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지옥계곡>이 기대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면 이 책은 기대를 넘어섰다. 전체적인 짜임새에서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지만 정말 가독성은 뛰어나다. 등장인물들 한 명 한 명에게 신경을 쓰고, 사연을 만들어서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스릴러 방식으로 진행하지만 미스터리를 같이 넣어서 마지막 반전에 한 방 먹었다. 솔직히 말해 반전 중 하나는 예상한 것이지만 너무 쉽게 긴장을 풀면서 놓쳤다. 작가의 능수능란한 작업에 속은 것이다. 그리고 찜찜한 몇 가지 문제를 남겨 놓았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잘 모르겠다.

 

과거 속에서 한 장면을 묘사한다. 한 여자를 익사시키는 장면이다. 여자가 누군지, 살인자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 도입부의 과거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이 살인이 이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남는 것은 왜? 라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내가 불만을 가지는 대목들은 이런 왜?에 대한 답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반전 같은 장면들은 가장 현실적인 물음일 수 있다. 현실의 모든 상황이 언제나 그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니까.

 

물의 정령이라고 말하는 인물이 있다. 그가 스스로 말하는 장면들을 보면 연쇄살인범이다. 그가 내뱉는 독백 속에는 왜 그가 에릭 슈티플러 형사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그 이유가 나올 즈음이면 소설의 끝부분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동생 이름은 시리다. 그 아이는 수영을 아주 잘 했다. 돌고래처럼 호수를 돌아다닌다. 점점 자라면서 더 빨라져 살인자보다 더 빨라진다. 그래도 오빠가 더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잠수다. 더 깊이 더 오래 물속에 머물 수 있다. 이 능력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익사시키는데 사용된다. 개인적으로 익사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감정이입되었다. 무서운 장면이다.

 

슈티플러에게 전화가 온다. 여자가 죽을 것이란 암시를 주는 전화다.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경찰 경력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아내의 불행했던 과거가 가정의 불화로 이어졌고 결국 이혼했다. 하지만 그가 세운 경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 덕분에 호수에서 발견된 여자 시체의 몸에 새겨진 글에도 불구하고 담당이 된다. 처음에는 그가 이 불행한 과거을 벗어던지고 범인을 열심히 쫓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추측은 그가 내미는 변명들에 의해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신참 경찰인 마누엘라 슈페를링이 차지했다.

 

마누엘라는 이 소설만 놓고 보면 아주 뛰어난 경찰이다. 아주 탁월한 추리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수다스럽다. 서장이 그녀를 슈티플러와 한 팀이 되게 했지만 슈티플러는 그녀를 곁에 둘 마음이 없다. 그녀에게 반경 60킬로미터 안의 호수물을 조사하라고 시키고, 그녀가 조사한 자료를 무시한다. 불만이 많지만 그녀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증거물을 수집한다. 이때만 해도 등장인물 중 그냥 그런 한 명이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그녀가 전면에 나오기 시작한다. 그녀의 추리와 열정이 새로운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택시 기사인 프랑크도 뒤로 가면서 비중이 높아진다. 처음에는 그냥 일반적인 택시기사였다. 이전에 창녀였던 라비니아를 우연히 태워준 많은 기사들 중 한 명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미행당하는 불안감을 느끼고, 겁을 먹으면서 둘이 만나게 된다. 승객과 기사로서 말이다. 이런 그녀를 프랑크가 도와준다. 그리고 프랑크는 그녀라면 자신의 문제를 포용하고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보통이라면 잠시 스쳐지나갈 인연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인연을 이어가게 한다. 어느 순간 둘은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프랑크는 기면증을, 라비니아는 창녀와 누군가를 죽일 뻔한 과거를 말한다.

 

라비니아의 시점은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불안감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불안감을 느끼는데 가장 크게 느끼는 인물이 라비니아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스토커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과거가 이것을 단절시킨다. 희생자들이 늘어날 때마다 혹시 그녀가 아닐까 하고 긴장한다. 프랑크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이 긴장감은 더 커진다. 그녀가 집에 없다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지만 오히려 스토커로 오해받는다. 자주 보는 설정이자 장면이다. 자신의 바라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현실의 벽은 낮지 않다. 라비니아의 실종을 조사하는 인물이 프랑크인 것은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다.

