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어떤 작가의 책이라면 관심을 두고, 사고, 읽는다. 물론 사거나 읽는 행위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모두 읽지 못하는 것처럼 선호하는 정도가 약간 미흡한 작가라도 읽는 경우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경우는 후자에 더 가깝다. <개미> 이후 계속해서 읽어온 그의 작품들은 늘 재밌거나 잘 읽혔다. 놀라운 가설과 상상력은 관찰력과 더불어 매혹적인 독서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어느 작품은 취향과 달랐고, 그 상상력이 판타지 소설에 멈춘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기대하고 읽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고양이. 그것도 암고양이다. 이름은 바스테트이다. 이 이름은 이집트의 고양이 모습을 한 여신에서 비롯했다. 바스테트는 보통의 암고양이인데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종과 대화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생쥐와 대화를 시도하려는 장면은 본능에 의해 가로 막히지만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종과의 상생과 대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고양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대척점에 있는 수고양이가 피타고라스다. 이 피타고라스는 머리에 USB단자가 있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 덕분에 인간의 지식을 습득한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정보에 기반한 사고를 한다. 바스테트에게 고양이와 인류의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의 고양이가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와 폭동으로 영적인 고양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고양이의 성장소설이란 평이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암고양이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다보니 인간의 모습과 행동과 문화 등이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 특히 테러에 대해서 그렇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를 묘사한 장면들이 있는데 공감한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는데 낯익은 명칭이다. 재미난 것은 노동을 바라보는 바스테트의 시점이다. 놀면서 본능적인 활동만 하는 고양이에게 시간을 내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가 인류가 멸종되면 고양이들이 인간처럼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재밌는 대목이다.

 

테러가 점점 과격화되고, 내전처럼 벌어진 가까운 미래의 파리가 배경이다. 이 테러와 더불어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긴다. 바로 패스트다. 쥐들이 번식하면서 전염병이 확산된다. 1일 생활권으로 묶인 현대에 병의 전파는 더욱 빨라진다. 약탈은 일상화되고, 생존을 위해 개인들이 무장한다. 이 무장도 쥐들에 공격에는 무력하다. 한두 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쥐와 고양이의 대결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양이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다. 압도적인 쥐의 숫자와 거대해진 몸집은 상식을 뒤집는다. 고양이들이 쥐를 피해 외곽으로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다.

 

고양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고, 인간의 능력 같은 주다 보니 조금 어색한 부분도 생긴다. 설정에서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한 피타고라스의 USB 머리나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모습 등은 살짝 거부감이 생긴다. 테러와 폭동 등으로 파괴된 파리에서 전기와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마저 쥐들을 피해 도망간 상태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에 쥐들과 대결하고, 최후의 보루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 아닌 고양이들이 진행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아주 어색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은데 파리 외곽에서 피타고라스가 자신이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파리에 가야 한다고 연설하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그에 반대하는 다른 고양이들이 과거의 기억에 의해 바다의 물고기를 쉽게 잡아먹을 수 있다고 외치는 장면이다. 선지자와 그 반대의 모습인데 어딘가에 많이 본 장면이다. 쥐떼와 고양이와 인간의 연대가 전투를 펼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빠른 번식이란 것과 날씨라는 변수 등은 미래를 쉽게 전망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바스테트가 영적으로 발전하는 장면은 <갈매지 조나단>이 연상되었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와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1권으로 충분한 분량인데 2권으로 나눈 것은 조금 심한 분권이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철학과 교육 등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도 아쉽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희조 2019-02-1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어떤 작가의 책이라면 관심을 두고, 사고, 읽는다. 물론 사거나 읽는 행위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모두 읽지 못하는 것처럼 선호하는 정도가 약간 미흡한 작가라도 읽는 경우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경우는 후자에 더 가깝다. <개미> 이후 계속해서 읽어온 그의 작품들은 늘 재밌거나 잘 읽혔다. 놀라운 가설과 상상력은 관찰력과 더불어 매혹적인 독서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취향과 달랐고, 그 상상력이 판타지 소설에 멈춘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기대하고 읽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베르나르의 <고양이>는 보통의 고양이가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와 폭동으로 영적인 고양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고양이의 성장소설이란 평이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암고양이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다보니 인간의 모습과 행동과 문화 등이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 특히 테러에 대해서 그렇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를 묘사한 장면들이 있는데 공감한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는데 낯익은 명칭이다. 재미난 것은 노동을 바라보는 바스테트의 시점이다. 놀면서 본능적인 활동만 하는 고양이에게 시간을 내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가 인류가 멸종되면 고양이들이 인간처럼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재밌는 대목이다.

