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미사일
야마시타 타카미츠 지음, 김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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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과 표지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옥상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고등학생들이었다. 물론 이 미사일이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실제 같은 위력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학생 과학 경시대회에 나오는 것이나 영화 속에서 학생들이 날리는 미사일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옥상은 맞지만 미사일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실제 이 미사일은 미국이 보유한 전략 미사일을 의미한다. 옥상은 이 소설 속 화자인 츠지오 아카네가 과제를 그리기 위해서 올라간 장소이자 그곳에서 만난 세 명의 남자들과 결성한 옥상부를 의미한다.

이 세 명의 남자들 특이하다. 먼저 싸움꾼으로 알려진 쿠니시게는 이 모임을 만든 인물이자 간결하고 직선적인 행동으로 사건에 직접 다가가는 학생이다. 사와키는 짝사랑하는 육상부 미야세에게 진심을 담아 고백하기 위해 1년간 말을 하지 않는 괴짜다. 옥상부에서 유일한 1학년인 히라하라는 꽃미남 스타일이지만 허무와 권태에 휩싸여 있다. 이런 특이한 남학생 사이에서 홀로 여학생으로 남은 아카네도 어떻게 보면 결코 평범한 여학생이 아니다. 만약 평범했다면 이런 괴상한 부원들의 모임에 참가하지고 않았고,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 개성 강하고 하나씩 과거를 가진 고등학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면 시대적 배경은 조금은 황당한 설정이다. 거대제국 미국 대통령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었고, 그가 감금된 장소에서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납치된 것도 조금 놀랍지만 황당한 것은 이 미사일 기지의 점령으로 인해 미국의 우방인 일본이 겪게 되는 두려움이다. 테러리스트들이 목적지를 입력하고 미사일을 날린다면 그곳이 초토화되는 것은 맞지만 너무 과장되고 코믹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마치 종말론에 빠진 광신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설정이 마냥 코믹하고 과장된 것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아마 세계에서 유일한 원폭 피해자들이 일본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옥상부를 결성하고 그들이 펼치는 활약은 처음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치기어린 활약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고 다른 사건들이 하나씩 엮이고 꼬이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먼저 시체 사진 한 장과 총을 발견한 후 킬러를 찾겠다고 의욕을 불태운다.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종말론적인 환경 속에서 태어난 벌신님 사건이나 육상부 미야세를 뒤쫓는 스토커 사건이나 아카네 동생의 폭행 사건이 일어난다. 각각 독립적인 사건처럼 하나씩 완결되었기에 역시 고등학생들의 유쾌하고 즐거운 청춘 미스터라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 사건들이 거대한 배후를 가지고 하나씩 연결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연결이 완성되는 것은 책 마지막에 와서이지만.

청춘물에서 늘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이런 행동을 하는 학생들을 그대로 놓아두는 부모다. 아카네의 부모는 동생이 록 음악을 하는 것을 방임하고 오히려 격려한다. 큰 틀에서 문제가 없다면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운다. 이 자유가 너무 많아 순간적으로 아카네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나름 그것을 잘 즐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아카네와 묘한 관계가 형성되려는 쿠니시게의 부모도 특이하다. 한 번도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좀비 영화를 연애영화라고 말한다. 아버지도 역시 러브호텔에서 고등학생 아들을 아르바이트 시키고 억압을 크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둘이 사건의 중심에서 힘차게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심각한 사건도 발생하지만 기본적으로 설정과 캐릭터가 주는 재미로 가득하다. 특히 캐릭터는 네 명의 주인공과 그 가족 외에도 곳곳에서 보인다. 킬러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모든 사건이 나중에 그와 연결되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숨은 주인공이 그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살인 대상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나 시간 여유를 주는 것과 오해를 하는 것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재미다. 이 능력 있지만 조그마한 실수가 많은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 편의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 번도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쿠니시게의 어머니는 다음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등장할지 의문이다. 뭐 이 소설이 시리즈로 나올 때 이야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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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세계
테리 프래쳇 지음, 송경아 옮김, 조니 두들 그림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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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프래쳇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멋진 징조들>이란 책 때문이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두 공저자의 이름이 너무 낯설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닐 게이먼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를 조금씩 알게 된 반면에 테리 프리쳇은 그냥 공저자였다.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출간된 책 중 <디스크 월드>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표지와 내용이 청소년용(알고 보니 청소년용도 있기는 했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신간 목록에서 발견한 이 책은 이름은 많이 들어 잘 알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 없는 작가 선집에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읽었다.

