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하난의 우물
장용민 지음 / 재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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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와 스릴러가 어우러진 소설이라고 해서 혹시 로맨스에 더 중심을 둔 소설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이 걱정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특유의 빠른 전개와 개성 강한 캐릭터에 빠지면서 잊었다. <귀신나방>이나 <궁극의 아이>가 음모론에 기대 황당한 듯한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면 이번 작품은 하나의 전설을 기반으로 짧지만 강렬한 며칠을 풀어놓았다.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영화로 만들면 누가 이 역할을 하면 좋을까 상상했다. 작가가 영화감독을 꿈꾸고,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이 얼마나 영화적 상상력을 구현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은 모두 영상으로 옮긴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10년만에 한국에 온 태경이 누리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면서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리는 낙원동을 돌면서 빈 병을 모아 고물상에 넘기는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노숙자다. 미혼모였던 어머니에게 버려진 것을 한 할머니가 거두어 키웠다. 할머니마저도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누리는 밝게 웃으며 리어카를 끌고 빈 병을 모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무서울 수도 있다. 그의 미성숙을 속이는 고물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노인을 도와주면서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을 듣는다. 할머니가 바란 것이 반쪽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이 전설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태경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양아버지가 겁탈하고, 엄마는 그 사실을 묵인했다.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양아버지 눈을 찔러 달아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또 다른 지옥이 그녀를 창녀로 만들었다. 이런 그녀에게 하나의 희망이 있다. 지상낙원처럼 보이는 남태평양 휴양지에 가는 것이다. 창녀를 그만 두고 달아나 하는 일이 소매치기다. 자신의 미모와 날랜 손놀림으로 그 희망을 부풀리지만 종로 등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동네에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전 포주에게 잡힌다. 그녀가 다시 끌려간 곳은 마약 거래를 축하하는 자리다. 그곳에서 여신의 눈물이란 45캐럿 다이아몬드를 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다이아몬드를 훔친 후부터다.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은 사막과 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간결하게 이 사랑 전설을 풀어놓는다. 사막 어디에서나 물을 찾아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부족과 사람의 인육을 먹고 사람의 뼈로 갑옷과 무기를 만드는 부족이 나와 더 전설처럼 들리게 한다. 이 전설은 비극이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누리는 자신이 부치하난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날린 종이비행기에 실린 목걸이를 한 태경을 올라라고 생각한다. 다섯 살 지능을 가진 누리는 이성보다 감정에 기댄 말을 더 잘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드러난다. “사랑은 심장을 주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로 만들면 좋을 소설이다. 속도감, 캐릭터, 전설, 진한 사랑 등이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장용민 특유의 과장된 감정이나 장면은 조금 아쉽다. 밑바닥 인생의 다양한 삶을 파편처럼 보여주지만 그것이 풍경처럼 다가올 뿐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사람의 감정을 이성으로 재단하려는 나쁜 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거대한 음모론에 빠져 황당한 설정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이 소설이 더 맞다. 아직 읽지 않은 장용민의 소설 몇 권이 집에 있는데 한 권씩 도전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 정말 운명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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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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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로 더 낯익은 이름이다. ‘아밀소설집’란 표지를 보고 김지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작가 김지현을 처음 만난 것은 에세이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였다. 이 에세이를 상당히 재밌게 읽었지만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못했다. 번역가로 인식한 작가들이 소설을 내는 경우를 가끔 본다. 대부분의 경우 생계용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순간 소설보다 번역에 더 치중하는 듯한 작가들을 보게 된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이런 번역가의 번역은 상당히 좋은 경우가 많아 믿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선택할 때도 있다.


표제작의 제목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국도나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이다. 내가 본 동물들은 거의 대부분 작은 동물이지만 사슴 같이 큰 동물들도 죽는다고 들었다. 이런 동물들이 도로 밑으로 다니게 하기 위해 통로도 만들어 두었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 단편 속 ‘로드킬’은 다르다. 인간들이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어느 정도 극복한 미래의 이야기다. 유전자 변형을 거치지 않은 여자들을 소수 인종이라고 부르고, 가둔 채 관리한다. 남자들이 그녀들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온다. 처음에는 보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상품 관리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보호소를 탈출한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화장실에서 듣는데 이때 로드킬이란 단어가 나온다. 처음 듣는 단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소수 인종과 고라니를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씁쓸하고 작은 희망을 엿보게 한다.


