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가족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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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에 나왔듯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가족이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이나 한국 소설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이 다르다는 말이 가족 사이에 애정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의미다. 세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 속에 ‘가족이라는 짐’이 들어가 있는 것은 가족의 부정적인 한 단면을 잘 드러내준다. 마지막 장이 제목인 ‘개인주의 가족’인데 현대의 핵가족 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일곱 살 아이가 시를 한 편 썼다.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았다.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가족들은 그에게서 작가를 보고, 소설 등을 쓰길 바란다. 아이의 소질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부모의 선택은 기숙학교다. 아홉 살에 신경쇠약에 걸렸고, 열 살에는 집을 떠나야했다. 이것이 주인공 에두아르의 유년기 이야기다. 소년은 어른이 되기 전부터 어른들이 바라는 삶을 강요받았다. 이것보다 더한 현실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낯설지는 않다. 소년의 세계는 축소되고, 대입시험은 겨우 통과한다. 아직도 부모는 소설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않았다. 여자 친구의 지원 아래 첫 소설을 썼지만 출간되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했지만 그녀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해야 하나. 아내와 가족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생계는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카피라이터다. 기존 광고를 자신의 감각적 언어로 표현해서 프로필을 돌린다. 브뤼셀의 광고 회사에 취직한다. 언어유희에 재능이 있던 그는 성공한다. 이 성공이 삶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만들지만 내면은 점점 피폐해진다. 아내와 불화가 생기고, 직장 동료와 섹스를 한다. 성공적인 광고인이 되지만 아내와 딸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간다.

 

외국의 경력이 그를 바로 채용해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실력이 있다면 언제쯤 빛을 발한다. 그는 광고를 성공시키고, 많은 스카우트 요청을 받는다. 연봉도 올라간다. 백만 프랑이나 된다. 이 돈에 가장 신난 것은 아내 모니크다.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들을 마구 산다. 멋진 집도 사고 싶어 한다. 이런 일이 있기 전 정신병원에 있던 그의 동생이 추락사한다. 이 사건은 한 번 더 그의 내면을 뒤흔든다. 여동생은 임신한 것을 알린 날 남친에게 버림을 받았다. 홀로 애를 낳는다. 엄마가 돌본다. 하지만 여동생의 삶은 점점 메말라간다. 자신의 삶이 사라졌다. 읽으면서 90년대 프랑스가 이랬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아빠는 덤보로 불린다. 우울증을 앓았고, 나중에는 정신을 놓았다. 에두아르 가족은 산산조각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모니크와 딸들과도 헤어졌다. 그가 첫 직장 여성을 사랑했지만 모니크를 사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니크도 마찬가지인 듯하지만 이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고액 연봉자의 아내가 되어 부유한 삶을 누리지만 남편 복은 그렇게 없다. 대신 멋진 전 남친이 있다. 불안하고 겉도는 가족이다. 그가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혹시 딸들도 실제 그의 딸들이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다. 작가는 이에 대한 어떤 단서로 보여주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에이즈 음성 판정을 받은 장면이다. 그 시절에 에이즈 양성 판정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한 여성들에게 병을 전염시켰을 수도 있다. 불안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와중에 눈물이 자연스레 흐른다. 당연하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도 지켰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에 호텔에서 함께 누워 진한 키스만 하는 장면이 있다. 삶의 찌들고, 그 무게에 눌린 사람들이 깊은 위로를 나눈 순간이다. 이것은 에두아르가 수많은 여성과 섹스를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공감, 위로, 연대, 사랑 등이 필요하다. 조각난 가족 속에서도 그가 발견한 것은 사랑이다. 유별나고 특이한 가족들을 다루지 않지만 가족의 다양한 모습을 본다. 에두아르가 느꼈을 깊은 공허감이 가슴 한 곳으로 살짝 스며든다. 희망과 사랑이 이를 물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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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툽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황중환 그림 / 자음과모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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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가 1993년 6월 19일부터 1994년 6월 11일까지 1년 동안 브라질 신문 <라 폴라 지 상파울루>에 연재한 글들 중에서 선별해, 황중환의 일러스트를 추가하여 묶은 것이다. 책에 담긴 내용은 11년 동안 코엘료의 스승이 코엘료에게 주신 가르침과 친구들이나 살면서 딱 한 번 만났지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제목에 나오는 <마크툽 Maktūb>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으로, 신의 섭리를 은유한다. 어떻게 보면 결정론적 이야기다. 짧은 우화로 먼저 다가왔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만 나오지는 않는다.

