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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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상 수상작 <컨설턴트> 이후 처음으로 이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한국 문학을 많이 읽지 않다 보니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작가의 작품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나의 뇌세포는 가끔 오랜만에 책을 내었다는 착각을 한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도 그랬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낯익은 표지와 제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제목과 표지들이 작가의 이름과 연결되지 않고 단순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책 정보를 볼 때면 더 심해진다. 하지만 이 단편집을 읽은 지금 작가의 이름은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다. 작가의 말을 보면 간단한 작품 해설을 달아 놓았는데 단편만큼 재밌다. 여기에 소설집의 콘셉트가 나온다. “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닥치는 대로 준비했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아이돌 그룹 구성 원리와 동일하다고 하는데 이 단편집을 다 읽은 지금 동의한다. 여섯 편이 모두 장르가 다르고, 개성 넘치고, 유머 있고, 기묘하고, 재밌다. 어떤 작품은 장편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포기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첫 작품 <몰:mall:沒>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세월호가 떠올랐다.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란 문장이다. 실제 작가의 말을 보면 세월호 관련 단편이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 다루고 있는 비극은 삼풍백화점 참사다. 아직도 기억한다. 2년 연속으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우리의 망각이 만들어낸 비극이 세월호임을 작가의 이 간결한 문장 속에 녹여내었다. 1995년 6월의 참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군제대한 복학생의 일상으로 담담히 진행한다. 상상력은 나쁜 쪽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현장의 쓰레기와 함께 옮겨진 사체들로 이어진다. 서늘하고 가슴이 아프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은 삼성가의 비자금과 맞물려 있다. 그 당시까지 세금의 사각지대에 있던 미술품이 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 한동안 시장이 경직되었다. 작가는 이 시기에 몰락한 화상을 통해 그 당시 미술시장 현실을 보여준다. 설계된 전시와 비자금 조성을 위한 미술품 거래가 어떤 의미인지, 지금 거액으로 거래되는 미술거래의 이면에 또 의미가 있는지도. 후반부 전시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기괴하고 역설적이다. 서서히 잠식하는 공포를 단숨에 바꾸는 단어 라이선스의 등장은 놀랍다. 이로써 전시회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서울전으로 이어진다.

 

<계절의 끝>은 장편 개작을 기대했던 작품이다. 인류의 종말을 다룬 간결한 작품인데 머릿속에 온갖 작품들이 오간다. 공룡 등이 멸종한 것처럼 인류도 멸종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 시작해 황량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편지라는 아날로그 감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것이 인류의 멸종을 더 부각시킨다. 높은 건물에 올라 석양을 바라볼 때 본 풍경과 지하철의 많은 물들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욕구가 만들어낸 식욕은 어린 생쥐를 날것으로 씹을 정도다. 다른 생존자들이 보이지 않고, 교류가 없는 것은 조금 아쉽다.

 

<사장님이 악마예요>는 오컬트 블랙코미디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실제 악마가 등장해서 현실의 삶을 설명해줄 때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에 내가 농담처럼 했던 말들이 이 소설 속에서는 현실로 등장한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위해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하는지도. 죄 지은 자가 많아 지옥의 과포화가 문제라는 악마의 걱정과 고민이 출산 반대로 이어질 때 이 역설이 재밌다. 지옥행을 막기 위해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이 역설도 마찬가지다.

 