뒤집힌 세계란 제목과 남과 북이 뒤집어진 지구의 모습은 이 소설이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먼저 품게 만들었다. 책을 펼쳐 읽으면서 세계 창조 신화 하나를 보게 되는데 낯익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오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기존 판타지와는 다른 평행우주를 다룬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평행우주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평행우주론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SF소설일 것이다. ‘아마도’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연걸 주연의 <더 원>을 볼 때 이미 평행우주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이연걸은 평행우주의 신이 되기 위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 또 다른 자신들을 죽인다. 그들 모두를 죽이게 되면 유일한 한 사람으로 남게 되고, 신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설정이다. 굉장히 오락적인 영화인데 내가 유심하게 본 것은 바로 평행우주였다. 물론 이연걸의 멋진 쿵푸 장면은 변함없이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 외에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양자역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뭐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 <쿼런틴>이란 SF소설이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란 생각에 읽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난해했다. 양자컴퓨터부터 시작하여 나오는 과학 용어들은 주인공의 능력과 함께 난해함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이 소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은 다른 책과 영화 등을 보면서 익숙해지고 이론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다. 언젠가 다시 읽는다면 전혀 다른 재미를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품는다.

19세기 무렵 영국의 귀족 문화 속에 살던 소녀 다프네와 대남원양의 조그마한 섬 부족의 일원인 소년 마우의 만남은 전혀 다른 두 문화의 충돌이다. 이 두 사람이 마우의 섬에서 만나게 된 것은 지구의 종말처럼 다가온 거대한 파도 때문이다. 다프네가 탄 배 스위티 주디 호가 섬에 갇히고 그녀만 살아남는다. 마우 또한 소년에서 성인으로 가기 위한 시험 도중에 바다로 나왔기에 살아남았다. 처음에 이 두 생존자를 보면서 혹시 지구 종말 후 두 생존자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다른 부족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과 오해와 이해의 과정들은 기존에 무인도에 남겨진 아이들 이야기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두 아이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탓에 직접 부딪히기보다 겉돈다. 특히 당시 영국 귀족 여성의 예절에 길들여져 있던 다프네의 경우는 심하다. 사실 그녀는 영국 왕위 서열 134번째 정도다. 그녀의 할머니가 이것을 강조하는데 소설의 설정 중 하나가 그녀 아버지 앞 서열자들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녀가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가 총과 칼로 큰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홀로 낯선 문화와 만나게 되는 그녀에게 이런 예절은 하나의 속박일 뿐이다. 원주민들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불필요한 겉치장인데 말이다. 특히 그곳이 뜨거운 햇살이 가득한 지역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녀가 의례적인 예절 속에 머물 때 마우는 행동에서 좀더 자유롭고, 머릿속에서는 자기 부족의 혼령들과 대화를 한다. 처음엔 환청이 아닐까 의심도 하고, 뭔가 판타지 소설처럼 신비한 힘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착각이었다. 물론 창조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로카하와의 대결 속에서 어느 정도 권능을 획득하지만 이때 그는 평행우주 속의 다른 세계를 이해한다. 이 인식과 이해는 다시 우리가 흔히 지금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간다면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희망 또는 기대가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려준다. 이모로 불리는 창조주가 지구를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듯이 다른 세계에서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인식은 정말 탁월한 통찰력이자 인식론이 아닐 수 없다.

처음 마우와 다프네가 소통을 위해 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단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자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오해가 빈번하다. 하지만 두 다른 문화가 충돌하면서 각각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자연스럽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다시 현재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다문화가정이나 이주노동자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를 반복과 오해 속에서 배우게 되는 과정은 외국에 사는 선배의 한 마디를 떠올려주었다. “모든 언어의 바탕은 모국어다.” 

이름만 알고 있던 낯선 작가의 작품을 알고자 읽는 한 편의 소설이 지금 예상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우가 자신의 부족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 때문에 신에 대해 회의를 품는 것과 사제 아타바와의 대화는 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각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다프네가 타고 온 배에서 나온 철과 도구를 보고 놀라는 원주민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장면은 문명의 초기 발달사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로카하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마우를 구하기 위해 죽음 속으로 뛰어든 다프네의 활약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뒤바꾼 것이자 서양 신화의 재현이다. 읽을 때보다 읽은 후, 그보다 글을 쓰는 지금 더 많은 것들이 ‘나를 알아줘’하고 외치면서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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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2 암자로 가는 길 2
정찬주 글,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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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처음 만나는 사진 한 장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나무바다 속에 자리한 조그마한 암자 사진이다. 영광 모악산 해불암의 전경을 담은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가끔 여행에세이나 사진을 담은 기행문을 읽을 때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이 고정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작가가 풀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보다 나에게 더 와 닿는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재현한다. 풍경에 마음이 빼앗겼다. 이렇게 책 읽기는 잠시 멍한 상태로 시작했다.