 

<연금술사>를 그렇게 재밌게도 감동적으로 읽지 않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코엘료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으로 선택했는데 우화집이다. 아주 짧은 글로 179편이 실려 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글도 많고, 흥미롭고 재밌는 이야기도 가끔 나온다. 짧은 이야기이다 보니 매일 적은 시간을 투자해도 며칠이면 다 읽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읽었다. 빠르고 편하게. 감동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바탕에 깔린 기독교 신앙을 잠깐 무시하고 본다고 해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는 상당히 많다. 바로 이 부분이 이야기들을 낯설게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이 책에 눈길을 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황중환의 그림이다. 모든 이야기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간략한 그림들이 이야기를 더 쉽게 이해하게 만든다. 덕분에 이 책은 한국에만 있는 책이 되었다. 그의 후기를 읽으면서 이 책이 동서양의 고전에서 발견한 이야기라는 부분을 읽었다. 내가 낯익게 느낀 이유일 것이다.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감탄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고전을 완독하고 싶다. 그것이 더 깊은 곳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황중환의 그림이 간략하지만 이야기를 잘 표현했듯이 짧은 이야기들이 삶의 지혜의 한 단면들을 잘 보여줬다. 가끔은 이렇게 짧은 이야기들이 지친 머리를 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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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 먹고 마시고 걷는 36일간의 자유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 오브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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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 낯선 듯 낯익은 이름이다. 카미노가 낯설다면 산티아고는 낯익다.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때문에 그렇다. 몇 년 전부터 나에게 계속 다가온 이름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이 길을 다녀온 수많은 사람들의 감탄과 이 길에서 영감을 얻어 제주도에 만든 올레길 등이 연속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룬 책은 처음이다. 이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이 길에 대한 무지로 그냥 지나갔다. 결국 만날 것은 만난다는 말처럼 36일 동안 이 길을 먹고 마시고 걸은 기록을 만났다.

 

저자는 총 세 번 이 길을 걸었다. 300km, 500km, 800km. 이렇게 세 번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에 있는 순례지의 기점인 생장피드포르 거리부터 800km 가까이 되는 길 전체를 35일 동안 걸은 기록이다. 단순히 나누면 하루에 약23km를 걸어야 한다. 하루라면 할 수 있다. 이렇게 35일을 걷는다면 어떨까? 아니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라면? 이런 숫자를 머릿속에 담아 두면 이 순례길이 얼마나 긴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짧은 휴가를 낸 사람들은 100km씩 끊어서 걷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렇게 긴 길을 사람들은 걷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보여준다.

 

많은 여행서를 읽었다. 하지만 도보로만 이렇게 긴 여행을 한 경우는 처음이다. 물론 찾아보면 이보다 더 긴 거리를 긴 시간 동안 걷은 사람들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들은 이 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고, 걸고 있고, 걸을 길은 아닐 것이다. 이 점이 나를 유혹했다. 언젠가 제주 올레길이 유행했을 때 나도 저곳에 가서 천천히 걸어봐야지 생각했던 것처럼. 물론 이 생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를 생각할 때면 늘 올레길이 떠오른다. 아마도 스페인 여행을 말하다보면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오를 것 같다. 실제는 갈 가능성이 낮지만. 평일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 혼자라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떠올랐다.

 