<불용>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관보다 작은 공간에서 열쇠를 깎고, 큰 책을 펼칠 수 없어 시집을 접어 읽는 그의 모습은 아주 비현실적이다. 뚫은 가슴에 열쇠를 꽂아 기억을 여는 모습은 아련하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을 듯한데 잘 모르겠다. <인류 낚시 통신>은 <은어 낚시 통신>의 패러디다. 원작을 읽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윤대녕의 소설을 좋아해 열심히 읽은 적이 있기에 읽은 듯하지만 자신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 자극적인 제목으로 낚시질 하던 그가 한 통의 초대장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은 현재 한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비밀결사처럼 모여 그들이 내뱉는 말 속에서 정치와 경제 등의 기득권층이 가진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암울한 내용이지만 재밌다. 다시 <은어 낚시 통신>을 읽고 이 단편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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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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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이 만들어낸 도둑 이야기다. 세상에는 수많은 분야의 덕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플라이 타잉이다. 원래는 강에서 송어를 잡기 위해 인조 미끼를 제작하는 것인데 조지 켈슨의 <연어플라이>가 나온 후 이것이 하나의 예술 장르처럼 바뀌었다. 플라이 타잉을 멋지게 만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 플라이 타잉을 위해 사용하는 재료가 문제다. 일반적인 새의 깃털 등을 염색해서 사용한다면 누가 시비를 걸 것인가. 하지만 몇 명의 플라이 타잉 기술자들은 희귀종이나 보호해야 하는 새들의 깃털을 재료로 사용한다. 당연히 불법이다.

 

명백한 불법이지만 이것을 피할 방법은 존재한다. 19세기에 유행했던 깃털 모자 등에서 뽑은 깃털을 사용하는 것이다. 모자와 박제된 새에게서 뽑아낸 깃털은 새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 금액이 정해진다. 박제된 새 한 마리 가격이 몇 천 불이나 한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후의 세계에서 금액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덕질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이 책을 쓰게 만든 에드윈 리스트도 재료를 사기 위해 어린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집안의 사정이 나빠지고 나쁜 덕질의 세계에 매혹되면서 깃털을 훔칠 계획을 짠다. 그 대상은 영국 트링 자연사박물관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송어 낚시를 하면서 처음 들었다. 2009년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새가죽 299점을 훔치고 500여 일이 지난 후 범인이 잡힌 사건이다. 범인은 열아홉 살 플루트 연주자 에드윈 리스트다. 한때 그는 플라이 타잉의 미래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었다. 이 뛰어난 기술은 더 좋은 재료에 대한 욕망을 불러왔다. 자연사박물관에 박제된 새들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그곳을 방문한 후 이 새들을 훔칠 계획을 짠다. 실행 당시 모습을 재현한 장면을 보면 허술하기 그지없다. 과학 발전과 연구에 중요한 새가죽 299점은 그렇게 초보 도둑에게 털렸다. 그는 이것을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고, 자신이 원하는 플루트를 사고, 생활비로 쓰고, 플라이 타잉 재료로 사용했다.

 

책의 구성은 상당히 재밌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자연사발물관이 짓기까지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든 에드윈 리스트의 삶에 대한 기술이다. 마지막 하나는 이 소식을 들은 작가가 사라진 새가죽을 쫓는 과정이다. 첫 이야기가 모험물에 가깝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조금 허술한 범죄 이야기다. 마지막 이야기는 추적물이다. 약간 장르 복합적으로 펼쳐지지만 실제 내용은 트링 자연사박물관의 새가죽 도난을 둘러싼 댜큐멘터리다. 단순히 두 번째 이야기까지만 쓴다면 흥미로운 도둑 이야기에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면서 단순한 도둑질이 아님이 드러난다.

 

무분별한 깃털 사용을 처음으로 막을 때 깃털 관련 업계는 ‘깃털 사업을 막는 법안을 만들면 일자리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경제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의원들에게 경고’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많은 경제 단체들이 현재도 똑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플라이 타잉 전문가들 중 일부가 염색한 깃털을 사용한 것과 실제 새들의 깃털을 사용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덕후들에겐 다르게 다가간다.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은 너무 많다. 초판본과 희귀본에 대한 책 수집가부터 그림, 벌레까지 다양하다 . 아니 내가 모르는 분야까지 합치면 셀 수조차 없다. 그리고 법의 경계를 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핑계를 만든다.