 

살인범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의 주요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온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불안감에 휩싸여 있거나 살의로 충만해 있거나 자신의 병 등으로 인한 부채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이 중심에 있다. 다른 소설이라면 언론을 집어넣어 사회문제로 만들겠지만 왠지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경찰 내부의 부패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빠져 있다. 인물과 사건과 살인범의 사연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 덕분에 가독성은 높지만 앞에서 말한 찜찜함이 남는다. 혹시 연작 중 한 권이라면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미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많이 본 설정이니까. 이 작품으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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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2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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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수의사 헤리엇의 두 번째 이야기다. 이번에는 헬렌과의 결혼 후부터 전쟁 때문에 소집되어 군대에 가기 전까지 이야기를 다룬다. 32개의 에피소드에는 그 시대와 그 지역의 삶을 적절하게 녹아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음주운전으로 큰 지탄을 받을 행동을 그와 동료들은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몇 개의 에피소드는 가슴 아프게 만들고, 몇 개의 에피소드는 크게 웃게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주류는 그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수의사 활동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동물들의 이야기다.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조금 익숙해진 구성은 다음 이야기의 결말이 어떨 것이란 짐작을 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마지막 한 문장에서 뭐지? 하고 놀라거나 웃게 만드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이 능력이 개성 강한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엮이면서 시너지 효과를 나타낸다. 그리고 전편에 나온 인물들이 또 다른 모습 혹은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갑고 즐겁게 만든다. 트리스탄의 분량이 조금 적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에피소드들을 읽다보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일처럼 다가온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인데 고대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수의사와 지역민이 가지는 유대감과 따듯한 감정 등은 점점 삭막해지는 현재를 생각하면 더욱 그리운 모습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로 의료행위를 하는 모습에서는 가끔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훈훈한 이야기가 떠올라 반가웠다. 시그프리드 원장과의 에피소드는 이런 감정을 더욱 잘 느끼게 한다. 물론 악덕 거래선에 엄청난 비용을 청구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이 수의사들은 언제나 정신이 없어 뭔가를 놓아둔다. 거금 10파운드를 둘러싼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어떤 결과가 되었을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혼자 즐거워했다.

 

이번 책에서 가장 재밌는 인물을 꼽으라고 단연코 그랜빌 베넷이다. 작은 동물 전문 수의사로 탁월한 수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 헤리엇이 치료 불가능한 일(대부분 외과적 수술)이 있으면 베넷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 베넷을 만날 때마다 헤리엇은 취하고 과식한다. 덩치가 좋고 엄청나게 먹는 베넷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여기에 베넷의 아름다운 아내를 만날 때는 항상 취해 있거나 속이 엉망이다. 그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수를 쓰지만 항상 베넷이 한수 위다. 폭설이 있던 날의 에피소드는 웃기지만 섬뜩한 느낌을 동시에 준다.

 

먼 곳에서 일상을 보면 매번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헤리엇의 수의사 활동이 그렇다. 늘 같은 말과 소와 양들을 돌보지만 변수는 항상 존재한다. 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조치가 늦어 어렵게 진행되거나 어렵겠다고 생각한 것이 갑자기 풀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항상 대기 상태로 살면서 새벽이라도 전화가 오면 나가는 그지만 그의 몸이나 정신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일반적인 법칙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행동은 늘 변함이 없다.

 

헤리엇이 활약하던 당시의 의학 수준은 지금과 많이 다르다. 그중에서 가장 큰 차이는 외과 수술 도구의 발전과 페니실린의 등장이다. 한 에피소드에서 제대로 된 약만 있었더라도 농장을 계속 운영할 수 있었던 천생 농부인 공장 노동자의 사연이 나온다. 이런 아픈 과거는 아마도 헤리엇의 수의사 생활 내내 계속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물들의 놀라운 자연치유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우리 삶에서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다. 아! 한 가지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바로 그와 함께 다니는 반려견 샘에 대한 이야기가 적다는 것이다. 아마 개 이야기 편이 나오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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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시선 401
김용택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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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온전하게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산문집도 읽었고, 그가 뽑은 시선집도 읽었지만 시집은 처음이다. 오히려 그의 시를 많이 만난 것은 누군가의 시선집이었다. 상당히 쉬운 시는 읽기 편했다. 시를 어렵게 생각한 사람에게 이런 것도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생각은 이 시집을 읽으면서도 들었다. 너무 간결해서, 쉬워서, 평범해서 말이다. 덕분에 빠르게 읽었다. 어려워 모르는 시도 있었지만 다른 시집에 비하면 엄청 읽기 편했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시인의 삶이, 시선이, 생각이 조용히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소설이나 시에 대한 책 속의 평론을 읽지 않고 있다. 이해를 조금 더 도와줄지 모르지만 나의 감상을 깨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주례사 평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로 읽지 않았다. 모르면 다음에 읽으면서 새롭게 깨우치면 된다. 오독의 위험은 언제나 있다. 평론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시집으로 나왔다면 그 이해의 폭과 깊이는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인지 짧은 시들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이미지를 나름대로 연상하면서 읽는다.