<라비>는 왜 읽으면서 아프리카 소수민족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선입견이 작용한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 속에서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라비는 마지막 주술사다. 주술사 할머니 손에서 원시성을 유지한 채 살기를 강요받는다. 공용어를 배우지도 못하게 하고, 과거의 기록을 외우게 한다. 문자가 없는 곳에서 구술 전승은 특별한 권력이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 바뀐다. 바뀐 세상을 본 라비가 구습을 좋아할 리 없다. 이 부족에 민속학자 등이 오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구전 전설이 펼쳐진다. 인간의 탐욕과 새로운 나무의 탄생이 엮인다.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는 미세먼지가 심해진 가상의 미래를 다룬다. 시점을 한 사람에게 고정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 명씩 등장시키면서 이 세계를 설명하게 한다. 현실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고, 시점의 변화가 이야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화자의 구분이 명확해 쉽게 읽을 수 있는데 <몽타주>에 오면 나의 오독인지 모르겠지만 슬며시 바뀐다. 긴 독백을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것으로 이해했는데 잘못일까? 도입부의 서늘함이 뒤로 가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져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다. 언제 다시 한달음에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외시경>을 읽으면서 심리 스릴러의 서늘함을 느꼈다. 비어 있는 앞집을 늦은 밤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과 주인공의 과거가 엮이면서 기존에 읽었던 스릴러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 존재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이 주는 서늘함은 그것을 덮기에 충분하다. <공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설이나 동화가 가장 떠올랐다. 바다 괴물의 제물이 될 여자를 구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인간의 탐욕, 집착, 오해 등이 펼쳐지고 마지막 장면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시간의 순환 고리 속에 갇힌 느낌도 든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것은 변질된 제의 방식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덧붙여진 욕망과 형식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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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현 지음 / 마카롱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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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대상 수상작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읽은 수상작 중 개인적으로 최고다. 약간 촌스러운 듯한 제목이지만 이 한 단어가 우리 사회의 가족과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사제 폭탄이 하나 ‘펑’하고 터지면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덮어두고, 묵혀두고, 숨겨둔 감정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고, 사람들은 익명이나 관심이란 가면 뒤에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퍼트린다. 이 소문과 거짓말들도 폭발의 부산물이다. 읽다 보면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들이다. 피해자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들의 시선과 말들은 그 가족을 다시 한번 더 ‘펑’하고 터트린다.


평범한 5인 가족. 그냥 평범하다고 했지만 아빠는 대학교수, 엄마는 약사, 쌍둥이 큰딸은 보조 방송작가, 아들은 스타트업 공동대표이고, 늦둥이 막내는 고등학생으로 강남의 부유한 아파트에 산다. 남들이 보기엔 부러워 보이는 집이지만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면 보통 사람들의 삶보다 결코 낫다고 말하기 힘든 삶들이 드러난다. 비교 당하는 것이 싫어 아등바등 살아온 쌍둥이 남매, 대학생 때 임신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엄마와 그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산 아빠, 친구가 생일날 장난처럼 불러준 노래 ‘왜 태어났니’에 공항장애에 빠진 막내 등의 사연과 감정 등이 폭발한다. 여기에 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음모론 등이 불을 끼얹는다.


배송된 택배 상사를 집안에 들여놓고 막내 승아는 옥상에 올라간다. 잠긴 자물쇠는 유튜브 영상을 따라해 푼다. 그 사이 방송작가 아라는 공모전에 작품을 힘겹게 제출한다. 33살, 독립을 못하고 부모님께 빌붙어 산다. 자신이 한심하다. 그러다 사제폭탄이 터진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문과 집안이 엉망진창이다. 가까운 코엑스에서 인공지능 박람회가 열리면서 테러의 가능성이 주목받는다. 대테러부대와 인근 경찰서가 출동해 가능성을 조사한다. 사건이 생기면 최근에는 어디에나 등장하는 1인 미디어 유튜브도 등장한다. 여과되지 않은 정보들이 흘러 넘치고, 피해자 가족들은 다양한 언론(?)에 의해 재단된다. 폭탄 테러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의심하는 시선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읽으면서 분노한다.


