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러블리
강서재 지음 / 예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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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대만 작가 왕원화의 소설 느낌이 나기는 하였지만 방송작가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재미있는 문장과 전개가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곳곳에 화를 돋우는 문장들이 나온다. 아마 내가 남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나의 주변에 책에서 묘사한 여자들이 거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지극히 뉴욕과 명품을 외치는 그녀에게 많이 질린 것도 사실이다.

 

남자들 거의 대부분이 쭉쭉빵빵한 여자들을 좋아한다. 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약간 마른 여자를 더 좋아한다. 가슴이 빵빵한 여자들이 시선을 잡아끌지만 사귀고 싶은 마음은 많지 않다. 음! 조금은 거짓말이 섞여있는 글인지도 모른다. 취향이 변한 탓도 있지만 요즘은 가슴 큰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말한 정신을 놓고 헤롱거릴 정도는 아니다. 지극히 피해망상에 가까운 표현들이 아닌가 한다. 뭐 나도 가끔 콤플렉스를 느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장동건을 보다보면 뻑이 가는 여자들이 이해가 되고 나 자신도 그넘의 미모를 부러워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길을 가다보면 잘생기고 이쁜 애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나의 곁에 왜......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 소설도 과하기에 충분한 재미를 살리지 못했다. 여자들이 열광하는 명품이라는 고가품에 환장을 하거나 영화 속의 돈질에 푹 빠져드는 것을 무작정 나무랄 생각은 없다. 남자들도 누구나 정신을 잃는 판타지가 있으니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을 작가가 대부분의 여자들의 생각인 것처럼 표현한 것에 거부감이 생긴다. 카드연체나 명품에 환장하여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까지 몰리는 것을 당연한 직장 여성들의 생활처럼 묘사한 것에는 나의 주변에 건실하게 돈을 모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모독처럼 느껴진다. 아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방송계이고 자신의 주변인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세 5백에 월20만원의 도시빈민이라는 표현에서 다시 한 번 열을 받았다. 옷장 가득 명품으로 채워놓고 혼자서 살아가는 그녀가 진정한 도시빈민을 겪어보기나 했을까?

 

끊임없이 나오는 ‘섹스 앤 시티’에 대한 열망과 추종은 현대 한국 여성들이 지향하는 바를 잘 나타내어준다. 브런치와 아점이 다른 것이라고 하는데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여기에 나의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돈 많은 여자의 게으른 일상을 묘사한 광고나 선망은 역시 짜증나는 대목이다. 아마 이런 나의 감정이 얼마 전에 읽은 왕원화의 소설 탓도 있을 것이다. 그의 책에서 보여준 여자에 대한 구분이나 연애 등이 이 소설에서 본 것과 유사한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현실의 일부분을 날카롭게 비틀어 풍자하면서 현실의 실체를 보여주지만 그 속에 가득 담겨있는 열망과 바람이 기분 좋은 마무리를 주지 못한다. 한 번 가볍게 읽고 치워버려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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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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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누군가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한 번 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어떻게 타냐고 타박했다. 그다지 기차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고, 몇 날 며칠을 기차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현실이 그런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나 다른 책들을 통해서 긴 기차여행이 주는 낭만에 마음이 들썩이고 있다. 혹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전체 구간은 아니더라도 몇 구간은 한 번 기차여행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9,938km. 사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서울 부산 왕복으로 몇 번이라고 하지만 한 번도 지겹고 힘든 나에게 이 거리는 비현실적이다. 그럼 작가는 이 거리를 단번에 다녀온 것일까? 아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여행을 여러 번 다녀온 결과물이다. 하지만 책의 흐름을 고려해 단번에 여행한 것처럼 구성했다. 이 부분은 서문에서 독자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조차 단번에 다녀오기 힘든 거리가 9,938km이다.

 

책은 재미있고 쉽게 읽히고, 그림은 밝음보다 왠지 모를 회색으로 가득하다. 그 곳 풍경이 그런 것인지 레닌 동상이 주는 색감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느낌들이 현재 러시아연방의 현재와 과거를 묘하게 대비시킨다. 가끔 그 장소에서 펼쳐지는 시위는 새로운 변화와 과거와 충돌하고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먼 곳의 삶이 우리 현재의 삶과 비교하게 만들고,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의 한 시점도.