목차를 보면서 내가 아는 암자가 있나? 하고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하나도 없다. 뭐 제대로 암자란 곳을 다닌 적도 없고, 갔다 온 곳도 기억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다. 남들에게 추천하는 유일한 암자가 남해 보리암인데 이미 1권에서 다루었다. 외삼촌을 따라 가본 깊은 산속 절이나 암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기억력이 나쁜 것도 있지만 그 당시 굽이굽이 들어가는 길에 시선이 빼앗겨 그 이름엔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언제나처럼 암자는 관심도 없고, 목적지로 가는 데만 정신이 팔렸을 것이다.

저자가 1권에서 지역별로 암자를 나누었다면 이번은 계절별로 구분지었다. 나를 설계하는 봄암자, 나를 성장시키는 여름암자, 나를 사색하는 가을암자, 나를 성숙시키는 겨울암자 등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를 설계, 성장, 사색, 성숙으로 이어지는 삶의 단계로 표현했다. 그냥 가벼이 볼 수도 있는 구분이지만 저자가 책 중간에 십우도를 말한 것처럼 나의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음을 알게 된다. 

서른두 곳의 암자를 다루고 있지만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기는 암자는 많지 않다. 읽을 당시 나의 기분과 저자가 풀어낸 글과 사진이 충분히 교감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한 번 그냥 읽고 지나갈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자리잡고 정독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끔 끄집어내어 사진을 보고, 혹시 가고픈 암자가 있지 않을까 하고 감상에 잠기기 위해서다. 단순히 감상으로 폄하할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은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바로 그 마음의 평화를 줄 사진 한 장과 그 암자를 통해 듣게 되는 저자의 깨달음 한 자락이 나에겐 필요하다. 

사실 바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이 암자를 찾아다니기가 쉽지는 않다. 가까운 암자부터 가면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오고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요즘은 차로 암자 밑까지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왠지 암자에서 바라는 고즈넉함이 사라진 기분이다. 이것은 아마도 절과 암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절로 암자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모순된 감정들을 가지고 읽다보면 저자의 글은 활자로만 읽힐 뿐이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읽으면 암자와 스님과 역사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제 사진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이런 반복을 자꾸 경험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잡념과 번뇌가 머릿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아무 곳이나 펼쳐 읽는다. 경주 남산 칠불암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글을 읽는다. 저자의 체험이 가슴 한 곳에서 조용한 울림을 전한다. 다시 펼친 곳은 또 다른 암자다. 이렇게 다시 펼치고 펼친다. 이 반복적인 행동이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하게 만든다. 한 번에 읽을 때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 차분하게 잦아든다. 빨리 한 번에 읽겠다는 욕심을 버린 탓이다. 그렇다. 이 책을 바로 조금씩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다. 언제 이 책에 나오는 암자 몇 곳은 꼭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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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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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표지도 마찬가지다. 헌데 가끔 이런 것을 무시하고 읽는 경우가 많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마나님의 280일이란 단어에서 임신을 떠올렸어야 하고, 표지 그림에서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도 읽기 전에 놓쳤다. 요즘 많은 책들이 나오고 인터넷 서점에서 책 정보를 얻게 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가끔은 제목을 오독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 소설 속 공생원의 행동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 멋대로 짐작해본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읽으면서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읽은 후 표지가 나타내고자 한 의도를 알게 된 것이다. 

시대는 중종반정 후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단지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렇지만 가끔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현대인과 별 차이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가문의 영광과 관련된 일은 생각할 바가 많다. 그 일이 무엇이냐고? 공생원 아버지 공령이 관료가 된 형님 공희달에게 빌붙어 사는 것이다. 

