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수장룡의 날
이누이 로쿠로 지음, 김윤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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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상현실을 다룬 일본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오카지마 후타리의 <클라인의 항아리>다. 이 소설은 게임을 소재로 다루었는데 이번 소설은 SC인터페이스라는 도구를 통해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와 의사소통을 한다. 두 작품의 출간 시기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보니 과학 발전에 의한 설명이나 해설 등에서 변화가 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영화 <인셉션>을 비교대상으로 삼는다. 아마 이 영화가 최근에 나온 영화 중 가장 가상현실을 잘 다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두 작품의 차이를 하나 꼽는다면 <클라인의 항아리>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5위 수상작이라면 이 소설은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J.D. 샐린저의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에 바치는 오마주란 글이 눈길을 끈다. 이 소설은 <아홉가지 이야기>란 소설집에 실린 단편이다. 아직 읽지 않은 소설이라 이 평가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지만 소설 속에 나온 내용만 본다면 장자의 <호접지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실과 가상의 교차와 뒤틀린 현실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읽는 내내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샐린저의 소설 속 오르트기스 자동권총이 하나의 도구로 등장하여 가상현실 속에 또 다른 가상현실을 만들어낼 때 일상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인기 만화가 가즈 아쓰미는 자살을 시도했던 동생 고이치가 있다. 이 동생에 대한 옛 기억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사는 섬에서 벌어진 고이치와 그녀의 익사할 뻔한 사고가 떠오른다. 떠내려가는 동생의 손을 잡았던 감촉은 아주 생생하다. 이 감각을 가지고 현실로 돌아온다. 그녀가 오랫동안 잡지에 연재했던 만화가 끝날 때가 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식물인간이 된 동생이다. 과학의 발달로 SC인터페이스란 장치를 통해 식물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동생과의 접촉은 늘 자살로 끝나고 만다. 왜 이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마무리될까? 그리고 샐린저의 오르트기스 자동권총은 왜 등장한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어릴 때 기억과 혼수상태 동생과의 의사소통과 인기 만화가로서의 삶이 나란히 진행된다. 각각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일상들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어디까지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아쓰미의 일상에 끼어드는 환상은 혹시 SC인터페이스의 부작용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작가는 섬세하고 교묘한 장치를 통해 단서를 앞에 심어놓았다. 그것을 알아챈다고 해도 쉽게 단정지을 수 없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을 통해 모든 상황을 뒤집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아! 하고 앞에 놓아둔 단서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깨어난다.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로 볼 수 없는 구성이다. 하지만 늘 일본 미스터리의 다양한 시도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공정한가 하는 물음에 이 소설은 다른 서술트릭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또 스케일을 확대하지 않고 축소하면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결국 인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연과 관계들이 숨겨진 사실과 맞물려 힘을 발휘할 때 그 반전은 어쩌면 미스터리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어쩔 수 없이 <클라인의 항아리>를 연상시킨다. 가상현실에서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아쉽다. 너무 그 구성 안에 안주하면서 억지 혼란을 심어주려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을 자주 본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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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위반 - 나쁜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묻는다
박용현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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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기자는 2008년 봄부터 2011년 봄까지 <한겨레21> 편집장으로 있었다. 이때 ‘만리재에서 ’란 칼럼에 글을 썼다. 이 글들을 모은 것이 이 책이다. 얼마 전 한겨레신문사 출신 손석춘 씨의 글 모음집 <새로운 바보를 기다리며>를 읽었었다. 우연인지 같은 신문사 출신의 칼럼이나 논설 등을 연속으로 읽고 있다. 왠지 한겨레와 나의 코드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그런 것일까? 손석춘 씨는 예전부터 잘 알던 이름이다. 반면에 박용현 기자는 낯설다. 원래 신문 논설이나 칼럼을 잘 읽지 않는다.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이 한 권으로 책으로 박용현이란 이름을 꼭 기억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표지의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래은행 옆 화장실에 철수와 영희란 이름으로 된 비슷한 그림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살짝 저자의 약력을 본다. 그런데 별다른 내용이 없다. 특이하다면 간결한 것과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 정도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그의 학력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법에 대한 해석과 인용과 적용 등이 이전 어떤 칼럼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 하나를 만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그의 칼럼들을 열심히 읽었다.

모두 여섯 장으로 칼럼을 나눴다. 124편의 칼럼을 민주주의, 언론, 어린이, 인권, 정의 등을 주제로 분류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그의 전공 분야를 살린 글들이다. 일 년간 미국 로스쿨 유학 과정에서 경험한 것과 법철학을 인용해 풀어낸 해설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번쯤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것들이다. 그 바탕에 깔린 민주주의와 법치를 생각할 때 더욱더. 그래서인지 단숨에 읽기는 조금 버겁다. 간결하고 좋은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나 자신의 문제들도.

