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푸른 상흔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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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 사강의 소설들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상당히 재밌게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저질 기억이라니. 이번에 리커버 개정판이 나왔다고 했을 때 읽은 것이 분명한 책들 몇 권을 빼고 이 책을 선택했다. 책소개에 따르면 ‘소설과 에세이 형식의 중간을 넘나드는 특이한 작품’이라고 한다. 읽다 보면 사강의 이야기가 중간중간 나온다.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창작자의 감정을 곁들이고 있다. 재밌는 설정이다.


무일푼으로 프랑스에 온 스웨덴 출신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가 주인공이다. 이 남매는 아주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 외모와 특이한 윤리관 덕분에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살게 된다. 프랑스 68 혁명 뒤의 시기로 설정한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 윤리관이 상당히 자유롭다.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유부녀가 애인과 그 여동생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재밌는 부분은 이 유부녀가 엘레오노르가 자기집 정원사와 잠을 자는 것에 대해 보여주는 의식이다. 남자를 노예로 만들 수는 있지만 노예를 자신의 남친으로 만들 수 없다는 계급의식이다. 읽으면서 뭐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매의 파리 생존기는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렇다고 젊지도 않다. 세바스티앵은 나이가 40이나 된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는 여자들을 끌어당긴다. 동생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수영복을 입었을 때 모습을 작가는 완벽하다는 단어로 표현한다. 어떤 몸매일까? 세바스티앵은 특별히 어떤 외모에 끌리는 것 같지 않다. 자신의 생존방법인 것일까? 이 남매에게 섹스는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 작가는 미래 세대를 끌고 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읽으면서 이 부분이 오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가가 자기 작품의 분량에 대해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책들은 200~300쪽 분량인데 자신의 책은 실제 200쪽에 가깝다고. 몇 권 확인하니 그 범위 안에 들어 있다.


남에게 빌붙어 사는 것 같은 이 남매는 아주 특이하다. 엘레오노르는 늘 책을 들고 있는데 장르가 미스터리물이다. 아주 잘 생긴 양성애자 배우가 그녀에게 끌려 보여준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홀로 집에 돌아오는 장면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남자에게 빠진 여자라면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성이 남았다면 그 행동의 누적에 반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를 전혀 만나지 않느냐 하면 아니다. 분노한 남자와 집에 찾아왔을 때 폭력을 휘두를 것 같았는데 그녀가 읽어준 문장에 웃고, 그녀 곁에 머문다. 예상하지 못한 장면과 전개다.


작가가 갑자기 한 남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같이 늘어놓는다. 이런 형식이란 것을 몰랐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품고 읽었을 것이다. 이 남매의 이야기를 창작하면서 생기는 문제와 어려움도 나오고, 독자와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까지 적어 놓았다. 시대와 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고, 왠지 모르게 그 단어들이 나에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아쉬운 대목이다. 자극적인 몇 곳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은 예상 외의 장면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자살과 만남이 이런 식으로 갑자기 튀어나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내가 중요한 뭔가를 놓친 것일까? 어릴 때 읽었던 재미를 누리지 못했는데 언제 그녀의 대표작들을 다시 읽고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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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놓치지 마 - 꿈과 삶을 그린 우리 그림 보물 상자
이종수 지음 / 학고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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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옛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나라의 보물이 된 22개의 그림과 저자가 보물로 삼고 싶은 4개의 그림을 다룬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은 2,643점이라고 한다. 이중에서 그림은 303점이 전부다. 11%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생각보다 적은 숫자다. 국보나 보물 전체 목록을 알지 못하니 당연히 들었겠지 생각한 그림이 빠진 경우도 있다. 너무나도 유명해 당연한 ‘몽유도원도’ 같은 경우는 일본에 있다 보니 보물로 지정할 수 없었다. ‘수월관음도’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늦게 보물로 지정된 그림도 있는 것도 의외다.