 

이 책에서 표본으로 가지고 있는 깃털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과학의 발전이 이 깃털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말한다.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냥 보관만 하고,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고, 과학적으로 소용도 없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다. 이 에세이의 가치 중 하나는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법거래를 이베이나 플라이 타잉 사이트 등에서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처음 극락조 등을 구해 영국으로 온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나 박물관을 만든 월터 로스차이들 같은 인물의 이야기를 처음에 배치한 것도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이 책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플라이 타잉 전문가의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어떤 일까지 벌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익단체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우리가 볼 때 평범한 도둑질이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가죽의 진실은 어떻게 숨겨지고 있는지 등 다양하다. 사진으로 본 몇 개의 플라이 타잉 작품은 책으로 본 것보다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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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돼지의 낙타
엄우흠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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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첫 작품인 <감색 운동화 한 켤레>가 낯익어 선택했다. 아마 비슷한 제목의 다른 소설과 헷갈렸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나의 부정확한 기억력은 언제부터인가 제목만 가지고는 읽었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소설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2011년 겨울부터 계간지 <문예중앙>에 이 소설의 전반부를 연재했다고 한다. 이 소설의 4장까지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완성작으로 출간되었다. 연재 당시 제목은 <올드 타운>이었다. 개인적으로 올드 타운이란 제목보다 현재의 제목이 더 시선을 끈다.

 

소설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경수네 가족이 무동에 들어가게 된 이유와 그 속에서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준다. 후반부는 이제 다 자란 경수와 친구들의 삶이 나오고, 전반부에 깔아둔 설정 등이 하나씩 튀어나와 의혹 등을 풀어준다. 무심코 본 장면들이 뒤에 밝혀지는 사실로 인해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황당한 이야기들은 더 황당한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결코 재미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꽤 두툼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캐릭터와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잘 엮여 있다.

 

중산층 자영업자의 몰락이 비닐하우스촌인 무동으로 경수네 가족을 이끌었다. 마지막 사기에는 경찰이었던 경력도 소용없다. 사채는 경수 아버지를 집에서 떠나게 만들고,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이런 이야기만 무겁게 펼치면 재미가 없을 텐데 로컨롤 고와 토마토 문이란 커플을 등장시켜 현실을 한 번 비튼다. 이들은 만남부터 비현실적인데 결혼 후 아들 열두 명을 낳는다. 아들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공장으로 가서 돈을 번다. 아버지는 이 동네에서 상위층에 해당하는 노가다다. 아들들이 돈을 벌어오니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 돈이 계속 쌓이고, 이로 인해 토마토 문의 시대가 열린다. 이때도 비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즐거운 이야기가 나온다.

 

떡볶이 가게를 한 경수네가 망한 것은 시대를 앞선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수가 벌인 한 번의 놀이 탓이다. 건물 화장실에 쓴 음란 낙서는 경수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작은 장난이다. 물론 이런 장난이 커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여자 아이를 좋아한다는 낙서는 업종 전환을 독촉하게 만들고, 이것이 결국 사업의 몰락과 사채 이용으로 이어진다. 무동으로 이사 온 날 엄마가 보여준 행동은 비참한 환경에 대한 자기방어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어린 경수는 그곳에서 친구를 사귄다. 이 과정에서 또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 황당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재미난 인연으로 이어진다.

 