그의 논설과 해설이 탁월한 법 지식을 통해 빛을 발하지만 현실에서 그 빛은 가두어져 있다. 대부분의 신문 독자들이 조,중,동,매만 읽고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아주 아주 가끔 이 신문들의 논설을 읽을 때면 교묘한 말장난을 보게 된다. 곡학아세라고 하나. 아마 보수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들도 나와 비슷한 표현을 할지 모르겠다. 이전에 독실한 한나라당 지지자 친구와 그 당시 유행하던 책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고, <김광수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읽은 한나라당 지지 상사의 말에서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그들과 나의 사이에 너무나도 큰 틈이 벌어져 있구나 하고.

MB가 집권한 후의 칼럼이다 보니 보수언론이 눈을 감거나 무시하거나 왜곡한 내용에 대한 수많은 의문과 반박이 담겨 있다. 거기에 그의 생활과 함께 풀어져 나오는 글들은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버스나 지하철 경로석 문제나 통화예절 등. 그리고 제대로 그 의미를 몰랐거나 묻혔던 판결문 등이 그의 글로 되살아난다. 어느 글에서는 나와 주변의 게으름이 만들어낸 사회의 어둠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당장 움직이지는 못한다고 해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것들이다. 

최근 나꼼수를 통해 또 다른 정치비판의 눈을 본다. 코믹하지만 신랄하고 나름 잘 정리된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잊고 있던 잊고자 했던 정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멋진 칼럼들에서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글들이 수없이 나오지만 나꼼수의 영향인지 눈길을 끄는 문장이 있다. “악마는 늘 디테일에 숨어 있으니까요.”(203쪽) 악마 기자 주기자가 연상된다. 물론 이 인용된 의미는 다르다. 하지만 조,중,동 이 지금까지 전체 맥락이 아닌 한 문장으로 전체를 왜곡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이때의 디테일은 주기자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의 디테일은 배경과 사실에 대한 디테일이다. 한 문장이 이런 연상 작용을 불러왔다는 것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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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1.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하나의 사건을 치밀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려내었고, 이전 한국소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내용과 전개였다. 읽는 내내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읽고 난 후 느껴지는 묵직하고 강한 울림도 일품이었다. 


 

2.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이번 평가단 도서들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 문학도 많았고, 읽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뒤로 미루어두었던 작가의 작품도 읽게 되어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많아 10기를 신청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한가해지면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늘 좋은 책, 재미있는 책 보내주셔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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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3 아서 왕 연대기 3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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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벨이 들려주는 아서의 장대한 이야기가 끝났다. 아서 왕 연대기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제목도 그 유명한 검 엑스칼리버다. 신화와 전설 속에 꾸며진 그가 데르벨의 손에 의해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그에 대한 전설 대부분이 기독교에 의해 윤색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처음부터 그를 왕으로 등장시키지 않았고, 과장되게 표현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정도인데 이 때문에 더 그에게 빠져든다. 물론 여기에는 데르벨의 모험과 활약이 중심에 있다.

시리즈 마지막이다 보니 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1권부터 궁금했던 의문점이 하나씩 풀리기도 한다. 데르벨의 왼팔이 어떻게 잘렸는지, 그가 왜 생쥐대마왕으로 불리는 산쉼 대주교 밑으로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란슬롯의 행보는 어떻게 되었나 등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거의 끝부분에 나오는데 안타까움과 강렬한 사랑이 느껴진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황당한 전개일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현재의 우리와 분명히 다르다. 바로 그 부분이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중반 이후 빨라지는 전개와 이전 시리즈와는 다른 전투 장면의 묘사는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마치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이 시리즈를 보면서 아쉬웠던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브리튼 족과 색슨 족에 대한 지식과 이해 부족이다. 이 두 부족의 대립이 현대에 어떻게 평가되는지, 어떤 역사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모른다고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왜 이 두 부족이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앵글로색슨족이란 단어가 이런 호기심을 불러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색슨족이 등장하여 아직도 대립중임을 알려줘 더욱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나중에 이 부분은 따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시작은 멀린이 브리튼의 신들을 부르기 위해 대마법을 전개하려는 대목부터다. 전편에서 브리튼의 보물을 모아 신들을 부르겠다는 그의 의도는 성공한다. 아서에게 엑스칼리버까지 빌려 그는 소환의식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의식은 중간에 중단된다. 그것은 아서의 아들 귀드레를 제물로 바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둠노니아 왕자의 피가 필요한데 실질적인 지배자가 아서이다 보니 그의 아들이 제몰로 선택된 것이다. 신들이 강림하면 지상천국이 펼쳐지고 제물은 솥에서 부활한다고 말한다. 알 수 없는 미래 일에 자기 자식을 죽일 정도로 이성이 없는 아서가 아니니 이 행동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물론 이 때문에 니무에의 강력한 저주를 받지만.

