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다 에프 그래픽 컬렉션
루이스 트론헤임 지음, 위베르 슈비야르 그림, 이지수 옮김 / F(에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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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애정하는 에프 그래픽 컬렉션 중 한 권이다. 이 그래픽노블은 도입부가 충격적이다. 휴가지에 도착하자마자 약혼자가 간판에 목이 잘려 죽는다. 바람 때문이라고 하지만 황당한 상황이다. 그의 죽음은 파비엔느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녀가 기댈 것은 약혼자 롤랑의 노트뿐이다. 노트에 기록된 숙소를 찾아가고, 투우장에도 간다. 롤랑은 노트에 함께 휴가를 보낼 계획을 꼼꼼하게 작성해 놓았다. 홀로 남은 파비엔느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그 노트의 일정을 혼자서 따라간다. 그러다 현지인 파코를 만난다. 얼핏 보기엔 술꾼 같고, 어떻게 보면 여행자를 유혹하려는 난봉꾼 같다. 유령처럼 부유하면서 일정을 따라가던 그녀에게 파코는 작은 침입자다. 실제는 친절한 현지인이다.


파비엔느가 롤랑의 일정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에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휴가를 즐기려고 온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이 강하게 대비된다. 아주 정적인 그녀의 모습에 변화를 던져주는 역동성은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서 온다. 걷고, 보고, 멈춰 있는 그녀가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우연히 날아온 배구 공이나 몰래 다가온 아이들이 이 정적인 풍경을 깨트린다. 그녀의 시선이 휴가를 즐기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녀가 느낀 상실과 혼란이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점으로 표시된 눈의 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다.


파비엔느와 파코가 만나고, 서로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다. 파코가 말한 어린 시절 불행과 그가 모으는 세계 각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수집이 타인의 죽음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란 사실이 드러나고, 롤랑의 사고 내역을 알게 되면서 둘은 한 발 더 다가간다. 죽음을 애도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정해진 일정을 따라 가는 그녀가 파코를 불러 저녁 식사를 하는 부분에서 죽은 약혼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녀가 들고 있던 노트의 의미도. 작가는 이렇게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주고 알려주기 보다 이야기 속에 하나씩 녹여낸다. 무심코 본 장면이 다시 볼 때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행용 가방 하나의 의미는 강렬하다. 처음에는 무거워서 차에 그냥 실어 두었다면 나중에 휴가지를 떠날 때는 그 가방을 차 밖에 둔다. 약혼자에 대한 애도와 관계를 암시한다. 그녀가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강하게 짖던 개는 케밥 하나에 조용해진다. 파코는 자신의 오줌을 부었었다. 그녀와의 동행 이후 파코의 대응 방법도 바뀐다. 작가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일상의 삶을 곳곳에 뿌려 놓았다.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과 그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사건이지만 타인들에게는 그 사건이 일회성 관심사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휴가를 즐기려고 왔다. 파코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파비엔느도 자신의 삶을 점점 찾아간다. 표정과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그렇게 두툼하지도 않고, 대사가 많지도 않다. 덕분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잠깐 멈춰 그림에 집중한다. 관광객의 표정과 여행 온 가족들의 모습에서 즐거움의 감정을 느낀다. 펜으로 그린 섬세한 그림은 사람들의 다양한 체형과 역동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듯하지만 무표정한 표정과 감정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채워지지 않고 남은 공백을 통해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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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7-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i origin이었나 엘베.나오고 참혹한 씬이.겹쳐 떠오르네요. 도입부 소개해주시는.부분에서^^,,

