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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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만 놓고 본다면 무협소설이 생각난다. 처음에 끌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김탁환임을 알게 되면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궁금했다. 내가 읽은 그의 소설 대부분이 시대물임을 생각하면서 책 소개를 읽었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조선 마지막 호랑이와 개마고원 포수의 7년에 걸친 추격전’이란 문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이제는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호랑이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멸종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그 호기심을 채워줄 소설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전에 시베리아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 시대 말기다. 주인공은 개마고원 포수 산과 백두산 호랑이 흰머리다. 이 둘은 악연으로 이어져있다. 흰머리의 새끼들이 산의 아버지 일행 때문에 죽었고, 이 때문에 흰머리에게 산의 아버지가 죽고 동생 수는 팔 하나를 잃었다. 가족을 잃은 산이 복수를 위해 흰머리를 좇은 것이 7년이다. 그 사이에 개마고원 포수로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바란 것은 단 하나다. 바로 흰머리를 쏘아 죽이는 것이다. 흰머리와의 대결에서 패해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사냥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그가 나아간 곳은 바로 흰머리가 출몰하는 개마고원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산과 흰머리의 숙명적인 대결과 산과 주홍의 절실하고 뜨거운 사랑이다. 흰머리와의 대결이 서로 죽이고자 하는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주홍과의 사랑은 추운 개마고원의 찬바람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뜨겁게 피어난 것이다. 가장 중요한 흰머리와의 추격전은 읽기만 해도 추운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흰머리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산과 해수격멸대란 조직을 이끌고 온 히데오 대장의 충돌은 서로 다른 욕망의 충돌이다. 복수하고자 하지만 너무나도 신중한 산과 만용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자연과 흰머리에 무지한 히데오. 여기에 호랑이 생존에 대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주홍의 등장으로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사랑의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그 추운 개마고원에서 조선 호랑이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과 살리고자 하는 사람의 충돌 속에서 피어날 사랑을 그들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독자인 우리는 시작과 동시에 미리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충돌은 7년간 복수만 생각한 남자를 생각할 때 너무나도 무모하고 순진하다. 하지만 이 둘은 홀로 살아간다는 외로움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호랑이의 혼을 지닌 채 흰머리를 사냥하러 다니는 산에게 그미가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산에게도 그녀의 무모할 정도로 순진한 행동과 열정이 차갑게 식은 가슴 한 곳을 데워줬을 것이다.

추운 겨울 개마고원을 헤집고 다니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루할 때도 잠시 나타나지만 욕망과 집념과 집착과 순수함이 충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불협화음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분명한 산과 흰머리의 대결로 가볍게 날아간다. 자연에 대해, 흰머리에 대해 잘 모른 사람들이 단순히 호기와 만용으로 다가갈 때 산의 경고는 무시되고, 그 결과는 참혹하다. 가끔 이런 맹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을 때 자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이런 설정은 산과 흰머리의 대결을 돋보여주는 동시에 당연히 동물보다 사람이 똑똑하다는 오만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소설 중반까지 나를 분노하게 만든 인물은 다름 아닌 주홍이다. 산의 복수를 위한 집념을 조선호랑이의 생존이라는 자신의 욕망(?)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흰머리에게 공격받아 죽어가는 현실에서 그녀의 논리는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져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맹수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살인은 자기방어에서 비롯한 것이 대부분이다. 읽는 순간 울컥했던 감정들이 이성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에 대한 감정이입이 심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소설들에서 철부지 여자들에서 비롯한 수많은 죽음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잘 읽히는 소설이다. 간결한 문장과 개마고원의 깊고 웅장한 풍경 묘사는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산과 함께 밀림을 헤치며 흰머리를 좇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은 아쉽게도 외국 영화에서 본 것들이다. 제대로 한국의 밀림을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이야기지만 그 시대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삶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직 산과 흰머리의 대결만이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대결이 가끔 무협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과 단 일합의 승부 때문이다. 첫발이 실패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포수의 운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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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나이트 Nobless Club 23
김이환 지음 / 로크미디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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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드디어 김이환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김이환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이 어느 카페에서 그의 소설 중 하나(아마도 <양말 줍는 소년>)를 극찬한 것을 본 순간이다. 그런데 그의 단편을 보면서 느낀 것은 과연 그런 극찬을 받을 만한가 하는 의문이었다. 몇 권의 장편을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의문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의문만 품고 있을 수는 없다. 노블레스 클럽의 스물세 번째로 나온 이번 <뱀파이어 나이트>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결론부터 말하자. 재미는 있지만 완성도는 부족하다. 독자를 압도하는 매력이 없어 신나게 읽을지는 모르지만 아! 하는 감탄사를 터트릴 정도는 아니다. 그가 설정한 세계와 인물 등이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뱀파이어가 외계인이란 설정은 이미 영화(이놈의 저질 기억력은 늘 제때 그것을 떠올려주지 못한다) 속에서 한 번 등장한 적이 있고, 뱀파이어 여왕의 강력한 힘과 영향력과 두려움은 일본 판타지 소설 <뱀파이어 헌터 D>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럼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나 오시이 마모루의 <블러드 라스트 뱀파이어> 같은 깊이 있는 철학이나 세계관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뱀파이어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으로 경제를 지배한다는 조금은 비슷한 세계를 보여주는 홍정훈의 <월야환담> 시리즈보다도 오락성이 더 떨어진다. 그렇다면 아주 졸작인가? 아니다.