이야기는 경수네에만 머물지 않고, 무동 주민들로 확장되고, 그들로 한정된다. 이 때문에 각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고, 관계가 더 밀착된다. 인호네 수퍼가 어떻게 생겼고, 그들의 몰락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보여줄 때 욕망의 하층부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게 된다. 경수의 엄마도 한국의 부동산 욕망의 희생자 중 한 명이다. 가진 자의 여유와 권력이 없는 그들은 더 많은 변수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그 가족들에게까지 전달된다. 경수와 인호와 유미 등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곳이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좋든 나쁘든 기억과 추억이 머물고 있기에, 그곳을 벗어난다고 해도 특별한 삶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머문다. 물론 떠날 기회가 생기면 떠날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인 ‘마리의 돼지의 낙타’는 제목 그대로 마리의 돼지가 낳은 낙타다. 마리는 민구의 누나이자 공부방 살인사건의 당사자다. 돼지가 낙타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낙타가 무동에 나타나고, 민구는 걸어서 중동까지 간다. 작가는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집어넣으면서 현실이 꼭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의 현실은 실제가 아닌 보여주고자 하는 시각을 통해 전달되지 않는가. 무동의 한자를 둘러싼 해프닝이나 서울의 위성도시 이름을 위성시라고 지은 것과 근교 농업지구와 재개발 철거민 등을 엮은 것에서 그가 쓴 소설들의 연장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이야기꾼 한 명을 발견했다. 더 많은 소설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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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증거 범죄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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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의 왕 시리즈 첫 권이다. 지난 번에 읽었던 <동트기 힘든 긴 밤>이 시리즈 3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순서가 바뀌어 출간되었다. 시리즈 마지막 권에서 워낙 강한 인상을 받았기에 첫 권이 나온다고 했을 때 정말 반가웠다. 이렇게 빨리 나올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중국판 <용의자 X의 헌신>이란 소개가 괜히 눈에 거슬린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금방 사라졌다. 범인이 누군가 하는 것보다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생각하면서 빨려들어갔다.

 

최고의 법의학자 뤄원과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의 대결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옌량의 추리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가 느낀 부조화가 고차방정식을 푸는데 단서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의심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만약 옌량이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를 남긴 연쇄살인범에 관심을 두고 수사에 참가했다면 그의 부조화가 더 쉽게 납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뤄원을 보고 연쇄살인범 수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뭐 어쩌면 이런 점이 평범한 나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덕분에 두 천재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몰입도는 더 높아진다.

 

3년 간 벌어진 다섯 건의 연쇄살인 사건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범인이 남긴 증거들이다. 그것은 줄넘기 줄을 이용한 교살과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 란 메모를 쓴 종이 한 장이다. 경찰은 지문을 하나씩 수집해서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만 대도시에 인구 이동이 많은 관계로 쉽지 않다. 이 연쇄살인범을 잡기위해 네 번이나 특별조사팀이 만들어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다섯 번째 살인이 벌어지고 이 수사의 책임자인 자오톄민은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경찰을 떠났기에 이런 수사에 관심이 없다. 다만 작은 해프닝 하나가 생기면서 작은 재미를 던져준다. 나중에는 옌량이 경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나와 이전 작품의 궁금점 하나가 해소되었다.

 

뤄원은 최고의 법의학자였다. 일중독자였다. 아내와 딸이 바라는 사소한 일들을 해주지 못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내와 딸이 사라졌다. 얼마 후 그는 법의학자를 그만두고 아내와 딸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한 사건을 보게 된다. 식당 주인의 여동생 주후이루와 그녀를 좋아하는 궈위가 실수로 동네 깡패를 죽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먼저 뤄원은 자수를 권한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자신이 죽였다고 말한다. 이들의 행동이 뤄원의 뭔가를 자극했다. 뤄원은 현장의 증거를 조작하고, 두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경찰에 대응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이대로만 한다면 둘은 경찰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긴장감이 또 하나 조성된다.

 