 

저자는 이 긴 여행 이야기의 시작을 한국에서부터 출발한다. 부산에서 북조선을 넘어 대륙횡단철도와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과연 연결되면 내가 탈 것인가는 뒤로 하고, 낭만적인 풍경과 수많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데 저자는 그 시작점을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의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일까? 여기엔 현재 단절된 분단 상황과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묘하게 연상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백야 속 불면을 만난다. 이 불면 속에서 “이루고 싶었고 목격하고 싶었던 변혁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의지의 종말”이 만든 상흔을 마주한다. 시간은 이 상흔을 중화했지만 기억 속에, 추억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쩌면 그런 상흔들이 레닌동상이 있는 러시아연방 도시들을 돌아다니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그 도시들에서 레닌동상을 만난 것이겠지만 그가 그곳에서 만난 여럿 동상은 착잡하면서도 다양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홉 도시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문학이나 다른 서적을 통해 만날 때보다 더 그렇다. 각 도시들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이 이야기에 현실과 과거를 차분히 이야기한다. 혁명의 꿈이 사라진 현실에 대한 아쉬움과 그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제 시들해진 레닌의 인기와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한 체 게바라를 비교하면서 머리숱을 많고 적음을 우스개로 풀어내는 여유와 유머는 모스코바에 가득한 한국제품 광고와 제품들로 이어지며 현실과 과거를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긴 여행 사진 속에서 만난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은 이 거대한 제국의 넓음을 짐작하게 만들고 가끔 우리와 별 차이 없는 얼굴을 만나면 고려인들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같은 몽골계지만 다른 민족임을 보면 저자의 말처럼 긴 과거의 한 시점에서 서로 이어져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도시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민족들의 이야기는 변화하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학창시절 러시아 지명과 인명은 참으로 외우기 힘들었다. 덕분에 책에서 그들을 만나면 늘 버벅거리곤 했다. 그런 힘겨움 속에서 그때 읽던 책들이 보여주던 낭만과 환상은 이제 많이 퇴색했다. 이 책을 따라 여행하다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전 세계가 권역화 되고 자본주의가 강화되는 현실에 눈을 감을 수 없지만 그 시절의 꿈을 잠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가 여행한 곳과 관련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인지 모르지만 시베리아에서 죽어간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의 수치가 없다. 레닌으로부터 시작한 혁명이 그 싹을 제대로 띄어보지 못하고 스탈린에게서 무참히 꺽인 현실 속에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학살이 있었던 그 기록들 말이다. 그 혁명의 대지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기억해야할 사실이 이 책에 담기엔 너무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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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아이라 재판소동
데브라 하멜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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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남겨져 있을 경우 우리는 그 시대를 비교적 잘 알 수 있거나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료가 충분하지 않거나 긴 세월이 지난 경우 자료도 부족할 뿐 아니라 자료만으로 그 시대를 추론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명의 창녀 네아이라를 중심으로 한 재판으로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생활상을 돌아보는데 분명 흥미롭고 놀라운 일이다.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으로도 우린 불과 수 백 년 전 조선시대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무려 2500년 전 아테네 사회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재평가하는 작업임을 상기한다면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분명히 새로운 재미를 준다. 비록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름이 복잡하고 읽기 힘들다 하더라도.

 

그리스 시대의 기록 중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많지 않은 것 중에서 저자가 네아이라 재판을 선택하여 글을 쓴 것은 이 재판을 통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잘 나타내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이 있기에 탄생했지만 저자는 연설문에만 기대지 않고 그 시대와 관련된 역사나 다른 연설문 등을 통해 그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을 한 면을 대변하는 창녀 네아이라를 보며 여성의 지위와 가부장 구조를 알게 되고,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법정 공방을 통해 그 시대의 소송제도와 배심원 제도를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재판의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과 연설문이 너무 엉성하다는 점이다. 현대 법정을 생각하고 읽는다면 그 허점투성이와 연관성이 부족한 논조에 웃음이 나올 정도다. 증거는 부족하고 논리나 정합성보다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는데 더 중심을 두는 듯하다. 노예를 고문해서 얻은 정보를 더 정확한 것으로 여겼다는 대목이나 간통자를 고문하는 방법으로 남자의 항문에 무를 넣었다는 사실에선 인권을 열외로 하고라도 우리 시대와 얼마나 다른 사회였는지 알게 한다. 또 도시국가였던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테네 시민권을 유지하기 위한 법률이 강하게 힘을 발휘하는 현실은 이 재판의 핵심이자 공격의 대상이다.