행인01 2021-07-15 11:16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지 않아 이미지가 겹쳐지지는 않네요.
언제 기회가 되면 영화 한 번 봐야겠네요.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 - 치열하고 찬란했던 그 날
은상 지음 / 빚은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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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학원물이란 단어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다. 1989년 여름이다. 공간은 안면도다. 정치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이 학교 안에 갇히면서 생기는 일을 다루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좀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좀비와 조금 다르다. 기생충 감염이란 방식으로 이성을 상실하고 기생충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설정이다. 바이러스의 진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는 점은 흔한 설정이지만 이 소설을 약간 상황을 비틀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의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은 타인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정치 캠프는 국회의장이 미래의 투표권자에게 사전 선거 목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안면도로 설정한 것은 폐쇄된 공간의 필요성 때문이다. 이 캠프에 참여한 학생 수는 무려 천 명이다. 높은 분의 지시가 있으니 학교에서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다. 이 소설 속 중요인물 중 석영과 상훈은 학교에서 문제가 있어 보냈고, 충청도 짱 현웅은 어머니 때문에 참가한다. 국회의장의 쌍둥이 남매 충걸과 유선은 아버지의 목적에 의해 보내졌다. 다양한 이유로 이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은 상훈의 실험과 한 소년의 악의적 장난이 결합하여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번진다. 재미 있는 점은 이 사건을 확장시키지 않고 캠프 내부에서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외부의 도움이 있었다.


초반부에 일어나는 몇 가지 일들은 전형적인 학원물이다. 누군가에게 눈길이 가고, 권력자 아버지에게 순응하는 아들과 이에 반발하는 딸, 자신이 원해서 짱이 되지 않은 아이 등의 사연이 간결하게 흘러나온다. 석영이 이 캠프에 참가한 이유는 오토바이를 훔쳐 타서 그렇고, 상훈은 소문난 똘아이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문제아들을 보낸 것이다. 충청도 학생들이 많은 것은 그 지역에서 차려진 캠프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학원물에 가까운 인물은 현웅이다. 덩치는 컸지만 순했던 그가 어떻게 충청도 짱으로 성장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은 한 편의 협객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카리스마가 강한 존재다.


상훈이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 만들어낸 기생충은 뇌에 자리를 잡고 처음 눈을 마주한 인물에게 복종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신이 제조한 기생충 약을 먹는 것이다. 우연히 석영과 유선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상훈은 자신의 기생충 캡슐을 유선에게 준다. 이 기생충에 중독된 인물을 자신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쌍둥이 오빠에게 장난을 치러 갔다가 허술한 연기 덕분에 자신이 먹는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상훈을 찾아와 약을 먹고 해결하지만 나머지 캡슐을 빼앗겼다. 문제는 이 약을 한 사람에게 먹이지 않고 모두가 마시는 물통에 넣은 것이다. 이것은 상훈도 실험하지 않은 일이다. 무더운 여름 모두가 물을 찾을 때다. 기생충은 번식하고 아이들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눈빛이 바뀌면서 좀비처럼 바뀐다.


이 소설 속 아이들은 좀비처럼 바뀌는데 이유는 신선한 고기와 피를 원한다는 설정 때문이다. 좀비로 된 아이이에 물린 아이나 피를 통해 전염된 아이들도 좀비가 된다. 같은 좀비는 물지 않는다. 좀비가 아닌 사람을 찾아가 물어뜯는다. 좀비로 변하는 순간 눈을 마주하고 자신의 지배 아래 둔 아이들은 문제가 아니지만 감염된 아이들이 너무 많다. 다행이라면 높은 담장 속에 갇혔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상훈의 일기에 나오는 해충제를 먹는 것이다. 문제는 상훈도 물려 좀비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석영이 이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의 지배 하에 둔 것 정도랄까. 하지만 약을 만들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만약 이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면 감염을 제어할 수 없을지 모른다.


1989년도는 아직도 군인의 시대였다. 위대한 보통 사람을 외친 군 출신 대통령이 있던 시기다. 세계는 민주화 열풍이 불었고, 한국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상훈이 만들어낸 기생충은 독재자들이 알게 되면 그 사용을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나 자발적으로 좀비가 되어 위기를 벗어나려는 아이들이 자신의 지배자로 선택하는 조건 등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와 신뢰, 독재가 무너진 시점 등을 엮으면서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간을 분 단위로 나누어 장면을 전환한 것도 속도감을 높인다. 인트로 장면은 이 좀비물이 결코 무섭고 무거운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준다. 후반부의 몇 가지 장면들을 보면서 왜 이 시대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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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서클 살인사건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5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희경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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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다섯 번째 소설이다. 현재까지 나온 다섯 권 중 네 권을 읽었다.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뭐 이렇게 허술하지!’라는 느낌도 있었는데 시대를 알게 되면서 조금씩 수긍하게 되었다. 이번 작품도 현대 추리소설에 비해 짜임새나 트릭 등이 약간 헐겁지만 속도감과 캐릭터 등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그리고 크림슨 서클이란 조직이 보여주는 범죄 행위는 어떻게 보면 뒤틀린 자경조직 같은 느낌도 준다. 자영조직이 악을 처단한다면 이 조직은 악의 점조직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가 이전에 이런 조직을 소설 속에 녹여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놀라운 조직이다.