저자는 4꼭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상, 현실, 역사, 보물 아닌 보물들 등이다. 단순히 목차만 보면 아주 이름난 몇 점의 그림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낯선 그림이다. 그런데 실제 그림을 보게 되면 대부분 낯익은 그림들이다. 내가 한국 옛 그림에 관심이 많아 낯익은 것이 아니라 한때 달력이나 다른 매체 등을 통해 봤기 때문이다. 요즘은 집에 달력을 붙여 놓고 생활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집 벽에 달력이 항상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달력 속에 민화 등의 옛 그림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었다. 최근에는 탁상 달력을 이용하다 보니 그림을 볼 일이 더 없어진다. 가끔 운치가 사라진다는 느낌이다.


그림에 문외한이다 보니 전문가들이 풀어낸 해설에 기대어 그림을 보게 된다. 책 크기의 한계 때문에 그림을 세밀하게 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놓친 부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책 속에서 한 부분을 확대해서 실어줄 때 내가 놓친 부분을 알게 된다. 무심하게 본 부분에 이런 그림이 숨겨져 있다니, 하고 놀란다. 그리고 다시 그림 전체를 훑어본다. 새로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동양화의 준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알지 못하지만 그림의 힘이나 이야기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섬세한지, 색감은 또 어떤지, 그 시대의 화풍은 어떤 것인지 등 참 많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다 보면 내 감상보다 저자의 감상에 짓눌리는 경우가 많다.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늘 명성에 놀라 나의 감상과 달라지는 작품으로 ‘세한도’가 있다. 너무 간결해서 나의 기분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금강전도’는 볼 때마다 이 풍경을 어디서 보고 그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실물과 좀더 세밀하게 본다면 느낌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이번에 처음 했다. ‘동궐도’도 이전에는 지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알고 보니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낯선 그림은 ‘최익현초상’이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은 없다. 그리고 늘 무심코 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놀라는 ‘화성행행도병풍’이 이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어릴 때 무심코 본 그림 중에 가장 흔하게 본 그림이 김홍도의 그림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낯익은 그림들이다. 이 책에서 김홍도의 민화는 빠지고 다른 화가의 그림이 들어 있다. ‘야모도추’와 ‘월하정인’인데 아주 낯익다. ‘야모도추’는 이번에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 그림의 해석을 읽고 그림을 줌인이나 줌아웃하면서 보면 아주 재밌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리고 읽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그림의 크기에 눈길이 간다. 생각보다 큰 그림들이 많다. ‘수월관음도’의 경우 실제 길이가 5미터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크기다. 장승업의 ‘호취도’도 적은 크기가 아니다. 책 속에 확대한 그림을 보면 그 세밀함과 힘찬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이었는데 저자는 이 부분은 생략했다. 단지 ‘화선’이라고만 말한다. 소문이나 야사를 배제하려고 한 듯하다. 앞으로 미술관에 가게 되면 이번에 배운 것처럼 좀더 그림을 세밀하게 봐야겠다. 집중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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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억
최정원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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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복잡하고 섬뜩하다. 소설의 도입부는 상당히 낯익은 설정이다. 갇힌 사람 한 명, 그의 가족들, 강요된 선택. 그 가족은 아버지, 아내, 아들이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죽거나 자신이 죽어야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주춤한다.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왜 이런 일이 생긴거지?  누구를 선택해야 하지? 선택을 한다고 해도 선택된 인물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 정말 처참하고 잔인하고 사악한 일이다. 나라면 어떨까? 나의 죽음을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 이성은 나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까? 자신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나아가다 그의 외침을 듣는다. 아내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이 기억은 단순한 악몽일까? 아내와 다른 몸매의 여자에게 끌린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강렬한 첫 도입부를 지난 후 작가는 세 사람을 내세워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풀어간다. 기석, 유경, 정환이다. 기석은 대학교수다. 학창시절 지하철에 떨어진 아이를 구한 후 영웅이 된 적이 있다.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와 과거 행적은 지속적으로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는다. 거절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권으로 나가는 순간 그의 숨겨진 비밀들이 파헤쳐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첫 장에서 그의 선택을 강요한 것은 어떤 일 때문일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의 삶과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어린 시절의 환상과 뒤틀린 욕망이 조금씩 밖으로 드러난다.

