죽을 위험 속에 놓인다. 나중에 이 소녀의 이름이 루루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를 피신시킨 후 그녀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단서를 얻는다. 이 단서가 거대한 음모의 한 자락을 발견하게 한다.


싱 부국장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장면 하나는 너무나도 끔찍하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간들의 탐욕은 보고 있으면 그 잔인함과 참혹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 중 최악 중 하나를 이 속에서 본다. 돈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윤리나 도덕은 중요하지 않다. 한 마을 전체가 범죄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거나 돕고, 권력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범죄자들의 방어막이 된다. 평범한 공안 팡무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관료들이다. 팡무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와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공포는 읽을 때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더 강하게 느낀다.


어린이 성매매를 둘러싼 글은 언제 읽어도 끔찍하다. 처음에는 ‘중국이니까’ 라고 생각했다가 N번방 사건이 떠오르면서 우리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N번방 사건이나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판결 등을 보면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범죄의 검은 강이 우리의 삶 이면에서 흘러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해도 최소한 밝혀낸 사건에 대한 처벌은 엄정해야 하지 않는가.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진 팡무를 일깨운 것은 피해 아동의 고맙다는 말 한 마디다.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설정이지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멋진 반전을 만들어내었다. 한국이라면 솜방망이 처벌로 용두사미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말이다. 책에서 경찰이 충성해야 할 대상이 법인지 양심인지 묻는데 이 질문을 한국의 검찰과 사법부에 그대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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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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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란 이름을 발표한 소설 중 한 권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 <롱 워크>를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의 <런닝 맨>도 이전에 재밌게 봤다. 지금처럼 스티븐 킹이 꾸준히 나오기 전부터 킹의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그래서 구작들은 많이 읽었는데 신작들은 비교적 적게 읽었다. 어떤 작품은 제목이 바뀌어 나와 읽은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집을 뒤지면 구판이 여러 권 나올 것이다. 킹에 대한, 리처드 바크만에 대한 작은 기억은 이 정도만 말하자. 이제는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이란 사실이 잘 알려졌으니까. 스티븐 킹의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니까.


나에게 킹은 언제나 쥐기 힘들지 읽기 힘든 작가는 아니었다. 집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 많은 작가들이 읽고는 싶지만 읽기 힘들어 포기한 책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손에 들면 재밌게 읽을 것이 분명하지만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 작가들도 많다. 이런 증상이 시초 중 한 명이 스티븐 킹이다. 헌책방을 돌면서 책을 살 때 킹의 소설을 바로 사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주저함 때문이다. 그래서 놓친 좋은 작품들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런데 지금은 황금가지에서 꾸준히 책을 내어주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지만. 킹이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꾸준히 소설을 내었는가 생각하면 그의 작품들을 따라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속도로 공사 예정지를 WHLM 방송국 기자가 취재를 한다. 이때 인터뷰 한 인물 중 한 명이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바튼 도스다. 작가는 프롤로그에 이 사실을 살짝 말하고 지나가는데 생각보다 이 장면이 중요하다. 모두 읽고 난 후 다시 앞으로 돌아와 확인했을 때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바튼은 세탁회사 중간 관리자다. 고속도로 건설로 회사를 이전해야 한다. 그의 집도 역시 공사의 여파로 옮겨야 한다. 이런 현실이 바튼 도스를 화나게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좋아하면서 옮겼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추억들이 뒤섞여 있는 곳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한계시점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버틴다.


아내에게는 새로운 집을 보러 갔다 왔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가보지 않았다. 아내도 같이 가자고 말하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다. 회사 이전 예정 부지의 계약 마감 시한이 다가왔을 때 사장에게는 그 건물이 가진 문제들을 만들어 내어 더 낮은 가격으로 옮길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상당히 그럴 듯하다. 하지만 사실을 바로 알려주면서 이런 위험한 일을 저지르는 이유를 묻게 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니라는 직원에게 자신의 과거와 이전 회사 사장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이야기에 나온다. 아주 인간적인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회사가 자본에 팔리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이것을 잘 알려주는 장면들이 곳곳에 나온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중동 전쟁에서 비롯한 제1차 석유 파동이다. 기름 값이 올라가면서 절전 등을 외치던 시기였다. 바튼이 분노해서 고속도로를 과속해 달릴 때 사람들은 그에게 욕을 하고, 주유소에는 기름이 없을 때도 있었다. 높아지는 원유 가격에 기름을 많이 먹는 자동차 값이 똥값으로 떨어지던 시기다. 불안감을 엄청나게 고조시켰던 모양이다. 현대 사회가 석유를 기반으로 성장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듯하지만 그 뒤에는 미국 정유회사의 조작들이 숨겨져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먼 훗날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절전 등을 외칠 때 이것과 상관없다는 듯이 고속도로를 짓는다. 고속도로 건설과 유지는 기름을 엄청나게 먹는 일인데 말이다.


