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크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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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리 할스 앤더슨의 원작을 그래픽노블로 만든 작품이다. 성폭행 당한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가는 여고생의 일상과 내면의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목처럼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그 상황을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한 멜린다의 모습은 수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그것을 해내었을 때 삶이 또 어떻게 변하는지 이 그래픽노블은 잘 보여준다. 읽으면서 실어증에 걸린 것인가 하는 생각을 먼저 했지만 완전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데 힘들 뿐이다. 소설을 찾아보니 어딘가 낯익은 표지가 보인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올라간 멜린다는 이전에 친했던 친구들과 멀어진다. 파티에서 그녀가 성폭행 당한 사실을 신고하려고 한 것 때문에 오히려 왕따가 된다. 그들은 그녀를 경찰에 신고한 아이로 기억하지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실 그녀 자신도 그 당시에는 이 성폭행을 크게 자각하지 못했다. 성폭행 당한 사실을 부모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작가는 왜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 사이가 멀어져 있고, 부모와 소원한 관계란 것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그녀가 부모와 더 멀어지게 만든다.

 

말하지 못하는 그녀는 많은 오해를 산다. 왕따의 원인이 된 경찰서에 전화한 애라는 소문이나 자신이 당한 일을 어릴 때 친구에게 용기 내어 전하지만 질투 탓이란 반응만 돌아올 뿐이다. 이런 일상은 그녀의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만든다. 전학 온 친구가 친한 척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좋은 클럽에 가입해서 인정받는 것이다. 멜린다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학내 상황을 알려주는 장면들을 보면 예전에 본 많은 소설이나 드라마 속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주류로 나가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 말이다.

 

멜린다를 성폭행한 남자 앤디가 다시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아주 강하다. “기억을 없앨 수 있다고 해도, 그 짐승은 내 안에 남아 나를 옥죄어 올 것이다.” 이 문장은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자신만의 공간 속에 숨어 자신의 머릿속 생각들을 껴안고 있을 수 있다고 느끼며 현실에서 멀어지고 싶어 한다. 그가 그녀의 곁에 오고,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 구토한 것은 그 날의 공포와 두려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앤디를 조심하라고 화장실 벽에 글을 남겼는데 여기에 덧붙이는 글들도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공감하는 글들이다.

 

표지의 나무는 미술 수업 시간에 미술 선생이 준 소재다. 그녀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려고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돌아본다. 집에서 잘린 나뭇가지를 보고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절망감과 고통을 작은 조형물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섬뜩하다.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선생과 이야기하는 공간이 미술실이다. 성폭행 당한 여성들의 글 등을 보면 이것이 그때만의 기억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계속 반복되는 아픔과 고통임을 말한다. 몸에 새겨진 아픔은 상처가 치유되면 사라지지만 마음에 새겨진 고통은 살아있는 동안 반복된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은 2차 피해자를 줄이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것도 상당한 일이다.

 

이 그래픽노블에서 그녀가 소리치고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 한 번 등장한다. 앤디가 그녀만의 공간에 들어와 다시 성폭행하려고 할 때다. 처음에는 공포에 짓눌리고 입도 뗄 수 없었지만 한 번 터진 목소리는 그녀 속에 갇혀 있던 두려움을 털어내고 그 폭행에 대항해 싸우는 힘과 용기를 준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녀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도망치고, 경찰에 전화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을 이번에는 제대로 해낸다. 멋진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과연 이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에 그녀가 현실 속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소설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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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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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놀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저지른 만행 중 하나를 아주 잘 표현해낸 것이다. 전쟁 물자 핵심 중 하나인 석탄을 캐기 위해 어떻게 식민지 사람들을 모으고, 속이고, 억압하고, 폭행 등을 가했는지 작가는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이 소설의 주 무대인 전후 탄광을 다루기 위해서 필수적일 수 있지만 사실 일본인 광부만으로도 충분하다. 덕분에 우린 전쟁 당시 조선인들을 어떻게 강제로 탄광으로 끌고 가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등을 일본 작가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여러 권 읽었지만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첫 권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시리즈 첫 권은 반갑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하야타라는 순진한 청년이 무시무시한 연쇄살인을 거치면서 어떻게 한 명의 탐정으로 성장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가 학도병으로 있다가 패전 후 탄광촌으로 오게 된 과정을 앞부분에 설명한다. 순진하게 탄광촌 악질 야마에 끌려갈 뻔한 그를 구해준 인물은 아야자토 마노루다. 한때 조선에서 광부를 모집한 이력이 있다. 그는 정남선이란 조선인을 속여 탄광에 데리고 온 적이 있다. 하야타를 구한 것도 이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인연으로 하야타는 아야자토가 일하는 탄광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초보가 탄광 갱도를 들어갔다 나오면서 느끼는 공포를 앞부분에 풀어놓는다. 실제 그가 이 탄광에 취직하는데 아야자토의 보증이 큰 역할을 했다. 현대화되고, 안전장치가 잘 된 탄광촌을 최근에 봤기에 이 시절 탄광촌이나 전쟁 당시 탄광촌의 환경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갱도에 묻히는 사고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지 않는가. 더 열악하고 안전에 소홀한 그 시절이라면 사고의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실제 이런 안전장치들도 모두 돈이다. 식민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좋은 환경 속에서 일하게 만들 마음이 정부도 탄광회사도 없었다. 만약 한다고 해도 일본인들이 우선일 것이다. 이런 현실을 하야토는 몸으로 겪으면서 하나씩 알게 된다.