처음에는 방송작가가 의심을 받고, 그 다음은 막내 승아가, 다음은 쌍둥이 현이, 대학교수인 아빠도, 약사인 엄마도 폭탄테러범으로 의심받는다. 경찰의 조사가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향하면서 사람들의 의심도 그들에게 향한다. 작가는 이 다섯 가족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폭발사건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 인터뷰와 경찰의 시선을 넣어 이야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이 인터뷰는 보통 이 가족들의 지인들이 등장하는데 자신의 상황에 따라, 이해에 따라 내용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악의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기에 더 과격하다. 어쩌면 그들도 경찰의 수사 정보 누출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누가, 누구에게, 왜 사제 폭탄을 보냈는지 의문이 생긴다. 범인이 빨리 잡히면 이 가족들이 온갖 음모론에 희생당하는 일이 사라질 텐데 수사가 더디기만 하다. 테러의 가능성이 지워지면서 일선 경찰서가 수사를 하는데 단 두 명이 전담한다. 이 형사들이 이 가족들을 대하는 장면을 보면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 없다. 실제 경찰이 이렇게 접근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말과 시선은 이 가족 중 한 명이 저지른 사건처럼 단정하는 모습이 살짝 보인다. 모든 가능성을 지워가는 것이 경찰의 일이라고 하지만 그 피해가 피해자 가족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경찰과 언론 등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서 왜 이가족은 변호사를 선임해 수많은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확대재생산하는 사람들을 고소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뭐 읽다 보면 이 콩가루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그런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에는 폭탄 테러란 소개에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그 가족들의 비밀이 드러난다고 해도 폭발이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숨에 읽으면서 범인 찾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작가는 부러울 것 없는 듯한 가족의 비밀을 터트리고,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와 경찰의 수사 정보 누출 등을 유기적으로 엮어 이야기의 밀도를 높였다. 부분적으로 가독성이 좋지만 읽으면서 이 가족이 처한 상황과 읽으면서 느낀 감정들 때문에 잠깐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이야기는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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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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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킹의 신작이다. 다른 필명으로 이전에 낸 소설을 최근에 읽었지만 근래 나온 책을 읽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오래 전 킹의 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것도 오래된 일이다. 산 책들이 쌓여만 간다. 그리고 옛날에 읽었던 책들이 재간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약간 안도한다.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킹의 중편집은 <별도 없는 한밤에> 이후 처음이다. 책소개를 보니 닐 게이먼은 “그의 마지막 중편집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 글이 보인다. <피가 흐르는 곳에>가 마지막 중편집이 아니길 바란다.


이번 중편집도 네 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는 빌 호지스 시리즈 속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이다. 이 시리즈도 구해 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 이 중편을 읽으면서 읽어야지 하는 강렬한 압박을 느꼈다. 추리소설가로 첫 발을 내딛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아껴(?)둔다.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의 소장이다. 빌 호지스가 죽은 후 탐정사무소를 인계 받은 것 같다. 이 부분을 알려면 빌 호지스 시리즈를 읽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으로 보려고 하는데 속보가 나온다. 중학교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왠지 모르게 뉴스 특보를 전하는 체트 온도스키란 기자가 눈에 밟힌다. 이 체트가 그녀가 경험한 이방인과 관계된 것 같다고 느낀다.


이방인 부분을 읽으면서 빌 호지스 시리즈가 추리소설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녀가 경험한 이방인은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힘을 키운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체트는 가장 강렬하게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킹 특유의 세밀한 감정 묘사와 더불어 홀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뒤섞이고, 자신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다렸기에 그녀와 같은 의심을 품은 사람을 만난다. 참혹한 사건 현장마다 있었던 그의 존재를 그녀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 있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죽일 때 생기는 문제 등은 서로 엮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홀리는 다르지만 말이다. 가장 긴 분량인데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이 중편만 얇은 책 한 권으로 낼 수 있을 정도인데 이렇게 묶여 나왔다니 기쁘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아이폰1과 관련 있다. 스마트폰으로 처음 세상에 나와 우리의 삶을 바꾼 그 물건 말이다. 주식 투자가 해리건 씨가 글을 잘 읽는 크레이그에게 소설을 읽는 알바를 시킨다. 그리고 매년 복권을 선물로 주는데 이 복권 중 하나가 3천 불 당첨된다. 이 돈으로 그렇게 원했던 아이폰을 사고, 하나 더 사서 해리건 씨에게 준다. 착한 아이다. 신문으로 세상의 정보를 받던 해리건 씨는 이제 손 안의 인터넷으로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이때 흘러나온 몇몇 회사 이름은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다. 해리건 씨가 죽은 후 이 아이폰을 관에 넣는다. 자신이 어렵고 힘들 때 전화해서 해리건 씨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말한 인물이 죽은 채 발견된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전화 한 통, 신세 한탄 한 번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니.