앞에서 이 작품에 대해 부족한 점을 널어놓았는데 분명히 장점이 있다. 먼저 연작 소설 형태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나가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중심으로 짧게 마무리하면서 이야기를 각각 다른 방식과 분위기로 이어간다. 이 세계에 대한 설정을 앞에서 조금 내려 보았는데 이것은 다른 걸작 판타지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지 아주 허술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장르문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등장인물의 개성이다. 맥스 리펜키와 그의 몸속에 심어진 인공지능나노로봇 데이비드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뭐 이런 것들이 있나 하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특히 맥스가 데이비드와의 대화를 중얼거릴 때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눈에 잡힐 듯하다. 이 둘의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은 약간 과격하고 잔인할 수 있는 장면에 웃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뱀파이어 소설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잘 쓴 뱀파이어 소설이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영화의 이미지가 강할 때 보아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첫 권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또한 영화로 먼저 보면서 반감되었다. 아마 그때 헌책방에서 뱀파이어 연대기 두 번째 시리즈인 <뱀파이어 레스타>를 구해 읽지 않았다면 아주 좋은 작가 한 명을 놓쳤을 것이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그녀가 기독교에 빠지면서 그녀가 창조한 멋진 캐릭터들이 이제 사라진 것은 열렬한 팬으로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쪽으로 흘러갔는데 이 소설에서 그 정도의 재미와 완성도를 기대한 것은 물론 아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얻고 있지만 한 번도 장편을 읽지 않은 작가의 신작과 뱀파이어 이야기란 것 때문에 읽었다. 그가 보여준 상상력이 기존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낸 것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독창적인 이야기(이 부분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무겁고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책이 지겨울 때 가볍게 펼쳐들고 단숨에 읽기엔 좋은 책이다. 물론 이런 장르문학을 싫어한다면 다른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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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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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당히 편협한 독서 취향을 지녔다. 자서전이라고 읽은 몇 권은 대부분이 자기 성공담을 다룬 것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성공담이 신나고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그들을 보여주기보다 한편의 시간 때우기 소설로 다가왔다. 대필 작가들이 쓴 글이나 깊이 있는 이야기가 빠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선택이 나빴거나 그 당시 다른 읽을거리가 없었던 탓도 있다. 아주 정말 가끔 읽는 평전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일 때가 있지만 말이다. 

러셀 베이커 자서전을 선택한 것은 한 독자의 “자서전이란 이런 것”이란 글 때문이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좀처럼 읽지 않던 나에게 이 문장은 강한 호기심을 불러왔다. 1982년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분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기존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낯선 작가의 글이다 보니 혹시 지루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펼쳐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러셀 베이커에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처음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맹모삼천지교나 한국 엄마들이 떠올랐다. 자식을 성공과 공부를 위해 정성과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들을 위해 생활비를 쪼개 최고의 선물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그의 기억과 추억은 냉정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미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지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고부간의 갈등, 생활고, 연애, 자식의 성장과 성공 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다시 최근 최인호 씨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고 추억한 글들을 연상시켜주었다. 이 둘의 공통점이라면 아버지가 빨리 죽어 어머니가 힘겹게 아이들을 키웠다는 것과 작가가 된 것이다. 