 

무수히 많은 신들이 살고 있는 일본에서 탄광촌이라고 모시는 신이 없을 리 없다. 그 중에서 검은 얼굴을 한 여우는 불길함을 의미한다. 실제 하야타의 동료 중 한 명이 이 여우 가면을 쓴 여자를 만났고, 다른 동료들은 이 여자를 이전에 만난 사람들이 사라진 사건을 이야기한다. 호러의 기반 중 하나인 마물을 이렇게 등장시킨다. 갇혀 있고, 덥고, 언제나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이 소문은 은연중에 가슴 한곳에 자리 잡는다. 갱도가 무너지는 사건이 생기고, 아야자토가 나오지 못하고, 훔쳐보기를 좋아하는 조선인 출신 박씨가 집에서 금줄에 목맨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같은 날 벌어진 사건이다. 탄광에 고용된 직원이 아니다보니 그 죽음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연쇄살인의 시작일 뿐이다.

 

처음부터 시신이 발견된 공간은 밀실이다. 안으로 문이 모두 잠겨 있다. 다른 죽음들도 마찬가지다. 시체가 늘어나고, 이 죽은 자들의 연관성이 드러나면서 자살이 아님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밀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트릭을 깨트리는 것이다. 아마추어 탐정이 된 하야토가 세운 가설은 간단한 실험으로 실패한다. 사고 갱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아야자토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에 탄광 측은 안전 등을 이유로 시간을 늦춘다. 이 늦춰진 시간이 그가 사건을 더 생각하고, 추리하고, 조사하는 시간을 갖게 만든다. 만주 건국대학 출신 엘리트에게 이 일은 딱 맞다. 그가 추리하고, 실패하고, 조사하고, 추리하는 과정 속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탐정으로 성장하는 그를 보게 된다.

 

이야기가 시작하고, 첫 사건이 벌어지면서 추리 애독자인 나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 나오면서 새로운 인물이 용의자가 되었다. 재미난 점은 마지막에 하야타가 용의자들에 대해 풀어낸 이야기가 내가 읽으면서 추리한 것들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야타가 마물의 저주가 아닌 살인자로써 검은 얼굴의 여우라고 칭하는 부분은 그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탄광촌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쌓이면서 그는 사실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일종의 사회파 호러미스터리인데 이전보다 더 쉽게 이해되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겪은 아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시리즈 다음 권에서 하야타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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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질문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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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태어나고 자란 이 나라에서 내가 애국심을 느끼는 순간은 결코 적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동을 느끼게 만든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구조의 모순을 알게 되면 분노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노도 결국 이 나라를 사랑하기에 생긴 감정이다. 어쩌면 이 감정은 교육에 의해 주입된 감정일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처럼 국가가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에서 국가의 울타리가 없다면 개인은 너무 위험하고 무력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몇 가지 사회의 문제점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내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생겼다.

 

오랜만에 조정래의 소설을 읽었다. 언제부터인가 대하장편에는 손이 가지 않고 권수가 많아져도 잘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욕심은 있어 사놓은 책들은 쌓여간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즈음 변호사하는 후배와 잠시 이 소설의 내용 중 법쪽 관련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대답은 조금 충격이었다. 거의 대부분 사실이란 것이다. 전관예우의 문제야 알고 있던 것이지만 그런 엄청난 수임료를 한 번에 받는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이런 판사와 검사가 있는 법정이라면 과연 법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얼마 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들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검찰들의 작태를 잘 알 수 있다. 사법 농단 사태는 또 어떤가. 한국에서 법과 정의는 따로 노는 것 같다.