작가는 그냥 보면 왜라고 묻게 되는 질문을 촘촘하게 엮어 놓고 마지막에 한방에 터트린다. 그 속에 가려진 것을 더 발견하는 것을 독자의 몫이다. 곳곳에 블랙유머와 비판의식을 드리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튼이 중화기를 사는 장면에 나오는 문구다. ‘총이 불법화되면 범법자들만이 총을 갖게 된다.’ 총기협회가 내세우는 표어다. 이것을 뒤집어 보여주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이다. 사냥용 총이 보여준 위력은 끔찍하다. 총을 누가 샀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총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안다. 서부 개척 시대도 아니고 일반 시민들이 총을 소유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범법자들이 총을 쉽게 못 가지게 하고,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 강한 처벌을 한다면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정치 로비는 이것을 힘들게 한다.


자꾸 다른 길로 빠진다. 이 작품이 지닌 매력 중 하나다. 읽을 때는 그냥 한 중년 남성이 추억 등으로 심리적 갈등을 겪고 파국으로 치닫는 내용인 것 같다. 실제 그의 정신 분열적인 상황과 뒤틀어지는 관계, 이전 부지 미계약 등으로 인한 회사 폐업 등을 보면 그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고 회사가 주장할지 모르지만 과연 그럴까 하고 묻게 된다. 회사가 문을 닫은 후 몇 사람의 새로운 직장 이야기는 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특히 바니의 경우가 그렇다. 미래가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튼은 아들이 뇌종양을 죽은 후 그 아픔을 털어내지 못했다. 울고 슬퍼하고 그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했는데 그 감정이 자신 속에 고였다. 밖에서 보기에 미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성은 날카롭게 살아 있다. 거리의 신부와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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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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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시리즈 4번째 작품이다. 앞의 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아마 집에 한두 권 정도 더 있을 것이다. 이 책도 사 놓고 상당히 묵혀 두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첫 연애소설이란 홍보문구를 기억하는데 작가는 이 연애도 미스터리처럼 풀어놓았다. 일곱 편의 연작 단편을 실고 있는데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은 첫 번째 실린 <곤돌라>인데 바람 피는 남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아주 스릴 있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 하나로 모든 것을 뒤집는다.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예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이 단편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 단편집에 나오는 남녀는 모두 아홉 명이다. 이 중에서 한 명만 이 단편 속 커플과 관계가 없다. 커플은 셋이고, 한 커플은 가능성만 남겨둔 상태로 끝난다. 그 가능성을 풀어낸 단편이 <곤돌라 리플레이>다.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려는 순간 첫 단편의 남녀 커플이 등장해 상황을 이상하게 이끈다. 이 작품에서 여자가 느끼는 감정이 폭발할 때 웃고,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 두 작품 사이에 낀 다섯 편의 단편들은 커플이 이루어지거나 <스키 가족>처럼 작은 반전을 품은 이야기들이다. <스키 가족>은 스노보드를 싫어하는 장인을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인데 이 편견을 살짝 깨부수는 훈훈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리프트>의 커플이 결혼한 후 이야기다.


<리프트>는 도쿄 한 호텔에서 근무하는 남녀 직원들이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에 보드를 타러 오면서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다룬다. 이 단편집에서 불운의 아이콘 같은 히다의 존재가 드러난다. 자신이 관심 있는 여자에게 바로 달려들지 않고 주변에 머물면서 기회만 노리는 인물이다. 연인보다는 친구나 믿을 수 있는 동료로 인식된다. 그의 옆에는 동기이자 바람둥이인 미즈키가 있다. 미즈키는 아키나와 사내 연애 중이지만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히다가 관심을 둔 마호에게 미즈키가 작업을 거는 듯해 충고를 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긴다. 이 일이 있은 후 히다는 호텔에 취직한 미유키와 만남을 이어가면서 프로포즈를 하려고 한다. 멋진 프로포즈 계획을 세웠는데 갑자기 나타난 전 남친이자 <곤돌라>의 주인공인 고타가 나타나 그녀를 휙 채어간다.


히다의 불운은 <겔팅>에서도 계속된다. 그런데 그가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아 단편이다. 히다는 여자를 재미있게 만들지도, 여자가 관심 있어 하는 대화도 제대로 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미식축구만 열심히 떠들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미즈키는 여전히 바람 필 생각만 하고, 모모미는 미즈키에게 끌린다. 이 미팅은 히다를 위한 것이고, 그는 가벼운 만남만을 원할 뿐이다. 모모미가 히다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한 순간이 마지막에 나오는데 그것은 히다가 일하는 호텔에서 그의 모습을 봤을 때다. 이후 이 둘의 관계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데 <곤돌라 리플레이>에서 그 방법을 찾아낸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는 고타 부부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힘을 잃지만 말이다.


