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영화 이야기 딴지영진공 - 촌철살인한 영화.시사 코드와 전문 OST 분석
차양현 외 지음, 서용남 그림 / 성안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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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련 책을 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한때는 영화가 좋아서 명작,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어떻게든 구해서 보려고 한 적도 있다. 일본 영화 수입이 되지 않을 때는 복사한 저화질의 영화를 구해서 열심히 본 적도 있다. 그러다 인터넷으로 쉽게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게 되면서 컴퓨터의 하드와 CD는 영화로 가득 찼다. 이 많은 영화들 중 실제로 본 것은 얼마 없다. 양이 너무 많아지고, 쉽게 구해지고, 다른 분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이제 영화는 아주 가끔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말에 조조영화를 홀로 보러가던 그 정성과 열정이 정말 대단했다. 백수였을 때는 하루에 극장에서 영화 2편 이상 본 적도 많았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있다. 바로 영화에 대한 관심과 기억들이다.

 

이 책의 목록을 보면서 보지 않은 영화가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예전 같으면 몇 편만 있어도 당장 구해서 봤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한 것을 주변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했을 것이다. 아는 척하느라고. 그런데 이제는 그 열정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본 영화도 적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귀찮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호기심과 시간나면 봐야지 하는 정도의 열정만 살짝 생겼다. 실제 이 열정이 한두 편의 영화를 보게 만들기는 했다. 이전에 보다가 잠든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데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2시간을 진득하게 앉아서 볼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바로 나의 조금씩 사라져가는 영화 보기에 대한 열정이다.

 

팟캐스트 내용을 책으로 낸 것이다. 한 번도 들은 적은 없는 팟캐스트다. 저자들도 낯설다. 뭐 몇 년 동안 영화관련 잡지도 책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 들은 적이 없는 방송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조만간 시간이 나면 이 방송을 다운 받아서 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에서 저자들이 보여준 시각과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은 영화는 보고 싶어졌고, 본 영화는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말이다. 실제 이 책에서 보여준 분석과 해석과 지식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영화 DNA를 일깨워 줄 정도였다. 특히 영화음악에 대한 부분은 이전에 잘 생각하지 못했고, 자주 다루어진 부분이 아니라서 더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총 여덟 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고, 그 주제에 맞는 영화들을 묶고 분류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슈퍼히어로, 거장, SF, 애니메이션, 방화, 로코, 호로, 번외 편 등이다. 이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것은 거장 편이다. 반어법을 통해 세계적인 거장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비틀고 쿡쿡 찌르는 내용이 아주 재미있었다.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금을 모으고, 애국심에 호소하여 관객을 끌어모으려는 거장들의 놀라운 마케팅 전략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최근 거장 한 분은 아내와 소송이 붙었고, 다른 한 분은 새롭게 방송에 나와 추억 팔기를 하고 있다. 이전에 이 두 거장의 코미디를 좋아했던 한 명의 팬으로써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즐겨보는 장르는 역시 슈퍼히어로와 SF와 애니메이션 등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최근 몇 편 중 일부는 보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본 영화다. 재미있게 본 것도 있고, 뭐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의 기억이 약간 희미한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을 가해주니 갑자기 반감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괜히 보고 싶어진다. SF의 경우는 최근에 본 영화보다 보지 않은 영화를 더 많이 다루어 옛 영화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특히 <혹성탈출>의 그 장면은 지금도 그 충격이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예전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봤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신작을 보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살짝 놀란다. 그에 대한 저자의 변명을 읽고 그 영화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졌다.

 