다만 고양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고, 인간의 능력은 엇비슷하게 주다 보니 조금 어색한 부분도 생긴다. 설정에서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한 피타고라스의 USB 머리나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모습 등은 살짝 거부감이 생긴다. 테러와 폭동 등으로 파괴된 파리에서 전기와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마저 쥐들을 피해 도망간 상태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에 쥐들과 대결하고, 최후의 보루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 아닌 고양이들이 진행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아주 어색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잘 읽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더 치밀한 구성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이희조 2019-02-1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행인님. 제가 임의로 기사 성격과 분량에 맞게 줄이고 마지막 문장만 추가해보았는데요, 혹시 이런 식으로 싣는 것이 문제가 없으시다면 진행하고 싶습니다. 거미(방구석힙스터) 와 같이 필명과 짧은 소개문구 하나 정도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행인01 2019-02-17 15:10   좋아요 0 | URL
필명은 특별히 없고 그냥 행인이나 행인01을 사용합니다.
그냥 책 모으는 것 좋아하고, 읽는 것 좋아하는 중년 직장인 정도로 해주시면 됩니다.

이희조 2019-02-1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알겠습니다. 잡지 받아보시길 원하시면 heejo@chaeg.co.kr 으로 주소 한 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편하고 불안하지만 잘 읽히는 소설이다. 열세 살 소녀가 쉰 살의 문학선생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후 성폭행이 이어지는 상황을 그렸다. 작가는 이 과정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낙원, 실낙원, 복락원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불과 몇 개월 전부터 한국을 뒤덮은 #withyou 운동으로 생각이 옮겨가게 만들었다. 흔히 말하는 피해자의 반응에 대한 가해자와 네티즌의 댓글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이런 말을 내뱉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섬뜩함과 끝없는 미안함을 느꼈다. 이것은 나와 내 후손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팡쓰치는 류이팅은 단짝이다. 둘 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같은 경험을 한다. 이들이 꼽은 멋진 남자들은 두 사람이다. 문학선생 리궈화와 이웃집 오빠 천이웨이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문제가 많은 남자들이다. 천이웨이는 술에 취하면 아내를 때리는 나쁜 술버릇이 있고, 리궈화는 아주 상습적인 아동 성폭행범이다. 소설은 이 둘에 의해 피해를 입은 두 여자가 어떻게 삶의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지 잘 보여준다. 그 과정은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들의 피해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쓰치와 이원도 서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팅이 쓰치의 이상한 행동을 알게 된 것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실낙원은 바로 쓰치와 이원이 왜, 어떻게 스스로 무너지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리궈화가 어떻게 이런 피해자를 선택하고, 감정을 왜곡하고, 자기합리화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지 보여준다. 작가가 강하고 용감한 사람은 리궈화였다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리궈화가 피해자가 자살했을 때 오히려 홀가분했다는 느낌을 전하는데 이런 상황들이 그로 하여금 상습적이고 반복적인 성폭행을 하게 만든다.

 

쓰치는 불면증에 빠지고,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왜곡한다. 리궈화의 노리개로 전락했지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그 바탕에는 사람들의 인식과 인내가 깔려 있다. 작가는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라고 외친다. 참으라고 말하고,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피해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하다. 정말 비틀어진 질서를 위해 이런 희생자들이 양산된다는 것은 참혹한 현실이다. 이 현실의 반동으로 일어나 #withme 운동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작가는 쓰치가 납치되어 강간당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고 말하고, 그들이 보통의 딸이나 엄마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을 ‘살아남은 자’라고 부른다. 위안은 곧바로 자신이 그런 사람 중 제일 못된 사람일 것이란 자기혐오에 빠진다. 이런 상황은 리궈화의 다른 희생자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을 때 나온 반응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피해자에 공감하기보다 공격하는 사람들의 잔혹한 글들은 익명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잔혹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니 자신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쓰치와 이팅의 가족이 살았던 곳 주민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이다.

 