 

여기서 재미난 점은 그녀가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바뀌면서 이 재판의 피고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대의 뛰어난 창녀였다가 두 남자에게 팔린 후 시간이 지나 자유인으로 그녀는 변한다. 그녀 삶이 간결하게 설명되지만 저자는 감정을 싣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술한다. 개인사에 대한 설명은 없고 그녀를 통해 그 사회의 모습을 구현하는데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인 부분이다. 냉정하게 그 시대를 그려낸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활기차거나 감정 이입될 인물이 등장하지 않다보니 약간 늘어지는 듯한 느낌도 있다. 그렇다 하여도 이 한 권으로 아테네 사회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주니 고대 그리스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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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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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소설을 읽은 때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이 공유한 시간과 공간이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함께 삶의 일부분을 겪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 나오는 두 인물은 비슷한 시기에 다른 경험과 비슷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재미를 느끼지만 쉽게 그 실체를 가름하지 못한다.

 

제목에서 말하는 ‘네가’는 누굴까? 그리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책을 덮고 난 지금도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나는 해매고 있다.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의 기이한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 소설은 시작부터 다른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것은 한 장의 누드사진이고, 화자의 사랑과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 당시 소위 말하는 운동권에서 동지와 연애를 하고, 좌절을 하고, 방황을 한 그가 한 남자의 기이한 삶을 만나는 대목에 오면 다른 분위기와 이야기로 이어진다.

 

화자와 정민의 이야기는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그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보았던 모습이다. 가끔 이런 모습은 왜곡되어 운동권에 대한 도덕적 타락으로 와전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사실 이들의 이야기에서 재미난 대목은 둘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 둘이 계속해서 주고받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삼촌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의미와 재미를 주고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누드 사진을 들고 돌아온 화자의 할아버지와 어느 날 조용히 자살한 삼촌 이야기가 다음에 나오는 기이한 삶을 산 이길용이자 강시우의 이야기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길용의 삶은 한 편의 비디오로 요약되어 말해지는데 그렇게 단순히 드러난 삶의 이면에 또 다른 삶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길용의 과거 속에 우리나라 운동권이 가진 환상과 낭만과 비극이 동시에 담겨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도 90년대 나온 수많은 후일담 소설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당시의 분위기와는 다른 전개와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별개의 인물과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으로 이어붙이고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음! 이렇게 적고 보니 갑자기 그 사진을 보고 싶어진다. 어떤 사진이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매혹시킨 것일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문실에서 이길용이 느낀 감정은 공포를 뛰어넘어 왜 그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깨닫게 한다. 실수에 의해서건 고의에 의해서건 고문실에서 죽더라도 누구 하나 그의 죽음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시체는 한강에 쓰레기처럼 던져 버려질 것이라는 협박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 정신을 무너트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훈련을 받은 인물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그냥 평범한 일용노동자였음을 생각하고, 뒤에 나올 그의 과거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한다.

 

지적하고 싶은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화자가 평화통일축전에 비상조로 베를린에 체류한 곳에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찾아와 도움을 청할 때다. 자신이 잘 몰라 정 교수라는 분에게 묻는데 그 분 말이 “외국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낯선 이들이야.”(218쪽)라고 하는 대목이다. 물론 그가 고문실을 경험하고 죽음 바로 앞에까지 다녀온 사람이란 사실도 있지만 그 시대에 우리나라의 풍경을 절실히 드러낸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폭력은 체제의 문제라고 지적한 대목에선 공권력과 학생, 민중운동이 강하게 충돌한 그 시대를 가장 간결하게 설명한 문장이라고 느낀다. 지금은 이미 이 문장이 퇴색한지 오래 되었지만.