방화는 생각보다 많이 보았고, 로코는 이전 작품들은 거의 본 것 같다. 호로 쪽으로 가면 걸작 이상만 봤는데 어느 순간 재밌게 보다가 다시 그 장르에서 눈길을 뗐다. 음악과 심장이 너무 싱크를 맞춰 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가 튀고, 잘린 팔다리와 목 등이 날아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믹서기에 갈리는 것은 더욱더. 오히려 아내와 같이 로코를 보면서 왜 프로포즈를 하지 않았나 하는 원망을 듣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 이 마음이 언제 다시 바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현실과 과거를 엮어서 풀어냈을 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배우나 다른 관련된 분야나 감독 등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와 가십이 많았던 것도 역시 재미있었다. 빈말이 섞여 있지만 언젠가 이 책에 나온 분류에 따라 보지 않은 영화 몇 편을 본 후 책 내용과 비교하는 즐거움도 누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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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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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원작을 이 소설로 착각했던 순간이 있다. 실제 원작이 되었던 책은 다른 책이다. 그 책은 에필로그에서 잠시 나왔던 앤드류 호치스가 쓴 앨런 튜링의 전기인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이 전기가 상당한 두께인 반면 요약본 비슷하게 나온 책이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튜링 :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이 책을 너무 어렵게 읽었다. 솔직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튜링>에 나온 이론들이 이 소설에도 나온다. 작가가 이야기 속에 더 쉽게 풀어내었다.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딱딱한 논문보다 훨씬 쉬웠다.

 

앨런 튜링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 현장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경찰이 있다. 바로 주인공 레오나드 코렐이다. 코렐은 현장을 둘러보고 이상한 점들을 발견한다. 수학 방정식으로 가득한 수첩과 베어 문 사과 반쪽이 옆에 놓여 있다. 때는 1954년 6월 8일 화요일이다. 이 시대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벌어지던 시기다. 영국 내부에서 스파이들이 활동했고, 미국에서 매카시 열풍이 몰아치던 시기다. 튜링이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동성애자라는 것만으로 호르몬 치료를 받는 등 엄청난 수모를 겪었다. 이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흔하게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불과 십 수 년 전만해도 이런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때는 이런 사람들이 불법이었다. 1950년대는 더 심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이나 업적에 상관없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의심하고 미행하는 사람이 있던 시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맡은 것은 가장 먼저 현장에 등장한 코렐이다. 코렐이 이 사건에 특별한 의문을 가지지 않고 한 동성애자의 자살로 처리했다면 그냥 보통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튜링의 죽음에서 이상한 낌새를 챈다. 혹시 이것을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재미가 아닐까 하고 기대를 하는 순간이다. 이 기대는 나만의 것이었다.

 

소설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튜링의 과거를 쫓으면서 그의 철학과 이론과 삶을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불만이 가득한 코렐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 흔한 스릴러처럼 긴장감을 조성하는 추격전이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지길 기대했다면 그 기대를 접는 것이 좋다. 속도감 있는 액션이나 스파이들의 암약과 음모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스파이들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권력자들만 있을 뿐이다. 냉전 시대의 삶 중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진행이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긴박하게 풀어내지 않고 코렐의 시점에서 풀어내다보니 상당히 더디다. 최근 스릴러의 속도감을 예상했다면 약간 지루할 수도 있다.

 

솔직히 튜링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최근이다. 에니그마를 깨트린 인물이란 것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이 소설을 읽기 전 에니그마와 튜링의 역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비록 튜링이 처음에 죽는다고 해도 그의 과거를 추적하는 코렐을 통해 2차 대전 당시의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튜링에 대해 그 시대 사람이 알고 있던 것은 얼마 전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동성애자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가 생각하는 기계를 말할 때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황당해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그 시대에 충실해서 다른 음모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 책에서 2차 대전 당시의 암호 해독을 둘러싼 스파이들의 치열한 경쟁과 음모만을 기대했다면 앞에서 말한대로 빨리 책을 덮어야 한다. 튜링의 죽음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젊은 경관 코렐의 맹활약을 기대했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그런 긴장감을 조성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강철같은 의지나 엄청난 추리력을 가진 주인공도 없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감이 조금 부족한 주인공이 있을 뿐이다. 엄청난 직관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논리의 모순을 밝혀낸 수학자가 있을 뿐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거대한 혹은 엄청난 방정식이 실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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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앤 비티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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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비티가 1974년부터 2006년까지 <뉴요커>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묶은 <뉴요커 단편집>에서 아홉 편을 뽑아 번역한 작품집이다. 단편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점점 현재와 다른 장면과 상황을 마주했다. 알고 보니 발랄한 개성으로 주목받았던 초기작을 주로 골라 번역했다. 당연히 그 시대의 정치, 문화, 경제 등의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다. 후기작은 마지막 작품인 <낱말 바꾸기>(2001)이 유일하다. 개인적으로 발표 연도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제목이나 마지막에 연도를 넣어주었다 조금은 더 쉽게 이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문장이 어렵지 않아 비교적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상황 등이 낯설었다. 명확한 결론을 내려 끝문장을 읽을 때면 그렇구나!’ 하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뭐지?’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간결한 문장이지만 그 상황을 단순하게 보여주면서 하나의 결론으로 이야기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의 상황을 이어붙였거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곤혹스럽다. 그 상황이나 장면을 즐기기보다 의미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난쟁이 집>에서 동생 맥도널드가 형 제임스를 찾아온다. 형은 난쟁이다. 엄마가 요청해 간 것이다. 그런데 형도 이런 방문이 반갑지 않다. 이들의 관계가 간결하게 나온다. 형이 자신보다 작은 여자와 결혼한다. 이 결혼식 풍경이 낯설다. 표제작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사소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앨런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똑같은 괴짜지만 한 명은 자신의 수고에 감사하고 선물을 주는 반면 다른 한 명은 그냥 누릴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순간 선입견처럼 고정된다. <도시의 저주>는 마리화나 중독자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일상이 산만하다. 뭔가를 찾으려고 하면 자꾸 다른 엇나간다. 전 아내가 내뱉은 꿈 이야기는 관계의 균열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잘 알려준다.