35일 동안 걸은 기록이지만 매일 매일 기록한 것은 아니다. 실제 기록된 것은 19일이다. 저자에게 큰 의미가 없었거나 편집에 의해 삭제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재미없다고 해도 매일 기록이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공황장애부터 시작하여 첫 출발지점에 오기까지 과정까지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한국 여자의 해프닝도 하나 넣어서. 그리고 생장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다. 이미 다른 곳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고, 예상한 이야기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자세하게 설명한 부분과 여행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기 조용히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책의 구성도 재미있다. 1장은 앞에서 이야기한 자신의 일정을 말한다. 2장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다룬다. 기초 지식부터 준비물을 비롯한 맛 기행까지 다양하다. 순례길을 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면 2장이 더 흥미로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에 안 것이지만 순례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대중적인 길을 그녀는 걸은 것이다. 가장 대중적이라고 해도 800km다.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고, 절박했는지 알 수 있다. 여행서 역할과 함께 안내서 역할도 같이 하는 책이다. 안내서의 경우 관심 분야가 아니면 집중력이 깨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 책도 그런 부분이 있다. 그리고 저자가 한국 출판을 염두에 두었다고 했는데 실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출판사에서 편집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 혹은 가까운 시간 안에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경우는 거의 없다. 우선순위를 두는 곳도 있고, 나의 환경이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알 수 없다. 언제 갑자기 혹은 무슨 일로 인해 이곳의 긴 도보여행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때까지 이 순례길은 나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면 깨어나 나로 하여금 그 길을 걷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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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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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본 작가 중 한 명이다. 충격적인 데뷔작 <고백> 이후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데뷔작을 먼저 읽은 독자들에게 최소한 그 정도의 소설이 나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작가가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이 나오면 늘 <고백>과 비교하는 문구가 나온다. 솔직히 말해 이 부분은 지겹다. 그 정도의 작품을 또 써준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최소한 지금 정도의 작품만 내어주어도 다른 유명 일본 작가의 작품 수준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을 끌고 나가는 인물은 후카세다. 커피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인물이다. 대인관계는 좋은 편이 아니다. 학창시절 짧은 왕따도 경험했고, 비교적 공부를 잘해 살던 동네를 떠나 도쿄의 좋은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학교에 비해 취직한 곳은 작은 회사다. 학벌만 놓고 보면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격이 문제다. 명확한 목표 의식도 없다. 좋은 회사의 1차는 통과하지만 그 다음 단계를 넘어가지 못한다. 친한 친구 한 명조차 없었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히로사와 요시키다.

 

첫 문장은 자극적이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단순히 이 문장만 놓고 보면 후카세가 대단히 계산적이고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과거를 숨긴 살인자가 연상된다. 하지만 실제 사연을 듣게 되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가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죽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장은 후카세의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이 편지가 몰고 올 거대한 폭풍의 서막을 알린다. 그 편지는 여자 친구 미호코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그가 처음 사귄 여자 친구다. 다른 장에서 이런 편지가 후카세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는 정보가 전해진다.

 

2장은 3년 전 과거로 돌아가 왜 그가 살인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 사실을 말한다. 네 명의 친구가 놀러가서 사고가 난 것이다. 이 사고는 친구들의 양보와 배려가 있었다면 없었을 것이다. 잘 먹지 못하는 술은 먹고 난 후 늦게 도착한 친구를 데리러 가면서 생긴 사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낸다. 후카세가 여자 친구 미호코에게 실제 사건 그대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현실에서는 당시 그곳에 있던 네 명의 동창생들이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바로 음주다. 술 다음에 나올 다른 이야기와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해서 합심해서 사실을 숨겼다. 그런데 이들에게 살인자라는 메시지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온 것이다.

 