 

오랜만에 읽은 묵직하고 남성적인 소설이다. 문장을 유려하고 간결하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선으로 처리하면서 후일담 소설들이 가지는 흐리고 어두운 분위기는 거의 없다. 물론 이것은 지나온 시간들이 그런 분위기를 씻고 온 것도 하나의 이유다. 처음으로 김연수의 장편을 읽는 나에게 아직 읽지 않고 있는 다른 장편소설들이 기대된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게서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삶의 파편들을 보고 느낀다. 이것도 역시 그와 비슷한 시간과 공간을 함께 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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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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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게릴라로 풀어내는 삼성이야기다. 좁게는 삼성이지만 넓게 본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고 정점에 있는 조직이 삼성이기 때문에, 김용철 변호사 등에 의해 드러난 비리의 규모가 사상 최대이기 때문에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얼마 전 나온 김앤장에 대한 책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권력집단을 보았다면 이 책은 너무 잘 알려졌지만 동시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은 삼성에 대한 글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삼성과 관련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살기는 상당히 힘들다. 전자제품이야 다른 회사 제품을 사용할 수 있지만 제일제당 등의 삼성 일가족 그룹의 제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삼성그룹이 지원하는 스포츠 단체나 행사는 나처럼 삼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삼성을 응원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처럼 삼성은 한국에서 그 존재를 제외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기업이다. 불과 십 수 년 전 지금의 기업CI로 변경한다고 했을 때 왜 그런 곳에 헛돈을 쓰냐고 생각한 나 자신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기업임에 틀림없다.

 

주변에 삼성에 일하는 친구나 선후배가 많다. 홍보팀에서 일하는 선배의 이전 이야기는 삼성이 어떻게 기자와 언론을 다루는지 그 실체를 알게 하였고, 삼성의 제일주의에 빠져있던 친구의 이야기는 하나의 성역처럼 말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요즘 많이 사라진 모양이다. 그 힘들다는 삼성전자에 입사한 신입들이 공무원이나 공사 등을 위한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에 점점 바뀌는 세태의 한 면을 보게 된다. 그래도 아직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바라는 기업이 삼성임을 생각하면 대단한 기업이다.

 

김용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상조, 노회찬,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 이 일곱 게릴라의 삼성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거나 언론 등을 통해 드러난 이야기들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되어 나오니 삼성의 실체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정확히는 삼성이 아니라 삼성을 지배하고 지배하려는 이건희 일가와 그 가신들의 실체가 맞을 것이다. 특히 1조 원을 가진 사람에게 1억 원의 가치가 1억 원을 가진 사람의 1만원 가치와 같다는 이야기는 섬뜩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깨닫게 한다. 삼성공화국이라고까지 불리는 삼성의 관리와 부패와 불법을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아주 잘 만나게 된 것이다.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바로 ‘돈’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먹이사슬을 말하면 기업은 정치인에게 약하고, 정치인은 언론에 약하고, 언론은 광고주에 약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런 먹이사슬을 뛰어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삼성이다. 정치와 검찰을 돈으로 다스리고, 자신들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쓰는 언론사는 광고 중단으로, 노조를 설립하려는 직원은 협박과 회유 등으로 무참히 짓밟는다. 과히 관리의 삼성이란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그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고 존속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법까지 바꾸려는 그들을 보면 무시무시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하지만 그 권리는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순간뿐이란 지적은 현재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가장 잘 나타내어준 대목이 아닌가 한다. 또 김성환 위원장이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가해자들은 유유히 자리를 벗어나고 피해자만 가득한 법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늘 만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받고 일한 사람이 그러면 안됀다는 이야기와 그렇게 하지 않는 기업이 있냐는 이야기다. 처음 이야기는 삼성에서 살며시 흘려낸 이야기를 점점 확대하면서 흠집 잡기의 일완으로 상당히 성공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그가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낼 뿐 삼성이 저지른 잘못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계속 본질보다 다른 소문에 더 비중 있게 다루는 현실이 한국 언론과 우리 주변임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무서운 현실이다. 그리고 다른 기업들도 그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하니까 그들도 무죄라는 발상으로 아주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관을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삼성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부조리가 다 나올 수는 없다. 삼성이란 거대 기업의 실체도 모두 알 수 없다. 하지만 입으로 전해지고, 인터넷으로 떠돌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논리로, 사실로, 자료로 표현되면서 그 실체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거대조직과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노력과 희생을 하는지도 알게 된다. 너무 거대하고 대단한 기업이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기에 그들이 자정하여 더 발전한 모습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정도 느껴진다. 앞으로 삼성 특검은 어떤 결론을 내놓을까? 아마 짐작한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까 예상하지만 그래도 이 땅에 하나의 희망을 던져줄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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