 

기석의 아내 유경은 정치권 유력 인사의 딸이다.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 잘 생긴 남편이 있고, 아들은 현재 유학 중이다. 남들이 보면 화목하고 부러운 집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랫동안 섹스도 없었다. 그런데 아파트 아줌마 사이에 잘 생긴 20층 남자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고, 넘어질 뻔한 그녀를 잡아준다. 그 남자에게 끌린다. 아직 외모에 자신 있다. 이때 하나의 동영상이 도착한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외도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다. 분노한다. 누가 왜 이런 동영상을 보낸 것이지? 일주일 뒤 다른 동영상이 온다. 분노하고 심리적으로 무너진다.

 

영환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앞의 두 인물이 현재에서 시작한 것과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랐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친구가 한 명 있다. 지후다. 밝고 잘 생긴 아이다. 지후의 초대를 받은 후 둘은 아주 가까워진다. 영환의 엄마도 지후라면 믿는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영환은 지후를 통해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귄다. 그러다 유명한 선생님이 운영하는 캠프 참여를 신청한다. 먼저 참여한 친구들이 극찬을 한다. 아이들이 홀로 그 캠프까지 찾아와야 한다. 영환의 악몽은 바로 이 캠프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영환이 발견되고, 지후가 한참 후 토막난 채 발견된다. 영환의 억제된 기억 속에 답이 있다.

 

기석과 영환의 과거 속에 사건의 답이 있다. 본심을 숨긴 채 살아가는 기석의 속내와 과거 행위가 하나씩 드러난다. 영환의 기억은 봉인된 채 사실을 알고 싶어 미쳐가는 지후의 엄마와 충돌한다. 깨지고 무너진 정신과 돌이킬 수 없는 일상의 파괴가 펼쳐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누군가는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누군가는 갑자기 촉발된 하나의 동영상으로 선명해진다. 이제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유경은 남편의 외도와 첫 장면에 나온 선택 영상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20층 남자가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다. 읽다 보면 이 남자가 누굴까 궁금해진다. 나의 추리는 그 실체가 벗겨졌을 때 완전히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앞에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소설의 영향으로 나만의 소설을 쓴 것일까?

 

과거에 있었던 살인 사건 하나. 그 범인을 죽이면 끝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강력하게 포장된 이미지와 당시 사건을 무마한 뒷배경은 역공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한 인물을 완전히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복수심에 불타 감정대로 움직인다면 자신마저도 태워버릴 수 있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놀란다. 봉인된 기억 속에 감추어진 욕망은 또 어떤가!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많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자극적이고 불편한 묘사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장에 나온 사진 한 장이다. 왠지 모르게 강하게 머릿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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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간다
아사이 료 지음, 곽세라 옮김 / 비에이블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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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때부터 강요받는 것이 하나 있다. 원대한 포부나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가장 흔하게 듣는 질문이 ‘너는 꿈이 무엇이냐?’와 ‘무엇이 되고 싶냐?’ 하는 것들이었다. 만화를 좋아했던 내가 한 답은 만화방 주인이었는데 원대한 포부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하나씩 그 계획을 달성하는 것도 내 성질과 맞지 않았다. 강요된 교육과 강요된 미래에 대한 설계 등은 언제나 내 삶과 충돌했다. 그렇다고 사회 바깥을 겉도는 아웃사이더도 아니다. 그냥 흔하게 우리 주변에서 보는 아저씨 중 한 명으로 살았다. 이런 나지만 살면서 고민이나 미래에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하루와 현실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하면 너무 포장하는 것일까? 제목에 먼저 꽂히고, 작가의 이력을 보고 더 읽고 싶어 선택한 책이다.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설정과 전개이지만 뛰어난 가독성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다. 책소개에 나오는 럭셔리한 두뇌에 퍼펙트한 운동신경을 가진 만년 1등 유스케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무장한 오랜 단짝 도모야에 새로운 전학생 가즈히로가 전체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각 장마다 한 사람이 등장해 자신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이런 이들 앞과 옆에 유스케와 도모야가 있는 설정이다. 그리고 첫 장에서 이들과 관계없는 간호사와 그 동생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로 시작해 유스케와 도모야로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지는데 이때 유스케에 대해 받은 인상은 이후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변한다. 식물인간처럼 변한 도모야를 매일 와서 간호하는 유스케의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헤치는 역할도 한다.