크림슨 서클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조직이다. 조직원들조차 누가 크림슨 서클인지 모른다. 크림슨 서클이 표시된 봉투 등을 받은 사람들은 이 협박에 따라야 한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불이행에 따른 처벌을 받는다. 거대한 자산가의 경우 거액의 돈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실제 이 조직이 처음 런던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살해 협박이 현실로 바뀌면서 점점 위험한 조직이 된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파르 경감이다. 소설은 크림슨 서클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제임스 비어드모어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크림슨 서클의 협박을 막기 위해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진 사립탐정 데릭 예일을 초대한다. 이 초대는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어둠 속 실루엣만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는 크림슨 서클. 그는 범죄자들을 모아 거대한 악의 고리를 만든다. 상호 감시하고, 검은 돈을 세탁하고, 협박으로 거액을 뜯어낸다. 협박을 거부한 부자들이 몇 명이나 죽었다. 이 살인으로 파르 경감은 경질설에 시달린다. 그리고 탈리아 드러먼드라는 미모의 여성이 등장해 잭 비어드모어의 마음을 사로잡고, 새로운 사건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그녀가 취직한 곳에서 발생한 도난 사건과 살인사건으로 의심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탈리아는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자주 읽다 보면 이런 인물이 범인인 경우는 많지 않다. 이야기의 진행 속에 드러나는 몇 가지 감정의 조각들은 그녀의 실체를 의심하게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크림슨 서클과 이를 쫓는 파르 경감과 데릭 예일 탐정의 대결이다. 이 범죄자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 사람들이 죽은 채 발견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장면은 밀실 살인과 닮아 있다. 작은 트릭과 적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몇 가지 행동들이 나와 약간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고,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 나중에는 이 크림슨 서클이 정부를 상대로 엄청난 협박을 한다. 기존의 살인 행각을 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협박이다. 지금까지 크림슨 서클이 보여준 살인들을 생각하면 무심코 대할 수는 없다. 파르 경감에 대한 불신이 있지만 예일 탐정과 힘을 합쳐 범죄자를 잡으라고 말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내부에 범죄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점 조직으로 구성된 듯한 크림슨 서클이지만 이 정보가 결국 한곳으로 모인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조직에 위험이 되는 인물은 제거되고, 협박을 현실화시킨다.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짜임새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시대를 감안하고, 이 설정을 생각하면 놀란다. 밖으로 드러난 몇 명의 크림슨 서클 조직원들이 나오지만 두목은 실루엣 속에 숨어 있다. 이 조직원들이 모인 장면이 나오는데 적지 않은 인원이다. 약점을 쥐고, 협박을 하고,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조직이다. 누군가 실제 이런 조직을 만든다면 엄청난 위험이 될 것이다. 범죄와 관련된 행동을 하는 인물로는 탈리아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파르 경감과 데릭 예일 탐정이 있다. 배후가 밝혀지는 순간 읽으면서 의심했던 장면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다. 한 동안 잊고 있던 고전 추리의 재미를 살짝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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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리바의 집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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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 자매 시리즈 3권이다. <보기왕이 온다>로 제22회 호러소설대상 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물론 둘은 같은 시리즈다. 시리즈 2권을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히가 자매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전면에 나와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화자는 사사쿠라 가호와 이가라시 데쓰야 둘이다. 가호가 현재 시점에서 시시리바와 엮여 있다면 이가라시는 과거 이 집을 다녀와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집은 히가가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 곳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히가가 다시 돌아와 문제를 해결한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괴이하고 무서운 존재가 사르르 사르르 머릿속을 파고든다.