 

시인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보고 들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한 가지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것은 역시 산문집의 영향이다. 섬진강과 작은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삶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이 시집에서도 그 이미지는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시인이 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사물을, 풍경을,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법 등을 배운다. 첫 시인 ‘어느날’을 읽으면서는 내가 습관처럼 말하던 someday가 연상되어 즐거웠고, ‘시인’을 읽을 때는 불가의 한 고사가 떠올랐다.

 

‘봄산은’이란 시의 전문은 “계집의 마음 같다/ 계집의 마음 같다 해놓고/ 웃었다.”인데 이 짧은 시를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난 김에’같은 시는 유서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동시다발’은 제목 그대로 시간을 고정시켜놓고 이미지를 만들게 한다. 인간이 지닌 인식 능력이 얼마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지 생각하게 된다. ‘모독’에서 돈이 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데 공감한다. 가난하지 않은 자들이 외치는 열정과 감동 등의 말은 단순한 언어유희일 뿐이다. 진짜 배고프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까 하는 말이다.

 

‘처음’에서 “말하자면,/피해갔던 진실을/ 만났을 뿐이다.”란 시어를 읽으면서 머리를 한 대 맞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나를 포함해) 처음 듣는다는 둥, 처음 본다는 둥의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부모님과 이웃과 현재의 삶도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시에서는 그리움을, 어떤 시에는 삶의 지혜를, 어떤 시는 내가 잊고 있던 과거의 풍경을 떠올려주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이 시집에서 받은 다양한 감상과 이미지들이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린다. 올해는 시집을 조금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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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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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 무겁거나 더딘 진도로 읽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프랑스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나의 평가다. 물론 비채에서 나온 몇 편의 프랑스 문학상 수상작들이 예상을 뒤엎는 재미와 속도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한두 달 전에 읽었던 작품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전에 읽은 프랑스 소설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도 했다. 이렇게 각각 다른 경험들이 혼재해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의 구판 표지를 봤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표지다. 그 당시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비해 이번 표지는 얼마나 깔끔한가. 나의 취향이다.

 

원제는 <노와 나>라고 한다. ‘나’는 열세 살의 소녀다. 소위 말하는 천재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몇 년이나 월반을 했다. 학습적으로 천재인지 모르지만 감정까지 천재는 아니다. 그래서 지적조숙아라고 부른다. 자신의 또래와 다른 삶을 살다보니 대인관계가 그렇게 편하지 않다. 이런 소녀가 한 주제에 대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노숙자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삶에서 우연은 또 다른 필연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계다. 이렇게 해서 ‘나’는 ‘노’를 만난다.

 

‘노’는 노숙자다. 십대 소녀다. 길에서 흔히 보는 나이 많은 노숙자가 아니라 십대다. 첫 접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면서 조금씩 다가간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따뜻한 카페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발표를 위한 인터뷰라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든다. 그녀의 삶을 조금씩 알아간다. 이 앎이 그녀를 힘들게 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노숙자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의지와 노력이 합쳐진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이 발표가 마지막 장에서나 이루어질 줄 알았다. 한 소녀 노숙자를 알아가는 과정을 다룰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 예상 그대로 깨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노가 ‘나’ 루이의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원한다고 노숙자를 집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집은 보통 집이 아니다. 아프고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루의 동생 타이스가 유아돌연사로 죽은 것이다. 이 죽음이 엄마의 삶을 산산조각 내고 가족의 유대를 끊었다. 루의 정서적인 불안감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정체된 집에 분위기가 노의 등장으로 바뀐다.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3년째 유급중인 뤼카다. 멋지고 잘 생겼지만 공부할 의지가 없는 그다. 루는 그를 좋아한다. 그가 자신을 안아주고 키스하는 것을 꿈꾼다. 바람일 뿐이다. 이런 그와 관계가 루의 노숙자에 대한 발표 후 변한다. 꼬맹이라고 부르고 같이 놀자고 한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현실은 반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노도 함께 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루의 집에서 노가 쫓겨났을 때 그녀가 간 곳도 뤼카의 집이다. 세 명의 십대 소년 소녀들은 신나고 즐겁다. 노의 삶이 빠르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 셋의 가정은 평범하지 않다. 루의 집은 아이의 죽음으로 엄마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뤼카의 부모는 이혼한 후 아이만 홀로 둔 채 따로 산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노의 엄마다. 그녀는 노를 원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탄생이 사랑이 아닌 강간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나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죽음 후 삶은 큰 파도를 탄다. 모성애가 없는 엄마에게 애정을 갈구하지만 대답이 없다. 이것은 루도 마찬가지다. 한창 감정적으로 변하는 시기의 그녀에게 엄마의 기계적인 행동과 반응은 그녀에게는 폭력과 마찬가지다.