시간적으로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20대 중반까지 다룬다.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만 그의 과거를 좇아가다보면 그 시대의 사회 모습을 만날 수밖에 없다. 특히 공황기에 그들의 겪은 고통과 힘겨운 상황은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현재와 달라 굉장히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의 풍요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1차 대전을 비롯한 전쟁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이것은 현재 미국인들이 외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보는 시선과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현재의 우리도 그런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말이다.

가난은 한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게 만들고, 한 곳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이 할머니 곁을 떠나게 만들고, 외삼촌에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곳마저 떠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사는 친한 친구와 헤어지게 만들지만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닫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경제적 상황적 악화가 그들이 혐오하는 삶 속으로 밀어 넣지만 역시 어머니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한다. 비록 그 시대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시대적 한계는 러셀과 동생 도리스의 행동과 성격을 대비해도 금방 드러난다. 적극성이나 사업 수단이 더 뛰어난 도리스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 선택에 제한이 생기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솔직함이다. 물론 이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가 겪은 실패와 불안과 두려움 등은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든다. 적극성을 키우려고 아들을 신문팔이로 만들거나 좋은 성적을 위해 옆에 붙어 공부를 시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라고 하는 행동들이 우리의 것과 너무 비슷하다. 신문팔이의 경우는 조금 별개지만. 이것은 아마 적극성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부모의 미래가 아이들의 과거”란 말은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다. 이것은 앞부분에 나오는데 어릴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성장이란 제목처럼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유치하고 비열한 행동들은 아이들이 단순히 과거의 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소년의 성장기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빠르게 읽으면서 한 편의 재미난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양한 주제들과 역사로 이어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정말 멋진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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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달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 들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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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만난 작가다. 처녀작인 <야간여행>의 평이 좋아서 이 작품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화려한 광고 문구는 역시 이번에도 나를 혹하게 만들었다. 유럽 언론이 극찬한 21세기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결론만 말한다면 과연 그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취향과도 관계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 읽지 않고 두 남자의 심리를 그린 소설로 읽는다면 또 다르다. 그들이 느낀 상실감과 두려움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킴모 요엔타가 아내 산나의 죽음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의 추억과 아픔을 껴안고 살아간다. 그녀의 죽음이 확정된 순간에도 킴모는 예상했던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이 거대한 상실감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미래이기에 그 충격은 더 커다. 이렇게 킴모의 상실감과 방랑과 혼돈을 섬세하게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킴모의 심리와 행적을 따라가는 도중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베사 레무스. 한 가정집에 피아노 조율을 한 후 열쇠를 들고 나온다. 밤이 된 후 그 집을 찾아가 오야란타 부인을 베개로 질식시켜 죽인다. 첫 살인이다. 이 살인은 그에게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이것은 두려움에 의해 벌어진 살인이다. 살인으로 그는 자신감을 가지지만 두려움은 곧 되살아난다. 이제 자신도 제어하기 힘든 상태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연쇄살인범들이 반복 살인을 하면서 결국 잡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결말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결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킴모는 형사다. 아내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그가 다시 현장에 복귀한 것은 아내의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서다. 충격적인 죽음으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맡겨진 일이 바로 오야란타 부인 살인사건이다. 이 부인의 남편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다시 뒤에 가서 반장과 연결된다. 이런 상실감과 사랑과 두려움은 이 소설에서 가장 깊게 다루는 주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스호스텔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연쇄살인사건이다. 하지만 서장에겐 국회의원 살인미수사건이 더 비중 있는 사건이다. 제3의 피해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들은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한다. 킴모 형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만약 이 소설에서 에르큘 포아로나 셜록 홈즈나 CSI 같은 인물을 기대했다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다. 영미 형사소설처럼 액션과 총격전을 기대했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한 수사기법으로 범인을 찾아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범인을 쫓는 열혈형사도, 범인이 남긴 단서나 살인방식을 보고 범인상을 추론하는 프로파일러도 없다. 다만 아내를 잃고 그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는 형사와 가정사 때문에 역시 고민하는 형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두려움과 자신감이란 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범인이 등장한다. 