가즈히로는 자주 전학을 다니는 아이다. 처음 등교한 날 이 학교에서 스키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학생인 그를 친절하게 도와주는 학생이 바로 도모야다. 도모야의 단짝은 잘 생기고 공부도 운동도 1등인 유스케다. 이 세 명은 친해져 같이 놀러 다닌다. 이때 유행하는 만화책이 있었다. <제국의 법칙>이란 전쟁만화다.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아이들은 이 영화 속 캐릭터에 열광한다. 명칭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들이 보기에 유스케 아버지 명함에 나온 이름은 영화 속 캐릭터와 닮아 보인다. 물론 이 실체가 다음 이야기에서 깨어지지만 초등학생들의 환상 속에서는 아직 그 힘이 유지된다. 이 삼총사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반이 갈린다. 유스케와 가즈히로는 같은 반이고, 도모야는 다른 반이다. 이때 유스케의 강렬한 경쟁의식이 밖으로 강하게 드러난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아야나라는 여학생이 화자다. 그녀의 절친은 유스케에 빠져 있고, 그녀는 도모야에 관심이 있다. 열네 살 소녀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과 유스케 등의 행동을 관찰한다. 학교에서 전체 석차를 붙이는 것을 금지하자 유스케는 초등학교때처럼 화를 낸다. 모든 운동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유스케가 단 하나 잘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수영이다. 도모야는 수영부의 부장까지 된다. 그 시절 소년 소녀의 미묘한 감수성과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런 구성은 유스케 등이 대학생이 된 후 다른 대학생의 시선으로 풀려나오고, 그 이후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으로 넘어간다. 자신들의 삶을 보여주고, 그 삶 속에 유스케 등이 놓여 있다. 읽으면서 그들의 삶과 생각들이 계속해서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비교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하나의 가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산족과 바다족의 대결이란 설정이다. 인기 만화와 엮이고, 도시전설과 이어지면서 이 가설은 점점 힘을 얻는다. 도모야가 식물인간처럼 변하게 된 사연이 바로 이 가설과 관계 있다. 그리고 이 가설은 두 청년 유스케와 도모야의 삶과 연결된다. 강요된 지식의 주입이 만들어낸 삶이 각자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삶의 이유를 자신의 존재감을 밖으로 드러내고 싸우는데 있는 유스케와 조용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도모야의 삶으로 말이다. 이 과정에 각각의 화자를 내세워 그 시절의 고민과 그들이 바라본 둘의 삶을 보여준다. 이때 보여지는 유스케의 모습은 어릴 때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던 모습은 사리지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행동만 부각된다. 살기 위한 이유가 아닌 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가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하나의 가설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빠진 듯한 느낌이지만 뛰어난 가독성과 마지막 설정이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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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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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께이가 “미스터리 마니아들이 원하는 요소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데 나보다 먼저 읽은 독자들의 평은 극찬 일색이다. 책을 받고 읽을 일정을 세웠는데 에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서 일정들이 꼬였다. 생각보다 늦게 읽게 되었는데 나의 마음 한 곳에서는 아껴둔 책을 읽는다는 쪽으로 위로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시간 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한 마디로 아주 멋진 미스터리 소설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네 명의 시선으로 풀어가는데 각자의 입장과 사연들이 엮이고 꼬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은 또 어떤가! 나쁘게 보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지만 실제는 촘촘히 쌓아 올린 이야기의 결과다.