 

작가는 기자, 국회의원, 대기업 임원, 대기업 미술관 큐레이터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기자 장우진은 읽으면서 자연스레 주진우 기자가 떠올랐다. 이름도 그렇지만 그가 탐사 보도한 내용들이 그렇다. 대기업 비자금을 파헤치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그와 그의 아내에게 어떤 식으로 회유와 협박이 들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아주 큰 금액이 주는 유혹은 잠시 사람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다. 누가 이런 유혹에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굳건하겠는가. 재밌는 부분은 그가 조사하려고 한 많은 사건들이 적들의 방해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가 조사한 사건들은 기사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한국 사회의 부정, 부패, 비리 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회의원 윤현기는 보신이 철저한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늘 의식한다. 정치자금을 받지만 뒷탈이 날 돈은 먹지 않는다. 이것은 그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고, 이전에 그가 모신 국회의원이 알려준 보신책이다. 지역신문에 대필로 글을 기고하지만 나름 열심히 노력한다. 대필자 고석민의 말대로 알 때까지 열 번이고 읽는다. 이것이 그를 유식하게 보이게 만든다. 나중에 지역구에 가서도 그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국회의원 자리를 놓칠 생각이 없기에 꼬투리 잡힐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단체가 있다. 바로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다. 이 단체가 그에 대한 나쁜 정보를 내놓으면 상대방 후보가 이를 이용해 그를 낙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오너가의 사위였다가 비자금 문제를 일으킨 김태범은 재벌들이 어떻게 비자금을 만드는지, 언론을 장악하는지 잘 보여준다. 언젠가 삼성에 충성을 맹세했던 수많은 언론사 임직원들이 있지 않았나. 비자금을 잘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란 사실은 예전에 김우중의 해외 비자금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한 번 드러났다. 삼성의 비자금을 사법부가 어떻게 면죄부를 주었는지 알기에 결코 낯설지 않다. 오너가 옆에서 사장단들이 어떻게 부를 쌓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재벌이 어떻게 한국의 부동산으로 거대한 부를 쌓았는지 잘 보여준다. 김태범이 새로운 재벌에 충성하면서 돈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내면이다.

 

미술관 큐레이터 임예지는 재벌들이 왜 미술품 등을 사는지 잘 보여준다. 재벌가의 미술관이 부의 증식과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은 이제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국보급 유물을 둘러싼 소송에서 전관예우의 힘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김태범의 이혼소송이나 재벌가 자손들의 사회문제를 덮는데도 아주 위력적이다. 나중에 임예지가 양심에 찔려하거나 조각가 등을 중개하면서 높은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모습은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이다. 시간 강사 고석민이 한국 대학의 문제점을 노출하고, 생계를 걱정하는 장면은 얼마 전 읽은 책과도 연결된다. 대필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의 모습은 씁쓸하고,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또 하나의 정치자금 모금이란 사실은 새로운 사실이다. 그들이 되지 않는 책을 내는 이유가 이것이라니.

 

실명과 차명을 오가며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파헤치는 작업은 박수칠만 하다. 가독성도 좋아 잘 읽힌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문장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뭔가를 가르치려는 느낌이 든다. 스웨덴 정치나 파리 등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듯한 부분도 조금은 아쉽다. 마지막에 가서 풀어낸 이야기는 한국 관료 조직이 어떻게 재벌 등과 결탁하고 그들의 부를 불려주는지 잘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는 부분이 늘어나면서 더 분노한다. 한국의 미래가 있는지 의문이다. 작가는 이 모든 문제를 풀 대안으로 시민단체 활성화를 이야기한다. 건전한 시민단체가 늘어나고, 국민들이 제대로 투표를 한다면 이 암울한 현실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희망을 말하지만 그 희망이 아직 가슴에 절실히 와 닿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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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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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도발적인 표지가 먼저 시선을 끈다. 제목을 들으면 판타지 소설처럼 다가오지만 말이다. 작가는 이 단편 <캣퍼슨>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왠지 모르지만 거의 끝까지 이 소설에 공감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휩쓸려 섹스를 하게 되는 그녀의 모습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남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몇 번 만났지만 잘 모르는 남자와 함께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도 마찬가지다. 마고가 로버트와 데이트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몇 가지 장면들은 여자와의 관계가 서툰 남자의 모습이 잘 보인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로버트가 마고에게 보낸 문자는 결코 낯설지 않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많은 남자들이 내뱉는 폭언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게시판에서 자주 본 장면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 책이 단편집이란 사실을 몰랐다. 이 작가가 스티븐 킹의 팬이란 사실도 서문을 통해 알았다. 이것을 알고 기대한 것은 킹의 기이한 이야기들이지만 앞의 작품들은 내가 예상한 전개와 달랐다. 대표적인 것인 <캣퍼슨>이고, 그 다음이 <룩 앳 유어 게임, 걸>이다. 이후 몇 편의 단편에서도 킹의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몇 편은 킹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킹의 작품들은 대부분 장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예전에 읽었던 단편들은 사실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킹처럼 쓴 소설이라면 이 또한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다양한 장르가 담겨 있다 보니 개인적 선호도가 나온다. 가장 유쾌하게 읽은 작품은 <무는 여자>고,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두 작품 <좋은 남자>와 <풀장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무는 여자>는 물고 싶은 욕망과 직장 성추행의 절묘한 반전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좋은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속이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가 여자에게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은연중에 보여준다. <풀장의 소년>은 어릴 때 비디오에서 본 남자를 처녀 파티에 데리고 오고, 그가 만들어내는 작은 이벤트가 마지막에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정어리>를 읽으면서 마지막 장면에 섬뜩함을 느꼈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 어른들의 비열한 욕망이 끼어들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려준다. <룩 앳 유어 게임, 걸>은 한 노숙자와의 만남과 그가 죽인 소녀의 기억을 다루는데 죄의식이 어떻게 시간의 흐름을 타는지 보여준다. <한밤에 달리는 사람>을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담인가 생각했지만 문화충돌과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는 깊은 자기애에 빠진 공주 이야기다. 동화처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전개다. <나쁜 아이>는 자존감이 바닥인 남자를 두고 어떻게 학대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인간의 이성은 저강도 감정의 공격에 가끔 너무 무력하다.