읽으면서 눈길을 끄는 몇 개의 관계가 있다. 쓰치와 이원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서로가 피해를 인식하지만 이것을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원은 유산을 한 후에 겨우 그 집을 떠나고, 쓰치는 정신을 놓으면서 그 상황을 벗어난다. 이원이 쓰치에게 나쁜 짓을 한 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할 때 자기반성이 들어있지만 결코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사회의 통념이란 뿌리 깊은 악습이 그들 앞에 놓여 있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사회와 가족 등이 없기 때문이다. 학원 선생들이 자신들의 경험담을 자랑하는 장면을 보면서 한국의 어느 여자 운동팀 감독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학생들 때문에 룸 등에 갈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학원선생들의 성폭행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존재는 학원뿐만 아니라 그 사회라는 부분도 잔인하게 가슴을 후벼 판다. 불편하지만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블로그 - 2018년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우희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 옆에 Love Blog, Love Log란 영어가 붙어 있다. 이 영어가 이 소설 속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표현해준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읽으면서 의문을 수시로 품게 된다. 꿈과 허구가 뒤섞이고, 현실로 넘어오기도 한다. 이때 벌어지는 일은 한 편의 코미디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웃음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코미디 소설의 외피를 가지고 있지만 표현 방식이나 유머 등이 그렇게 세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아재 개그의 남발이 이런 생각을 더욱 하게 만든다.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 작가의 잃어버린 원고를 찾는 과정을 다룬다. 코미디 월간지에서 퇴출 통보를 받은 작가가 회심의 작품으로 생각한 미완성 원고다. 이 원고만 완성하면 퇴출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만 이때까지 그가 보여준 작품들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편집장이자 사장이 그의 원고를 보고 말하는 장면은 수준 높은(?) 아재 개그의 향연이다. 작가 역시 현실에서 이 아재 개그와 개드립을 남발한다. 이런 작가가 과연 재밌고 웃기는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말과 글은 다른 영역이다. 물론 편집장과 담당 편집자가 보여준 반응을 보면 그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읽으면서 하성란의 평가에 동의하게 된다. B급 영화의 장면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결코 나를 웃기지 못했고, 지루하기만 했던 그 영화들 말이다. B급 감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왠지 이 감성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겠다. 내가 세련된 코미디에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취향에 너무 벗어난 탓이다. 그가 원고를 분실한 후 파출소에 가서 신고한 후 일어나는 일들은 또 다른 코미디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다. 결코 일반적인(논란의 문제가 있는 표현이지만) 등장인물이 나오지 않는 이 소설에서 그들은 한 장면의 코미디를 위해 연기한다.

 

소설 속에 이 화자의 작품 중 일부가 나온다. 대중적으로 결코 환대받을 수 없는 작품이다. 대중적이지 못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좋아할 수 있다. 그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독자가 있을 정도니까. 이 설정은 나중에 하나의 반전 장치가 된다. 선입견에 휘둘린 사람들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잘 보여준다. 화자가 단서를 찾아 돌아다니는 공간은 인터넷이다. 원고를 잃어버린 커피숍 커피공화국을 검색하고, 이 연관 검색어를 통해 용의자에게 다가간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과거를 쫓는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있다. Love Blog는 이것과 연관성이 있다. Love Log가 시작된다.

 

아재 개그가 난립하는 와중에 정제된 문장과 현학적인 용어들이 3류 코미디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준다. 반복되지만 결코 같지 않은 상황들은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느 순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구분하게 되고, 이 아재 개그와 코미디에 적응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운명적인 만남으로 착각한 상황은 순간적으로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었다. 이런 장면이 내 취향인 것일까? 아니면 작가의 한 방인 것일까? 다층적으로 쌓아올린 구조들은 말장난이란 뼈대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 부분은 결코 적응할 수 없지만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개인적으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코미디 소설이 아니다. 한두 권 더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는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탁의 길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묵직한 이야기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전작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압축된 시간이 아닌 한 청년의 요리사 성장기를 다루다 보니 조금 느슨하다. 시간을 가볍게 뛰어넘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그 사이에 요리와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가 같이 흘러나온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프랑스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분야다. 저임금과 수많은 폭력 등은 작가도 지적했듯이 나쁜 악습이다. 이런 악습이 너무 많은 한국을 생각하면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모로. 그의 성장기를 보면 어릴 때부터 대단하다. 정크 푸드를 먹지 않고, 패스트푸드점에 가지도 않는다. 한창 성장기의 소년들은 모로가 만들어주는 음식으로 자란다. 그들이 낸 돈으로 모로가 음식을 만든다. 푸짐하고 맛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가 바로 요리사의 길로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는 경제학 공부를 계속한다. 석사를 마치고, 여행을 하고, 음식점에서 알바를 하고, 박사 과정까지 마친다. 그 사이에 자신의 식당도 운영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요리사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어떤 결말에 도달할지 예측할 수 없다.

 

미식의 세계에서 프랑스 요리는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 만나는 것을 요리가 아니라 제과, 제빵이다. 와인이다. 작가는 요리를 뺀 부분은 그냥 스쳐지나간다. 읽으면서 느끼는 고역이 하나 있다. 바로 프랑스어로 된 음식이나 재료 등이다. 주석이 달렸다고 해도 본 적도, 먹은 적도 없으니 알 수 없다. 상상력으로 이것을 해결하기에는 무리다. 그냥 대충 지나갈 수밖에 없다. 아쉽다. 다시 파리로 가게 된다면 모로가 말한 음식들 중 몇 가지는 먹어보고 싶다. 그 정도 가격이라면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물론 미슐랭 별을 받은 식당은 다르겠지만 별로 그 식당들은 관심이 없다.