 

<늑대 꿈>은 세 번째 결혼을 앞둔 신시아 이야기다. 다이어트 이후 결혼을 원하는 신시아와 현재의 그녀를 사랑하는 찰리의 모습이 불안하게 보인다. 짧은 이야기 속에 신시아의 삶이 단편적으로 나오고, 현실의 그녀를 만든 삶의 장면들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세 번째 결혼에 대한 부모의 반대와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감이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어진다. <콜로라도>는 낯설다. 낯익은 지명이지만 잘 모르는 환경이 나오고, 이곳을 가고자 하는 페넬로페의 바람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이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볼 뿐이다. <먼 음악 소리> 속 샤론과 잭의 관계는 엇나가 있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뉴욕 시절이 음악으로 흘러나올 때 느끼는 감정이 따뜻하다. 쿨하다.

 

<아내가 사는 집>은 관계가 약간 복잡하다. 꼬였다기보다 서로가 보는 관점이 달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전 남편에게 열쇠를 줬지만 그것이 일상 속으로 불쑥 들어오길 바란 것은 아니다. 이네스와 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는 다른 사람이 몰랐던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하게 보는 것만으로는 듣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낱말 바꾸기>는 비교적 최근 작품이다. 다큐 속 등장인물들은 과연 이름만 바꾸면 모를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당발 엄마를 찾아온 딸의 방문은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고 보기 힘들다. 자신의 마음이 편한 곳으로 가고자 하는데 이것이 형식적인 관심으로 표출된다. 마음과 실제 행동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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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 : 이미테이션 게임
앤드루 호지스 지음, 박정일 옮김 / 해나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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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때문인지 앨런 튜링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다. 비슷한 제목으로 몇 권이 나왔다. 이 책은 그 중에서 앨런 튜링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짧은 전기라는 소개가 시선을 끌었다. 실제 분량도 150쪽이 되지 않는다. 원서의 분량은 80쪽 정도인 모양이다. 일반적인 전기를 생각하고 가볍게 달려들었다. 그러다 정말 큰코다쳤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몇 쪽을 읽지 않아 그냥 날아갔다. 전기보다 오히려 튜링의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요약 논문집에 더 가깝다. 거기에 번역도 기계적이다보니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문장이 너무 딱딱하다. 아니 내용을 이해하고 번역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옮긴이의 이력과 옮긴이의 말을 읽으니 이 분야의 전문가다. 그런데 왜 이런 번역이 나온 것일까? 의문이다. 단순히 이름만 빌려준 것인지 아니면 교정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인지.

 

컴퓨터의 아버지이자 인공지능의 선구자라는 글은 이 분야에 관심이 없다 해도 솔깃해진다. 물론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것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기 에니그마를 해독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기대한 것도 바로 이런 흥미로운 사실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의 성장기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동성애자였던 그의 삶 일부도 함께.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그냥 살짝 지나가는 정도에 머물 뿐이다.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튜링 철학의 핵심을 짧은 분량으로 집필한 것이다. 실제 앨런 튜닝의 전기는 다른 제목으로 같은 저자가 이미 내놓았다.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실제 영화의 원작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 책이다. 표지와 소개 글에 완전히 속았다.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내용이 간략해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뭐 그렇다고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조금 더 일뿐이지만.