잘 사는 형님에게 좀 신세지는 것이 무엇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구조적으로 한 가문에 정착된다면 다른 문제다. 조선시대 양반은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만 했다. 가문에 한 명도 합격자가 없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을 위해 온 가족이 한 사람이 합격하기를 바라고 뒷바라지를 한다. 한 번 합격하면 가문의 영광인 동시에 가족들이 이전에 고생한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다. 가문의 영광이란 무형의 것에는 문제가 없는데 보상이란 부분이 늘 문제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관료가 받을 수 있는 녹봉의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지 너무 뻔한 것 아닌가. 요즘 누구네 형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덕을 보려는 가족의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비껴나갔는데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다. 공생원 마나님의 임신 기간 동안에 벌어진 이야기다. 공생원과 최 씨 마님의 결혼이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졌고, 이 둘 사이가 어떠했는지 먼저 알려준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사실을 말하고, 마나님의 아들 얻기를 위한 지극한 정성을 풀어놓는다. 단지 이런 이야기라면 단편으로 충분했을 텐데 여기에 한 의생의 말에서 생긴 의심이 가슴 한 곳에 똬리를 틀면서 다양한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한마디로 한 소심한 남편의 의처증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공생원이 결혼 이야기를 듣고 최 씨 셋째 딸을 보러갔을 때 느낀 실망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노래에도 나오듯이 셋째 딸은 미모가 출중해야 하는데 늘 예외는 있다. 늘 시험에서 낙방하는 그가 호구지책이자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얻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결혼이다. 그런데 최 씨 마나님이 보통이 아니다. 공생원보다 덩치 큰 것과 말과 행동이 드센 것이 보통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늘 마나님에게 잡혀 산다. 공생원이자 공처가다. 이런 그에게도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을 수 없다. 서의원이 그에게 심어준 의심이 마나님 뱃속 아기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의처증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뒤집어 놓고 보면 같이 살아온 동안에 그가 느낀 불안과 부러움과 질투와 사랑이 뒤섞여 있다. 자신은 부르지 못하는 ‘송아’란 이름을 부른다거나 자신과 다른 멋진 외모를 가졌다거나 아내와 자주 만난다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의심을 자기 주변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넓혀가는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이다. 그런데 한 명 한 명 넘어갈 때마다 용의자는 지워지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뭐 그 덕분에 그가 마나님을 발길질 한 번에 나뒹굴게 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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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잃은 날부터
최인석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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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를 만나기 위해 카페에 앉아 있던 그 앞에 한 여자가 말도 없이 앉는다. 그리고 말한다. “날...... 좀 데려다줘요.” 황당한 상황이다. 이렇게 두 남녀 준성과 서진은 만난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을 하고 싶지 않은 한 해커와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광고판에서 살던 한 여자 모델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순간만 해도 준성은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몰랐고,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자본주의를 배격하는 해커와 광고 모델의 만남은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준성에게 필요가 아닌 순간의 욕망에 지배당해 상품을 사는 서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업들의 이익을 부수기 위해 프로그램 크랙을 만들고 배포하는 그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속에 빠져 사는 그녀를 만난 것은 어쩌면 극과 극은 통한다는 통설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아니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가 그의 욕망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욕망만으로 그가 그녀의 삶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거짓과 기만 속에서 자란다. 이미지가 만들어낸 환상이 사람을 현혹시키고, 필요가 아닌 욕망이 소비를 촉진시킨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보다 남에게 비춰지는 모습에 더 신경을 쓰고, 그 때문에 자신을 점점 더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자신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현명하다는 말이나 탁원한 선택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것을 넘어가면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그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에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서진이 홈쇼핑 속옷 모델로 벗고 돌아다닐 때 그녀의 탁월한 미모가 한 몫을 했지만 시청자들에겐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그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살아 움직이는 마네킹만 존재한다. 성공을 위해 자신을 던지지만 돌아온 것은 언제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뿐이다. 그 일상의 끝에 만난 사람이 바로 준성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바라는 성공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지향하는 삶은 화려한 소비와 자신을 우러르 볼 사람을 바라는 그녀의 것과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그녀가 지닌 공허와 욕망에서 비롯한 결핍들을 그는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서진의 욕망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받아들일 뿐이다. 그녀의 거짓말을 알게 되어도, 그녀의 일탈을 알게 되어도, 뒤틀린 욕망을 알아도 말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도 쉽게 고쳐질 리가 없다. 그녀 속에 자리한 욕망이 텅 비거나 공허가 채워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와 욕망 뒤에는 순수함이 있다. 이 순수함은 그녀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트릴 뿐이다. 고가품으로 치장하고 브랜드가 아니면 쳐다보지 않던 그녀가 영화판에서 받은 감동은 그 순수를 아직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려한 광고 세계 속에서 볼 수 없던 투박함과 진솔함은 강한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늘 유혹은 그 무엇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그녀 자신이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기 전까지.

준성의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녀가 사채를 이용해 사용하지도 않을 물건들을 사는 것이나 단숨에 인기를 얻기 위해 PD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다른 두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이 괴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춰진 모습은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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