 

모로의 경험과 성장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요리사란 직업이 얼마나 힘든지 느낀다. 재료를 사서 돌아와 손질하고 눈코 뜰 새 없이 음식을 만든다. 그가 식당을 열었을 때 주방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엄청난 강도의 즉흥적 행위와 아주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의 실험을 매일 한다. 재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재료에 집중해요. 재료를 드러내고, 재료에 포커스를 맞추는 편이에요. 가끔 서로 결이 다른 재료들이 어우러질 때 그것들은 입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드러내죠.” 이때만 해도 성공한 요리사가 어떻게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리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될 줄 알았다. 그가 연 식당이 엄청난 호평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확장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힘든 노동과 생활과 분리되지 않는 일이 그를 극도로 피로하게 만든다.

 

식당을 접었다고 요리사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제 새로운 요리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닌다. 방콕과 미얀마를 돌면서 식재료를 더 배우고, 유명 식당에서 요리사를 한다. 아직 자신만의 식탁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수행은 그로 하여금 마지막에 놀라운 기획을 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은 요리의 세계가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유명 요리사의 화려한 세계가 아니라 세계 곳곳을 채우는 수많은 생계형 요리사들이 더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이 과정을 친구 혹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표현한다. 간결한 문장과 섬세한 표현은 순간순간 집중하게 만든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곧, 주말
시바사키 토모카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을 소재로 여덟 이야기를 풀어낸 단편집이다. 처음 책을 신청했을 때는 단편이란 사실을 알았는데 받아놓고 시간이 지나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첫 단편 <여기서 먼 곳>을 읽고 난 후 이상함을 느꼈다. 혹시 연작 소설인가 하고 다음 이야기를 읽었지만 독립된 단편이었다. 요즘 책을 쌓아두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가끔 이런 현상이 생긴다. 표지 때문인지, 이 책 앞에 읽었던 에세이 때문인지 주말을 소재로 한 에세이로 착각한 순간도 있다. 읽기 전에 그 작가를 잘 아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생긴다. 뭐 유명 작가의 경우에도 단편집을 장편으로 착각하는 날이 빈번하니 어쩌면 나에게 당연한 일이다.

 

주말. 이전과 달리 요즘에는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쉰다. 이전에는 토요일은 오전에 일했고, 그 다음은 격주로 쉬었다. 이런 변화를 기억하다보니 가끔은 주말이 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주말의 변화는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주말이 더 바쁜 곳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주말에 쉬는 것은 아니다. 이 단편집 속에서 주말에 일하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이야기에 쉽게 공감하는 것은 평생 부모님과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계절 장사란 특성 때문이다. 소설 속 식당이나 다른 직업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덟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각 소설의 마무리가 아주 낯설었다. 삶과 시간의 계속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소설이란 특성 때문에 뭔가 끝나지 않은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이런 단편을 읽을 때면 언제나 이 낯섦 때문에 뭔가 찜찜함을 느낀다. 예전 읽었던 단편들이 어느 정도 이야기의 완결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들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그 완결성을 찾아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격 탓도 있을까? 삶이 언제나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주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르툼에 나는 없다>란 단편을 읽으면서 나의 선입견이 여러 곳에서 깨졌다. 2차, 3차로 이어지는 모임과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와 미래를 잘못 예상한 것이다. 소소한 일상의 풍경에 낯섦이 끼어들었는데 이 낯선 상황을 일상적인 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먼 곳>은 좋아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차이와 낯선 이의 인사가 던지는 의혹 등이 재밌게 풀린다. <해피하고, 뉴, 하지만은 않지만>은 현대인의 불안과 생각지도 못한 전화 한 통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가 재밌다. 연말, 연초에 아파 꼼짝도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순간 나의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 이후 체질이 조금 바뀐 것 같다.

 

<개구리 왕자와 할리우드>는 서점이란 배경이 기억에 남는다.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둘러싼 작은 에피소드는 보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제비의 날>은 운전자라면 누구나 느낄 차 고장 이야기가 먼저 다가온다. 나의 기억은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이야기보다 지엽적인 상황에 더 눈길이 간다. <나뮤기마의 날>은 앞에서 말한 주말에 일하는 부모를 둔 수험생 이야기다. 그녀에게 주말은 다른 사람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안도로>는 소음성난청으로 시작하여 과거의 기억으로 끝난다. 분량만 놓고 보면 현재가 많은데 머릿속은 그 작은 에피소드가 더 남는다. <지상의 파티>는 계획이 깨어진 차선의 선택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다. 마지막 문장의 의미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놓친 것이 있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들의 주말 풍경은 그 평범과 각자의 개성으로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을 연출한다. 좀더 차분하게 읽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