가호는 남편을 따라 도쿄에 왔다. 아이를 가진다는 명목으로 남편은 혼자 일을 하고, 가호는 집에 머문다. 그러다 동창생 히라이와 도시아키를 우연히 만난다. 도시는 가호 부부를 초대한다. 일이 바쁜 가호의 남편 유다이는 주말에도 직장에 간다. 혼자 도시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이 집 이상하다. 집에 모래가 곳곳에 쌓여 있다. 어릴 때 자신을 귀여워해준 할머니를 보러 올라갔는데 더 이상하다. 도시의 아내 아즈사 얼굴에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까지 수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의 분위기는 아주 좋다. 모래가 신경 쓰이지만 이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자주 가호를 초대한다. 꺼림직한 느낌이 있지만 이 집을 자꾸 방문한다.


이가라시는 이 히라이와 집 맞은편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히가와 함께 이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친구 가족이 야반도주한 이후 이 집은 폐가가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페가탐험을 갔다. 히가도 이때 같이 간다. 공포의 감정을 숨긴 채 허세를 부린 아이들이 이 집에 들어가서 이상한 경험을 한다. 같이 들어간 4명의 아이 중 2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이가라시와 히가 고토코 둘 뿐이다. 이가라시의 머릿속에서는 모래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 일상 생활이 힘들다. 하는 것은 긴이라는 개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것 정도다. 십수 년이 지난 후 히가가 이가라시의 집에 찾아온다. 현재 히라이와 집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면서. 그리고 현재 처리하는 일 때문에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아즈사에게 온 것이다. 집에 일어난 기이한 일의 원인을 알았다고. 도시가 결혼 전 한 약속 때문에 여자가 건 저주가 원인이란 것이다. 이 사건을 해결한 후 아즈사의 다크서클은 사라졌지만 모래는 그대로다. 가호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 늘 바쁜 남편도 잠시 시간을 내어 병원에 동행한다. 도시의 집에 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결혼 반지가 없다. 어디에 있을까? 도시에게 찾아봐 달라고 요청하지만 찾지 못한다. 다시 찾아간다. 이때 이가라시와 가호의 접점이 생긴다. 이 만남을 통해 두 개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폐가에서 시작한 공포는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사아아아 흘러간다.


이 공포소설에서 폐가가 지닌 힘은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 집에서 문제없이 산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빈집이 된 후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서늘하다. 집안에 모래가 이렇게 많은데 무신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 울리는 모래 소리는 또 어떤가. 이가라시의 과거 경험보다 눈길을 더 끄는 것은 가호의 현재다. 낯선 곳에서 홀로 집을 지켜야 하는 외로움이 어느 순간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 집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 남편이 사라진 결혼반지에 대한 아쉬운 눈빛만 보여주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지 모른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가 예상하지 못한 큰 문제로 이어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시선을 끈 부분은 공포가 아니라 이가라시가 히가를 만난 후 어머니가 늙은 것을 발견하는 부분이다. 자신이 집밖에 나가지 않고 어머니에게 기생한 채 살아가는 현실은 알지만 부모가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씩 자각하는 부분이다. 엄마가 직장에서 일어난 일을 가볍게 말해도 그는 듣는 척 마는 척한다. 늘 그 집을 지켜보지만 들어갈 용기가 없고, 머릿속 모래 소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작은 변화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히가와 함께 그 집에 다시 들어가게 한다. 그 집에 사는 시시리바의 역사를 파헤칠 때 드러난 사실은 놀랍다. 예상하지 못한 설정이다. 소설을 읽을 때도 ‘사아아아아아’ 란 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는데 지금도 모래를 떠올리면 이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히가 자매의 장녀 히가 고토코의 시작을 알려주는 이야기란 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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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룸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7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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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17권이다. 오랜만에 이 시리즈를 읽었다. 집에 이 시리즈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이 시리즈가 나오길 그렇게 바랐던 순간이 이루어지자 책에서 멀어졌다. 나쁜 습관이다. 얼마 전 시리즈 초기작 중 한 권을 읽었는데 시대가 묻어나왔다. 가독성은 여전히 좋았다. 물론 이 작품도 말할 필요 없이 가독성이 좋다. 다만 초기작을 읽은 나에게 해리의 나이든 모습이 낯설다. 그리고 읽지 않은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들에 대한 관심이 또 불쑥 생긴다. 시간이 되면 올해가 가기 전 한두 권 이상 읽고 싶은데 다른 시리즈도 많이 밀려 있어 자신할 수 없다. 오래된 시리즈의 최신작들을 읽을 때면 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정년퇴직을 앞둔 해리의 모습이 낯선 것은 중간에 읽지 않은 시리즈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시리즈 중 한 권이 <드롭>인데 이 소설을 읽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조금은 더 낯익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딸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해리가 어떻게 미제사건을 전담하는 부서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새로운 파트너 루시아 소토를 맞는다. 범죄자와의 총격 사건으로 영웅이 된 그녀다. 새 파트너와 함께 맡게 된 사건은 10년 총격 사건으로 몸에 탄환을 가지고 있다가 얼마 전 죽은 메르세드 사건이다. 그는 마리아치 연주단의 일원으로 연주를 하던 중 어딘가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고 불구가 되었다. 10년만에 죽었는데 해부를 통해 그의 척수에 박혀 있던 탄환을 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탄환 적출이 도입부다.