무증거 범죄. 현재 법률에서 증거가 없다면 법의 심판대에 올릴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자백이다. 경찰은 이 두 남녀가 살인했다는 의심을 하지만 알리바이나 증거 등이 모두 그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형사의 감과 수사가 이어지지만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 그러다 발견된 지문의 정체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지우게 한다. 바로 ‘날 잡아주세요’ 연쇄살인범의 범행이란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미 뤄원이 이 살인범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짜 놀라게 되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적으로 표현된다. 작가가 잘 깔아놓은 장치와 의도가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회문제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파고들지 않기 때문이다. 두 천재의 대결에 집중하고, 우발적 살인을 한 두 남녀의 행동과 이들을 돕는 뤄원의 심리가 더 돋보인다. 동네에 깡패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뤄원의 아내와 딸이 사라졌다고, 성추행을 하는 인물이 있다고 사회파 추리가 아니다. 관료조직과 현실의 우선순위가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고, 한 의인이 왜 이런 불의를 저질렀는지 알려줄 때 사회파의 힘을 가진다. 물론 뤄원이 저지른 범죄를 두둔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게 되었는지 보여줄 때, 그가 예상한대로 현실이 흘러가지 않을 때 단순한 수학공식 같은 대결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이 남는다. 이 작품도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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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병동
가키야 미우 지음, 송경원 옮김 / 왼쪽주머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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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가의 다른 작품인 <40세, 미혼출산>을 읽었다. 상당히 재밌게 읽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좋아 다른 작품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 검색을 하니 낯익은 제목들과 표지들이 상당히 보인다. 작가를 제대로 몰랐기에 그냥 무심코 지나간 책들이다. 아마 이 책들 중 몇 권은 나의 위시리스트로 올라갈 것 같다. 물론 다른 책들처럼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더미에 묻힐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공고히 하게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이번 소설이 했다. 이름도 조금씩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호스피스 병동의 여의사 루미코는 미녀이지만 언어의 표현력이 많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둔감하다. 당연히 자신의 노력이나 마음과 달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다 화단에서 청진기 하나를 발견한다. 이 청진기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다. 환자의 몸에 청진기를 대면 환자의 마음속 목소리가 들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환자가 후회하는 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선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험은 루미코도 같이 한다. 이런 후회와 새로운 경험의 공유가 루미코를 환자에게 신뢰받는 의사로 만든다.

 

dream, family, marriage, friend 등 네 편의 이야기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유명 여배우의 딸이 꿈꾸었던 배우의 삶, 가족보다 일이 먼저였던 직장인, 딸의 결혼을 반대한 엄마, 친구의 거짓말을 대신해주지 못한 아쉬움 등이 후회의 감정으로 죽음을 앞둔 그들이 뒤덮는다. 마법의 청진기로 이들의 속마음을 파악한 루미코는 그 후회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삶을 살게 한다. 이 다시 사는 삶은 그들이 가진 후회의 감정을 날려버리는 기회가 된다. 시한부 삶이 남은 그들에게 마음의 평온함을 남겨둔다.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자신의 현재에 불만이 있다면,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 자신도 지난 삶을 돌아보면 그 순간들이 적지 않게 있다. 소설 속 상황처럼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강한 후회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나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마법의 청진기를 통해 현실의 1분으로 마법의 1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이 경험은 그들이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삶의 순간으로 이끈다. 네 이야기 중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가는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끌면서 현실을 긍정하게 되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

 

다른 삶을 살아보는 과정이 반드시 실현 가능했던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선택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엄마와 닮지 않았지만 유명 여배우의 딸이란 후광과 지저분한 연예계를 보여주고, 승진을 포기하고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이 오히려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딸이 외모 외에 볼 것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았는데 그 남자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방송에서 보여줄 때 느낀 후회의 감정은 그 남자와 그 가족의 실체를 통해, 또 다른 환자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마음속에 담고 있던 여자가 돈을 훔친 것을 친구가 먼저 말해 그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후회한 삶의 이면이 드러날 때 삶의 서늘한 현실이 불쑥 다가오고, 반전이 펼쳐진다.

 

이 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루미코의 가족사가 등장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동료 의사 이와시미즈를 조금씩 이해한다. 한때 모델을 할 정도로 잘 생기고 큰 병원의 후계자란 소문이 있는 이와시미즈는 루미코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동료였다. 새로운 경험은 그녀의 둔감력을 약하게 만들고, 편견으로 바라본 그의 삶을 제대로 알게 한다. 이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감정은 슬며시 마음 한곳에 자리를 잡는다. 작가는 판타지 같은 설정 속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누가 그녀에게 이 청진기를 전달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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