이 단편 속 남녀들은 스노보드를 상당히 좋아한다. 일년에 몇 번이나 이 스키장에 와서 보드를 탄다. 각각의 커플들과 함께 오는데 두 명의 남자만 그렇지 못하다. 히다와 미즈키다. 히다는 연애에 서툴러서, 미즈키는 히다를 도우면서 자신의 바람기를 채우기 위해서다. 다시 한 번 더 미즈키 등이 히다의 프로포즈를 돕기 위해 작전을 펼치는데 히다가 부상을 당한다. 뭐지? 역시 불운의 아이콘인가 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웃게 된다. 연애하는 남녀의 심리 표현을 간결하지만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이상하고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모두 다 읽은 지금 갑자기 이 훈훈함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떠올린 것은 왜일까?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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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불의 딸들
야 지야시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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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소개를 읽으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250년의 세월 속에 열네 명의 이야기를 담아 내었다는 정보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었을까 하고, 호기심을 자극했다. 표지를 넘기고 마주한 두 면을 채운 가계도는 이 소설의 구성과도 이어진다. 마메에서 갈라져 에피아와 에시로 나누어진 두 자매와 그 후손들의 삶은 긴 세월만큼 그 시대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어 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한 명은 백인의 현지처가 되어 안락한 삶을 살고, 한 명은 지하에서 노예로 팔려갈 상황이다. 이렇게 갈라진 후예들의 삶을 작가는 간결하지만 한 순간의 핵심을 뽑아내어 각각 다른 공간, 다른 문화,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에피아가 미녀로 알려져 30파운드에 총독의 현지처가 된다. 아들 퀘이를 낳는다. 퀘이는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아버지의 후광과 삼촌의 영향력이 함께 어우러져 왕의 딸과 정략 결혼한다. 서아프리카 판틀랜드는 노예무역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케이프코스트 성은 두 자매의 엇갈린 운명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자 참혹한 역사의 공간이다. 물론 두 자매는 서로의 존재를 정확하게 모른다. 에시가 다른 노에의 입을 통해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백인들이 성을 짓고, 흑인들을 충동질해 노예를 수집한다. 노예무역이 순수하게 백인들만의 죄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흑인들은 자신들이 전쟁으로 획득한 노예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들이 먼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에피아의 후손들이 나중에 가나가 되는 곳에 머물면서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산 반면 에시의 후손들은 미국의 노예제도와 인종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간다. 노예의 삶과 자유민이지만 언제든지 노예로 잡아갈 수 있다는 법 개정은 사람들을 더 북쪽으로 넘어가게 한다. 도망 노예나 자유인이 된 흑인의 납치 등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소설에서 이미 많이 다루었다. 하지만 조금 낯선 이야기 하나가 나온다. 사소한 범죄로 흑인들을 탄광촌으로 보낸 것이다. 흑백 차별은 형량의 차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암울한 삶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고, 아이들은 태어난다.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랐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가난과 차별 속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간다. 곳곳에 묘사되고 그려진 흑인의 삶은, 그 피부색의 정도에 따라 또 나누어진다. 작가는 냉혹하게 이 현실을 그대로 요약해 보여준다.


에피아의 후손들이 모두 평온하게 산 것은 아니다. 제임스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순간 후손들의 삶은 곤두박질친다. 귀족처럼 자란 그가 낯선 곳에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능력이 없다. 그의 딸과 그 후손들의 삶은 하층민으로 전락한다. 딸 아비나는 제대로 결혼조차 하지 못한다. 아비나의 딸 아쿠아는 불의 여인에 대한 꿈과 환상 때문에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이런 가족사 속에 역사의 흐름이 조용히 녹아든다. 아쿠아의 남편이 백인들과의 전쟁에서 다리를 하나 잃고, 그 아들 야우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선생이 되어 노예무역과 가나의 독립을 말한다. 아프리카 현대사의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 있다면 이 상황들이 조금은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신 가나계 미국인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마메의 두 딸들에서 갈라진 후손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조차 구분하는 시대를 마주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들 눈에는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인데 그들은 또 나눈다. 아마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한국계, 중국계 등으로 나누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나눔이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 바로 마지막 마커스의 이야기에 도달해서다. 둘이 가나의 케이프코스트 성에 와서 자신들이 가진 공포와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바뀐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현실은 아직도 그 옛날의 차별 속에 머물고 있다. 인종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아직도 들썩거린다.


수없이 생략된 이야기들은 역사를 공부해야만 알 수 있다. 이 긴 연대기적 이야기는 마커스가 자신의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분노한 것과 맞닿아 있다. 바로 인종차별과 노예다. 노예 무역 이전에도 노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노예를 획득하고, 서로 죽이고 죽었다. 부족 간의 갈등은 유구하게 이어지고, 이 갈등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국가들이나 기업 등도 있다. 노예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가혹하지만 이 가혹함이 미국의 노예제도 속으로 넘어오면 ‘악마’로 변한다. 노예제도가 사라졌지만 인종차별은 그 힘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현재도 존재한다. 진보의 발걸음은 더디지만 이 긴 세월 속에서 작지만 큰 변화들이 보인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소용돌이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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