 

노숙자와 지적조숙아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잔잔하고 현실적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 이야기는 조금 불편하지만 그녀들에게는 필요한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것이 의존적으로 변하면서 관계가 불안정해진다. 노는 엄마가 필요한데 그녀는 반응이 없다.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노숙자 삶이 순간적으로 정리되었다고 삶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많은 의지와 노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아니다. 망가진 그녀의 삶에 대해 작가는 상세한 설명을 뺐다. 추측으로 채워야 한다. 알코올 중독 정도로 한정하기에는 더 많은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존재의 고통과 아픔을 잘 그려내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작가가 한 명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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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자는 누구인가 - 유배탐정 김만중과 열 개의 사건
임종욱 지음 / 어문학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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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이란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소정묘 파일>이란 역사추리소설이었다. 이 당시 한창 팩션이 번역 출간되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의 광풍이 전 세계를 몰아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 팩션에 많은 실망을 하고 있었고, 번역된 팩션도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서관에서 이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백수였던 시절이라 가능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공자에 대한 역사추리소설이란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다행히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언제나처럼 작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책 제목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후 몇 편의 한국 팩션을 읽을 때면 이 작품이 떠올랐다.

 

사실 임종욱의 소설이 계속 나왔다. 반값 할인의 시기에 몇 권을 사놓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 정도가 출간된 책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검색하니 상당히 많은 책이 계속 나왔다. 새로운 작가와 작품에 점점 빠져들면서 이전에 재밌게 읽은 작가의 작품에 손이 쉽게 나가지 않고 있다. 이 작품도 한 카페에서 작가 자신의 소개글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선택했다. 그리고 이전에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인상만 가지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좀더 강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좋은 의미의 이미지다.

 

서포 김만중을 탐정으로 내세운 역사추리소설이다. 부제에서 ‘유배탐정 김만중과 열 개의 사건’이라고 말해 연작단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국어 시간에 배운 <구운몽>의 저자로 먼저 알았고, 좀더 자라면서 당쟁의 중심인물 중 한 명임을 알게 된 그 김만중이다. 최근에 조선시대 유배된 학자들을 탐정으로 내세운 소설이 몇 권 나왔다. 이 책도 그 작품들 중 한 권이다. 대부분 완성도가 높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이 책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부분이 있다.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가 낯익다거나 마무리가 나의 취향이 아니라는 등. 그럼에도 재미있는 단편이 많고, 빠르고 재밌게 읽었다. 나중에 김만중을 탐정으로 내세운 장편이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열 개의 이야기를 다룬다. 각각 독립적이지만 계속 연관성을 가진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읽기에 큰 부담은 없다. 이 부분은 작가의 역량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은 크게 김만중과 포교 박태수다. 박태수가 사건을 가지고 오면 김만중이 논리적인 추리와 조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가끔은 어린 아이가 사건을 가져오기도 하고, 자신의 제자가 우연히 들은 살인 이야기가 소재가 되기도 한다. 밀실 살인, 암호 풀이, 다잉 메세지 등 기존의 추리소설에서 다루는 소재들을 각각의 단편들에 녹였다. 트릭 등에 약한 내가 그 완성도를 평가하기는 물론 쉽지 않다.

 

김만중의 유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 속 설정은 상당히 자유로워 보인다. 남해 곳곳을 다닐 수 있고,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인척인 그의 유배에는 두 명의 하인이 따라붙는다.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호우와 음식 등을 담당하는 아미다. 여기에 그에게 글을 배우는 남해 거부의 아들 나정언이 같은 집에 머문다. 가끔 올 손님을 위한 사랑방까지 있는 집이니 상당한 규모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김만중은 남해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고, 박태수 등이 가져온 사건들을 해결한다. 가장 큰 사건으로 시작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현재로 내려오는 방식이다.

 

열 개의 사건이지만 이 단편 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몇 가지가 있다. 박태수와 조강호의 과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남해 최대 조폭인 조강호가 포교인 박태수에게 단순히 뇌물만 먹인 것이 아니라 같은 동료였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알려주지만 정확한 내역은 생략되어 있다. 혹시 김만중 탐정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 부분이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의 마무리는 어정쩡하다. 깔끔하기보다는 뒤끝을 너무 많이 남겼다. 후속편이 없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매력적이고 정감 가는 캐릭터가 많은 소설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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