 

만약 독자가 수학과 컴퓨터에 관심이 많고, 지식도 어느 정도 쌓았다면 이 책은 훨씬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은 제외하고. 하지만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 하나의 철학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철학을 다른 철학자와 대립, 논쟁, 발전의 방식으로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튜링 철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한 후 논쟁거리를 하나씩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배우는 기쁨이 가득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기본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용어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다 보니 더 힘들다. 파편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 있지만 전체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난해하다. 튜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저자의 아주 두꺼운 전기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을 읽는 것이 더 쉽고 빠를 듯하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어렵고 가장 큰 착각을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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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 아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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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작가가 바로 조이스 캐럴 오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 한 번도 그녀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이미 몇 권을 사놓았지만 어딘가 책장에 꽃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 작가들과 달리 굉장히 많은 소설을 내놓았다. 최근에 나온 것만 해도 상당한 숫자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에 비해 한국에 출간된 책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뭐 나 자신이 많이 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각 단편이 각각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비슷하다. 그것은 심리묘사와 상황을 만들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상인데 그 이면에 숨겨진 사실은 섬뜩함 그 자체다. 평온한 일상으로 생각했던 것 뒤에 있는 뒤틀리고 일그러지고 섬뜩하고 왜곡된 감정들은 현실의 화사한 그림을 찢어내고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만든다. 그래서 상당히 불편하다.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여운이 남겨져 있을 경우 그 감정은 더 찝찝하다.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더 스산하고 무서워진다.

 

표제작 <이블 아이>는 나이 차이가 30살이 넘는 부부의 이야기다. 실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아내인 마리아나다. 이 둘이 결혼하게 된 데는 마리아나 부모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부모가 죽은 후 마리아나는 심신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때 오스틴이 그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나이 많은 남편의 친절과 관심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 오스틴이 보여준 말과 행동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첫 아내가 자신들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가 이상한 말을 한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 첫 번째 아내가 마리아나에게 뿜어낸 독설은 그녀의 영혼을 잠식한다. 마지막에 그녀가 짓던 희미한 미소의 의미가 섬뜩하다.

 

<아주 가까이 아무때나 언제나>는 여고생을 사랑했고, 그녀에게 집착했다가 파멸에 다다른 한 남자 데즈먼드 이야기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여고생 리즈베스다. 이 둘은 도서관에서 만났다. 데즈먼드는 유식하고 여자에게 예의가 바르다. 빠져든다. 그녀의 엄마도 빠져든다. 그런데 이 소녀의 마음 한 곳에 돌을 던지는 언니가 나타난다. 이 작은 돌은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킨다. 어느 순간 리즈베스는 그를 멀리하고, 데즈먼드는 그녀를 스토킹한다. 이 단편의 제목인 ‘아주 가까이 마무때나 언제나’란 글이 적힌 사진도 보낸다. 이 일은 어린 시절의 삶을 뿌리째 뽑는다.

 

<처단>은 가장 잔혹한 단편이다. 스무 살 대학생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부모를 죽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이 존속살인은 어머니가 발견될 때 한 말 때문에 바트를 살인자로 지목한다. 바트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어머니의 증언도 있다. 살인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이 변한다. 그런데 이 변화가 처음에는 모성애의 발로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으로 오면서 어머니의 다른 모습이 살짝 드러난다. 평범한 모자의 모습이 아니다. 섬뜩하고 스산한 기운이 흐른다.

 

<플랫베드>는 어릴 때 성폭행 때문에 트라우마를 가진 한 여자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그녀의 삶을 보여준다. 현재는 남자 친구도 있지만 과거는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 성폭행의 나쁘고 아픈 것 너머에 왠지 모를 감정을 내품고 있는 것이다. 읽으면서 가장 이상했던 부분이다. 그녀의 애인은 과거의 나쁜 기억을 되살리고, 그녀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이 복수가 예상할 수 있는 멋진 장면이 아니다. 추악하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 복수 뒤에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굉장히 강렬하다. 오르가슴을 느낀다. 이제 새로운 둘만의 비밀이 생긴다. 잔혹한 관계에 대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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