<척의 일생>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3막에서 1막으로. 전 세계가 대규모 지진과 재앙으로 종말을 향해 가는 와중 광고판에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란 광고가 나온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나오는데 척은 누굴까? 3막의 마지막에 척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척의 삶이 하나씩 나온다. 회의 갔다가 버스킹에서 신나는 춤을 추는 척,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은 후 그의 작은 삶과 이후의 삶과 이어지는 추억 등. 마지막 장면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다.


<쥐>는 창작과 생명 거래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편만 여섯 편 발표한 작가가 어느 날 장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 장편을 집필할 장소로 가면서 생긴 일을 재밌게 풀어내었다. 한적한 시골 통나무 집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구성을 받아쓰기와 같은 속도로 집필하는데 심한 독감과 태풍까지 겹치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이때 쥐가 나타나 거래를 제안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때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작품은 완성된다. 소설 창작을 둘러싼 어려움을 악마의 계약과 엮었는데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지, 그 어려움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중편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한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나온다. 그리고 작가 후기에 네 편의 아이디어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라고 느꼈던 것이 거짓이라니 역시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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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틴더 유 트리플 7
정대건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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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나오는 트리플 시리즈 7권이다. 이 시리즈를 이번에 처음 읽었다. 단편소설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시리즈 다른 책들도 같은 구성이다. 많은 분량이 아니라 마음먹고 읽으면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단편들도 상당히 가독성이 좋은데 나의 시선을 끈 이야기는 에세이다. 자신의 삶을 간결하게 요약해서 들려줘서 재미있었다. 이 에세이를 읽다 보면 앞에 나온 단편들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제목을 보고 늘 착각하는 <GV 빌런 고태경>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그가 영화 쪽으로 가게 된 이유를 읽으면서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걸은 그가 살짝 부러웠다.


표제작 <아이 틴더 유>는 ‘I SEOUL U’를 패러디한 것이다. 틴더라는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난 남녀의 가벼운 관계를 다루는데 나에겐 낯선 세계다. 이런 앱에 무지한 나는 검색까지 해서야 실재하는 앱이란 사실을 알았다. 호의 신체 사이즈와 나이가 첫 문장인데 읽을 때 무심코 본 2km가 나중에는 더 늘어난다. 이 늘어난 거리가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한다. 틴더로 만나 하룻밤을 보내지만 연인이 아닌 서로의 스페어가 된 이들이 더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연애에서 상처받고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내게는 낯설게 다가오지만 현실은 이런 만남도 많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 해소하려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것은 그 외로움을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기 전에>는 10년 전 다큐 영화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그 이후 만들려고 한 영화가 무산되면서 삶이 뒤엉킨 승주의 이야기다. 아내와 이혼하고, 10년만에 그 영화를 재상영하는 부산으로 어머니와 내려와 겪게 되는 이야기를 간결하지만 뛰어난 심리 묘사로 풀어낸다.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데 서로가 그 선을 넘지 않기에 연락도 만남도 가능하다. 읽으면서 부산에서 패러글라이딩이 가능하다는 부분에 놀라고, 10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뀌고 성숙해지고 현실적으로 변한 승주의 모습에 살짝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 감정의 일부를 날려버린다.


<멍자국>도 데이트 앱에서 만난 서아와 영선 두 사람의 이야기다. 서아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이 둘은 과거의 기억과 추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남편과 전 여친의 흔적은 이들의 이야기와 만남 속에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둘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들은 과거에 묶여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머뭇거리고, 한 발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 가벼운 1박2일의 여행과 소소한 행동이 잠시 마음의 문을 열지만 그때뿐이다. 거리를 유지했기에 가능했던 만남, 그 거리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두 남녀. 삶은 언제나 기대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들에게 멍은 “아픔에 대한 몸의 기억”일 뿐이다. 과거가 멍자국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흉터만 남는다. 그리고 이 단편 속 영선도 영화판에서 일했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세 남자들이 모두 경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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