이렇게 적고 보면 상당히 지루하거나 심심한 이야기인데 생각 이상으로 가독성이 좋다. 그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상실과 두려움은 호기심을 불러온다.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를 섬세하고 깊이 있는 심리묘사가 자리 잡았다.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상실과 두려움을 말이다. 그래서 이 감정들이 어느 순간은 피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박함은 없지만 간결한 문장과 내면으로 파고드는 심리묘사와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빠르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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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의 복음
톰 에겔란 지음, 손화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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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권의 기독교 팩션이 나왔다. 그 무엇보다 표지가 인상적이다. 처음엔 동일한 제목의 다른 소설과 착각했다. 하지만 책 소개를 읽으면서 다른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작가 소개를 보니 <요한 기사단의 황금상자>란 팩션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적이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인데 관심이 생긴다. 북유럽 지적 독자들 사이에 루시퍼 신드롬을 일으킨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루시퍼에 대해 단순한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나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2009년 현재 시간 흐름을 따라가는 비외른 벨토와 1970년 지오반니 노빌레 교수다. 근 40년의 시간 차이가 있는데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있다. 바로 루시퍼 복음이다. 이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이 복음서를 얻게 되는데 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험한 상황에 말려들어간다. 벨토는 이 복음서를 전해준 사람과 같이 연구하기로 한 사람이 살해되고, 노빌레 교수는 딸이 납치당한다. 살인과 납치라는 두 소재를 바탕으로 루시퍼 복음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한다.

처음은 기독교 팩션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흘러간다. 우연히 자료를 얻고, 이 자료를 빼앗으려는 단체가 등장하고,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달아나면서 그 자료를 조사하는 그 방식 말이다. 이것은 벨토의 시간 속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그 사이사이에 드러나는 루시퍼와 사탄과 지옥에 대한 지식과 해석은 학문적 영역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가진 사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중세교회에서 만든 것이라고 할 때 놀라게 된다. 다른 팩션에서 워낙 강한 내용을 보여줘 조금 무덤덤한 부분도 있지만 작가는 이런 식으로 기존 기독교의 믿음을 하나씩 바로 잡는다. 교회가 권위를 세우고 권력을 잡기 위해 어떤 식으로 현재 속에서 과거를 바꿨는지 보여준다. 

사실 이 소설에서 기대한 것은 두 가지다. 루시퍼의 복음을 둘러싼 신학적 역사적 해석과 이 문서를 둘러싼 스릴러다. 첫 번째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종교학과 고고학, 천문학과 지리학, 세계 각 문화의 종말론을 적절하게 섞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다른 해석의 길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이전에 <오메가 스크롤>이나 그레이엄 헨콕의 책에서 본 내용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스릴러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다빈치 코드>가 마지막에 준 허무감을 떠올려주지 않을까 의문이다.

스릴러라는 부분만 떼어놓고 본다면 이 소설은 낙제다. 일단 긴장감이 거의 없다. 제례 살인이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지만 쫓기는 자의 긴장감이 살아있지 못하다. 특히 루시퍼의 복음을 두고 벌어지는 두 조직의 대결이 너무 한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운 것이나 한쪽의 손을 너무 쉽게 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벨토의 모험이나 활약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너무 무력하다. 즉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다는 의미다. 또 하나 작가가 반전을 노리고 깔아놓은 정체도 중간에 너무 쉽게 드러난다. 다른 인물이기를 살짝 기대했는데 반전은 없었다.

좀더 새롭고 강한 충격을 기대한 나에게 이 소설은 조금 미흡하다. 아마 다른 책에서 이와 비슷한 결론을 먼저 본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다빈치 코드>처럼 빠른 전개와 강한 모험을 원했는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분의 이까지는 정말 흥미로웠다. 적들의 강력한 공격과 반전을 기대했는데 벨토가 가담한 조직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 오락적인 힘이 조금 떨어지지만 기독교 팩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있다. 가독성 있는 문장과 이야기는 책을 빠르게 몰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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