그들이 살인자인가 하는 도덕적 문제는 놓아두자. 이제 이야기는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 메시지가 당사자들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무라이가 후카세에게 연락을 할 정도다.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다니하라는 누군가에게 밀려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다. 아사미는 전단이 학교차를 뒤덮었다. 그냥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수 없는 일이다. 이 친구들이 모여 누가 했을까 고민하지만 답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가장 유력한 히로사와의 부모님도 그럴 분이 아니다. 이때 후카세가 나서 조사하겠다고 말한다. 책 후반부는 후카세가 히로사와의 과거를 뒤쫓고 파헤치는 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후카세가 생각조차 못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극적인 부분은 없지만 무난하게 읽힌다. 개성이 약한 남자 주인공을 내세워 한 템포 느린 속도로 사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중요한 도구로 커피를 사용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은 갈증을 불러온 것은 커피다. 작가가 표현한 맛의 일부를 맛본 적 있고, 그렇게 맛있는 커피라면 나도 마시고 싶기 때문이다. 개성 없는 인물에게 강한 인상을 부여하는 역할도 커피가 한다.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겨보지 못한 후카세에게 여자 친구를 만들어준 것도 커피다.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라 여행을 갈 때면 커피를 꼭 챙겨간다. 사건이 있던 날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조금 심심한 전개다. 4장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누가 메시지를 보냈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범인이 나오길 바랐는데 그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반전은 아니다. 마지막 문장에 가장 압축적이고 충격적으로 드러난다. 이 문장을 읽고 잠시 숨을 골랐다. 아주 멋진 여운과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가독성 있지만 조금 밋밋했던 이야기를 단숨에 뒤집어버렸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일순간 <고백>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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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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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대역 문예 계간지 <아시아>에 실린 단편 중 열두 편을 선정해서 한 권으로 묶었다. 열두 편이면 열두 나라일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실제는 아홉 나라다. 가장 많은 나라는 베트남이다. 조금 의외다. 세 편이나 실렸다니. 이것이 또 아쉬움이기도 하다.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 작품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의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반가웠다.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라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집은 간단하지만 충실하다. 먼저 작가에 대한 소개를 하고, 그 밑에 번역자의 정보를 넣는다. 그리고 각 단편이 원래 어떤 언어로 쓰여져 있었는지 알려준다. 영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작품도 있다. 이런 정보는 외국 문학을 읽을 때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워낙 한국 번역에서 중역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전보다 일본어 번역본을 재번역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중역하면서 생긴 오류나 어투의 차이 등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기 때문이다.

 

목차를 보면서 낯익은 작가는 딱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바오 닌이고, 다른 한 명은 야샤르 케말이다. 케말의 작품은 읽은 적이 있지만 바오 닌은 처음이다. 이전에 바오 닌의 대표작인 <전쟁의 슬픔>에 대한 극찬을 읽고 책을 사 놓았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을 묵혀 두었는데 단편으로 먼저 만났다. 그 작품은 바로 표제작 <물결의 비밀>이다. 아주 짧은 단편인데 반전과 강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마지막을 읽으면서 다시 앞장을 펼치고 앞에서 놓친 것을 찾았을 때 그 여운은 정말 멋있었다. 케말의 <하얀 바지>는 이전에 읽은 작품과 다른 분위기였다. 한 소년의 열망이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안타깝고 아쉬웠다.

 

처음 읽은 필리핀 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불 위를 걷다>는 깔끔한 전개에 비해 이야기는 조금 으스스하다. 필리핀의 거대한 빈부 격차와 시대의 아픔이 그 나라 역사에 무지한 나도 공감하게 된다. <꽃피는 계절>은 대만 작가 리앙의 작품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얻기 위해 가는 과정에서 한 소녀가 멋대로 상상하는 내용이 섬뜩하면서도 유쾌하다. 그 시절 대만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상상을 한 것인 궁금하다. 아니면 무슨 책이나 영화를 보았는지. 베트남 남 까오의 <지 패오>는 한국 근대의 일상 중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 패오의 행동에 공감할 수 없지만 그 상황들은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처음 읽은 태국 찻 껍찟띠의 <발로 하는 얼굴마사지>는 다 읽고 난 후 현재 한국의 정치인들이 떠올랐다. 혹시 그들이 태국에 단체로 마사지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중국 츠쯔젠의 <돼지기름 한 항아리>는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마무리였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아이 셋을 데리고 가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투박한 이야기 전개는 또 다른 매력이다. 베트남 레 민 쿠에의 <골목 풍경>은 해학적이지만 그 이면에 깔린 의도는 씁쓸한 현실이다. 인도 마하스웨타 데비의 <곡쟁이>는 인도 하층민의 삶과 상층민들의 거대한 허세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하층민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세밀하게 그려내지 않는 것은 일상이기에 표현할 필요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다 가쓰에의 <모래는 모래가 아니고>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해서 한 개인의 기억을 다룬다. 잊고자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긍정하는 마지막은 평범하지만 좋다. 인도 사다트 하산 만토의 <모젤>은 사랑에 빠진 남자 이야기다. 자신의 종교가 걸림돌이 되지만 모젤은 쉬운 여자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한 장면을 삽입한 마지막 장면은 의외다. 싱가포르 고팔 바라담이 쓴 <궁극적 상품>은 읽으면서 싱가포르의 정치적 현실을 풍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몇 가지 설정들이 강한 독재국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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