 

<겁먹다>는 판타지이지만 확장하지 않고 소품으로 놓아두면서 <나쁜 아이>의 이성 마비를 풀어놓는다. 욕망은 언제나 더 많은 먹이를 요구한다. <죽고 싶어하는 여자>를 읽으면서 한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한계를 넘어 계속 나아가면 결국 파국에 이르지만 그 선을 넘지 않으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녀가 진짜 원한 건 그 한계 너머일까? <성냥갑 증후군>은 다 읽은 지금도 과연 심리 문제인지, 아니면 진짜 기생충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몸을 긁는 장면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나도 긁고 싶었는데 단순히 기분 탓이겠지. 열두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적응이 필요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처음과 상당히 다른 기분이었다. 아마 마지막 단편 탓이 아닐까. 이 작가가 장편을 쓴다면 과연 어떤 장르일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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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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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프래쳇의 놀라운 찬사가 나를 이 책으로 인도했다. “지난 50만 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재미있는 책이다!" 이 문장을 읽고 혹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는 그랬다. 좀더 차분히 생각하면 책이 나온지 50만 년이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뭐 이것이 중요한가. 실제로 이 소설 속 화자인 어니스트란 이름도 지극히 현대적이다. 문자도 없던 시기에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것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오는 시간이나 거리 단위에서도 적용된다. 이런 부분 때문에 내가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을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다. 세부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지만.

 

어니스트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아주 진화적인 인물이다. 불은 화산에서 가져와 가족의 안락한 환경을 꾸몄지만 그는 결코 진화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과 반대편에 있는 인물은 바냐 삼촌이다. 그는 위험하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진화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진화의 결과물을 누리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이 둘의 토론은 나중에 에드워드와 어니스트의 논쟁에서 다시 다른 방식으로 불거진다. 과학기술의 독점과 특허권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다시 소유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을 발견하고,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한 실험은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을 요구한다. 이 불이 다양한 육식동물에게 노출된 인간들을 동굴 속 생활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불로 굴 속 곰을 내쫓았기 때문이다. 안전한 주거공간이 확보되는 순간이다. 이 불을 유지하는 과정에 창을 발명하고, 창은 가족들에게 풍족한 고기를 가져다준다. 나중에는 고기를 굽는 행위까지 이어지는데 작가는 이 과정들을 압축적으로 이 한 가족의 이야기 속에 빠르게 녹여낸다. 과학의 발전을 진화와 연결하고, 더 진화하려는 아버지와 이 부산물로 만족하려는 가족 사이에 대립이 이어진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족외혼의 시작이다. 형제자매끼리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족에서 배후자를 구하려는 노력이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첫사랑이란 감정이 싹튼다. 이 구애 과정이 상당히 힘들지만 두 남녀의 결합을 돈독하게 만든다. 일종의 약탈혼이지만 작가는 이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나중에 과부가 된 여자의 약탈을 둘러싼 작은 해프닝은 또 다른 재미다. 어쩔 수 없이 동굴을 떠나야 했던 가족들이 새로운 부족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몇 가지 일들은 현대 사교계에 대한 좋은 풍자다. 의상과 가방을 둘러싼 유행을 가볍게 말하고 지나간다.

 

작가는 진화의 부작용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가족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벌인 실험의 결과다. 새롭게 불은 만드는 과정에서 초원이 불탄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과학실험이 인류에게 어떤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위험한 실험과 더불어 불의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은 이 가족 내부에서 더욱 심해진다. 새로운 무기의 발명은 부의 소유와 권력을 독점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지고 결국 최악의 결과로 치닫는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그 당시 인문, 과학, 고고학적 발견 등을 바탕으로 쓴 듯한 데 지금도 유효한 내용들이다. 이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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