전 시장은 자신의 선거에 메르세드를 이용했고. 두 번이나 당선되었다. 메르세드가 죽은 지금 범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 현상금 5만 불을 주겠다고 말한다. 경찰 담당자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다. 현상금을 노린 거짓 전화가 빗발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해리와 소토가 미제사건 담당자가 되어 사건을 파헤치려고 한다. 그런데 늦은 밤 소토가 다른 사건 파일을 복사한다. 20년 전 무허가 어린 집 아이들이 방하로 죽은 사건이다. 불법 복사다. 아직 소토가 낯설고 믿을 수 있는 경찰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녀가 왜 그 사건에 관심이 있는지 듣게 되면서 도와주려고 한다. 이제 사건은 두 개가 되고, 해리의 거짓말 덕분에 이 두 사건 모두 해리와 소토가 맡는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흔적을 따라 가면서 미제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시신의 몸에서 뽑아낸 탄환 하나가 사건 해결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다. 피해자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동네 갱들이 저지른 행위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그런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쫌 읽은 독자들이라면 대충 범인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범인상이 그려진다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확한 증거가 더 모여야 한다. 과학의 발전은 이전에 놓쳤던 증거물에 대한 자료를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다. 메르세드를 이용해 시장 선거에 당선된 전 시장 세야스는 이제 그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주지사 당선을 꿈꾼다. 소설에서 이 부분은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변하는 LA의 모습을 이것으로 조금씩 알 수 있다.


소토가 복사한 미제사건은 어릴 때 소토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역시 동네 갱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 사건 해결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이해하게 된다. 두 사건이 교차하고, 비중이 거의 비슷하게 다루어진다. 해리가 다양한 경험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단서들 사이의 관계를 추론한다면 소토는 젊은 형사답게 인터넷과 경찰 내부의 자료 등을 통해 단서들 사이를 채운다. 탄환 하나와 기술의 진보로 CCTV의 화질을 개선하면서 알게 된 정보가 한 발 더 나아가게 한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추리력과 뛰어난 인맥이다. 당연히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노련한 형사가 왜 필요한지 잘 보여준다. 만약 모든 형사가 해리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찰도 많다. 형사가 아닌 관료가 된 경찰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 소설 속에서 꾸준히 모습을 보여준다.


소토가 경험한 미제 방화사건의 단서도 경험과 대담한 추론을 통해 찾는다. 자신이 겪은 일이라 소토는 더 열심히 일한다. 소설 속에서도 작가가 말했듯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서 그 사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시각도 이전 경찰들이 기록하고 모은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담당 형사들의 기억도 좋은 자료다. 열린 자료는 소토가 찾아내고, 닫힌 자료는 해리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얻는다. 멋진 콤비다. 이제 겨우 근무연장프로그램(DROP)이 1년 남은 해리는 몸을 사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해리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남자다. 차근차근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그 과정은 아주 현실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다. 이 작품이 2014년 출간임을 감안하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다음 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 전에 나는 이전 작품을 더 읽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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