네 명은 조류학자이자 탐정인 푸얼타이 교수와 전직 형사였던 뤄밍싱과 거레이 변호사와 괴도인 인텔선생 등이다. 사건은 1월1일 캉티뉴쓰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가 산책로에서 총을 맞고 죽은 것이다. 그 시간대에 산책로를 드나든 사람도, 단서도, 목격자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밀실 같다. 현장을 조사한 경찰은 그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다. 가능성이 나오면 다른 증거에 의해 소거된다. 이때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이 호텔에 온 조류셜록이라고 불리는 푸얼타이가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적한다. 호텔 조경을 담당하던 황아투라고. 살인자가 숨은 곳도 알아낸다. 그런데 황아투가 죽은 책 발견된다. 다른 누가 있는 것일까?


전직 경찰이자 현재 사립탐정인 뤄밍싱은 고도비만이 시달리고 있다. 한때 그의 정보원이었던 여인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 캉티뉴쓰 호텔에 왔다. 그가 경찰을 그만두게 된 사연이 나온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뛰어난 형사였다. 많은 사건과 중요한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다. 이런 실력이 발휘된 결과로 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 호텔에서 그가 변한 모습에 놀란 이전 친구와 아내가 등장하고, 그의 작은 실수는 결국 바이웨이둬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푸얼타이 교수가 지목한 범인 외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지적한다. 사건이 꼬인다.


거레이 변호사는 이혼전문변호사이자 뤄밍싱의 전처였다. 피살된 바이웨이퉈의 아내인 란니의 오랜 친구다. 란니의 의뢰로 바이웨이퉈의 사생활을 조사하던 중이고, 또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녀가 뤄밍싱과 이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 엇갈린 사실은 우리의 현실을 다면적으로 보게 한다. 생각하지도 못한 이유다. 그녀는 란니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치내면서 황아투에 대한 비교적 잘 안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이자 탐정의 조사는 이 사건의 또 다른 부분을 지적하게 만든다. 각자의 사연으로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새로운 사실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그녀가 지적한 범인 중 한 명은 한때 유명했던 괴도 인텔 선생이다.


마지막 화자는 신출귀몰한 솜씨로 부유층만 전문적으로 털었던 괴도 인텔 선생이다. 그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이전의 파트너가 그를 다시 도둑질로 이끈다. 거래의 대상은 바이웨이둬였다. 그가 괴도가 된 사연이 흘러나오고, 우연히 발견한 단서들이 사건의 다른 면을 엿보게 한다. 그가 도둑질을 그만 두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사회의 변화에 대해 목사와 나눈 대화다. 그가 도둑질로 사람들을 돕는다고 바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려주고, 한 신부의 오랜 세월 선교 활동의 결과로 신도가 늘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돌렸다. 그가 또 다른 범인을 지적할 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네 명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각각 완벽하지 않지만 그 과정들이 덧붙여지면서 진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셜록 홈즈의 패러디인 푸얼타이 교수가 보여준 놀라운 추리는 탁월한 직관과 통찰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이지만 이 복잡한 사건을 완전히 밝히는 것은 무리다. 다른 사실을 가지고 다가온 화자들이 보여준 진실의 한자락도 마찬가지다. 앞의 완전하지 못한 허점을 조금씩 메우면서 나아간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그들의 사연은 그 자체로 재밌고 흥미롭다. 이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가는 힘이 대단하다고 느끼게 한다. 이 정도 필력과 캐릭터 형성 능력이라면 다른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독자처럼 다음 작품을 빨리 내주길 바란다. 이미 출간된 책들이 있으니 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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