이런 소환 의식 도중에 데르벨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둠노니아를 위해 사자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인 색슨 족 왕 앨레를 찾아간다. 앨러와 연대해서 반 아서 진행을 대항하려고 했던 아서의 시도도 역시 실패한다. 이후 펼쳐지는 아서 대 색슨족 및 반 아서 진영의 전투는 힘과 지혜와 용기의 대결로 이어진다. 이 대전투는 실제 역사 속에도 남아 있는데 작가의 손에 의해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하게 부활한다.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는 데르벨과 전사들의 모습은 가슴 한켠에 진한 감동을 준다. 이것은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만든다.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설정 중 하나가 바로 서약이다. 아서가 왕이 되지 않는 것도 바로 서약 때문이고, 데르벨이 이리저리 묶인 것도 서약 때문이다. 명예와 서약은 지키는 자에게는 그 의미가 크지만 이를 우습게 여기는 자에게는 한낱 말일 뿐이다. 이 소설 속 두 영웅 아서와 데르벨은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한다. 중간에 데르벨이 아서가 서약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아쉬워하지만 그 또한 니무에의 서약에 묶여 있다. 이 서약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던 아서 왕의 전설 대신 군주 아서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통해 아서의 전설은 각색되고 와전된다. 여기에 란슬롯도 한몫한다. 그가 한 것이 바로 여론 조작과 역사 왜곡인데 왠지 우리 현실과 겹쳐보이는 것은 왜일까? 

대단원의 장인만큼 변함없이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전쟁 중에 죽는다. 물론 그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과 욕망도 수없이 많다. 멋진 인물들이 수없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배신의 아이콘 역할을 하는 산쉼 주교다. 그는 예상 외의 모습을 보여주며 멋진 조연 역할을 한다. 음모의 중심에서 혹은 변방에서 끝없이 움직이는데 은근한 매력을 발휘한다. 우직하고 충직하며 강렬한 인물 속에서 다른 매력을 품었다고 해야 하나? 밉상에 짜증나는 캐릭터지만 은근히 가슴 한 곳에 인상을 심어주는 인물이다. 그 외에도 이 소설은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비록 끝까지 살아남지는 못하지만. 이 시리즈는 역사와 신화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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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손
존 어빙 지음, 이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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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어빙의 소설을 처음 읽는다. 집에 있는 그의 다른 소설을 생각하면 의외다. 다른 책 본다고 바빠서 그런 것도 있지만 왠지 쉽게 읽히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더 강했다. 가끔 이 작가의 소설 평을 읽으면 재미있다는 글이 올라오는데 그래도 늘 두툼한 분량이 쉽게 손을 뻗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읽은 이 책은 왜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는지 살짝 맛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구성이나 전개를 보면서 한때 너무나도 열중했던 폴 오스터가 떠올랐다. 이 둘의 연관성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따진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잘 생겼지만 결코 모험을 하지 않고 오는 여자를 절대 막지 않는 매력적인 뉴욕 방송기자 패트릭 월링퍼드는 인도에서 한 서커스 취재 중 사자에게 왼손을 잃게 된다. 이 영상이 전세계를 떠돌면서 ' 사자사나이'나 ‘재앙맨’으로 불린다. 그 전에도 그의 매력에 빠진 수많은 여자들 때문에 방종한 생활을 했었다. 모험심이 없어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새로운 손을 붙이는 수술로 이어지게 되고, 그 손 주인의 아내가 바라서 임신시키고 그 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약간 황당한 설정과 전개인 것 같은데 사실 이 설정이 그렇게 강한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패트릭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사연이 세밀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 사연과 감정을 하나씩 설명하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구성이 어떻게 보면 복잡할 수도 있지만 삶의 미묘함과 기묘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전혀 관계없던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고, 이전 관계는 또 어떻게 추억되는지 보여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삶 속의 만남과 헤어짐과 그리움과 아픔과 사랑 등이 하나씩 풀려나온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주인공의 성적 활약만 다루었다면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남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패트릭의 직업을 통해 현재 미디어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한다. 자극적인 정보와 앞뒤 연관성 없는 뉴스만 방송하는 것이다. ‘맥락의 부재’인데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상당히 양호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고? 그것은 허위나 과장 홍보 등을 아무 검증 없이 내보내고 아주 가끔은 혹은 자주 왜곡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언론이 사실만 보고해도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정도로 패트릭이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뭐 소설만 봐서는 이 정도가 아니겠지만.

‘맥락의 부재’가 패트릭을 직업적으로 힘들게 한다면 네 번째 손의 주인인 도리스는 감정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그 감정은 사랑이다. 그녀는 바로 패트릭의 왼손에 이식된 기증자의 아내다. 또 그와 섹스를 해서 작은 오토를 낳은 어머니기도 하다. 제목의 의미를 거의 끝부분에 말해줄 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이 겪는 감정의 흐름들이 가슴 한 곳에 콕 박힌다. 물론 중간중간 문화 차이인지 아니면 과장된 것인지 잘 모를 상황들이 등장한다. 아이에 집착하는 여자들, 무분별한 섹스 등등. 하지만 이런 설정이나 장면이 세상에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책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코믹하고 황당한 경우가 많은 요즘에 말이다. 저자는 이 소설의 설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만약에’라는 가정 속에서 썼다고 한다. 앞으로 이 작가의 더 많은 소설을 읽는다면 호불호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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